세상이 가르쳐주는 교육과 성경이 말해주는 하나님의 말씀하고는 반대되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다시 말하면, 육으로 볼때는 무척이나 선하고 똑똑한 것이지만 영으로 볼때는 비진리에 해당되는 것들이 상당히 많다라는 것입니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동성애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고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여 심지어는 같은 성끼리 결혼까지도 하지요. 이에 대해서 인격존중, 소수의 성도 보호해야 한다라는 나름 지식과 지각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도 존중받아야 하고 보호받아야 한다라고 생각들 합니다.
<인격>, <존중>, <보호>. 이 얼마나 좋은 단어들이고 선한 어감입니까. 그러기에 동성애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독단적이고 이기적이다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보호해주고 존중해주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운거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참 재밌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자신은 그럼 동성애를 하겠는가.
이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답변을 내놓습니다. 자신에게 그런 잣대로 접근하는 것은 혐오적이고 저질적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녀가 동성애 결혼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결단코 발악적인 반대를 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지요.
다시 말하면, 남에게는 마치 선한 생각과 마음을 갖은 것처럼 포용해주고 존중해주는 듯 하면서도 그것을 자기 가족에게도 기준해 본다면 결단코 반대한다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육신의 생각이고 육의 선입니다.
이런 육신의 생각과 육의 선은 결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도 않을 뿐더러 굴복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각이 옳고 선하다라는 자기 의가 단단하기에 이런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경우를 하나 더 봅시다.
한번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가족동반으로 오신 손님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아무개 친구와 싸운 이야기를 하더군요. 이를 듣던 그 아이의 아버지는 강하게 말해줍니다. "한대 맞으면 가만히 있지말고 너도 때려. 맞고 사는 것은 바부나 하는 짓이야. 한대 맞으면 넌 두대 때려. 어디가서 병X처럼 맞고 다니지 마. 알았지?"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디가서 맞고 다니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상대가 자신을 때리면 방어할 수 있는 능력도 있어야 겠지요. 게다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녀가 어디가서 맞고 다닌다는 것. 친구들과 싸워서 쥐어터지고 와서 상처입고 온다는 것은 부모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기에 육으로 볼때는 같이 싸우고 같이 때리고 아니, 더 때려주는 것이 오히려 나아보일지도 모릅니다. 피해자의 입장보다는 가해자의 입장이 되어서 나중에 변상을 해주는 일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일터에서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실수는 감추고 상대의 실수를 드러내면서 경쟁사회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윗선에 줄대기를 하고 경쟁자로 여기지는 사람들은 짓누르고 이겨서 좋은 점수를 받고 성과를 내야 승진도 하고 인정도 받는 것이 세상에서의 똑똑함입니다.
실제로 보면 그저 순둥이 같고 곰같은 사람은 주변으로부터 인정도 못받고 어떤 일이 터지면 그 사람에게 뒤집어 씌우면서 하나의 공동의 적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기적이고도 경쟁적인 욕심을 갖고 승진하고 인정받는 자리에 올랐다해도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또 다른 경쟁과 권모술사를 남발해야 하는 경우가 많고, 자신이 예전에 상대에게 행한대로 다시 또 자신도 희생양으로 되는 일들이 다반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정반대입니다. 높아지고 싶으면 낮아지라는 것입니다. 높아지고 싶다고해서 주변을 힘들게 하고 욕심을 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낮아져서 섬기며 화평하는 마음을 이루면 높아진다라는 것입니다.
3가지의 실질적인 예를 들면서, 오늘 이 시간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세상에서 말하는 똑똑함은 하나님 보시기에 어리석은 것이 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의 모임을 가만히 보시면 재밌는 현상이 있습니다. 똑똑하고 박학다식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은 어떻게 될까요? 한 개인 한 개인이 똑똑하고 지식이 출중하니 그 집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모범적인 집단이 될까요?
그렇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다투고 싸우고 분란이 가중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똑똑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더 똑똑해 질 줄 알았는데 실상은 시기질투와 감정이 더 도사리고 때로는 다투는 소리와 큰 언성들이 오고가며 다투는 집단으로 되어가는 것이 바로 육의 똑똑함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분란이 생기고 바로 서지 못하는 이유중에 하나는 바로 이런 똑똑한 것을 지나치게 인정해주고 좋아들 하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기도 합니다.
목회자는 똑똑한 성도들을 좋아하고 성도들도 똑똑한 목회자를 좋아들 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자신이 대형교회를 다니며 담임목사님이 외국에서 공부를 많이 하고 오셨고 외국어도 잘 하시고 문물에도 밝은 것을 자랑하시도 하십니다.
목회자들 역시 슬하에 똑똑한 성도들, 다시 말하면 지식이 있고 사회적인 안정감도 있어 말길을 잘 알아듣는 성도들을 좋아들 하기도 하지요.
어떤 목회자들은 자신이 성경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볼 수 있는 것에 대한 지식의 자부심이 대단한 것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개중에는 남의 말과 가르침은 다 틀렸고 자신이 원문으로 봐주는 해석만이 절대적 진리이고 가장 올바른 해석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요.
교회안에서도 똑똑한 사람들끼리 모여있으면 다툼과 분란은 끊이지 않습니다. 육신으로 똑똑한 사람들이 처음에는 좋아보이는 과실처럼 보이지만 육신의 똑똑함이 슬슬 하나님 나라를 발목잡고 사단의 교만함을 교회내에 끌어들이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식이 높고 깊은 사람들이 다 교만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식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라는 의미는, 하나님 말씀을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것은 교만한 사람이 되어간다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에서도 똑똑한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남다른 이해와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분들은 어떤 성경강해를 들어도 이해를 잘 하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기독교 카페들에서도 보시면 종종 성경의 어떤 구절이나 해석을 갖고 갑론을박하는 일들을 보곤 합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전하는 것에 지나쳐서 이제는 상대의 지식을 짓누르고 인신공격으로도 변질되기도 하지요.
서로간의 어느정도의 변론과 논쟁은 필요하기도 하고 유익함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에 지나쳐서 인신공격과 자기 악을 발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 말씀을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곧 믿음이 되었다고 착각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지식이 성경에 근거를 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그 확신은 자신의 마음속에 믿음으로 장착되었다라고 생각들 하기에 그것을 전하는 자신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 응당 합당하다고 생각만 하지, 전하는 과정에서 상대를 비난하고 자기 악한 생각이 발동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하등 문제가 없다라고 눈이 가리워져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응당 봉사요 충성이요 순종이요 상급이 되는 것이라고 요거 하나만 생각하지, 그 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주변과 화평이 깨어지고 사람들은 힘들어하고 상처받고 있는 것은 하등 문제가 없다라고 눈이 가리워져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지혜를 구하십시요.
성령의 은사에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지식의 은사도 있고 지혜의 은사도 있고 섬김의 은사도 있고 방언이나 통역이나 예언도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구하는 은사들을 가만 들어보면 남들 앞에서 인정받고 드러나는 은사를 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통역이나 예언 말입니다.
이런 은사를 구하다가 얼마나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미혹을 받고 하나님과 반대되는 길을 가게 되었는지 분명 목도하였습니다. 신비주의에 빠져서 하나님이 주시지도 않은 것을 갖고서 하나님 이름을 방자히 남용하는 일들도 다반사였습니다.
그렇다고 저런 은사들을 구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구하더라도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바로 알아서 그 분량에 맞게 지혜롭게 구하여야 하고, 행여나 욕심과 들램으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섬김과 지식, 지혜의 은사를 구하는 것이 더 낫다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근거로 한 하나님 말씀이라해도 이것을 머릿속에 지식적으로 담아놓기만 하고 있는 것은 점점 그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어 갑니다. 교만하게 만든다라는 것은 보통네들이 생각하는 것마냥 으시대고 목 쭉 세워서 큰소리 치고 그러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이들은 육신의 생각이 점점 많아지고 알고있는 지식이 곧 믿음이라는 착각속에서 진작 하나님 말씀대로는 살아갈 믿음과 능력이 오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기도해 보면 압니다. 지금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듣고 계시는 성령의 주관이 오는지 나 혼자서 벽보고 이야기하는 느낌인지 말입니다.
기도를 해도 벽보고 이야기하는 느낌이거나 허공에대가 혼자서 말하는 기분이라면 그만큼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힌 담과 죄의 담이 두텁다라는 것을 깨우치시고 회개거리를 찾으셔야 합니다. 그만큼 하나님 앞에 자기 똑똑함으로 생활해왔다라는 것을 발견해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리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똑똑함이라는 것은 그저 많이 배우고 교양학식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선하다라는 어떤 사상이나 생각, 흐름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 중에는 하나님 말씀에 반대되는 것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다시 말하면 육의 선과 육의 똑똑함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악이요 미련함이 되는 것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앞에 인정받지 못하는 육의 선과 똑똑함은 점점 사람을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
첫째, 마음을 강팍하게 만들어 갑니다. 마음이 강팍해진 사람은 기도를 해도 벽을 보고 하는 느낌이고 허공에대가 혼자서 말하는 기분이 됩니다. 내주하신 성령님이 마음의 강팍함으로 인하여 활동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어 갑니다. 지식과 생각이 많아져서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이 들어갈 틈이 없어지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말씀조차도 지식으로만 갖고 있는 사람은 점점 육신의 생각이 많아지면서 사단의 주관을 받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율법의 의를 갖고서 잣대를 하게 되고, 종교행위로 변질되어가는 것입니다.
위 두가지를 보십시요. 불신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대개 똑똑한 것으로 생각들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남들 앞에서는 부족한 듯 말하지만서도 실상은 자신들의 마음은 무척이나 강팍해져있어 하나님 말씀이 들어갈 틈이 없고 생각은 교만해져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일쑤이지요.
그런데 이런 모습이 우리 믿는다라는 하나님의 자녀들도 갖고 있다면 어떻습니까.
아니될 말이지요. 그럼 그 영혼은 위태위태 합니다. 신앙생활 종교적으로 헛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똑똑하다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구하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이 중요한게 아니라 과연 내 마음에 사랑이 있는가를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겸손함을 구하는 것입니다. 부족한 것이 교만한 것보다 차라리 낫습니다.
혼자 있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 앞에 있는 것처럼 동일한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은밀한 죄에서 떠나도록 , 죄에서 멀어진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교회는 육의 똑똑함을 갖고서 직분을 주고 사명을 주고 이생의 자랑거리로 만들어가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리고 목회자들 , 교회들이 하나님 앞에 똑똑하기를 오늘 이 하루 아침의 시간 기도를 드리며 글을 마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