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의 딸
원제 : The Farmer's Daughter
1947년 미국영화
감독 : H. C. 포터
출연 : 로레타 영, 조셉 코튼, 에셀 배리모어
찰스 빅포드, 로즈 호바트, 리스 윌리암스
해리 데븐포트, 톰 파워스, 윌리암 해리건
렉스 바커, 제임스 아네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 (로레타 영)
요즘 젊은 사람들이 '원시시대'로 생각할 수 도 있는 80-90년전, 즉 1930-40년대 시대, 그 시절에도 놀랍게도 꽤 많은 서구영화들이 우리나라에 개봉되었고 인기리에 상영되었습니다 그 시절 가장 인기가 있었던 여배우는 누구일까요?
그레타 가르보, 베티 데이비스, 조안 크로포드 등의 배우들이 당시 인기가 높았고 개봉이 많이 되던 여배우였지만 로레타 영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로레타 영은 30-40년대에만 우리나라에 20편이 넘는 영화가 개봉되었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누린 할리우드의 1급 주연 여배우입니다. 30-40년대를 대표하는 여배우인 셈이지요.
그런 로레타 영 이지만 이상하게도 TV주말의 명화 시대에는 철저히 배척된 인물입니다. 과거 TV에서 주말에 방영되는 외국영화를 보고 자란 세대들은 그래서 로레타 영의 작품을 거의 못 보고 자랐습니다. 이렇게 한 때 많은 인기가 있어서 개봉영화가 많지만 이상하게 후대에 TV나 케이블 영화에서 배척당한 배우들이 좀 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로레타 영 입니다. 그나마도 그레타 가르보나 베티 데이비스 등은 DVD 출시라도 제법 되었지만 로레타 영의 작품으로는 '주교의 아내'와 '이방인' 외에는 거의 알려진 작품이 없습니다. 이렇게 철저히 잊혀진 배우는 정말 보기 드문 경우입니다. 공교롭게도 그 두 편의 영화는 국내에 상영하지 않은 작품이지요. '이방인'은 오손 웰즈 감독의 작품이다보니 알려졌고, '주교의 아내'도 캐리 그랜트의 여러 작품중 끼어서 알려진 영화일 뿐입니다.
오늘은 로레타 영이 1947년에 출연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작 '농부의 딸'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아마도 '누구누구의 딸.....' 이라는 제목은 시골 탄광촌에서 태어나 유명한 컨츄리 가수가 되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광부의 딸'이 좀 알려진 영화일겁니다. '농부의 딸' 역시 그렇게 입지전적의 인물을 다룬 이야기인데 일종의 신데렐라 드라마라고 할 수 있지요. 스웨덴 이민가족의 딸이 아버지의 농장에서 벗어나 도시에 와서 백만장자와 결혼하게 되고 하원의원까지 당선되는 그야말로 꿈같은 내용이지요. 우리나라 아침드라마에서 아주 단골소재인 신데렐라 드라마의 전형이지요. 다만 신데렐라 이야기는 잘난 남자를 만나서 성공하는 이야기지만 아침드라마들은 여자의 능력 + 잘난 남자의 배려가 같이 결합된 내용들인데 이 영화도 그렇습니다.
40년전 스웨덴에서 이민을 와서 농장을 운영하는 가문에서 태어난 카트린(로레타 영)은 성인이 되자 농장에 머물지 않고 간호사가 되기 위해서 정든 가족들과 작별을 하고 도시로 향합니다. 도시로 가는 도중 엉큼한 동네 페인트공의 농간에 속아 돈을 거의 날리게 되자 간호학교에 들어갈 비용을 만들기 위해서 일자리를 구하는데 카트린이 들어간 직장은 백만장자 국회의원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깐깐한 집사 조셉(찰스 빅포드)은 수십년간 그 가문에서 일을 해온 만만찮은 인물이었지만 농장에서 대가족과 살며 온갖 살림을 다 해온 카트린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부지런하고 일을 잘하며 총명하기까지 한 카트린을 조셉과 집 주인 모두 마음에 들어합니다. 그 집은 대를 물려 의회에 진출한 정치인 집안이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 몰리여사(에셀 배리모어)와 함께 사는 외아들 글렌(조셉 코튼)은 명망있는 의원입니다. 또한 글렌은 버지니아 라는 근사한 멋쟁이 여인과 교제하고 있었습니다.
구도가 나오는 내용이지요? 유명 정치인이자 백만장자 상속인이 하녀로 일하는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네, 카트린과 글렌이 어떻게 언제 사랑에 빠지느냐고 문제일 뿐이죠. 이야기는 뻔히 그렇게 전개됩니다. 카트린은 자신가 비교가 안되는 높은 곳에 있는 버지니아를 부러워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총명하고 온갖 일을 잘하는 카트린에게 글렌은 점점 빠져듭니다. 집사까지 단 3명이 사는 집이었지만 50명이 살아도 될만큼 으리으리한 대저택의 규모에 놀라는 카트린, 그렇지만 워낙 일을 잘하고 가끔 바른말도 잘하는 카트린은 이런 낯선 부자집에서의 생활을 금방 적응하고 이 집의 외아들 글렌의 마음을 사로잡지요.
이야기가 너무 순조로운 전개만 되든 건 아닙니다.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서인데 이야기가 확 전환되는데, 글렌이 속한 여당의 하원의원이 갑자기 급사하게 되자 보궐선거가 치루어지고 당에서는 핀리라는 오래도록 당에 헌신해온 인물을 공천합니다. 하지만 핀리는 구태정치인이었고 그것을 아는 카트린은 대중연설 장소에서 핀리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하여 몰아붙입니다. 순식간에 관심을 받게 된 카트린, 야당측에서는 핀리를 꺾을 마땅한 후보가 없는 차에 농부의 딸이고 하녀출신이기에 입지전적인 이야기거리가 있는 카트린을 후보로 내세우려고 합니다. 졸지에 자신의 돌봐준 정치인 집안과 맞서야 하는 반대당의 후보가 되어야 하는 카트린, 하지만 제대로 된 정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후보수락을 하게 되는데.....
신데렐라식 로맨스 영화이긴 하지만 은근 정치영화로서의 내용도 있습니다. 영화내용 자체가 정치적이라기 보다는 과연 어떤 사람이 국회의원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일침을 놓는 부분이 있습니다 국민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하는 일꾼이 아닌 당에 충성하고 당만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당선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의원이 되는 순간 국민을 위해서 일해야지 자신의 선거비용을 대준 사람을 위해서 일해서는 안됩니다" 라고 역설하는 카트린의 말이 굉장히 와닿는 부분이지요. 또한 21세기에나 우리나라에서 이슈가 된 '무상급식' 최저임금 인상' 같은 내용이 이미 이 영화에서 슬쩍 논의가 되지요.
이 영화에서 눈여겨 볼만한 캐릭터는 주인공 카트린 보다는 정치인 집안의 두 인물, 글렌과 그의 어머니 몰리여사인데, 두 사람 모두 여당의 영향력있는 정치인들이고 특히 몰리 여사는 거의 정치계의 대모같은 인물이고 사별한 남편은 존경받는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이니 그야말로 당을 위해서 가장 앞장서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입장인데 자신의 당에서 내세운 후보가 부적절하고 야당의 후보로 출마한 카트린의 당선이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오히려 카트린의 당선을 돕는 내용이 굉장히 이례적입니다. 특히 부당한 흑색선전때문에 선거를 하루 앞두고 카트린이 위기에 몰리는 상황이 되는데 그 상황을 뒤집기 위해서 발벗고 뛰는 것이 글렌과 몰리여사 입니다. 자기집에서 하녀로 일하던 여자였지만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정치적 명분'보다 사랑을 택하는 멋진 상남자 역을 조셉 코튼이 연기합니다. 약간은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가 연상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후반부, 단 하루밤 사이에 이루어지는 급박한 반전이 볼만합니다.
결과적으로 상대당의 음해와 흑색선전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정계진출을 모두 이루는 해피엔딩의 내용으로 사필귀정 적인 결말입니다. 이 내용을 보면 사람이 출세하려면 1. 올바른 사람이어야 하고 2. 유능해야 하고 3. 주변에 도와주는 의로운 인물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카트린은 결국 그런 세 가지를 모두 갖춘 주인공이지요.
여성 차별이 심하던 40년대 영화이고 더구나 여주인공이 스웨덴 이민계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상징성이 있는 영화입니다. 인맥, 혈연, 배경보다는 올바르고 능력있는 사람을 선택한다는 미국의 아량을 과시하는 내용이기도 하고요.
배우들의 경연이 볼만한데 우선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은 로레타 영, 데뷔를 일찍하여 10대 시절인 1920년대 후반부터 이미 주연급 배우였던 그녀는 당시 34세 였지만 20대 초반 정도의 여성을 연기한 셈인데 오히려 너무 늦게나 주연상 후보가 된 것입니다. 그 해에 캐리 그랜트와 공연한 '주교의 아내'를 크게 히트시켰고 그 영화를 아카데미용으로 적극 밀었는데 오히려 다른 영화 '농부의 딸'에서 수상을 했습니다. 하녀에 불과하지만 할말하고 살면서 정치인이 되는 여주인공역을 무난히 소화합니다. 41년 데뷔이후 40년대 주연급 배우로 활약해 온 조셉 코튼은 금수저출신 정치인이지만 하녀를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매력을 알아보고 사랑하며 정치인이 되는 것을 도와주는 멋진 상남자를 연기하는데 늘 비슷한 연기를 하는 듯 하면서도 은근한 매력이 있는 배우입니다. 그 시기에 조셉 코튼은 '백주의 결투' '제니의 초상' 등 좋은 영화를 계속 내놓으며 전성기를 누리던 상황이었습니다. 어머니인 몰리 여사로 출연한 에셀 배리모어는 정치계의 여걸다운 당차고 품위있는 연기를 하는데 드류 배리모어의 증조 혹은 고조할머니 자매쯤 되는 혈연관계라고 합니다. 조셉 코튼과 '제니의 초상'에도 함께 출연했지요. 좀 아까운 배우가 찰스 빅포드인데 이 배우는 고집센 인상에 걸맞는 완고한 역할에 잘 어울리는 명 조연 배우인데 이 영화에서도 완고하지만 충성스럽게 따뜻한 면이 있는 집사역으로 좋은 연기를 보였고 조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을 못합니다.. 그는 세 번 아카데미 조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을 못했습니다.
1947년에는 쟁쟁한 영화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인물만도 수잔 헤이워드, 로잘린드 러셀, 도로시 맥과이어, 조안 크로포드 등 정말 쟁쟁했습니다. 로잘린드 러셀이 유력하다는 추측이 되었지만 로레타 영이 의외로 수상을 했고, 히트작 '주교의 아내'가 아니라 '농부의 딸' 로 후보에 올라 수상한 것도 화제였습니다. '흑수선'의 데보라 커 나 '파도'의 도나 리드, 라나 터너가 후보에도 못 오를 정도였으니. '파도' '흑수선' '34번가의 기적' '위대한 유산' '십자포화' 등 좋은 영화들이 많았지만 사회물인 '신사협정'이 작품상을 가져갔는데 그럼에도 주연인 그레고리 펙과 도로시 맥과이어가 수상을 하지 못해서 좀 빛이 바랜 느낌이 있습니다. 그렇게 치열한 한 해였지만 연기경력 20여년이나 된 로레타 영이 천신만고 끝에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은 것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30-40년대 맹활약을 한 여배우로 캐서린 헵번, 베티 데이비스, 조안 크로포드, 바바라 스탠윅 등과 함께 로레타 영도 많이 기억되어야 할 그 시대의 명배우입니다. 특히 20년대 후반부터 40년대 후반까지 꽤 긴 전성기를 누린 배우라는 것도 주목할 부분입니다. 이런 배우의 출연작이 좀 더 많이 발굴되어 알려져야 진정 세계영화의 상업적 흐름을 판단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로레타 영의 영화들이 좀 더 많이 알려졌으면 합니다.
ps1 : 당선을 위해서 흑색선전을 하고 상대후보의 약점을 공격하려는 음모 등은 요즘 정치판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지요. 아마 몰리부인이나 글렌 같은 정치인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ps2 : 민주국가에서 국민의 권리는 자신에게 부여된 소중한 한 표에 의해서 행사되는 것이라는 걸 알려주는 내용인데 아쉽게도 우리나라는 대부분 진영논리에 의한 '묻지마 투표'인 것이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그러니 정치인들도 잘해서 표를 얻을 생각보다 공천을 받기 위한 것을 더 중요시 여길 수 밖에 없고. 로레타 영이 연설문 책을 꺼내서 읽는 장면에서 '소박한 시골의사 이야기'가 매우 와닿는 의미있는 내용이었습니다.
ps3 : 타잔 역으로 나중에 알려지는 체격좋은 렉스 바커가 로레타 영의 시골 오빠 3명중 하나로 등장합니다. 농부의 아들이라서 삼형제가 모두 기골이 장대한 배우를 캐스팅했더군요. 렉스 바커는 단역인데 나중에 자니 와이즈뮬러에 이어서 타잔 역할을 하게 되지요. 소위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타잔'으로 불리웠던 배우입니다.
ps4 : 철저히 신분제 사회인 것이 느껴지는 영국영화와 달리 미국은 좀 다른가 보네요. 아니면 영화라서 그런지. 백만장자 정치인 가문의 외아들이 자신의 집에서 하녀로 일했던 시골 농부의 딸과 결혼을 하고 그것도 시어머니 될 사람이 적극적으로 지지를 하다니. 21세기 우리나라 드라마에서도 그런 상황이면 집안이 발칵 뒤집히는데.
ps5 : 21세기 우리나라에도 없는 버튼을 누르면 의자가 튀어나와서 계단을 자동으로 오를 수 있는 장치가 1947년 영화에 등장해서 신기합니다. 물론 부자들이 2층집이 아닌 아파트에 사는 우리나라라서 그런 오픈된 2층집 구조가 별로 없어서 그런 장치가 없겠지만. 장애인에게 매우 유용한 장치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전철역 계단에 설치된 느려터진 장치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보이더군요.
[출처] 농부의 딸(The Farmer's Daughter, 47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작|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