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송주의 좋은 글 나누기> 독도
한겨레신문 [정의길의 세계 그리고] 2023-03-23
오므라이스 한 그릇과 바꾼 윤석열의 ‘도게자’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말이라고 널리 퍼져 있다. 비즈니스에서는 “거래에 실패한 직원은 용서해도, 접대(의전)에 실패한 직원은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외교에서도 의전은 중요하다. 그래서 16~17일 윤석열 대통령의 방일에서 나의 관심은 오므라이스였다.
조지 부시는 이자카야 맛집, 버락 오바마는 스시 맛집, 도널드 트럼프는 뎃판야키 맛집에서 훈훈하게 대접받는 것을 본 적이 있는 나는 윤 대통령도 오므라이스 맛집에서 같은 반열의 대접을 받는다고 감읍했다. 그런데, 정상 사이의 친교를 다지는데 손바닥 절반만한 오므라이스 한 그릇만으로는 부족해 보였다. 밤늦게 검찰청에서 먹는 짜장면이 그리워 검사로 다시 컴백했다는 윤 대통령의 식탐에 오므라이스는 게 눈 감추듯 사라질 텐데, 분위기가 썰렁해질까 걱정됐다. ‘그 맛집에는 돈가스도 유명하다는데, 돈가스를 안주로 시켜 ‘나마비루’(생맥주)를 마시고는 오므라이스를 식사로 할까’라는 등 온갖 상상을 했다.
그런데 스키야키 맛집에서 저녁을 먼저 먹고는, 오므라이스 맛집으로 간다는 발표를 보고 ‘멘붕’에 빠졌다. 저녁을 두 끼 먹는단 말인가? 사람들을 많이 만나려고 점심, 저녁을 두 탕씩 뛰는 한국 정치인의 관행을 챙겨주는 세심한 배려인지, 아니면 2차에서는 ‘밥이 최고 안주’라는 한국의 주법을 일본이 세심히 배려해 오므라이스를 안주로 하여 나마비루를 대접하려는 것인지 헷갈렸다.
오므라이스에 대한 관심은 이번 방일 최대 현안인 강제동원 배상 문제에서 피해자인 한국 쪽이 독박쓰기로 정리된 데 따른 것이다. 남은 것은 그 대가로 일본이 중요한 외국 정상을 격의 없이 환영하는 접대인, 특유의 ‘오모테나시’를 윤 대통령에게 베푸는 것 정도였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와 언론들은 오므라이스 접대가 얼마나 극진한 환대인지 입이 마르도록 포장해, 나도 부화뇌동했다.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위안부,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독도 문제 등까지 해결을 요청했다는 일본 언론들의 보도가 연이어 나와, 나는 다시 멘붕에 빠졌다. 이번 방일에서 ‘강제동원 문제 독박’-‘오므라이스 접대’라는 ‘깔끔한’ 한-일 주고받기로 정리된다는 건 나의 순진한 생각이었다. 일본은 스키야키까지 쓰키다시로 접대하고는 다른 것도 요구한 게 아니었냐는 의구심이 들었다.
일본 문제에 밝은 동료 기자는 방일 전에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은 없을 것”이라고 노래를 불렀다. 동료 기자는 일본 사무라이 문화에서 한쪽이 고개를 숙이거나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모든 처분을 맡기는 것이라며, 일본은 한국에 오히려 더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동료 기자가 맞았다. 윤 정부의 ‘강제동원 문제 독박’은 일본에는 한국의 ‘도게자’였다. 도게자란 사무라이 문화에서 무릎을 꿇고는 머리가 바닥까지 닿는 큰절로 사죄를 구하는 예법이다. 도게자는 자신의 목까지도 내놓을 정도로 상대방에게 전적으로 처분권을 준다는 의미이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한국의 강제동원 문제 해법에 “사실 일본이 깜짝 놀랐다”며 “이렇게 하면 한국 국내 정치에서 괜찮을지 모르겠는데 우리로서는 이것이 학수고대하던 해법인 것 같다(고 반응했다)”고 설명했다. 일본으로선 한국이 도게자를 했다고 본 것이다. 이제 전적으로 처분권이 있으니 강제동원 문제 외의 다른 현안도 한국 쪽에 해결하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정상회담에서 위안부 문제 등도 거론됐다는 일본 언론들의 보도에 대통령실이 일본이 언론플레이를 한다며 화를 냈다. 일본은 잘못이 없다. 일본으로서는 한국이 도게자를 했기에 당연한 것들을 요구한 것이다. 잘못은 윤 정부이다. 도게자를 하고도, 했는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앞으로가 더 문제다. 일본은 도게자를 한 한국에 계속 모든 문제의 해결을 떠넘길 것이다. 4년 뒤 윤 정부가 물러나도 변치 않을 것이다. 물론 일본은 한국이 이후에도 이번처럼 ‘스스로 독박’ 해결책을 제시하면, 아마 규동, 소바, 지라시스시 접대 정도는 할 것이다. 윤 정부처럼 오므라이스 한 접시에 “오모테나시를 받았다”고 감읍해야만 한-일 관계는 풀릴 것이다.
오므라이스를 놓고 트집을 잡는 이런 나의 심사는 “저 왕궁 대신에, 왕국의 음탕 대신에, 오십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김수영의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하는 옹졸한 반항일 뿐인가?
정의길 | 국제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