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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사40:27-31절)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관심이 없다거나 아니면 여러분을 공평하게 대하지 않는다고 느낀 적이 없습니까. 시련은 하나님의 위엄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에 대해 유감스럽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사야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난을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면 삶에 문제가 없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듯이 우리가 침체에 빠져 있을 때 영적인 좌절을 해결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사40:27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네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행위는 정당한데 그 정당한 사정이 하나님께 외면당하고 있다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신자의 좌절에 대해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위대한 인물들 가운데서도 자주 나타납니다.
*시42: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고라 자손들은 자기들이 조상들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야로 울며 하나님께 그 사실을 아뢰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왕상19: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하고..
엘리야 선지자는 아합 왕과 대결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변화시키기는커녕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은 죽음뿐이라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하나님 앞에 죽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요나4: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요나 선지자는 니느웨 사람들이 자기가 선포한 회개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자 하나님이 계획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므로 그 사실을 매우 싫어하고 성을 내며 죽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렘20:14-18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렘20:18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하니라.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어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아니하리라고 스스로 맹세하면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고 답답하여 견딜 수 없어 자신의 출생을 비관하며 한탄했습니다. 고라 자손들, 엘리야, 요나, 예레미야는 이와 같이 절망과 좌절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절망과 좌절은 육신적인 것보다는 그 원인이 영적인 것, 심리적인 것이 대부분입니다. 불신과 분노와 후회와 낙심, 이것들과 모든 죄들이 절망의 배후에 진을 치고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절망에 처한 인생들에게 하나님은 오늘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40:31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1. 영적인 절망에 대하여 먼저 생각하겠습니다.
마틴 루터가 인본주의자 에라스쿠스에게,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너무 인간적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대한 인생들의 인본주의 생각과 또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40:25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
인간은 숭배의 대상으로 우상을 만듭니다. 그러나 생명력이 없는 우상은 인간이야말로 가장 우매한 존재임을 스스로 반증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초월자이실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과 권세를 세우시고 그 운명을 좌우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진정으로 숭배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저지른 잘못은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억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야곱을 버리지 아니하신 것처럼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나아가 오늘 우리들도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간혹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고 메마른 곳에 두었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영광을 잊어버릴 때 나타납니다. 우리가 잊어버린 하나님의 영광 네 가지를 먼저 생각해 봅시다.
가) 첫째--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사40: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가 즐겨 사용했던 말씀은 히브리서 13장 8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불안 그리고 실망은 인간 삶의 리듬이기도 합니다. 파도는 오르면 내려가지만 내려간 파도는 다시 돌아옵니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패턴이 언제나 한결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심령이 내려갔을 때 다시 올라올 줄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미국의 야구 투수 사이영은 당대 최고의 투수였습니다. 그의 놀라운 기록은 자신의 메니저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손이 풀리지 않고 실점이 가중될 때 대개의 코치는 선수를 불러내어 교체하는데 자기 코치는 자기가 원래의 컨디션을 회복할 때까지 기다려 준다는 것입니다. 즉 그의 코치는 그의 불안한 심적 상태를 극복할 때까지 공을 던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명선수에 명코치가 아닙니까. 고라 자손들은 낙심되고 불안할 때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시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네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이 올라올 때나 내려갈 때나 언제나 동일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영원하신 분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네 가지입니다.
1) 하나님 사랑이 영원합니다.
*사54:8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2) 하나님의 언약이 영원합니다.
*사55: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사61:8 무릇 나 여호와는 정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주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을 것이라.
3)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합니다.
*사60:15 전에는 네가 버림을 당하며 미움을 당하였으므로 네게로 가는 자가 없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를 영원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이 되게 하리니...
*사60:19-20 다시는 낮의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4) 하나님의 기쁨이 영원합니다.
*사61:7 너희가 수치 대신에 보상을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몫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그들의 땅에서 갑절이나 얻고 영원한 기쁨이 있으리라.
사랑도, 언약도, 영광도, 기쁨도,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 둘째--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사40:28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하나님은 지치지 아니하십니다. 그분에게는 너무 어렵거나 너무 복잡한 상황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에너지는 결코 고갈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주 지치곤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우리에게 자기 안에서 쉬라고 하셨습니다. 비행기가 착륙할 때 가장 위험한 것은 비록 급강하할 때라도 기수를 내리며 끌어당기는 작동 그 자체보다 순간적으로 시각 장애가 생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신경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 것을 알면 시각 장애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죄인입니다. 파산자와 같습니다. 사람이 부도가 나면 어쩔 줄을 모릅니다. 자신이 파산자임을 알았던 이사야와 베드로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우리는 하나님께 필요한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항상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10: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이 말씀은 구속받은 성도의 가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우리 자신을 참새의 자리에 올려놓고 있지 않은가요. 먹고 마시고 잠자고, 돌고 도는 일상의 생활이 나 자신의 전부인 것으로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깨달을 것은, 적어도 주께서 반드시 나를 통하여 이루어 나가시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하지 아니하시며 곤비하지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신 능력이 무한한 분입니다.
다. 셋째--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심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사40:27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으신다는 생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는 그분의 전능성입니다.
*사40:13-14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이 말은 그분은 우리에 대한 모든 것을 아신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 글을 기록한 당시의 상황을 살펴봅시다. 앗수르 왕 산헤립이 말하기를 ‘열국의 모든 신 중에 누가 그 땅을 내 손에서 건졌기에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능히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라고 하였습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전능하신 여호와를 모욕하였습니다. 그 죄로 말미암아 그 후 몇 년이 못 되어 산헤립은 자신의 나라에서 신하에게 암살당하여 죽었습니다. 우리가 낙담되고 불안할 때 내 속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나쁜 사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좋은 사람입니다. 나는 잘 움츠리는 사람인 동시에 고통의 상황을 잘 평정하는 용기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나는 진흙 속에 잘 빠지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별을 향하여 나르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내 속에는 이기주의의 내가 있지만 동시에 섬기고 베푸는 나 자신도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내 속에 언제나 최선의 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 고 하였습니다. 내가 불행하게도 낙심과 불안에 빠졌을 때는 내 속에서 다른 내가 나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들어 최선의 나를 보고 그 최선의 내가 권리 행사를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라. 넷째--우리는 순례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사1:23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
이사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패역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은 조상 아브라함처럼 하늘을 사모하고 하나님이 지으실 도성을 바라보고 산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부귀영화가 전부인 타락한 육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들이 이 땅의 순례자들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권리만을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처한 형편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상에 공정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결론부터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권리와 소명을 구분할 때 우리는 은혜 가운데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그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낙담은 기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부닥친 모든 어려운 일들을 ‘하나님의 뜻’이란 미명 아래 묶어 두고 두 손 놓고 있어서는 더 더욱 안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서기 위함이라”는 뜻은 장애물 앞에 정지, 또는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라 당당히 맞서야 한다는 뜻입니다. 태산이 앞을 막으면 굴을 뚫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빅톨 유고가 외딴 섬으로 유배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48세였습니다. 거기서 그는 20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뼈아픈 절망의 나날들, 그러나 거기서 그는 ‘아-무정 (레 미제라블)’이라는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대작을 썼습니다. 그의 뼈아픈 낙담이 없었던들 그런 대작도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스페인 여행을 열망했습니다. 스페인 여행은 그의 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페인 대신에 바울이 상륙한 곳은 로마의 차디찬 지하 감옥, 죽음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낙망은 새로운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의 죄수복에서 그는 영광스러운 복음의 비밀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빌1: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일은 감옥마다, 죽음의 골짜기마다, 광명한 빛으로 인도하는 문은 아닙니다. 어떤 낙담은 평생을 갑니다. 무너진 육체, 상처 입은 마음, 깨어진 삶, 이런 것들은 새날이 밝아 와도 그대로 아픔으로 남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이 땅의 순례자라는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Happy end'-행복으로 끝나는 소설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우리가 갈 곳은 갈보리 십자가 저 언덕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말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라는 말씀을 주홍글씨처럼 가슴에 단 자입니다.
2. 두 번째 생각할 것은 너는 하나님을 앙망하라는 것입니다.
절망과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입니다.
*사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여기서 여호와를 앙망하라는 뜻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가. 인내의 뜻이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기다림(wait) 이라고 번역합니다.
*애3:24-26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무릇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마지막 절에 ‘잠잠히 기다림’ 이란 번역이 흥미롭습니다. 애가는 고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애가는 우리가 그토록 자주 하나님의 축복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를 다루고 있습니다. 어려움이 발생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를 돌보시는지의 여부에 대해 묻곤 합니다. 그러나 그 대답은 명백합니다.
*애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우리는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잘못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지 마시고 원망을 삼가야 합니다.
나. 믿음의 뜻이 있습니다.
*시37:7-9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여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시편 37편은 악인의 번영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흥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입니다. 신자는 고요히 기다리고 지켜보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싱클레어 퍼거슨은 말하기를 ‘시37:7에 ‘기다리다’ 는 것은 본래 뒤틀림이나 구부러진 것을 바로 펴는 것의 개념을 전달하는 것으로, 이 단어는 하나님을 그냥 수동적 고요함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긴장되고 간절한 마음으로 세상과 육과 악마와의 오랜 전쟁을 의미한다.‘ 고 하였습니다.
다. 기대한다는 뜻입니다.
바라본다, 희망한다.(hope)의 뜻이 있습니다.
*사30: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여기에 ‘기다리라’ 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또 다른 뜻입니다. 이 개념은 우리를 축복해 주실 하나님을 기대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밀스러운 목적을 보여 주시기를 원하시지만 오직 그 자신의 때가 이르렀을 때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백성에 대해 끝까지 인내하고, 믿음을 굳건히 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서 어느 때가 되면, 시간이 무척이나 오래 지난 후에 그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잊은 것처럼 여겨질 때, 그들의 힘이 다 사라져 버릴 때,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고 자빠질 때, 너희들은 여호와를 앙망하라. 즉 여호와를 바라보라.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는 새 힘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새 힘은 순간적으로 얻어지는 힘이 아닙니다. 에너지 같은 것이 아니라 축복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섬기고 있는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공급되는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기도하면서 여호와를 앙망하고 있습니다.
*렘14:22 이방인의 우상 가운데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하늘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으리이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그리하는 자는 주가 아니시니이까.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 하니라..
이 새로운 힘은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다고 하였습니다.
*시103: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않는 다함이 없는 힘입니다. 여호와를 끝까지 기다리므로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으로부터 해방되어 귀환하는 축복을 누릴 것을 말합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두 사람은 친척입니다. 아마도 어린 시절은 다정하게 놀면서 자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요한이 무참히 목 베임을 당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그 소식은 두말할 것도 없이 주님의 마음에 슬픔을 주었고 아픔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마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 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비행기가 몹시 흔들릴 때 조종사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우리는 지금 가벼운 진동 속에 있습니다. 이제 고공 20,000피트 기류를 타기 위해 상승하겠습니다.’ 비행기가 30,000피트 이상 올라갈 때 거대한 항공기는 조용한 항해를 시작합니다. 우리의 삶에 진동이 일어날 때 우리가 하늘을 바라보고 올라가면 참으로 놀랍게도 진동은 조용해집니다. 친구가 죽었을 때도 주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분의 삶이 어렵고 힘들 때 그분은 홀로 동산에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손을 힘차게 잡았을 때 두 발로 능히 설 수 있을 것입니다. 퍼마로이라는 강력한 자석 물체가 있는데 이것을 쇠붙이와 같은 방향으로 놓으면 전혀 자석의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놓으면 강력한 힘을 행사합니다. 우리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향하여 우리를 놓으면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하나님을 향하여 놓을 때 우리는 삶의 역경을 이기고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마침내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을 맞을 것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라. 여호와를 기다리라. 여호와를 소망하라.”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참고 인내하면서 반석 같은 굳건한 믿음으로 축복의 단비를 주실 때까지 여호와를 앙망하고 여호와를 소망하는 우리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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