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6월 록 콘서트에 참석한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이 무대 위에서 댄서들과 춤을 추고 있다. [로스토프 AP=연합뉴스]
1991년 8월 러시아 의회에서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에게 메모를 건네며 낭독하라고 윽박지르고 있다. [모스크바 AFP=연합뉴스]
1998년 8월 옐친 대통령(오른쪽)이 크렘린궁에서 업무 보고를 위해 들어온 푸틴 연방보안국 국장에게 자리를 권하고 있다. [모스크바 AFP=연합뉴스]
그것은 세계를 뒤흔든 사건이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의 일이다. 1991년 8월 19일 보리스 옐친(1931~2007) 당시 러시아 대통령이 모스크바의 러시아공화국 의사당 앞에서 탱크 포탑 위에 올라탔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대통령의 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개혁·개방정책)에 반기를 든 공산당 보수파가 쿠데타(18~21일)를 일으켜 그를 체포하려 혈안이 돼 있던 때였다.
옐친은 탱크 위에서 러시아 국민에게 “쿠데타 세력에 당당히 맞서자”고 촉구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려던 세력에 맞선 옐친은 ‘용기 있는 리더십’으로 공산주의 소련을 무너뜨리고 러시아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이 역사적 장면이 신(新)러시아의 시작이다.
일요일이던 그해 8월 18일 밤 국가보안위원회(KGB)와 국방·내무부의 공산당 보수 강경파들은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구성하고 흑해 크림반도의 별장에서 휴가 중이던 고르바초프를 찾아가 사임을 요구했으며 이를 거절한 고르바초프를 별장에 감금했다. 그리고 탱크부대를 모스크바에 진입시켰다. 쿠데타 세력은 고르바초프로부터 핵미사일 발사장치까지 빼앗았다. 모스크바 인근 별장에서 이 소식을 들은 옐친은 쿠데타에 대항하자는 내용의 대국민 성명을 작성했다.
이튿날 역사적인 탱크 포탑 연설이 이뤄졌다. 옐친은 쿠데타군이 모스크바를 장악할 경우 임시정부를 만들어 대항할 계획까지 세워놓았다. 쿠데타군이 모스크바 시내로 밀고 들어온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수천 명의 옐친 지지자들이 의사당 주변으로 몰려들어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20일 청년 3명이 쿠데타군의 총에 맞아 숨지자 더 많은 시민이 모여 항의했다. 국제적 비난도 거세졌다. 그러자 쿠데타에 참가한 군부대는 갈팡질팡하다 21일 탱크를 철수시켰다. 쿠데타 주모자 대부분은 곧바로 체포됐다.
공산체제로의 복귀를 꾀했던 쿠데타는 72시간 만에 진압됐다. 옐친은 쿠데타 진압을 계기로 공산당의 활동을 금지시키는 등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손발을 묶었다. 정치적 치명상을 입은 고르바초프는 그해 말 사임하고 옐친이 신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CIS)을 이끄는 최고 권력자가 됐다.
한러 관계
2010년 양국의 교역량은 176억 5000만 달러로서, 대러시아 수출은 77억 6000만 달러, 수입은 98억 9000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 품목은 자동차 및 부품류, 전자기기, 플라스틱 등이며, 주요 수입 품목은 석유, 석탄, 가스 등 에너지 자원과 철강, 니켈, 목재 등 원자재 제품 등이며
진출기업 54개사
삼성
엘지
포스코
SK에너지
현대 건설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STX
한전
칼리만탄의 왕 최계월
南中國海 아래 말레이반도와 필리핀 사이의 적도를 중심으로 북위7도와 남위3도에 걸쳐있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보르네오섬 전체면적 3분의2에 해당하는 남쪽지역의 인도네시아령 칼리만탄.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대통령으로부터 11일 특별상을 받은 한국남방개발(현지법인명 코데코)의 崔桂月(76)회장은 온갖 독충과 맹수가 우굴거리는 열대우림지역인 이곳을 사람이 살수있는 현대식 도시로 바꿔 주변에서는 그를 `칼리만탄의 왕(King of Kalimantan)'으로 불린다.
그는 한때 마두라유전개발에 뛰어들었다가 석유가 나오지않는 바람에 국내에서 엄청난 액수의 정부융자금을 남의 나라 바다밑에 쳐박은 `사기꾼'같은 사람이라는 악평을 듣기도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부근의 가스田에서 일산 4천만입방피트의 엄청난 천연가스가 나오는 바람에 투자자본을 회수하고 있다.
1919년 경남 창원군 동면에서 출생한 그는 아버지 崔永圭씨를 따라 일찌기 渡日, 와세다대하 법학부를 졸업했다. 대학재학시절 학병으로 오사카(大阪)군사령부에서 일본육군의 항공정보/전파탐지기관리장교로 근무한후 47년부터 일본동양무역사 사장을 거쳐 인도네시아의 산림개발에 뛰어들 때까지 흥아상사 전무로 일해왔다.
그가 한국남방개발이란 회사를 설립하고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것은 지난 63년.
당시 朴正熙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대통령권한대행)의 군사정부에서는 해외투자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외화가 넉넉치 못한데다 해외투자법규도 마련돼있지 않아 해외자원개발같은 것은 엄두도 내지못하고 있었으나 군사정부로부터 당시 외환보유고 4천3백만달러중 4백50만달러를 빌려 인도네시아 진출했다.
崔회장이 당시로서는 엄청난 4백50만달러를 정부로부터 빌렸다는 것은 朴최고회의의장과 둘도없는 절친한 사이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朴의장과 인연을 맺은것은 JP(金鍾泌씨)를 통해서였다. 崔회장은 그가 인도네시아를 방문, 수카르노대통령을 만나고 돌아온 3개월후인 62년 11월 도쿄(東京)에서 한일국교정상화 협상차 두번째로 이케다를 방문한 JP를 만났고 마침 도쿄를 방문중이던 수카르노-JP간 면담을 주선했다.
이때 崔회장은 JP에게 자신이 인도네시아 산림개발을 계획중이며 이미 수카르노대통령의 약속을 받아냈다고 얘기했으며 이는 JP의 귀국과 함께 朴의장에게 전달되고 62년 12월6일 그는 16년만에 귀국, 朴의장을 만났고 이자리에서 朴의장은 지원을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崔회장은 朴대통령과 수카르노외에도 수하르토 現인도네시아대통령과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 미키, 후쿠다, 다나카 등 일본의 역대총리들과 인맥을 형성 해왔다.
그가 해외투자사업대상지로 인도네시아를 선택한 것은 스카르노, 수하르토 두 대통령과 맺고있는 인연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는 62년8월 일본에서 駐日인도네시아대사로부터 수카르노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국빈자격으로 자카르타를 방문했다. 그가 西이리안섬 추장 3명으로하여금 수카르노를 방문토록하고 西이리안섬이 인도네시아와 합병을 원한다는 성명을 발표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수카르노는 崔회장의 당초계획인 산림개발을 허용했고 수하르토대통령도 그의 인간됨됨이에 깊은 신뢰를 느낀 나머지 즉각 산림장관을 불러 "미스터 초이(崔)의 사업에 전적으로 협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후문이다.
그는 68년 해병상륙사단 제대자 1백20명을 차출하고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해 美정부로부터 은성무공훈장을 받은 함덕창 예비역해병중령을 단장으로 칼리만탄의 오지에 닻을 내렸다. 이제 이곳은 당시의 원주민 3가구에서 남방개발의 종업원 및 그 가족 3만여명을 포함한 인구 6만의 도시로 변했다. 현재 추진중인 시멘트공장과 화력발전소가 완공되는 98년쯤이면 인구 10만의 도시로 변하게된다.
崔회장은 조림에도 열의를 보여 현재 旣조림지를 포함 1억평의 땅을 조림지로 조성하고 있으며 그의 조림목표는 5억평이다. 그가 현재 심어놓은 고무나무도 약 20만본에 달하며 이미 조성된 고무농장도 여의도 면적의 40배에 달한다. 칼리만탄 주정부는 남방개발측이 쿠란지지역의 6천만평에 고무 및 야자농장을 성공적으로 조성한 것에 고무돼 바리토강 유역의 3억2천만평을 아예 무상으로 야자.무농장으로 쓰도록 제공했다.
崔회장은 사업신조는 "있는데 가서 찾는다. 안에 없는 것은 밖에 나가 찾는다.밖에서 찾은 것은 반드시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다"로 전해지고 있다. 社訓은 ▲조국의 영광 ▲양국의 우호 ▲회사의 번영으로 정했다.
그를 두고 한국에서는 `사기꾼' `정부돈을 떼어 먹은사람'이라는 악평도 나돌고 있지만 보르네오섬의 남방개발사업현장을 찾는 사람이면 오히려 그가 이룩해놓은 모든 것들에 압도되어 그저 머리를 숙일뿐이라는 것이다. 崔회장과 함께 일제때 학병에 끌려갔던 극작가 韓雲史씨는 일찌기 그를 `大人'으로까지 불렀다.
서울 서소문동 동화빌딩 10층에 본사를 두고 사업차 한국, 일본, 미얀마 등을 자주 방문하고있는 최회장은 在인도네시아교민회장(73년), 한국해양산림개발협회장(76년), 해외국민연합회회장(80년)등을 역임했으며 古稀가 훨씬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즘도 새벽 4시까지 책을 읽을 정도로 독서광으로 알려져있다. 부인과의 사이에 남방개발경영에 참여하고있는 장성한 아들 하나를 두고있다.
1차 오일쇼크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1976년 2월16일,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에 위치한 체신청 회의실. 오전 9시30분을 전후로 속속 입장하던 미국, 영국, 서독(현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등 세계 유수의 대형 건설업체 관계자들이 모두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있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던, 아니 있으면 안될 사람이 보였던 것이다. 훗날 왕 회장으로 불렸던 현대건설 정주영(전 명예회장, 2001년 3월21일 별세)이었다. 이들은 이미 국내 모 항공사 회장을 통해 "현대건설이 (입찰을)포기했다"고 전해들었던터라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3시. 피말리는 시간이 지나가고 동행한 직원이 입찰결과를 발표하는 소회의실에서 환한 얼굴로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나왔다.
"우리 `현대'가 낙찰받았습니다!"
정 회장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리야드 여행자 숙박소에서 일주일동안 방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철야하다시피하며 입찰을 준비했던 견적팀과 직원들도 모두 두 손을 번쩍 올렸다. 공사 금액만 9억3114만달러(당시 환율 약 4609억원). 몇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세계 건설업계가 20세기 최대의 역사라고 불렀던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낸 순간이었다.
◇`기적'을 쐈다〓현대건설의 주베일 산업항 공사 수주는 말 그대로 한 편의 드라마다. 애당초 입찰 참가도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낙찰이어서 더 그랬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의 건설시장은 다른 해외 시장과 마찬가지로 선진국의 독무대였다. 단지 10개사만이 초청 대상이던 주베일 산업항 입찰에도 일본 건설사는 한자리도 끼지 못할 정도였다.
현대건설은 단 한 건의 이 공사를 수주함으로써 당시 우리나라 예산액의 절반과 맞먹는 규모의 외화를 벌어들였다. 당시 최악의 외환사정으로 곤란을 겪던 우리 정부에도 이 소식은 낭보 중의 낭보였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수주는 국가를 부도위기에서 구출해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
경쟁사들의 방해 공작 등으로 계약시점부터 어려움을 겪어왔지만 현대건설은 공사 수행과정에서 특유의 뚝심과 아이디어를 동원했다.
모두들 `미친 짓'이라고 했지만 모든 기자재와 콘크리트 슬래브를 울산조선소에서 제작, 대형 바지선을 통해 모두 19차례에 걸쳐 세계 최대 태풍권인 필리핀 해양을 지나 걸프만으로 날랐다. 오일쇼크로 침체돼 있던 울산조선소에도 일거리를 줄 수 있었던 이 구상은 공사기간을 단축하기 위한 극약처방이었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의 성공적 수행으로 시공능력을 만방에 과시한 현대건설은 이후 라스알가르 주택항공사, 쿠웨이트 슈아이바항 확장공사, 두바이 발전소, 바스라 하수처리공사 등 대형공사를 잇따라 수주했다. 1975년 중동 진출후 1979년까지 현대건설은 약 51억6400만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였다.
◇`현대건설'의 태동〓정 회장은 26세이던 1940년 3월, 동업자 두 사람과 함께 아현동 고개에 있는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인수했다. 이 공장은 나중에 그를 국내 굴지의 재벌기업가로 만드는 계기를 제공함과 동시에 `현대호'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탄생시킨 모태가 됐다.
해방후인 1946년 4월, 중구 초동에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차리면서 `현대'라는 상호를 쓰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47년 5월, 공업사 건물에 `현대토건사' 간판을 달았다. `현대건설'의 출발이었다. 두 회사는 1950년 1월 합병, `현대건설주식회사'로 거듭났다.
◇고령교의 전화위복〓6.25전쟁이 터지자 현대건설은 자연스럽게 부산으로 옮겨졌다. 1.4후퇴후 서울이 재탈환될 당시 현대건설은 미8군 발주공사를 독점하다시피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숙소 꾸며내기와 한겨울 유엔군 묘지를 보리를 이용해 푸른색으로 덮었던 일은 정 회장의 사업수완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미군 공사 의존도를 줄이려던 현대건설에 떨어진 특명은 대구와 거창을 잇는 고령교의 복구공사였다. 이 공사는 한 마디로 골치덩어리였다. 계절에 따라 극심한 차이를 보인 낙동강 수심과 턱없이 부족한 장비, 홍수 등이 공사를 방해했다. 여기에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물가도 훼방꾼 노릇을 톡톡히 했다. 결국 이 공사로 공사비(5478만환)보다 더 많은 6500만환의 적자를 봤다.
하지만 고령교 복구공사는 후일 현대건설의 신용가치를 높여 정부공사를 수주하는데 일조했다. 미국 원조자금으로 전후복구사업이 한창이던 1954년이후 현대건설은 가창댐 확장공사, 내무부 중기공장 신축공사, 부산항 제4부두 신축공사, 옥산교, 가창댐 확장공사, 강구교공사 등 5억4000여만환의 공사를 따내면서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훗날 정 회장은 "경쟁자들보다 앞섰던 기계화와 장비화가 현대건설 성장에 큰 몫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고령교 시련의 덕택"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가자 해외로〓국내 정치상황이 급변하던 1960년대 초. 현대건설은 활로 모색을 위해 해외건설시장 진출을 꾀했다. 1963년 7월, 베트남 사이공의 상수도 시설공사 입찰에 참여하면서 해외 진출의 시동을 걸었던 현대건설은 1965년 5월, 태국에서 세번째 도전만에 522만달러 규모의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따냈다. 현지 풍토를 견디지 못해 손해는 봤지만 이 공사 수행 경험은 결국 경부고속도로를 수주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를 출발점으로 현대건설은 알래스카 협곡의 교량공사, 괌의 주택과 군사기지 건설, 파푸아뉴기니 지하 수력발전소 공사, 베트남 캄란군사기지 건설, 메콩강 준설공사, 호주의 항만공사를 잇따라 수행했다. 이 시기인 1967년에는 소양강 다목적댐을 시공하기도 했다.
현대그룹의 맡형이자, 한국건설을 이끈 견인차였지만 현대건설 역시 경제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유동성위기에 몰리며 채권단 관리에 들어가는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건설은 지난해 사상 최대 규모인 1714억원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하는 등 최고의 실적으로 올리며 다시 웅비할 채비를 갖춰가고 있다.
1차 오일쇼크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1976년 2월16일,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에 위치한 체신청 회의실. 오전 9시30분을 전후로 속속 입장하던 미국, 영국, 서독(현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등 세계 유수의 대형 건설업체 관계자들이 모두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있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던, 아니 있으면 안될 사람이 보였던 것이다. 훗날 왕 회장으로 불렸던 현대건설 정주영(전 명예회장, 2001년 3월21일 별세)이었다. 이들은 이미 국내 모 항공사 회장을 통해 "현대건설이 (입찰을)포기했다"고 전해들었던터라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3시. 피말리는 시간이 지나가고 동행한 직원이 입찰결과를 발표하는 소회의실에서 환한 얼굴로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나왔다.
"우리 `현대'가 낙찰받았습니다!"
정 회장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리야드 여행자 숙박소에서 일주일동안 방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철야하다시피하며 입찰을 준비했던 견적팀과 직원들도 모두 두 손을 번쩍 올렸다. 공사 금액만 9억3114만달러(당시 환율 약 4609억원). 몇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세계 건설업계가 20세기 최대의 역사라고 불렀던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낸 순간이었다.
◇`기적'을 쐈다〓현대건설의 주베일 산업항 공사 수주는 말 그대로 한 편의 드라마다. 애당초 입찰 참가도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낙찰이어서 더 그랬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의 건설시장은 다른 해외 시장과 마찬가지로 선진국의 독무대였다. 단지 10개사만이 초청 대상이던 주베일 산업항 입찰에도 일본 건설사는 한자리도 끼지 못할 정도였다.
현대건설은 단 한 건의 이 공사를 수주함으로써 당시 우리나라 예산액의 절반과 맞먹는 규모의 외화를 벌어들였다. 당시 최악의 외환사정으로 곤란을 겪던 우리 정부에도 이 소식은 낭보 중의 낭보였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수주는 국가를 부도위기에서 구출해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
경쟁사들의 방해 공작 등으로 계약시점부터 어려움을 겪어왔지만 현대건설은 공사 수행과정에서 특유의 뚝심과 아이디어를 동원했다.
모두들 `미친 짓'이라고 했지만 모든 기자재와 콘크리트 슬래브를 울산조선소에서 제작, 대형 바지선을 통해 모두 19차례에 걸쳐 세계 최대 태풍권인 필리핀 해양을 지나 걸프만으로 날랐다. 오일쇼크로 침체돼 있던 울산조선소에도 일거리를 줄 수 있었던 이 구상은 공사기간을 단축하기 위한 극약처방이었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의 성공적 수행으로 시공능력을 만방에 과시한 현대건설은 이후 라스알가르 주택항공사, 쿠웨이트 슈아이바항 확장공사, 두바이 발전소, 바스라 하수처리공사 등 대형공사를 잇따라 수주했다. 1975년 중동 진출후 1979년까지 현대건설은 약 51억6400만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였다.
◇`현대건설'의 태동〓정 회장은 26세이던 1940년 3월, 동업자 두 사람과 함께 아현동 고개에 있는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인수했다. 이 공장은 나중에 그를 국내 굴지의 재벌기업가로 만드는 계기를 제공함과 동시에 `현대호'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탄생시킨 모태가 됐다.
해방후인 1946년 4월, 중구 초동에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차리면서 `현대'라는 상호를 쓰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47년 5월, 공업사 건물에 `현대토건사' 간판을 달았다. `현대건설'의 출발이었다. 두 회사는 1950년 1월 합병, `현대건설주식회사'로 거듭났다.
◇고령교의 전화위복〓6.25전쟁이 터지자 현대건설은 자연스럽게 부산으로 옮겨졌다. 1.4후퇴후 서울이 재탈환될 당시 현대건설은 미8군 발주공사를 독점하다시피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숙소 꾸며내기와 한겨울 유엔군 묘지를 보리를 이용해 푸른색으로 덮었던 일은 정 회장의 사업수완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미군 공사 의존도를 줄이려던 현대건설에 떨어진 특명은 대구와 거창을 잇는 고령교의 복구공사였다. 이 공사는 한 마디로 골치덩어리였다. 계절에 따라 극심한 차이를 보인 낙동강 수심과 턱없이 부족한 장비, 홍수 등이 공사를 방해했다. 여기에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물가도 훼방꾼 노릇을 톡톡히 했다. 결국 이 공사로 공사비(5478만환)보다 더 많은 6500만환의 적자를 봤다.
하지만 고령교 복구공사는 후일 현대건설의 신용가치를 높여 정부공사를 수주하는데 일조했다. 미국 원조자금으로 전후복구사업이 한창이던 1954년이후 현대건설은 가창댐 확장공사, 내무부 중기공장 신축공사, 부산항 제4부두 신축공사, 옥산교, 가창댐 확장공사, 강구교공사 등 5억4000여만환의 공사를 따내면서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훗날 정 회장은 "경쟁자들보다 앞섰던 기계화와 장비화가 현대건설 성장에 큰 몫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고령교 시련의 덕택"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가자 해외로〓국내 정치상황이 급변하던 1960년대 초. 현대건설은 활로 모색을 위해 해외건설시장 진출을 꾀했다. 1963년 7월, 베트남 사이공의 상수도 시설공사 입찰에 참여하면서 해외 진출의 시동을 걸었던 현대건설은 1965년 5월, 태국에서 세번째 도전만에 522만달러 규모의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따냈다. 현지 풍토를 견디지 못해 손해는 봤지만 이 공사 수행 경험은 결국 경부고속도로를 수주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를 출발점으로 현대건설은 알래스카 협곡의 교량공사, 괌의 주택과 군사기지 건설, 파푸아뉴기니 지하 수력발전소 공사, 베트남 캄란군사기지 건설, 메콩강 준설공사, 호주의 항만공사를 잇따라 수행했다. 이 시기인 1967년에는 소양강 다목적댐을 시공하기도 했다.
현대그룹의 맡형이자, 한국건설을 이끈 견인차였지만 현대건설 역시 경제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유동성위기에 몰리며 채권단 관리에 들어가는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건설은 지난해 사상 최대 규모인 1714억원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하는 등 최고의 실적으로 올리며 다시 웅비할 채비를 갖춰가고 있다.
조선 총독부 건물은 1916년 일제가 식민통치의 위엄을 내세우기 위해 그 당시로서는 엄청난 돈인 6백75만엔이 들어간 동양 최대의 건물(연건평 9천4백71평)이다.
북한에서 낙엽송 9천3백 그루로 기초를 다지고 압록강의 호두나무, 평양산 석회, 목포 앞바다 해태, 등 일급 자재들을 총동원했다. 유색의 대리석도 한반도 곳곳에서 캐다가 썻다. 완공은 14년만인 1926년 10월에 했으며 35년 식민지 기간 가운데 3분의 1가량을 건물 짓는 데 허비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역대 총독들이 사용했고, 8·15 해방 후 미군정기(美軍政期)에는 군정청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때부터 이 건물은 중앙청이라고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1946년 12월 입법의원이 구성되면서 이 건물 중앙홀을 이용했다. 그 때부터 중앙청(캐피탈 홀)이라고 불리게 된다. 6.25때 크게 부숴진 것을 5.16 쿠데타가 일어난 1961년 복구하여 국무 총리와 장관들이 사용하다가 1983년 다시 수리를 시작하여 1986년부터 국립 중앙 박물관으로 쓰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인 이 건물을 주요정부기관의 청사로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여론이 거세게 일자, 이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조하기로 결정하고 1986년 8월부터 박물관으로 개관하여 일반에 공개했습니다. 1993년 8월 민족정기의 회복 차원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완전해체를 결정하여, 1995년에 완전히 해체되었습니다.
첫댓글 한 시대의 색채가 뚜렷한 흐름 구미가 당기는군요~~!!
굵직 굵직한 사건들을 한번 다시 찾아보게 하는 소설이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찾아다 놓았구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