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산업에 뿌리 내리기 시작한 인공지능 활용의 사례들
‘유튜브 360’ 등을 만든 구글의 모회사 ‘알파벳(Alphabet)’의 CEO 에릭 슈미트(Eric Schmidt)는 지난 해 6월 열린 ‘칸 라이언즈 국제광고제(Cannes Lions of Creativity)’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동안 할리우드가 사람들에게 각인시킨 AI에 대한 두려움을 상쇄시킬 방법을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의 말대로 오랫동안 할리우드는 AI를 공포의 대상으로 그려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알파고가 바둑계의 1인자라는 사실을, 미국의 LA 타임즈와 로이터통신 등에서 인공지능이 작성한 기사를 읽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영화계도 비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할리우드에서는 최근 ‘인공지능이 내 업무를 대신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문화, 엔터테인먼트 등 창조성이 필요한 분야에 대해서만큼은 인공지능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리라는 일부 과학자들의 예상에도 불구하고, 이미 인공지능과 영화의 결합에 대한 시도들이 하나둘 가시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AI가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2016년 칸 라이온즈 국제광고제의 ‘뉴 디렉터스 쇼케이스(New Directors Showcase)’ 부문에서는 AI 툴을 사용해 제작한 영화 <이클립스>(Eclipse)가 공개됐다. 이 프로젝트는 광고회사 ‘새치&새치(Saatchi & Saatchi)’의 부사장인 맷 터넬이 “AI를 사용해 짧은 영화를 기획하고 쓰고 연출하고 편집할 수 있을까?”라는 궁금증을 구현하고자 시각효과 전문회사 ‘조익 랩스’에 제작을 의뢰하며 시작됐다. IBM의 인공지능 왓슨, 마이크로소프트의 인공지능 챗봇 린나(Rinna), 이펙티바(Affectiva) 사의 안면 인식 프로그램 등이 동원된 이 프로젝트를 완성한 제작진은 “첫 번째 시도로는 좋았다”고 자평했다. 프로듀서이자 개발자인 브라이언 프레이저는 “원래 우리의 목표는 인간의 상호작용이 거의 필요치 않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말했다.
또 하나 화제의 뉴스는 단편영화 <선스프링>의 등장이었다. 지난해 6월 유튜브에서 공개된 <선스프링>은 인공지능 ‘벤자민’이 시나리오를 쓰고 그 시나리오에 맞춰 오스카 샤프 감독이 연출했다. 오스카 샤프 감독은 개발자 로스 굿윈과 함께 수백 편에 달하는 SF TV 드라마와 영화 대본을 벤자민에 입력했다. 벤자민은 입력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반복학습을 실시해 특정한 이야기를 완성했다. 주요 내용은 삼각관계로 보이는 두 명의 남성과 한 명의 여성이 우주 정거장에서 갈등을 겪는다는 것이었다. 오스카 샤프 감독은 배우를 섭외해 48시간 동안 시나리오에 따라 촬영을 실시했고 9분짜리 최종 편집본에 <선스프링>(Sunspring | A Sci-Fi Short Film Starring Thomas Middleditch)이라는 제목을 달아 미국의 IT기술 전문매체 ‘아르스 테크니카(
http://arstechnica.com)와 유튜브에서 공개했다.
그는 <선스프링> 후반부에 제작기를 실으며 “이 영화는 과연 컴퓨터가 영화 대본을 쓸 수 있을지에 관한 궁금증 때문에 시작됐다.”고 말했다. <선스프링>의 등장은 인공지능이 영화제작 부문, 그것도 시나리오라는 가장 핵심적인 창작분야에 진출했다는 충격을 던져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선스프링>의 결과물을 놓고 볼 때, 아직 AI가 작품성이나 영화적 완성도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예고편 편집에서 흥행 예측까지
다른 한편에서는 AI가 앞으로 로케이션 스카우팅과 스크립트, 편집 보조 등에서 주요 제작진의 보조 역할을 하는데 훌륭한 역할을 할 것이란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미디어 및 엔터테인먼트 기술 컨설턴트인 셸리 팔머(Shelly Palmer)는 지난 5월 미국 영화전문매체 '버라이어티'와의 인터뷰에서 “영화 한 편이 완성되는 과정에는 수많은 단계가 있다. 그 중 단순한 기술적 결정을 내리는 일은 컴퓨터가 더 잘할 것”이라면서 “AI의 도입이 필요한 가장 큰 이유는 비용 절감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마치 신디사이저가 등장해 한 명의 뮤지션이 여러 악기를 동시에 다룰 수 있게 된 것처럼, AI가 도입되면 기존의 도제 시스템이 파괴되고 수석 아트 디렉터 한 명이 10명 분의 아트 디렉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중 예고편 편집 분야에서 실제 사례가 등장하기도 했다. 2016년 루크 스캇 감독이 AI를 소재로 만든 서스펜스 스릴러 영화 <모건>의 예고편을 인공지능이 제작한 것이다. <모건>의 투자배급사인 20세기 폭스는 IBM 리서치와 파트너십을 맺고 ‘왓슨’에게 <모건>의 예고편을 맡겼다. IBM은 “영화, 특히 공포영화에 대한 평가는 매우 주관적이다. 공포 영화는 관객마다 공포를 느끼는 지점, 패턴, 감정의 강도 등이 각각 다르며 이들의 복잡한 상호 연관성은 AI 시스템이 예고편을 제작하기 위해 반드시 이해해야 할 특성이었다.”고 말하면서 ‘무서운 것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대다수 예고편 시청자들이 ‘무섭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왓슨에게 공포영화 예고편 100편을 분석해 각 예고편을 ‘모먼트(moments)’로 구분하도록 했다.
사람, 사물, 풍경 등을 시각적으로 분석, 구분하고 총 22,000개의 장면에 섬뜩함, 무서움, 사랑스러움 등 24가지 감정을 태그로 다는 작업이 시작됐다. 그리고 오디오 분석을 실시하여 캐릭터의 음색과 배경음악을 통해 각 장면에 관련된 정서를 구분했다. 이런 방식으로 서스펜스, 호러 영화 예고편을 구성하는 신 또는 쇼트의 유형을 분류하게 된 왓슨은 그 룰에 맞춰 <모건>의 전편을 분석해 수집한 쇼트를 이어 붙여 예고편을 만들었다. IBM은 “예고편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편집자와 마케팅 담당자를 최대 1개월까지 고용해야 하지만 왓슨과 함께 한 <모건> 예고편은 단 며칠 만에 완성됐다”고 자랑했다.
이 밖에도 영화와 관련된 많은 분야에서 AI 진출이 기대되고 있다. 특히 SNS 등 디지털 광고시장이 급격히 성장함에 따라 페이스북 등 AI에 대규모 투자를 벌이는 기업들이 곧 영화마케팅에 AI를 접목한 가시화된 성과를 드러낼 것으로 예상된다. 또 최근에는 미국의 스타트업 ‘볼트(Vault)’에서 블록버스터의 흥행 여부를 예측하는 시스템을 선보이기도 했다.
영화제, 미래를 향한 문을 열어젖히다
새로운 기술을 활용해 영화의 저변을 넓히려는 영화제에서도 발 빠르게 AI 실험에 나서고 있다. 올해 트라이베카 영화제가 IBM과 공동 기획한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의 A.I. 활용방안에 관한 아이디어 콘테스트’가 대표적이다. ‘스토리텔러 위드 왓슨(Storytellers With Watson: A Competition for Innovation)’이라고 이름붙인 이번 콘테스트는 비디오, 웹 콘텐츠, 게임, AR 또는 VR과 같은 스토리텔링 기반 프로젝트에 왓슨의 데이터 분석력과 자연어 질의응답 시스템(natural-language query system)을 적용하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