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age to Catalonia. pp.95-99
전쟁에 대한 일반적인 무관심은 놀랍고 무척이나 역겨웠다. 그것은 마드리드나 심지어 발렌시아에서 온 사람들을 두렵게 하였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실제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에서 바르셀로나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에 기인한 것이었는데, 나는 한 달 후에 말끔한 해변 도시의 일반적인 생활이 방해받지 않고 지속되는 타라고나Tarragona에서 같은 것에 주목하였다. 하지만 1월부터 스페인 전역에서 자원 입대자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었다. 카탈로니아에서는 2월에 인민군에 대한 거대한 열정적 움직임의 파도가 있었지만 모집에 대한 아무런 증가세도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스페인 정부가 외국과의 전쟁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이겠지만 내전에서는 변칙적으로 보일 징병제에 의존해야 했을 때 전쟁은 겨우 여섯 달 쯤 되었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것은 전쟁의 시작에 대한 혁명적 희망에 대한 실망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전쟁의 첫 몇 주 동안 그들 스스로 의용군에 입대하고 사라고사로 파시스트들을 추격하였던 노동조합원들은 그들 자신이 노동계급의 지배를 위해 싸운다고 믿었기 때문에 대부분 그렇게 했지만, 노동계급의 지배라는 것이 가망 없다는 것이 점점 분명해지고, 특히 내전이나 외국과의 전쟁에서 모든 인원ranks을 채워야 했던 도시노동자들의 특정한 무관심에 대해 비난할 수 없었다. 전쟁에 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끝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당신이 가는 모든 곳에서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모든 곳에서 똑 같은 형식적 언급을 접할 것이다: ‘이 전쟁,- 끔찍하지 않습니까? 언제나 끝날까요?’ 정치적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프랑코에 대항하는 싸움보다는 무정부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간의 내부 투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대중들에게는 음식의 부족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전선’은 사라진 젊은이들이 돌아오지 않거나 서너 달 후에 그들의 호주머니에 막대한 돈을 가지고 돌아오는 머나 먼 신비로운 곳으로 생각되어 갔다. (의용군 병사는 대개 그가 떠나 올 때 지급되지 않은 급료를 소급해서 받았었다.)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다니는 부상당한 사람들마저도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민병대원에 속해 있는 것은 더 이상 유행이 아니게 되었다. 항상 대중적 취향의 지표였던 상점들이 그것을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내가 처음 바르셀로나에 도착했을 때 그 상점들은 민병대 병사들의 장비로 특화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빈약하고 허름하였다. 보병용 작업모, 지퍼달린 재킷, 장교용 혁대, 사냥용 칼, 물통, 권총집 등이 유리창마다 전시되어 있었다. 이제 상점들은 더 말쑥해 졌지만, 전쟁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나중에 알게 된 것처럼, 전방으로 돌아가기 전 내 장비를 구입할 때 전방에서 꼭 필요한 어떤 것들은 매우 구하기 어려웠었다. 그러는 동안 당의 민병대에 대한 선전과 인민군을 지지하는 체계적인 선전이 계속되었다. 이곳의 위치는 무척 기묘하였다. 2월부터 무장한 전체병력은 이론적으로는 인민군에 통합되었으며, 서류상으로 민병대는 차등 급여율, 임관된 계급gazetted rank 등으로 인민군의 전선을 따라 재구축되었다. 사단은 일부는 인민군으로 일부는 민병대로 구성된 혼성여단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점령된 장소의 명칭이 바뀐 것이 유일한 변화였다. 예를 들어 이전엔 레닌사단으로 불렸던 마르크스 통일 노동자당POUM의 부대는 이제 29사단으로 알려졌다. 6월까지 극히 일부의 인민군 부대만 아라곤 전선에 도착하였고, 그 결과로 민병대는 그들의 별도의 구조와 특별한 개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부 부처의 모든 벽에는 등사된 인쇄물이 붙었다. ‘우리는 인민군이 필요하다,’ 그리고 라디오와 공산주의 언론에서는 민병대를 훈련도 안 되어 있고 규율도 엉망이라는 등으로 묘사하며 끊임없이 그리고 자주자주 악의에 찬 험담을 하고 있었고 인민군은 항상 영웅적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그러한 수많은 선전으로부터 당신은 자발적으로 전선으로 나갔던 것에 불명예스러운 어떤 점이 있거나 징집되기를 기다리는 것에 무엇인가 칭찬받을 점이 있다는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분간 민병대는 인민군이 후방에서 훈련 받는 동안 전선을 맡을 것이고, 그러한 사실은 가능한 한 적게 알려져야 했다. 전선으로 돌아간 민병대의 보충병들은 더 이상 북을 치고 깃발을 날리며 거리를 따라 행진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침 다섯 시에 기차나 화물차로 몰래 보내졌다smuggled away. 소수의 인민군 보충병들은 이제 전선으로 떠나기 시작했으며, 그리고 그들은 앞서와 같이 거리를 따라 격식에 맞추어 행진하였지만 그들도 전쟁에 대한 관심의 전반적 저하로 인해 상대적으로 적은 열정과 마주하였다. 실제로 민병대 또한 서류상으로는 인민군 부대였다는 사실을 언론을 통한 선전에 교묘하게 이용하였다. 진행 중에 발생한 모든 공적은 자동적으로 인민군에게 돌려졌고, 반면 책임은 민병대에게 지워졌다. 때로는 동일한 부대가 하나의 능력으로 칭찬 받으면서 다른 것으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 외에 눈에 띄는 사회적 분위기의 변화는 - 당신이 실제로 경험하지 않으면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내가 바르셀로나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나는 그 도시가 계급의 구분과 부의 차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확실히 그렇게 보였다. ‘말쑥한’ 의상은 이상했고, 기가 죽어 위축되거나 팁을 받는 사람은 없었고, 접대원이나 꽃 파는 여인, 구두닦이도 당신이 눈을 똑바로 보면서 ‘동무’라고 불렀었다. 나는 그것이 대부분 희망이 섞인 것이거나 위장이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했다. 노동계급은 이제 시작된 혁명을 믿었지만 결코 통합되지 못했고, 부르주아는 겁먹거나 일시적으로 그들 자신을 노동자로 위장하였다. 혁명의 첫 달에는 분명히 계획적으로 아래 위도리가 붙은 작업복을 입고 그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혁명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이 수천 명이나 있었다. 이제 만사가 정상으로 돌아갔다. 노동계급 인구의 음식 값이 상응하는 임금의 인상 없이 엄청나게 오르는 동안 깔끔한 식당과 호텔은 비싼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는 부자들로 꽉 찼다. 모든 비싼 것들을 제외하고서도 이것저것의 부족이 반복되었고 그것은 물론 부자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타격을 주었다. 식당과 호텔은 그들이 원하는 무엇이나 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노동계급이 빵과 올리브기름, 그리고 필수품을 사기위해 기다리는 줄이 수백 야드나 되었다. 나는 이전에 바르셀로나에서 거지가 없는 것에 충격을 받았었는데, 이제 그들이 많은 것에 놀란다. 맨발의 아이들로 구성된 람블라스 갱단의 정상top of Ramblas gangs of barefooted children에 있는 식품점delicatessen조리된 육류나 치즈, 흔하지 않은 수입 식품 등을 파는 가게 밖에는 항상 음식 자투리를 찾아 나온 사람들이 모여들어 기다리고 있었다. ‘혁명적’ 형식의 연설은 쓸모없었다. 낮선 사람들은 이제 당신을 당신tú이나 동지camarada라고 부르지 않았으며, 그것은 일반적으로 어르신señor이나 귀하Usted로 바뀌었다. 격식을 갖춘 아침인사Buenos días가 건강하세요salud를 대체하기 시작하였다. 웨이터는 빳빳하게 풀 먹인 셔츠를 다시 입기 시작하였고 매장 감독들은 익숙한 방식으로 굽실거렸다. 내 아내와 나는 스타킹을 사기위해 람블라스의 양말류 가게에 들어갔다. 점원은 그들이 20년 전에나 하던 일이었지만, 이제는 영국에서도 하지 않는, 머리를 숙이며 그의 손을 비볐다. 간접적인 방식으로 은밀하게 행하여지던 팁을 주는 행위도 다시 돌아왔다. 노동자 순찰대는 해산명령을 받았고 전쟁 전의 경찰병력이 거리로 돌아왔다. 그것의 결과 하나는 노동자 순찰대에 의해 대부분 폐쇄되었던 캬바레 쇼와 고급 창녀촌들이 다시 즉시 개업한 것 이었다. 이제 모든 것이 부유층이 선호하는 방향으로 가는 방식의 작지만 의미 있는 예가 담배의 부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