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여백
진정한 지혜는 여백을 어떻게 채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백은 비움인데, 예수님의 지혜는 여백의 지혜요, 비움의 지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형체를 입으셨고(빌2:7),
예수님은 자신을 비우신 후에 그 빈자리를 은혜와 진리로 가득 채우셨습니다(요1:14).
보통의 것들로 가득 찬 그릇보다 귀한 것은 텅 빈 그릇입니다.
이미 가득 찬 그릇에는 아무 것도 채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가득 찬 그릇은 변화의 가능성도, 성장의 가능성도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세상 것들로 가득 찬 그릇보다 텅 빈 그릇이 아름답습니다.
노자는 "항아리를 쓸모 있게 하는 것은 도공이 빚는 흙이 아니라
항아리 안의 빈 공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항아리가 쓸모 있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쓸모 있는 그릇이 되기 위해 우리는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탐욕과 이기심을 비워야 하고, 미움과 질투와 시기를 비워야 합니다.
헛된 욕망과 집착을 버려야 할 때 우리는 쓸모 있는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동양화의 아름다움은 여백에 있습니다.
이 같이 인생에 있어 여백은 여유를 주고, 안식과 평강을 줍니다.
음악의 아름다움과 감미로움은 쉼표의 여백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쉼표는 음악의 감동을 느끼고 즐길 수 있는 여백입니다.
그래서 음악에서 쉼표는 끝이요, 시작이며, 음악과 음악을 연결시키는 다리의 역할을 합니다.
여백은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 냅니다.
가슴 아픈 소리를 내는 피리는 속이 비어 있어 이 피리의 애절한 소리는 텅 빈 여백에서 나옵니다.
이와 같이 비움이 있기에 소리가 있고, 비움이 있기에 아름다운 음악이 있습니다.
참된 사랑과 깊은 친밀함은 여백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사람이 늘 함께 있다고 친밀한 것이 아니라, 떨어져 있는 여백의 시간 속에
관계를 어떻게 이루어 가느냐에 따라 친밀함의 정도가 판가름 납니다.
지나친 친밀함이 친밀함의 적이라는 말이 있듯이,
참된 친밀함이란 여백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인간은 홀로 있을 때 함께 있음을 갈망하고,
함께 있을 때 홀로 있음을 갈망하기도 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여백을 통해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 여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 역사의 여백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단절되는 아픔의 현장이 십자가였으나,
십자가의 여백이 새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을 연결시킨 다리였습니다.
십자가는 육적인 것을 비우고 영적인 것으로 채우려는 여백의 장소요,
연결의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사랑하고,
그 길을 가기 위해 세상과 단절되고 비우는 여백을 통해 새로운 영적인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지혜자가 될 수 있음을 자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