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만평팔아 의병항쟁에 나섰다가
서대문형무소 사형 1호로 순국한 허위
1908년 9월 27일 53세의 한 사대부가 서대문 형무소 교수대에 섰다. 정2품 참찬
벼슬과 지금의 대법원장에 해당하는 평리원 원장을 지낸 왕산(旺山) 허위(許蔿
1855-1908)다. 서대문형무소 첫 사형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하늘에 뜬 해의 빛이 없어졌다"고 한탄했고, 매천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신문을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옥졸 두 사람도 비분을 견디다 못해 모자를 찢고 물러났다" 고 전할 정도로 모두의 슬픔과 분노를 샀다.
1908년이면 고종의 아들 순종이 명목상이나마 황제로 있을 때지만 나라는 이미 일본인들과 친일파들에 의해 장악당해 구국의 영웅을 사형시킨 것이었다.
안중근은 이 소식을 듣고 "만일 우리 2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용맹과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國辱:나라의 치욕)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관계 제일의 충신이다"라고 평가했다.
왕산 허위는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지금의 임오동)에서 태어났다. 4형제의 막내로서 큰 형인 방산(舫山) 허훈(許薰 1836-1907)과는 17년 차이였다. 왕산은 숙부 허희(許禧)와 형 허훈 밑에서 공부했는데, 허훈은 퇴계학통을 물려받았지만 그의 스승 허전(許傳)은 성호 이익(李瀷)에서 안정복(安鼎福)으로 이어지는 성호학파의 학통을 이었다.
그래서인지 왕산은 경학과 실학 모두에 조예가 깊었고, 남명(南冥) 조식(曹植 1501-1572)의 절의도 높였다. 제자백가와 병법에도 밝아 형 허훈은 "경서 공부는 내가 아우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내가 아우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1896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왕산은 경북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이때 백부에게 양자로 간 형 허훈은 3천 마지기(60만평) 농토를 선뜻 군자금으로 내놓았다.
그러나 이때의 의병전쟁은 준비도 부족했고, 또 고종도 의병 해산을 명했기 때문에 장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의병을 해산하면서 읊은 시 한 수가 전한다.
호남 3월에 오얏꽃 날리니
나라에 보답하려는 서생 갑옷을 벗네
산새도 이렇게 시사 급함을 알고서
밤새도록 나를 불러 불여귀를 외우네
의병 해산 후 청송군 진보면으로 이사한 형 허훈에게 가서 계속 공부에 진력하던 중 고종의 근신 신기선(申箕善 1851-1909)이 "허위의 경륜과 포부는 세상에서 관중과 제갈량이라고 한다"고 추천하여 벼슬길에 나가게 된다. 선생은 "벼슬은 나의 근본 뜻은 아니지만 왜적을 없애지 않을 수가 없고 국가를 회복시키지 않을 수가 없으니 내 장차 시험해 보리라"고 다짐하면서 상경했다.
1899년 벼슬길에 나선 허위는 1904년에 평리원(平理院) 재판장이 되었다. <왕산허위선생사실대략>은 "사무를 본지 불과 수일 동안에 쌓였던 송안(訟案)을 일체 공평하고 분명하게 판결하니 사람들이 그 밝은 식견에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전한다. 평리원 재판장은 오늘날 대법원장에 해당하는데, 재판과정에서 권력 가진 척족들이 개입했지만 모두 배격하고, 정의편에 섰다.
이어 정2품 의정부 참찬이 되어 재상의 반열에 오른 후 10개조의 개혁안을 제시했다. 산업을 증진하여 민생 안정에 힘쓰고, 군사력을 강화해야 하며, 물가안정과 은행 설립, 노비 해방과 적서차별을 철폐하자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양반 출신으로 노비해방과 적서차별을 주장한 것은 획기적이었지만 이 건의가 제대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나라가 가망 없게 돌아가자 일제의 죄상을 알리는 격문을 작성하여 뿌리고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자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했다.
1905년 11월에 을사늑약이 체결되고,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이 강제로 퇴위 당하자 허위는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황제까지 저들 마음대로 뗐다 붙였다 하는 판국이니 나라는 이미 망한 것이었다. 허위는 과거같이 고립된 의병으로는 가망이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경상, 경기, 충청, 전라, 강원 각 도를 돌면서 연합의병 결성을 역설했다. 허위 자신은 경기도 포천, 연천, 적성, 양주, 강화 등지를 중심으로 의병부대를 결성했다.
그래서 1907년 9월 경기도 양주에서 전국 13도 의병 1만명이 모여 연합의병창의군을 결성할 수 있었다.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허위는 참모장인 군사장이 되었다. 그런데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했다며 낙향하자 왕산은 이인영의 몫까지 맡아 1908년 1월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했다.
허위는 3백명의 선봉대를 지휘하여 동대문밖 30리까지 진출했지만 후속 부대의 도착이 지연되고, 일제가 화력전을 쏟아붓자 결국 후퇴했다. 비록 실패했지만 일제는 연합의병이 동대문밖 30리까지 진출해 수도를 탈환하려 한 서울진공작전에 크게 놀랐다.
서울진공작전에 놀란 일제는 허위 체포에 사활을 걸었다. 허위는 경기도 북부로 군대를 이동시켜 여러 차례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1908년 5월 24일 연천에서 일제 헌병에게 기습당해 생포되고 말았다. 매국노 이완용이 사람을 보내 경상도관찰사나 외부대신 자리를 주겠다고 회유하고 간 다음날이었다. 그 4개월 후 허위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일제의 사주를 받은 친일파들에 의해 사형 1호로 순국했다.
왕산은 열 살이 되기 전에 "달은 대장군이 되고 별은 군사처럼 따르네(月爲大將軍 星爲萬兵隨)"라는 시를 지었다. 문인 집안 소년이 장수의 시를 지은 것은 소년 시절에 의병장의 길을 예감한 것일까? 순국 직전 시 한 수를 남겼다.
"국치와 민욕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찌 하겠는가. 아버지 장례도 치루지 못하고 나라의 주권도 회복하지 못해서 충성도, 효도도 못한 몸이니 죽은들 어이 눈을 감으리(國恥民辱 乃至於此 不死何爲 父葬未成 國權未復 不忠不孝 死何瞑目)"
왕산이 순국한 후 일제와 친일파들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다. 왕산의 둘째 형 성산 허겸은 1912년 왕산의 남은 가족과 자신의 가족을 이끌고 만주 통화현으로 망명했다. 왕산에게는 종형제가 둘 있었는데 이들의 가족도 1915년 만주로 망명했다.
야반도주하다시피 망명한 것인데 왕산의 종형 허형(許蘅)의 손녀로 임정 국무령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의 손부가 되는 허은(許銀) 여사는 구술자서전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서 서간도로 망명할 때의 정황을 전해준다.
"1915년 음력 3월 (중략) 언제 짐을 다 싸 놓았던지 우리는 하늘이 아직 깜깜할 때 집을 나섰다. (중략) 성산 어른이 먼저 당신네 가족을 데리고 도만(渡滿)해서 통화현 다황거우에 자리를 잡아놓고 나서 우리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
우리는 밤길을 걸어서 구미 아래에 있는 김천시 남면 부상역에 와서 기차를 탔다. 새로운 땅 신천지를 찾아 나선 동네 사람들 수십 명이 깜깜한 어둠 속을 걷고 또 걸었다. 대부분 친척들이었고 타성바지도 더러 있었다."
만주로 망명한 왕산의 일족들은 모두 대일항쟁에 나섰다. 형 허겸이 민주공화정의 씨앗이 된 경학사가 부민단(扶民團)으로 개편되자 초대 단장으로 선임된 것을 비롯해서 이 일가의 독립전쟁 행적은 뒤따라가기에도 숨 가쁠 정도이다.
그 중 한 명인 허규(許珪 1884-1957)는 의병항쟁에 이어 1915년에는 광복단 사건, 임정 건립 후에는 군자금 모금 사건 등으로 20년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고 광복 후 미군정 입법위원을 지냈다. 외손들도 마찬가지였다. '광야'의 시인 이육사(李陸史) 형제들은 왕산의 종형 허형의 외손자들이다.
그중 한 명이 종제 허필(許苾)의 아들 허형식(許亨植 1909-1942)이다. 허형식은 동북항일연군 제3군 군장으로 한인들 중에서 최고위직까지 올랐다. 동북항일연군이 위기에 몰리자 다른 사람들은 소련으로 월경했지만 그는 월경을 거부하고 만주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1942년 34세로 장렬하게 순국했다.
일제는 그의 머리는 효수하고 시신은 토막 내어 짐승의 먹이로 던져줄 정도로 증오했는데, 하얼빈에 있는 흑룡강성박물관 동북혁명열사전시실에는 그(허영으로 소개되어 있음)의 활약상이 소상하게 전시되어 있다. 만주 항일무장투쟁에서 그는 전설이 되었다.
왕산의 고향 임은동 이웃 마을 상모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이다. 둘째 형 박상희가 항일의 길을 걸은 것은 아마도 왕산 허위의 우뢰같은 이름을 듣고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달랐다. 혈서로 황국신민 충성서약을 하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갔다. 후일 육영수와 대구에서 결혼할 때 왕산의 형 허훈의 손자로서 당시 대구시장이었던 허억(許億)이 주례를 섰으니 세상일은 참 알 수 없다.
임은동 기차길 건너 마을에는 3만석 부자 장승원이 살았다. 장승원 형의 딸이 왕산의 형수였다. 왕산이 고위직에 있을 때 장승원이 거금을 들고 오자 "이 돈을 가지고 있다가 후일 조국을 위해 내놓으라"고 당부했다. 왕산 순국 후 그의 제자 박상진(朴尙鎭 1884-1921)이 독립운동에 쓰겠다고 그 돈을 달라고 하자 장승원은 딱 잘라 거절했다.
그래서 박상진은 장승원을 처단했다. 장승원의 아들이 미 군정 때 수도경찰청장을 지내고 이승만 정부 때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인데, 그가 미 군정 때 숱한 독립운동가들을 좌익으로 몰아 죽인 데는 장승원이 독립운동가에게 죽은 구원이 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이처럼 해방 후에도 친일파의 후손들은 떵떵거리며 살았지만 왕산 허위의 후손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다. 연해주에 살던 왕산의 직계 후손들은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것을 비롯해서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스탄, 내몽고, 북한, 미국으로 흩어졌다. 일족이 디아스포라된 것이다.
게다가 30년 전에 편찬된 <김해허씨대종보>에는 왕산의 아들 대까지만 기록에 나오고 손자들은 없다. 친일파들의 세상에서 독립전쟁에 나섰던 선조들의 행적은 후손들의 멍에였기에 족보를 편찬할 때 아무도 챙기지 않은 탓일 것이다.
서울진공작전을 기리고자 1962년 동대문에서 청량리까지 거리 이름을 허위의 호를 따서 왕산로(旺山路)로 명명했지만 왕산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후 독립전쟁을 기리는 사회 분위기가 조금 살아나자 구미시에서 왕산허위기념관을 건립하고 그의 후손들을 수소문해서 초청했다. 100년 만에 4촌, 5촌, 6촌들이 처음 만난 슬픈 순간이었다.
'왕대밭에 왕대 나고 쪽대밭에 쪽대 난다'는 옛 사람들의 얘기가 빈 말이 아님이 왕산 일문은 보여주었지만 그 왕대를 쪽대가 덮어버렸던 것이 지금 이 나라가 적폐청산을 외치는 근본 원인일 것이다.
글 ㅣ허성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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