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수의 감격시대와 친일행적
감격시대~
이 노래는 남인수가 스물한 살 되던 해 봄 4월에 취입한 곡이다.
남인수(南仁樹, 본명 최창수, 1918~1962)는 일제 치하의 조선에서 태어나 대한민국에서 생을 마감한 한국의 가수이며, 당대 최고의 예인 중 한 명이자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친 한국 예술사의 중요 인물 가운데 하나다. 수없이 많은 대표곡들 가운데 '이별의 부산정거장', '가거라 삼팔선', '무정열차' 등과 같은 노래들은 오늘날까지도 널리 사랑받는 명곡으로 회자된다
그런데 남인수는 현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음악, 무용 부문 친일인사로 등재되어 있다.
남인수가 일제의 프로파간다를 적극적으로 선전하는 내용의 노래를 불렀다는 것, 그리고 이로써 일제에 부역하였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두드러지는 예로~
1943년 발표된 '혈서지원'이라는 노래의 가사는 당시 실시된 징병제를 찬양하며 천황과 일제를 위해서 싸우는 일을 영광스러운 일로 묘사하고 있다.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
일장기(日章旗) 그려 놓고
성수만세(聖壽萬歲) 부르고
…(중략)…
대동아(大東亞) 공영권(共榮圈)을 건설하는 새 아침
구름을 헤치고서 솟아 오는 저 햇발
기쁘고 반가워라 두 손을 합장하고
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
('혈서지원血書志願'
작사 조명암, 작곡 박시춘, 노래 남인수 등 3인)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하던 시기인 1939년엔 독도가 시마네 현으로 공식 편입된 해이면서
1937년 중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동남아로 세력을 키우던 시기이다.
1941년 태평양 전쟁으로 확전되기 전이었으니 일본의 광기가 극에 달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죽인 중국인은 1,200만 명. 일본은 중국인 전체를 적으로 생각했다.
중일전쟁은 중국의 곡공합작으로 인한 저항으로 점(도시)과 선(도로)만 점령한 채 교착상태에 빠져 중국에서 일본의 힘은 쇠하기 시작하고 있던 시기로 일본의 발악은 동남아로 확대되고 태평양전쟁으로 확전하면서 제 무덤을 파고 있던 시기다.
이런 시점에서 이 노레는 어떤 의미로 만들어 졌을까?
경남 진주시는 2007년까지 12차례 개최한 바 있는 '남인수가요제'를 2008년 들어 '남인수는 친일가수'라는 주장을 앞세운 시민단체와 여론의 반발 등으로 인해 끝내 폐지하였다.
유독 많은 논란을 불러오는 작품이 있다.
바로 ‘감격시대感激時代’다.
일간지 '한겨레'는 2015년 7월 10일 한 기사에서 1995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폭파한 김영삼 정부가 같은 해 열린 광복 50돌 기념식에서 남인수의 '감격시대'를 연주하도록 한 것을 가리켜 '역사에 대한 무지가 빚어낸 웃지 못할 촌극'이라고 했고, 근거로서 대중음악평론가 강헌 씨가 저술한 <전복과 반전의 순간>이라는 책을 소개하며 본 서적의 내용을 언급해 '감격시대'를 "난징의 함락과 황군의 연승을 축하하는 노래"라고 설명했다.
과연 그런가?
행진곡풍의 리듬과 선동적인 가사라는 이유로 일제말기 남인수의 친일행적에 경도된 시각을 갖는 사람들에 의해 남인수의 친일가요로 오인되기도 하는 곡이다.하지만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가요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을뿐 아니라 오히려 조사에 의하면 이 곡이 나올 시점에서는 군국가요를 낸 음반사는 없었고 발표된 곡도 없었다고 밝혀졌다.
더구나~
작사자인 강해인(강사랑)이 "일본의 압박 속에 있지만 매일의 삶에서 기쁨을 잃지 말자는 의도"로 쓴 것이라고 한다.
이 노래가 해방 직후 더욱 유행했다는 점은 이 노래의 생명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다만 남인수씨의 친일행적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시류에 편승하여 나찌를 찬양하고 민족의 독립의지마져 꺽어버리는 문화예술 및 언론인들을 처단했던 프랑스 드골장군의 모습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