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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내가 만난 고승대덕(高僧大德)
대학 졸업 후 바로 불교신문 기자 된 건 잘한 일이다. 불가에 맹구부목(盲龜浮木)이란 말이 있다. 큰 바다에 눈먼 거북이가 백 년마다 한 번 숨을 쉬러 물 위로 올라오는데, 망망대해에 떠다니는 구멍 뚫린 나무판자를 만나 머리를 들이밀고 숨을 쉰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나무판자를 못 만나면 다시 백 년 후에 올라온다는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일은 어려운 일이고, 사람으로 태어나도 부처님 세상 만나는 일은 그 보다 더 어렵다. 그런데 복이라면 복인지 모르지만, 나는 佛法僧 三寶로 치는 고승대덕을 수없이 만나보았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불교와 인연이 있다. 가친은 청담(靑潭)스님과 진주 중앙초등 동기이다. 그것도 기혼자이신 스님이 반장이고, 아버님이 부반장이셨다. 아버님은 스님이 만세운동으로 경찰서에 갇혔을 때 경찰서 마당에서 밤을 새우셨다. 스님은 일본에서 귀국하여 해인사와 도선사 주지를 역임하고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냈다. 아버님은 동경유학 마치고 교장 교육감 등 진주 일대 교육계의 원로로 지내셨다. 서울 올라오시면 우리 형제를 조계사에 데려가시곤 했다. 아버님 보다 다섯 살 년세 높은 스님은 아들이 없어 그랬는지, 내가 철학 배운 것이 기특했던지, 용돈을 주시며 혼자라도 찾아오라는 당부를 하시곤 했다. 그래 나는 친구들에게 농담삼아 대한민국에서 청담 스님 한테 촌지 받은 사람 있으면 나 밖에 없다.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하곤 했다. 그런데 은퇴 후에 내가 살고있는 수지 근처 수원 봉녕사에 가보니, 청담스님 따님 묘엄스님이 방장이셨다. 봉녕사는 선원과 강원, 승가대학까지 갖춘 대가람 이다. 간혹 초파일엔 내자와 가서 점심 공양을 했지만, 묘엄스님에게 큰스님과 우리 선친이 초등학교 같은 반 동기였다는 말씀은 드리지 못했고, 생각만 하던 중 스님이 입적하셨다.
졸업 후 불교신문 기자 시험은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생 30명과 같이 응시했는데, 고대 심리학과 고예환과 나 두 명만 뽑혔다. 신문 편집은 동국대 학보 편집국장 출신 선원빈 기자가 맡고, 취재는 주로 내가 주로 맡았다. 당시 조계종 역경원은 몇 백년 한문으로 내려오던 팔만대장경을 최초로 한글로 번역하던 역사적 사업을 벌이는 중이었고, 주간이던 역경원 실무책임자 유찬 거사는 불교에 해박한 학자였는데, 그 분이 과감한 인선을 한 것이다.
결혼 후 나는 조계종 총무원 강당을 청소하고 거기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그때 주례 해주신 철학과 은사 이상은 노교수님은 高僧 30여 명이 참석한 걸 보시고 '내가 주례를 서본 중에 그렇게 많은 스님이 참석한 결혼식을 처음이었다'고 술회하셨다. 당시 총무원장 석주 스님은 '雨順風調'란 휘호를 결혼 기념 선물로 주셨고, 동대 부총장 법안 스님도 글씨를 보내주셨다. 석주 스님은 중앙승가대학교 초대 학장과 봉은사, 칠보사 조실을 지낸 분이다. 뒤에 총무원장에 취임한 월주스님은 고대 옆 개운사 경내 한쪽에 있던 집에 가서 살아보라고 권하시기도 했다.
원래 대승불교의 근본 사상을 짧게 한마디로 말하라면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이다. 위로는 불법의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대학에서 초자연적인 데서 神을 구한 탈레스 메논 등 고대 그리스 철학, 소크라테스 프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유심론적인 윤리 인식 체계를 배웠고, '참다운 행복은 모든 욕망을 끊어버리고 어떤 사물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아파테이아(APATHEIA) 상태를 추구하는 스토아 학파와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에피크루스 학파를 거쳐, '神은 존재 하느냐, 아니면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신의 존재증명에 대한 판단 중지를 통해서 '賢人'이 될수 있다는 쿼론의 이론 등을 거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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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중세 기독교 철학을 거쳤다. 또 근세 데칼트 방법론을 거쳐, 헤에겔의 논리학, 칸트의 으 실천이성 을 배웠다. 그 중에서 스님들 수양의 핵심을 禪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21세기는 동서양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것이고, 그 중에서 서양이 동양에게 배울 건 선(禪)이라 생각했다. 그래 그걸 내가 선점해보자는 생각으로 선에 관련된 책자를 모으고, 선에 해박한 스님을 찾아가곤 했다.
경산, 경보, 무진장 스님이 그들인데, 경산스님은 천축사(天竺寺) 무문관(無門關) 토굴에서 10년 면벽한 후 회향했을 때, 내가 처음 인터뷰했다. 경보스님은 1년에 선(禪) 관련 책자를 세 권이나 내던 분이다. 신문사에 신간안내 부탁하러 오곤 했고, 간혹 자기 글씨를 禪筆이라며 주셨다. 포교사로 유명한 무진장 스님은 같은 총무원 건물에 있어 자주 선에 관한 질문을 해보곤 했다. 무진장 스님한테 풍난 석부작 멋을 배웠고, 쌍계사 백운스님한테서 지리산 춘란 선물을 받기도 했다. 당시 가장 인상 깊은 인터뷰는 봉선사 운허 스님 인터뷰다. 그분은 춘원 이광수의 사촌 형이다. 춘원은 봉선사에서 그 유명한 <산중일기>를 썼다. 운허 스님은 역경원장을 하면서 당시 한문으로 되어있던 팔만대장경을 한글로 번역했다. 나는 인터뷰에서 그분을 '물속에 깊이 숨은 용이요, 숲 속에 엎드린 범'같은 분이라고 표현했다.
곁가지 이야기로 그 당시 봉은사 땅 5백 평을 공짜로 얻은 적 있다. 당시 한 승려가 봉은사 땅 수십만 평을 팔아서 그 돈으로 동국대 경내 총무원 건물을 사고, 나머지는 부산에 절을 세웠다. 돈의 끝자리 회계가 애매해서 날만 새면 찬성과 반대파가 싸움을 벌였다. 스님들은 종단 보도기관 불교신문 눈치를 보곤 했다. 나는 '스님들이 공부는 않고, 시장판 같이 땅 가지고 이 무슨 창피한 모습이냐?'라고 힐난했다. 당시 봉은사는 다리가 없어 뚝섬에서 나룻배를 타고 건너 다녔다. 어느 날 '거기 채소 키울 땅이나 나한테 5백 평 떼어 줄 수 있소?' 하고 물었더니 가능하다고 한다. 그럼 주지한테 승낙 얻어 연락달라고 했더니 승낙 났다는 소식이 왔다. 당시 그 땅 1평에 십원 2십 원 하던 때다. 그래 미뤄두고 있었는데, 금방 강남이 개발될 줄 누가 알았는가. 제3한강교가 서고 땅값이 금방 오르고 나니 차마 땅 내놓으라고 할 수 없었다. 지금 그 땅은 평당 1억 넘는다. 일은 반드시 법적인 서류를 만들어놓아야 한다. 총무원장 월주스님이 내게 개운사 경내에 있던 가옥에 와서 살라고 권했다. 종단 위해 일하는 젊은 기자가 집이 없다고 호의를 베푼 것인데, 아내가 반대하는 바람에 포기했다.
불교신문에 스님도 관여했다. 광덕, 월주, 설조, 법정스님이 그들이다. 광덕 스님은 용모가 청초하고, 구질구질한 세속적 욕심이 없어, 내가 중다운 중이로구나 하고 존경했던 분이다. 스님은 그의 사형 성철스님과 함께 범어사 동산스님 제자다. 경전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던지, 내가 신문 社說 받으러 가서 방에서 기다리면, 어려운 한자도 거침없이 쓱쓱 휘갈겨 쓰곤 했다. 참으로 박학강기(博學强記) 하시던 분이다. 동국대 서정주 교수는 원고 받으러 가면, '가만있자 이젠 한자가 가물가물 하네. 김기자가 한문으로 좀 고쳐주소' 했다. 그러나 원고료를 택시비 하라고 기자에게 인심을 쓰는 맛에 자주 원고 청탁했다. 광덕 스님은 종로 3가 대각사에서 1974년 불광회를 창립하고 월간 '불광'이란 잡지를 창간했다. <선관책진>이란 책을 내놓았다. 선관책진(禪關策進)은 명나라 때 항저우의 운서사에 주석하던 운서 주굉 스님이 저술한 선어록이다. 광덕 스님은 1999년 잠실 불광사에서 입적했고, 불광사에 광덕 스님 기념관이 있다.
원래 대승불교의 근본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다.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스님은 매스컴에 나오길 좋아한 분이다. 총무원장 시절 사회단체 성명서에 곧잘 이름을 올렸고, 청와대 초청엔 만사 불구하고 참석하신 분이다.
설조스님은 공주사대 영문과 출신으로 미남이고 다정하던 분이다. 신혼 때 우리 부부와 신륵사에 갔을 때, 스님이 남한강 달빛 아래 배를 띄우고 외국곡 '먼 산타루치아'를 부르던 일, 신륵사 주지가 다락에 감추고 있던 곡차를 우리에게 대접하게 한 일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스님은 샌프란시스코 '여래사' 주지를 하다가 돌아와서 불국사 주지를 역임했다. 년 전에 88세의 스님이 41일간 단식을 하여 조계종 총무원장을 사임시킨 적도 있다. 법주사에 계신데, 간혹 서울 오시면 아내와 종로 3가 선학원 근처에서 뵙곤 한다.
법정스님은 많은 책을 낸 유명한 분이다. 그러나 개운찮게 헤어졌다. 내가 불교신문에서 내외경제신문으로 옮길 때다. 송별연 회식에서 스님이 '김 거사! 그동안 불교신문에서 나와 함께 근무하면서의 느낌을 한마디 해보소.' 하고 부탁했다. 아마 고대 출신 젊은이 평을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몇 번 사양해도 세 번이나 요청하고, 유찬 거사도 '어디 한 말씀해보시게. 스님이 궁금해하시잖아?' 그랬다. 그래 내가 '굳이 말해보라고 하시니 말씀드리겠습니다'하고 운을 뗀 뒤, '스님은 제가 보기엔 스님이라기보다는 문필가입니다. 아침에 출근하면 함석헌, 천관우 씨들과 전화 통화로 일과를 시작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수행하는 사람은 처자식까지도 버리고 목숨을 걸고 구도에 정진하는 것이 본업 아닙니까?' 이렇게 질문하는 바람에 좌중의 분위기가 싹 변해버렸다. 말이야 옳은 말이지만, 젊은 놈이 너무 우직했다. 스님은 안색이 변했고 곁에 있던 유찬 거사도 '이 사람아! 말을 하라고 해도 그렇지, 그렇게 말하면 쓰나?' 하고 꾸짖었지만, 때는 늦었다. 이렇게 헤어졌고, 그 뒤론 만난 적 없다.
최근에 사람들은 스님이 불일암에서 손수 나무를 얽어 만들어 쓰던 의자까지도 무슨 보물처럼 떠받든다. 요정 대원각을 김영환 마담한테 기증받아 길상사로 만든 걸 찬탄한다. 서점에는 좌판 중앙에 스님 책이 가득하다. 금세기 최고의 고승대덕이라고 요란하다. 사람들은 법정스님 '무소유'란 말 좋아하고, 스님이 낸 책은 모두 베스트셀러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진정한 '무소유'란 무엇인가. 명예나 이름도 소유이다. 무소유가 아니다. 이름을 세간에 대문짝만 하게 내놓고, '나는 무소유를 추구했소'라고 할 수 없다. 스님은 입적할 때 '그동안 풀어놓은 말 빚을 다음 생에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달라'라고 했다. 그걸 보고 사람들은 스님은 자신의 책마저도 애착을 끊었구나 하면서 또 존경한다. 그러나 고승 중 이런 유언 남긴 분 많다. 성철스님도 임종 시에 '한평생 무수한 사람들 속였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보다 더 하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이니, 한 덩이 붉은 해 푸른 산에 걸려 있다'라고 하셨다.
어쨌든 스님의 유언에 따라 책을 절판시키자, 어떤 경매에서 출판 당시 1500원 하던 '무소유' 1993년판 중고책이 110만 5천 원에 낙찰되었다. 이런 유명한 스님과 헤어진 것은 아쉽다. 그러나 '어허 내가 김기자에게 그렇게 보였나? 앞으론 주의하겠네!' 굳이 소감을 부탁하셨으니 스님이 이렇게 응수해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소설가 최인호 씨는 법정스님이 무소유에 너무 집착했다고 말한 적 있다. 나도 동감이다.
고승대덕 이야기 끝에 효당(曉堂) 최범술 스님 이야길 빼놓을 순 없다. 그분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란 화두를 낸 성철스님을 출가시킨 스님이다. 건강이 좋지 않아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한 성철이 지리산 대원사에서 불교 공부하다가 최범술 스님 권유로 해인사에 입산했다. 효당은 일본 초대 민단 단장 박열의사, 독립운동가 박흥곤, 옥홍균을 만나 단체를 조직하여 일본 천황 암살 계획을 세웠다. 몸소 상하이에 잠입해 폭탄을 동경으로 운반했다. 1930년 귀국하여 다솔사를 중심으로 불교 청년들의 항일 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을 결성했고, 만당의 당원과 우국지사들이 왕래하면서 다솔사는 항일의 거점이 되었다.
스님은 경남 사천군 서포면 바닷가 마을 밤섬에서 태어나, 13세인 1916년 1월 12일 다솔사로 출가, 해인사 임환경 스님 아래서 수계 했다. 당호는 금봉(錦峰)이며, 효당(曉堂)은 원효 스님의 교학 복원에 평생을 바칠 것을 서원하여 스스로 지은 법호(法號)다. 스님은 다솔사 뒷산에 죽로차 차밭을 조성하고, 거기에서 만해 한용운과 김동리 씨의 형 김범부를 만났다. 소설가 김동리는 다솔사 요사채에 10여 년 머물던 중 스님들 대화에서 중국 소신공양(燒身供養) 이야기를 듣고 소설 '등신불(等身佛)'을 썼다.
그런데 내가 고등학생 때 진주 해인대학에서 최범술 스님을 첫대면한 일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온다. 그 시절 나는 하교하면 해인대학에서 평행봉을 하다가 브로크 담 위에 앉아 놀곤 했다. 그러면 스님이 담 위에 앉은 놈을 보고 방앗간 참새 쫒듯 손을 휘저으며 달려오신다. 당시 나는 몇십 년 묵은 고리삭은 양복을 입고, 뚱뚱하고 키 작고, 행동 느린 스님을 완전히 무시했다. 못 본 체 딴전을 보고 있다가 스님이 바로 발밑에까지 오면 훌쩍 담 넘어 길가쪽에 뛰어내리곤 했다.
그 웃기던 화상이 그렇게 대단한 분인지 나중에 알았다. 대학 도서관에서 그분의 저서 '한국의 차도(茶道)'란 책을 본 후다. 그분은 초의 스님 이래 한국 최고의 차인(茶人)이다. 광주 무등산에 의제 허백련이 있다면, 곤양 다솔사에 효당 최범술이 있다. 허백련은 화가로서 차를 즐긴 분이고, 효당 최범술은 차를 즐기면서 차 이론을 정립한 분이다. 1975년 보련각(寶蓮閣)에서 펴낸 이 책은 원효 스님 이래 한국 불교의 다선 일여(茶禪一如) 사상을 가장 잘 정리해놓은 책이다.
스님은 초대 제헌국회의원을 역임했고, 1936년 서울에 여성교육기관인 명성 여자 학교를 설립했고, 1948년에는 신익희 씨와 국민대학을 설립하여 재단 이사장에 취임했고, 1952년 해인사 부동산을 담보로 해인대학을 설립했다.
훗날 나는 인사동에서 스님과의 인연을 다시 만났다. 채원화 보살을 만난 것이다. 채원화 보살은 나보다 1년 뒤 진주여고 졸업하고 연세대를 졸업한 분이다. 다솔사에서 효당 스님 모신 인연으로 인사동 허름한 2층 방에서 반야로(般若露)란 차회(茶會)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날 우연히 들린 내가 공부하는 여대생들에게 효당 스님 내력을 소개했고, 채 원장은 여대생들 반응이 좋자, 날더러 같이 차회(茶會) 운영하자고 한 적 있다. 지금 반야로(般若露) 차회(茶會)는 전국적 조직을 자랑하고 있다. 그를 통해 한국 불교계의 큰 별, 효당(曉堂) 스님의 사상이 더욱더 알려졌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