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내가 만난 사람들(高僧大德)
대학 졸업 후 바로 불교신문 기자가 되었다.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의 <수심결(修心訣)>에 ‘섬개투침(纖芥投鍼)’이라는 말이 있다. ‘섬개투침’은 작은 겨자씨를 공중에 던져놓고 바늘을 던져 그 겨자씨를 관통시킨다는 말이다. 그만큼 사람 몸 받기 어렵고, 정법(正法) 만나거나, 깨달은 성자(聖者) 만나기 어렵다는 의미다. 그런데 무슨 복인지 모르지만, 나는 佛法僧 三寶에 해당하는 고승대덕을 수없이 만났다.
우선 가친이 청담(靑潭) 스님과 진주 중앙초등학교 동기이다. 가친 보다 다섯 살 위 기혼자인 스님이 반장이고, 아버님이 부반장이셨다. 스님은 일본에서 귀국하여 해인사와 도선사 주지를 역임하고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냈다. 아버님은 동경유학 마치고 돌아와 진주에서 교장 교육감 역임하며 교육계의 원로로 지내셨다. 아버님은 만세운동 때 스님이 경찰서에 갇혔을 때 경찰서 마당에서 밤을 새우셨다. 일제가 물러갈 때 아버님은 건국준비위원회 진주시 위원장 자격으로 경찰서와 시청을 일본인에게서 인수받고 치안을 유지하셨다.
훗날 서울 올라오시면 아버님은 우리 형제를 조계사에 데려가시곤 했는데, 아들이 없어 그랬는지, 친구 아들이 철학 배우는 것이 기특했던지, 내게 용돈 주시며 혼자라도 찾아오라는 당부를 하시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대한민국에서 청담 스님한테 두 번 돈봉투 받은 사람은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나 밖에 없다'는 농담을 하곤 했다. 우연히 내가 사는 수지 근처 수원 봉녕사에 청담스님의 따님 묘엄스님이 방장으로 계셨다. 봉녕사는 선원과 강원, 율원과 승가대학을 갖춘 총림(叢林)이다. 초파일엔 내자와 거기 가서 점심 공양을 한 일이 있지만, 인연이 닿지 않았는지, 정작 묘엄스님과 茶를 나누면서 아버님끼리 진주 초등학교에서 반장 부반장을 했다는 이야기는 못했고, 아깝게도 그전에 스님이 입적하셨다.
불교신문 기자 시험엔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생이 30여 명 왔는데, 고대 심리학과 나온 여학생과 나, 둘만 뽑혔다. 당시 편집국장은 동국대 총장 비서실장 출신 송재운 씨고, 기획부장은 서울대 사학과 출신 정광호 씨, 편집은 동국대 학보 편집국장 출신 선원빈이 맡고, 취재는 고려대 출신인 나와 고예환 기자가 맡았다. 당시 조계종은 역경원을 만들어 몇 백 년간 한문으로 내려오던 팔만대장경을 한글로 번역하고 있었다. 그 역경원 실무책임자 유찬 거사가 주간을 맡았고, 사설은 광덕스님이 썼다.
결혼식은 1972년 돈이 없어 동국대 안에 있던 조계종 총무원 강당에서 올렸다. 주례 하셨던 이상은 노교수님은 스님이 30여 명이나 참석한 걸 보고 '내가 주례 서본 중에 그렇게 많은 스님 본 건 처음이다'라고 술회하셨다. 결혼하지 않은 비구, 비구니 스님들이 총무원 강당에서 거행한 결혼식에 호기심 때문에 많이 왔던 것이다. 결혼 기념이라고 중앙승가대학교 초대 학장과 봉은사와 칠보사 조실을 지낸 당시 총무원장 석주 스님이 '雨順風調'란 휘호를 주셨고, 서예가로 유명했던 동대 부총장 법안 스님도 글씨 한 점을 주셨다. 석주당은 수행을 본업으로 하는 종단의 책임자 다웠다. 어쩌다 시끌벅적한 俗事 일로 회의가 열리면 스님들이 서로삿대질하는 험악한 분위기도 생겼는데, 그때 스님은 의장석에 앉아서 하품하거나 눈을 감고 졸고 계셨다. 나는 그 모습 보고 그분을 고승이라 생각했다. 속세 초월한 고승에게 그런 일은 의당 하품의 대상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 21세기는 선(禪)이 동서양에서 각광받는 시대가 온다고 생각했다. 禪에 관련된 책자를 수집하고, 선에 해박한 스님이라면 불원천리 하고 찾아다녔다.
불교신문 기자 되어 처음 인터뷰 한 분은 경산 스님이다. 그분이 도봉산 천축사(天竺寺) 무문관(無門關) 토굴에서 홀로 10년 면벽참선을 끝내고 회향하셨다. 나는 우선 경산스님의 잘 생기고 고요한 신비로운 모습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 느낌을 제일 먼저 독자에게 소개했다. 다음 인터뷰한 노장 스님은 춘원 이광수 사촌 형으로 남양주 봉선사에 계시던 운허스님이다. 1972년 역경원에서 한국 최초로 간략한 <불교성전>을 펴냈는데, 그 大作佛事를 끝낸 역경원 원장이 그분이다. 나는 봉선사에 가서 스님을 인터뷰한 후,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공부가 돋보이던 스님을 숲속에 웅크린 범이라고 소개했다.
불교신문에 자주 찾아오시던 경보스님은 1년에 선(禪) 관련 책자를 세 권이나 내고 그때 마다 신간안내를 부탁하셨다. 褙接 前 글씨를 仙筆이라며 자주 선물하셨지만, 나는 我相이 보이는 것 같아 그 글씨를 가차 없이 주변에 줘버렸다. 제자 원고를 돈으로 사서 자기 이름으로 책을 낸 학자도 있던 시절이다. 무진장스님은 포교사 사무실 그분 책상 위에 놓아둔 풍난 석부작으로 내게 풍난의 멋을 처음 開眼하도록 해준 분이다. 쌍계사 백운스님은 춘난을 선물해 내가 처음 난초를 시작하게 한 분이다.
이젠 전설적 고승이 되었지만, 불교신문에 참여한 광덕, 법정, 월주, 설조스님을 아침저녁으로 뵙게 된 것은 내 福 이다. 광덕 스님은 용모가 청초하고, 구질구질한 세속적 욕심이 없어, 내가 중다운 중이구나 하고 존경했던 분이다. 스님은 그의 사형 성철스님과 함께 범어사 동산스님 제자다. 경전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던지, 내가 신문 社說을 받으러 가서 옆에서 기다리면, 어려운 한자를 거침없이 쓱쓱 휘갈겨 쓰곤 할 정도의 박학강기(博學强記) 셨다. 동국대 서정주 교수는 원고 받으러 가면, '가만있자 이젠 한자가 가물가물 하군. 김기자가 한문으로 좀 바꿔주소' 격의 없이 부탁을 했다. 그러나 원고료는 택시비 하라고 항상 인심 썼고, 그 맛에 원고 청탁 자주 갔다. 광덕 스님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이던 백용성스님이 활동한 종로 3가 대각사에서 1974년 불광회를 창립하고 월간 '불광'이란 잡지를 창간했다. 펴내신 선관책진(禪關策進)이란 책은 명나라 때 항저우의 운서사에서 주석하던 운서 주굉(雲棲株宏) 스님이 저술한 禪語錄이 원본이다. 광덕 스님은 1999년 잠실 불광사에서 입적했고, 불광사에 광덕 스님 기념관이 있다.
두번째 불교신문에 참여한 월주 스님은, 내가 고대 출신으로 집이 없는 걸 알자 개운사 땅 한쪽 허름한 집에 살라고 권하신 분이다. 아내가 너무 허름하다고 결사반대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백 여평 집 하나 공짜 장만했을 것이다. 지금 서울 땅 한 평이 얼마인가? 스님 호의가 지금도 감사하다. 그러나 각종 사회단체 성명서에 이름 올리고, 청와대 초청 만사 불구하고 참석하시는 걸 보면서 과연 세속과 승가의 길이 무엇인가 하고 나를 헷갈리게 한 분이다.
설조스님은 공주사대 영문과 출신으로 미남이고 다정하던 분이다. 신혼 때 우리 부부와 신륵사에 갔을 때, 스님이 남한강 달빛 아래 배를 띄우고 '먼 산타루치아'를 부르던 일, 신륵사 주지가 다락에 감추고 있던 곡차를 나에게 대접하게 한 일은 잊히지 않는다. 스님은 샌프란시스코 '여래사' 주지를 하다가 돌아와서 불국사 주지를 역임했다. 년 전에 88세의 스님이 41일간 단식을 하여 조계종 총무원장을 사임시킨 적도 있다. 법주사에 계신데, 간혹 서울 오시면 아내와 종로 3가 선학원 근처에서 뵙곤 한다.
법정스님은 책을 많이 저술하신 분이다. 내가 불교신문에서 일간 내외경제신문사로 옮길 때다. 송별연 회식에서 스님이 아마 고대 출신 젊은이 평을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김 기자! 그동안 불교신문에 근무하면서 나에 대해 느낀 점을 한마디 해보소.' 하고 부탁했다. 그 바람에 사건이 생겼다. 세 번이나 부탁하는데 내가 계속 사양하자, 곁에 계신 유찬 거사께서 '어디 한 말씀 해보시게. 스님이 궁금해하시잖아?' 하셨다. 그래 순진하고 아둔한 이 사람이 '굳이 하라고 말씀하시니 말씀드리겠습니다' 하고, '스님은 제가 보기엔 스님이라기보다는 문필가입니다. 아침에 출근하면 스님은 늘 함석헌, 천관우 씨와 전화 통화로 일과를 시작하지 않습니까?' 이까지는 문제없는 발언이다. 그런데 후미가 문제였다. '수행자는 처자식도 버리고 목숨 걸고 구도에 정진하는 것이 본업이라 생각합니다. ' 이런 건방진 결론을 내리는 바람에 좌중 분위기를 싹 가라앉게 만들어 버렸다.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스님 안색이 싹 변했고 곁에 있던 유찬 거사도 '이 사람아! 아무리 말을 하라고 해도 그렇지, 그렇게 말하면 쓰나?' 하고 꾸짖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소처럼 미련한 사람은 그렇게 스님과 헤어져 그 뒤론 뵌 적 없다.
요즘 사람들은 스님을 너무 존경한 나머지 불일암에서 나무 가지를 얽어 만들어 쓰던 의자까지도 보물처럼 떠받들려고 한다. 또 요정 대원각을 김영환 마담한테 기증받아 길상사로 만드는 바람에 더 존경한다. 종로 교보문고 좌판 중심엔 스님 책이 가득히 놓여있다. 사람들은 금세기 최고의 고승대덕이라 믿는다. 그러나 나는 고승이라면 청담스님, 성철스님, 운허스님, 탄허스님, 석주스님, 광덕스님을 먼저 생각한다. 사람들은 법정스님의 '무소유'란 말 좋아한다. 그러나 진정한 '무소유'란 무엇인가. 명예나 이름은 소유에 속하는 것이다. 이름을 세상에 대문짝만 하게 내놓고, '나는 무소유를 추구했소'라고 함은 모순이다. 스님은 입적할 때 '그동안 풀어놓은 말 빚을 다음 생에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달라'라고 했다. 한 조각 양심선언 이다. 성철스님도 임종 시에 '한평생 무수한 사람을 속였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보다 더 하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이니, 한 덩이 붉은 해 푸른 산에 걸려 있다'라고 하셨다.
어쨌든 법정스님 책은 유언 때문에 절판되자, 경매에서 출판 당시 1500원 하던 '무소유' 1993년판 중고본이 110만 5천 원에 낙찰되었다. 근래에 소설가 최인호 씨는 '법정스님이 무소유에 너무 집착했다'라고 코멘트했다. 지식인다운 지적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