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101장면 - 한국 최초 만담가 대본도 쓰고 연기도 한 만담가, 신불출
인기멤버
hanjy9713
2024.05.27. 03:52조회 5
댓글 0URL 복사
한국 최초 101장면
한국 최초 만담가
대본도 쓰고 연기도 한 만담가, 신불출
요약 1920년대부터 코미디의 주종이었던 '만담'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 만담가 신불출.
직접 대본을 쓰고 연기를 시작, 대중 스타가 됨. 전국 순회공연을 함.
몰지각한 한국인들을 비꼬는 한복차림에 게다를 신고 무대에 올라와 만담을 한 일화도 있음.
신불출 이외에도 만담가 성광현·나품심·신은봉·김윤심 등이 인기를 누림.
신불출
1990년대 들어 중국에서는 만담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터 주변에서 혼자 또는 여럿이서 우스갯소리를 늘어놓는 사람들이 차츰 늘어난다는 것이다. 레퍼토리가 부족해서 그런지 한국의 원로 만담가들을 초청한 적도 있다.
그 방면의 복고라면 우리 나라에서 있어야 하는데 엉뚱하게도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1920년대에 발생해서 1960년대까지 코미디의 주종을 이루었던 것이 바로 만담이다. 특히 일제 때에는 레코드에 담겨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신불출(申不出)·성광현·나품심·신은봉·김윤심 등은 이때의 대표적인 만담가들이다. 복혜숙도 한때는 만담가로 활동한 적이 있었다. 나운규 작품 <아리랑>의 히로인인 신일선도 만담가였고, 목사 황재경도 성대묘사를 잘하는 명만담가였다. <배뱅이굿>의 달인 이은관은 만담가들과 같이 다녀 그 방면의 증언자로서는 유일하다.
1930년대 초반의 신불출
신불출과 같이 있는 여인은 나운규의 <아리랑>에서 여주인공을 맡았던 신일선이다. 신일선은 결혼에 실패한 후 다시 연예계로 돌아오는데 그때 시도한 것이 만담이었다. 신불출과 공연했다는 것은 그녀가 스타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사진들은 가사지에서 얻은 것이다. ‘가사지’란 당시 레코드를 판매할 때 첨부되어 있는 것으로, 레코드에 담겨 있는 내용을 옮겨놓은 인쇄물을 말한다.
광복 후에는 장소팔과 고춘자, 김영운이 유명했다. 그들은 텔레비전이 안방을 차지하고 코미디, 개그가 새로운 맛을 제공하면서 차츰 대중들로부터 멀어져갔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다룬 소재가 지금도 개그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단지 그 맛과 분위기가 다를 뿐 정서는 같은 것이다.
이는 만담이 무엇이냐 하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구석이다. 만담은 흔히 일본에서 전해진 것으로 알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일본에는 한자로 만재(漫才)라 쓰는 '만자이'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의 만담과 흡사하다. 그러나 우리 나라 전통의 재담을 들어보면 만담이 만자이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만담은 판소리나 가면극, 무가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삽입되어 있는 재담이 변해서 된 것이다.
재담을 시대에 맞게 고쳐서 발전시킨 사람은 신불출이다. 만담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사람도 바로 그였다. 신불출은 재담을 하되 새로운 것을 찾아 보여주려 했던 박춘재의 공연을 눈여겨보았다고 한다. 반재식이 지은 「만담 백년사」에 의하면 신불출은 박춘재의 공연을 보고 만담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창출해냈다.
그는 최초의 만담가로 등장하여 직접 대본을 썼고, 연기를 시작하자마자 일약 대중 스타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처음에 그는 혼자 연기를 하다가 차츰 여성 상대역을 두기도 하고, 전국 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했다.
이은관은 「만담 백년사」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신불출과 같이 만담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곧 만담가로서 크게 인정을 받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니, 그를 알고, 그와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요즘 말로 스타가 된 거나 마찬가지였죠. 레코드 회사에서는 어떻게든 그의 신작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경쟁을 벌였고, 극장에서는 그가 공연을 하겠다면 언제라도 무대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수지가 맞았으니까요.
공연만 했다 하면 연일 만원사례였으니 그것만으로도 그 인기도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당시 연배가 좀 높다 했던 연극배우 강계식 선생이나 고설봉 선생보다 약간 위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지방에 가면 연배보다 명성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고, 대접을 받았어요. 아니 일본인 관리들도 선생을 한 사람의 만담가로 진정으로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신불출이 만담가로 활동을 시작하던 1920년대 후반 그의 나이는 20대 후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전까지 그는 극단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연기도 하고 대본도 썼다. 그러다가 하루 아침에 만담가로 변신해 천하에 이름을 떨친 것이었다.
그는 개성 출신으로, 와세다 대학 문과를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언변이 좋았고, 암송하는 시가 수백 편이어서 한번 흥이 나면 쉴새없이 동서양의 시를 읊었다고 한다. 사진으로 남아 있는 그의 모습은 매우 깔끔하다. 만담가보다는 오히려 학자풍이다.
신불출은 일제 때 만담에 시국 관련 발언을 섞어서 했다가 구속된 적이 있었다. 한복 차림에 게다를 신고 무대에 올라와 만담을 한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일부 몰지각한 한국인들을 비꼬는 만담을 하기 위한 차림이었다.
그런 기질은 광복 후 에도 누그러지지 않았는데, 그러다가 이번엔 사상적으로 의심을 받았다. 그후 월북했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복 후 만담의 맥을 이었던 김윤심은 그의 제자였다. 장소팔도 그에게서 배운 적이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 최초 만담가 - 대본도 쓰고 연기도 한 만담가, 신불출 (한국 최초 101장면, 1998. 9. 10., 김은신)
hanjy9713님의 게시글 더보기
좋아요0
이 글을 '좋아요'한 멤버 리스트
댓글0
블로그/카페 공유수0
공유
클린봇이 악성 댓글을 감지합니다.설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