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63
8월28일[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연중 제21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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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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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eQ9JkeAS7Vw
[서울대교구 장이태 경환프란치스코(가톨릭교리신학원 부원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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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 나는 얼마나 한심한 인간입니까? 내가 밖을 내다보는 순간 하느님은 내 안에 계셨습니다!>
그리 길지도 않지만, 짧지도 않은 지난 나날들을 돌아보니, 인생에는 적어도 몇번의 대전환점, 다시 말해서 터닝 포인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삶을 180도 바꿀 수 있는 기회, 인생을 대 반전시킬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그런데 그 기회가 왔는데도 온 줄도 모르고, 그 소중한 대 전환의 기회를 놓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숱하게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가끔씩 자신의 삶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틈나는 대로 진지하게 자신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성찰해보는 일입니다. 한 번씩 인생의 물구나무서기를 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탈탈 털어버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대반전의 시기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을 쳤을 때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사방이 높은 벽으로 둘러쌓여 있어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보일때가, 곧 인생의 터닝 포인트일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대 성인이자 학자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교부이신 아우구스티노 주교님이 바로 그랬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껌 좀 씹는 청년이었습니다. 다양한 분야에 출중한 재능이 있다보니 하느님 두려운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오로지 세속적인 성공, 명예와 육체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거기까지만 해도 괜찮았습니다. 더 심각한 일이 청년 아우구스티노에게 발생했습니다. 마니교에 깊이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마니교는 페르시아 영지주의 종교 가운데 하나이며,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고대 및 중세에 널리 팽창되던 종교였습니다. 창시자 마니는 자신이 아담에서 시작하여 오랫동안 붓다, 조로아스터, 예수로 이어져 내려온 예언자들의 마지막 계승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니교 가르침의 핵심은 진리에 대한 영적인 지식(靈知 gnosis)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타락해서 악의 물질과 섞여 있지만, 영혼 또는 지혜가 해방시킨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의 영혼은 죽어서 천국으로 돌아가지만, 육적인 것을 고집하는 사람은 육체가 연속되는 환생의 저주를 받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마니교는 3세기에서 7세기 동안 융성하는데, 그 절정기에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퍼진 종교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역시 자신의 고백록을 통해 9년 동안 마니교에 심취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리던 청년 아우구스티노에게 강렬한 빛 한줄기와 함께 인생의 대 전환점이 찾아오게 됩니다.
386년 가을이었습니다. 밀라노에 머물고 있던 아우구스티노에게 고향 친구 폰시아노가 찾아옵니다.
폰시아노는 최근 북아프리카 리비아의 깊은 사막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한 수도자들, 특히 안토니오의 성스럽고 빛나는 영적생활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아우구스티노는 얼마나 감격했던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렇게 외쳤답니다.
“아! 우리는 얼마나 한심한 인간입니까? 제대로 못 배운 사람들도 온 힘을 다해 천국을 차지하려고 저리 애를 쓰고 있는데, 공부 꽤나 했다는 우리는 육욕의 노예가 되어 있다니! 이 무슨 꼴입니까?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로다! 부끄러운 일!”
마침내 방황하던 청년 아우구스티노에게도 은혜로운 깨달음의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새로운 삶에 대한 열정이 활활 불타올랐습니다. 갑작스런 내면의 변화을 주체하지 못해 빠른 걸음으로 정원을 산책하며 기도하던 아우구스티노의 귓전에 한 애띤 어린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들어서 읽어보라! 들어서 읽어보라!”
즉시 발길을 돌려 침실로 돌아온 아우구스티노는 책상 위해 놓여 있는 성경을 들어 펼쳤습니다. 아우구스티노의 눈에 최초로 들어온 성경 구절은 다음의 말씀이었습니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로마서 13장 13~13절)
그 순간 아우구스티노는 큰 망치로 뒷통수를 크게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성경 구절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아우구스티노 자신을 위한 맞춤형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죄의 아들 아우구스티노가 회개하던 순간 천국에서는 예수님과 성모님을 물론, 수많은 성인성녀들과 천사들이 큰 목소리로 환호성을 올렸을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씩 성경책을 들어 펼쳐볼 일입니다. 그 안에는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줄 생명수같은 말씀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는 우리 인생의 대전환을 이루게 해줄 은혜로운 말씀으로 흘러넘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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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4zFHXaoQFP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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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녀는 미운 부모의 잘못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여자 주인공 테레자는 어머니를 극도로 싫어하면서도 어머니와 닮은 남자를 사귑니다. 어머니는 외도 하는 것을 딸에게 자랑할 정도였고 테레자를 무시하였습니다. 테레자는 어머니와 같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어머니와 비슷한 바람기가 있는 의사 토마시와 사귑니다.
토마시도 자기 내연녀인 사비나에게 테레자를 소개할 정도로 사랑을 가볍게 여깁니다. 어쩌면 테레자가 토마시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을 수 있습니다. 결국 둘이 반씩 양보하는 상황이 됩니다. 토마시는 결혼을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테레자는 자신도 외도하면서 토마시에게 미안함을 갖습니다. 이런 사례는 너무도 많습니다. 부모를 원망했지만, 결국 부모를 닮아있는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부모를 싫어하면서도 부모를 닮거나 자기가 싫어하는 부모와 같은 배우자를 만나는 이유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모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태도에서는 분명히 부모 중 한 명과 경쟁을 하게 됩니다.
테레자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으며 자신이 어머니보다 우월해질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술주정뱅이 아버지에 대해 그 책임이 어머니에게 있다고 믿는 딸은 자신도 술주정뱅이와 결혼해 어머니보다 잘사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누군가를 심판하면 이제 나는 그 누군가와 경쟁 관계가 될 수밖에 없고 그러면 그 관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십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속이 썩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를 그들이 조상들을 비난하며 여전히 그들의 조상을 자기 조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조상들을 비난하며 자신들은 조상들처럼 살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조상들의 전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부모를 비난하며 부모처럼 되는 경우와 같습니다. 아예 그 족보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족보를 주러 오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에게는 ‘새로 태어남’이 새로운 족보에 들어옴과 같습니다.
영화 ‘오블리비언’(2013)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지구인을 위해 외계인과 싸운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를 만든 것이 외계인이고 그는 지구인을 죽이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겉은 지구인이지만 조상은 외계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우리 안의 조상을 모시고 삽니다. 그리고 그 조상이 산 대로 삽니다. 만약 ‘진화론’을 믿는다면 우리 조상은 누가 되겠습니까? 원숭이가 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원숭이를 비웃지만, 실상 사는 것은 원숭이와 다름없이 비윤리적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개구리가 되고 싶은 전갈이 있었습니다. 겉으로 참으로 착했지만, 소풍 가는 날 개울을 건널 때는 자신이 개구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영을 할 수 없는 전갈은 자기를 태우고 가는 개구리를 독침으로 찔러 개구리도 죽고 자신도 죽습니다. 자기 조상이 전갈이라고 믿으면 아무리 자기가 전갈의 조상들을 비난하더라도 그 본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개구리처럼 온순하여지려면 그냥 개구리가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와 맞서서 이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래봐야 그 부모의 수준밖에 안 됩니다. 인간의 수준을 넘어서려면 인간을 비판하며 그 비판하는 인간들처럼 살지 않을 것이라 결심해도 소용없습니다. 여전히 인간의 다른 부족한 면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조상으로 여기면 그들을 비난해도 그들의 습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새로 태어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와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온 갈비뼈로 탄생했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피와 물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냥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면서 신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을 비난할 이유도 없습니다. 자신이 신처럼 살지 못하는 것만 보이며 인간의 죄의 습성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비난하는 것으로는 절대 그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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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며칠 전에 재미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일 더하기 일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너무 힘듦’이랍니다. 일이 많아지면 힘들기 마련입니다. 부주임 신부님이 1달간 한국으로 휴가를 갔을 때입니다. 파도가 밀려오듯이 일정이 생겼습니다. 오기로 한 미국 신부님이 못 오신다고 해서 영어미사를 했고, 대건회 모임, 사목회의, 구역모임을 다녀왔습니다. 구역장 회의, 세례식, 미사가 있었습니다. 장례미사, 병원방문, 포트워스 한인 성당 미사가 있었습니다. 냉탕과 열탕을 오가듯이 실내는 에어컨의 힘으로 서늘한데, 바깥은 따가운 햇볕이 강해서 목감기도 찾아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 더하기 일’의 정답을 ‘너무 신남’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일을 통해서 사람을 만나는 것도 즐겁고, 아픈 사람이 위로를 받고, 힘든 사람이 용기를 얻는 것을 보는 것도 기쁨이고, 이렇게 일 할 수 있도록 건강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저도 ‘일 더하기 일’은 ‘너무 감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신문사에 있을 때는 사람 만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원고 교정하고, 신문 홍보 다니는 일이 있었지만, 그것도 팬데믹 때는 할 수 없었습니다. 이곳 댈러스에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일 더하기 일’의 정답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적당한 식사와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사람, 긍정적인 생각과 성찰의 시간을 갖는 사람, 이웃을 위한 봉사와 나눔을 즐겁게 하는 사람은 삶이 풍요롭고, 행복합니다. 이런 사람은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이웃을 도우며 살아갑니다. 반면에 불규칙적인 식사와 지나친 음주를 하는 사람,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사람, 게임과 노름에 빠진 사람, 자신만 알고 나눔에 인색한 사람은 삶이 고달프고, 불행합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은 물론 이웃에게도 걱정을 끼치기 마련입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는 한 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렵습니다. 매일 기도하는 사람, 늘 감사하는 사람, 언제나 기뻐하는 사람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아서 신앙생활에도 사랑의 꽃이 피고, 믿음이 열매 맺습니다. 시련 중에도 희망의 등불을 향해서 나갈 수 있습니다. 영적인 독서를 자주하고, 미사참례를 꾸준히 하는 사람, 본당의 피정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단체 활동을 성실하게 하는 사람은 샘이 깊은 물과 같아서 영적으로 목마른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 미사에 참례하지 않는 사람, 본당의 피정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 단체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자갈밭에 뿌려진 씨와 같아서 시련과 고통이 다가오면 하느님과 멀어집니다.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와 같아서 유혹이 다가오면 하느님과 멀어집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는 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많은 책을 남겨 주었습니다. ‘고백록, 신국론, 삼위일체론’은 초기 가톨릭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성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간에 대해서 알고 있는데 시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분명 시간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핸드폰에 일정표가 있고, 약속이 잡혀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두 가지 시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욕망의 시간, 위선의 시간, 탐욕의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시간 속에 사는 사람을 책망하십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내면은 텅텅 비어 있는 사람입니다. 불평과 불만의 시간을 사는 사람입니다. 남을 평가하고, 남을 판단하고, 남을 비난하는 시간을 사는 사람입니다. 다른 하나는 의미와 가치의 시간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런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나무는 독립적으로 서 있어도 하나의 숲을 이루는데 왜 우리는 하나의 숲을 이루지 못하나!’ 우리 안에 있는 시기, 갈등, 질투, 욕망, 원망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의 숲을 이루어야 합니다. 희망의 시간, 믿음의 시간, 사랑의 시간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모두 신앙의 숲을 만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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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혼인을 앞둔 젊은이들과 혼배 면담을 할 때가 있습니다. 부모님은 알아도 혼인 당사자들은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제가 젊은이들과 소통하는 방법은 편지를 써 달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만났는지, 결혼 준비는 어떻게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서 메일을 보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젊은이들은 진솔하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제게 해 주곤 합니다. 저는 당사자들의 편지를 요약해서 강론 때 전해 주기도 합니다.
혼인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강조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물론 신앙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하느님께 의지하고 기도하도록 당부합니다. 둘이 마주 보려하지 말고, 같은 곳을 보라고 이야기를 해 줍니다. 마주 보면 상대방의 허물과 잘못이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곳을 바라본다면 화복한 가정, 충실한 신앙생활을 바라본다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삶의 도전들을 극복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성실함입니다. 아내에게 성실한 남편이 되기를 부탁합니다. 남편에게 성실한 아내가 되기를 부탁합니다. 자신의 삶에 성실하기를 당부합니다. 주어진 일에 충실할 수 있기를 이야기합니다. 만나는 이들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실함은 많은 부족함을 극복할 수 있게 합니다. 하지만 게으름과 나태함은 많은 장점들을 빛바래게 하기 마련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주제는 성실함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과 비교할 때 정말 근면하고, 성실하다고 합니다. 일주일의 노동시간도 그렇고, 휴가를 보내는 시간도 그렇습니다. 이민 가서 한국 사람들이 하는 일들은 대게는 편의점과 세탁소의 일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 일을 잘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침 일찍 가게 문을 열어야 하고, 늦은 시간까지 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힘든 일을 정말 열심히 해서, 처음에는 고생을 하지만 나중에는 다들 집도 장만하고, 나름대로 삶의 기반을 잡습니다.
뒤에서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팔을 걷어붙이고, 직접 봉사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새벽에 쓰레기를 치우는 환경미화원이 있기에 거리는 깨끗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시가 생각납니다.
나태주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 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보다는 드러나지 않지만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그런 사람들을 이야기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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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3,27-32: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책하시면서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27~28절)라고 하신다. 의인들의 몸은 하느님의 성전이다. 언제나 하느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죄인들의 몸은 죽은 자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영혼이 죽어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 몸은 이미 죽은 몸이나 다름없다. 무덤은 닫혀있는 한 겉모양은 아름다울 수 있지만, 무덤을 열면 그 광경은 참혹하다. 위선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실체를 모르면 모두 칭찬받을 만한 이들로 보일 수 있지만, 그들의 실체가 드러나면 그 모습은 역겹다.
위선은 선을 가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선이 아니다. 이것은 의로움을 가장한 모든 것은 죽은 것이며, 의로움이 아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때문에 거짓으로 행하는 덕은 죽은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자신이 아니면서도 그 사람과 똑같이 하는 배우들과 같다. 이런 사람들은 속은 죽은 이들의 뼈로 가득 찼지만, 겉으로는 의로움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겉만 아름답게 보이는 회칠한 무덤이 된다. 회칠한 무덤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의 경고이다. 그렇게 보이는 행동이 아니라, 참사랑이 담긴 진정한 주님의 자녀로서의 삶의 자세를 항상 가질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겉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속이 썩어있다면 그것은 죽음만이 있는 것이 아닌가? 주님께서는 인간이 살아있는 것을 원하시지, 죽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다. 주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는 그래서 주님의 참된 영광이 될 수 있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불행 선언을 하신 것은 그들이 예언자들을 죽인 자들의 자식들로 더 나쁜 짓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31절) 그들은 결국 똑같이 사악한 짓, 아니 훨씬 더 사악한 짓을 벌이려고 한다. 그들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다.”(사도 3,15) 그리고 사도들까지도 죽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32절) 하신다. 우리는 회칠한 무덤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올바로 따를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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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2테살 3,10). 매우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바오로 사도가 신자들에게 하였던 말이고, 특히 그 자신과 같이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하는 이들에게 건네는 권고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면서 자신은 그 일을 하고 있으니 먹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복음으로 생활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1코린 9,14)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폐를 끼치지 않고자, 그리고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이 그것으로 먹고살 때, 더구나 여유 있는 삶을 누릴 때, 아마츠야가 아모스에게 하였던 “거기에서나 예언하며 밥을 벌어먹어라.”(아모 7,12) 같은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양심에는 거리낌이 없다 하여도 누군가에게는 걸림돌이 될 수 있고, 복음 선포조차 돈벌이로 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정말 믿을 수 있어서 오해를 일으키지 않으리라고 확신하였던 필리피 신자들에게서만 도움을 받았습니다. 다른 교회들도 자신이 복음을 처음 전하여 주었고 자신이 세운 교회들이었지만, 그는 그 교회들에서 도움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분명히 같은 위험이 있습니다. 복음 선포도 얼마든지 개인의 이익 추구를 위하여 쓰일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자신을 드러내려고까지 할 때는, 이것은 이미 걸림돌이나 오해가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나는 바오로 사도보다도 열심히 복음을 전하느라고 천막 만드는 일을 할 시간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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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위선자들의 업적은 바벨탑일 뿐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마태 23,27-32)
1)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회칠한 무덤 같다.”라는 말씀에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말씀이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하였다. ‘스승님, 보십시오. 얼마나 대단한 돌들이고 얼마나 장엄한 건물들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 웅장한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마르 13,1-2)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은 바빌론에 의해서 파괴되었는데(2열왕 25장), 헤로데가 재건축했습니다. 당시에 헤로데가 46년이나 걸려서 재건축한(요한 2,20) 예루살렘 성전은 대단히 아름답고 장엄해서 보는 사람들마다 감탄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예루살렘 성전은 ‘강도들의 소굴’이었을 뿐입니다.(마태 21,13) 겉은 아름답게(거룩하게) 보이지만 속은 온갖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한, 생명력 없는 무덤이었던 것입니다.
2) 그런데 사실 솔로몬이 처음에 성전을 지어서 하느님께 봉헌할 때에 이미 하느님의 경고가 있었습니다.
“만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나에게서 돌아서서,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계명과 규정을 따르지 않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예배하면, 나는 내가 준 땅에서 이스라엘을 잘라 버리고,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별한 이 집을 내 앞에서 내버리겠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속담거리와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 집은 폐허가 되어, 이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몹시 놀라고 휘파람을 불어 대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찌하여 주님이 이 땅과 이 집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러면 사람들이 대답할 것이다. ‘자기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끌어내신 주 그들의 하느님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끌어들여 그 신들을 예배하고 섬겼기 때문이지.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모든 재앙을 그들 위에 내리셨다네.’”(1열왕 9,6-9)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일에 대해서 ‘예수님의 예언’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예수님의 성전 파괴 예언’ 이전에 이미 ‘하느님의 경고’가 있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강도들의 소굴로 전락한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또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경고하신 대로 완전히 파괴되었고, 오늘날까지도 파괴된 채로 있습니다.>
3) 그 일은, 성전이라는 ‘건물’의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는(나는) 어떤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바로 우리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올리브 나무에서 몇몇 가지가 잘려나가고, 야생 올리브 나무가지인 그대가 그 가지들 자리에 접붙여져 그 올리브 나무뿌리의 기름진 수액을 같이 받게 되었다면, 그대는 잘려 나간 그 가지들을 얕보며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그대가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그대를 지탱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대는, ‘가지들이 잘려나간 것은 내가 접붙여지기 위해서였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아서 잘려나가고 그대는 믿어서 그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한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두려워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준엄하심도 생각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떨어져 나간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그대에게는 인자하십니다. 오직 그분의 인자하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로마 11,17-22)
이 경고는 교회 전체를 향한 것이기도 하고, 신앙인들 각 개인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위선’의 바탕에는 ‘교만’과 ‘자만심’이 있습니다. “나는 잘하고 있다.”라는 착각과 자만심이 ‘위선’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전체든지, 각 개인이든지 간에 자만심에 빠지면 곧바로 위선자가 되어버립니다. 누구든지 참으로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 ‘아름다고 거룩한 성전’은 ‘강도들의 소굴’로 전락하고, ‘회칠한 무덤’이라는 꾸중을 듣게 됩니다.
4) 우리는 신앙생활을 무슨 업적을 쌓는 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서도 겉으로 보기에만 대단한 업적을 쌓는 것은 ‘바벨탑’을 세우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이 될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업적만 보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에 합당하게 살았느냐를 보십니다. ‘진실하고 충실한 삶’ 자체가 신앙인의 업적입니다. <위선자들은 “우리는 정말로 많은 일을 했고, 많은 업적을 쌓았다.” 라고 내세우지만,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7,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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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홍도 치릴로 신부님]
<외적인 행위와 내적인 동기의 현저한 갭(Gap)>
오늘 복음도 월~화요일에 이어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책망하시는 내용입니다. 그 책망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여러차례 내면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 하셨습니다.
마태오 5.8에서 “예수께서는 오직 마음이 깨끗한 자들만이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또 입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힐 수 없으며 참으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과 말이라고 마태오15장에서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또 오늘 복음 앞 구절 23, 25-26 에서는 정결예식에서는 중요한 것은 외적인 의식 즉 컵과 그릇은 닦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의 외적인 행위와 내적인 동기는 심히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삶을 예수님께서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책망 하십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골에 있는 무덤들을 사람들이 즉시 알아오고 우발적으로라도 무덤을 만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회를 칠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무덤에 닿게 되면 의식상 부정하게 되어 기도나 예배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한 것은 무덤은 겉에서는 그럴싸하게 보이지만 그 속은 썩는 것으로 가득 차 있듯이 그들도 겉으로는 의로운 사람같이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사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무딘 마음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의 묘소를 돌면서 “우리가 우리 조상들 시대에 살았다면 조상들이 예언자들의 피를 흘리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합니다.
이렇게 그들은 자기들이 조상들보다 더 훌륭하며 자기들이 무덤을 꾸며 놓은 의인들의 편에 서 있다고 뻔뻔스럽게 생각하십니다. 이러한 착각으로 인해 그들의 눈은 더 멀어졌고 마음이 더 무디어 진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는 다른 삶의 모습을 바오로 사도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게으른 생활을 하지 않았고 아무에게서도 빵을 거져 얻어 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러분 중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수고하며 애써 노동을 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요구할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여러분에게 우리를 본받게 하려고 스스로 모범을 보인 것 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마음을 깨끗이 하고 하느님과 스스로에게 정직할 수만 있다면 그들의 외적인 행동과 사람들에 대한 태도도 즉시 깨끗하고 진실한 것이 될 것입니다.
언젠가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갑자기 쏟아지던날 공소 미사를 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제 차안에는 반주자와 그 딸이 함께 타고 있었는데 천둥소리를 듣고 무서워하던 그 아이가 곧바로 엄마품에 안겨 잠을 자고 있는 것 이었습니다.
금방 무섭다고 했는데 엄마를 믿고 엄마품에 안겨 금방 잠이든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를 보면서 왜 예수께서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하셨는지? 왜 그렇게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그렇게 책망하셨는지를 조금이나마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외적인 것에, 세상의 것에 매여 불안과 위선 속에 살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스스로에게 정직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아울러 우리 본당의 아이처럼 하느님품에 안겨 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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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23, 27.29.)
휴가 때는 수도원에서 먹던 음식과 다른, 색다른 음식을 먹게 되지만, 사실 맛있는 음식도 한두 번 이면 충분하더군요. 그런데 며칠 동안 계속 외식만 하다 보면 질리는 것처럼, 지난 토요일 그리고 월요일, 화요일에 이어 오늘까지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책망하시는 내용을 듣다 보니 별 감흥이 없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도 어제에 이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겉과 속이 다름으로 인한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행위를 질책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외적인 행위보다 내적 지향(=동기)을 더 강조하셨지요. 예를 들면, 진복 팔단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마태5,8)하는 말씀을 통해서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15,11)라는 말씀으로 강조하신 것은 사람의 안(=생각과 지향, 내적 동기)에서 나오는 것이 본인과 이웃과 세상을 오염시키는 요인이다,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정결 예식에서 중요한 것은 외적인 의식 즉 컵과 그릇은 닦는 것보다 먼저 잔 속(=마음)을 깨끗이 닦아야 한다고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겉(=외적 행동)과 속(=내적 동기)이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기에 그런 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회칠한 무덤이란,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골에 있는 무덤들을 사람들이 즉시 알아보고 우발적으로라도 무덤을 만지지 않도록 회를 발랐습니다. 왜냐하면 무덤에 닿게 되면 의식상 부정하게 되어 기도나 예배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풍습을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회칠한 무덤이라고 호칭한 한 까닭은, 회를 칠함으로써 무덤의 겉이 그럴싸하게 보이지만 실상 그 속은 썩은 것으로 가득 차 있듯이, 그들도 겉으로는 의로운 사람같이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질책하신 것입니다.
저는 모든 과일을 좋아하지만 어렸을 땐 이상하게 수박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제게 왜 수박을 좋아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하면, 수박은 겉과 속이 달라서 싫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벳남에서 살면서 벳남 양성자들과 함께 먹을 수 있는 가장 싸고 흔한 게 수박이다 보니 그때부터 수박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제가 나이 들어가면서 체질이 바뀐 까닭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체질적으로도 그랬지만, 아무튼 어렸을 때 겉과 속이 다른 수박을 저는 좋아하지 않았고, 그러기에 저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참사람이란 表裏不同표리부동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言行一致언행일치하는 사람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는 다른 삶의 모습을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여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2테3, 7-10) 삶을 통한 가르침보다 더 강력한 모범은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공동체 안에서는 자기 소임에 충실하지 않고 무질서(=게으르게)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지만,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을 걸고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강하게 질타하였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말합니다. “우리의 선조들과 사도들이 그랬듯이 직접 손으로 일을 해서 먹고 살아야 진정한 수도사라 할 수 있다.” 라고. 그래서 성인은 ‘게으름은 영혼의 적’이라는 사실을 꿰뚫어 보시고,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 Ora et labora”는 모토 아래 일과 기도의 균형 잡힌 삶을 실천하셨습니다. 성인은 단지 노동의 신성함을 일깨우신 것만이 아니라, 노동이 분열을 조장할 수 있는 위험성도 일찍부터 깨달으셨기에 노동이 균형을 잃지 않도록 강조하였습니다. 곧, “그 어떤 것도 예배보다 우선시해서는 안 된다. 하고 일갈하셨습니다. 결국 명상하는 삶은 노동하는 삶으로 인해 지탱되며, 다시 말해 인간의 모든 행위는 내5적 성찰에 의해 심화된다, 는 것입니다. 결국 기도와 노동이 함께 있는 곳에서 비로소 인간은 삶의 균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의 핵심이며, 영성의 본질이다, 고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13세부터 조그만 공장에서 청소 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오전 7시에서 오후 1시까지 일하고, 점심 식사 후 학교에 가서 저녁 8시까지 공부했다고 합니다. 그때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내 일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였습니다. 노동하면서 나는 인간의 노력에서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 오늘도 제 손으로 벌어먹을 수 있도록 건강한 몸과 건전한 정신을 심어주셨으니 찬미하옵니다. 오늘도 제게 주어진 소임지에서 제게 주어진 소임을 충실히 행함으로써 당신의 영광과 저의 구원을 위해 힘써 일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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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이 따로 있을까요? 따로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따로 있지 않습니다. 굳이 나눈다면 행복이라 여기는 사람과 불행이라 여기는 사람만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것, 또 형체를 확인할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습니다. 각자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행복이라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하고, 불행이라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불행한 것입니다.
엄청난 부와 명예를 가지고 있지만 불행이라는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불행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것 같은데도 행복이라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자기 행복은 자기만 꺼낼 수가 있습니다. ‘누구 때문에’라면서 사람과 환경 때문에 불행하다고 말하지만, 외적인 것이 행복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행복은 내가 마음 안에 만들고 보관해서 밖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그게 행복이다.”
행복을 멀리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또 세상의 것에서만 찾는 것도 안 됩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우리는 행복을 자기 마음 안에 차곡차곡 쌓을 수 있으며, 이로써 언제든지 행복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을 위선자라고 부르면서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입으로 하느님을 끊임없이 외치고 있지만, 실상 하느님의 것을 찾지 않고 세상의 것만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만 아름답게 보이려고 하지만, 실상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했습니다. 위선과 불법은 하느님의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내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에게 “너희는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이다.”라고 꾸짖으십니다. 무덤의 겉은 아주 깨끗하고 아름답게 단장된 것 같지만, 무덤 속은 시신이 부패하면서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처럼 그들의 마음이 더럽고 추한 것으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위선의 끝은 생명이 아니라 죽음임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이 진정한 행복을 마음에 품고 살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또 받아주시기에 더 큰 행복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진정한 행복을 찾아 나서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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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회칠한 무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꾸중을 하였습니다.‘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입니다.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그 ‘회칠한 무덤’이 바로 저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부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한다고 성덕이 출중한 것도 아닙니다. 그에 상응하는 마음가짐과 정성을 담지 않으면 거룩한 것을 더 많이 접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불경한 잘못을 범하고 맙니다. 알면 아는 만큼 더 잘 살아야 하는데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사실 신부이기 때문에 더 많은 위선을 떨고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정화가 필요합니다.
신자들에게는 기도를 많이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을 하지만 최소한의 의무인‘성무일도’조차 거르고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성체조배는 물론 묵주기도를 하는 것은 기본이거늘 일반 신자보다 더 많이 기도한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이러저러한 인간적인 욕망에 대해서도 절제 있는 기쁨을 누리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닌 척 하고 목을 빳빳이 세우고 다닙니다. 이런 모습에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생각하면서도 몸은 여전히 육정을 따르고 맙니다.‘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를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내 눈 안에 들보를 지닌 채 남의 눈의 티를 빼주겠다고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 백성은 말로만 나와 가까운 체하고 입술로만 나를 높이는 체하며 그 마음은 나에게서 멀어져 간다”(이사29,13). 하였고, 주님께서도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하신 말씀이 새롭습니다.
아무리 겉이 화려하더라도 소중한 것은 알맹이입니다. 부정함을 피해가라고 무덤에 회칠을 하였으니 ‘회칠한 무덤’은 더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오히려 회칠한 무덤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남을 부정하고 더럽다고 비난하지 말고 자신의 속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세상에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정화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면 자비를 청하게 되고, 인정하지 못하면 내 안의 부정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쉽게 비난합니다.‘회칠한 무덤’은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다. 자비를 청하는 가운데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1위선을 내려놓고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허물을 용서하소서. 구원을 허락하소서. 아멘.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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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스스로 고백하는 이>
마태오 23,27-3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스스로 고백하는 이>
스스로 악하다고
고백하는 이는
착해집니다
스스로 더럽다고
고백하는 이는
깨끗해집니다
스스로 차갑다고
고백하는 이는
따뜻해집니다
스스로 딱딱하다고
고백하는 이는
부드러워집니다
스스로 어둡다고
고백하는 이는
밝아집니다
스스로 탐욕스럽다고
고백하는 이는
비워집니다
스스로 교만하다고
고백하는 이는
낮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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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수녀님]
<"겉은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오늘 <복음>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불행선언의 계속입니다. 곧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불행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섯 번째 불행선언’에서 그들 위선자들을 “회칠한 무덤”(마태 23,27)에 비유하십니다. 그것은 그들의 영혼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이 생명의 본성을 뿜는 것이 아니라, 무덤의 냄새를 뿜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19,16)에 따르면, 무덤에 닿으면 칠 일간 부정하기에 때문에 무덤을 회칠하여 표시함으로써 사람들이 불결해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러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회칠한 무덤과 같다’는 것은 부정을 타지 않도록 그들을 경계하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고, 겉은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마태 23,27-28)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악”보다 더 추악한 것은 “거짓된 선”, 곧 “위선”입니다. 마치 “선”인양 자신의 얼굴을 꾸미고 사람들을 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선’은 악보다 더 추악합니다.
사실, ‘종교적 위선’이란 단순히 거짓으로 꾸미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행위, 곧 선한 행위로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을 말합니다.
곧 겉으로는 하느님을 위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기도나 자선이나 단식, 미사나 전례나 성사와 같은 종교적 행위를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기 위해서’ 한다면 그렇습니다.
‘위선’(ùποκρισισ)은 그 행동과 마음 속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것을 말하지만, 이와 같은 마음과 입술 혹은 행동 사이의 차이는 나아가서, 못된 속셈을 교묘한 방법으로 감추고, 자기 체면을 세우기 위해 오히려 상대방을 올가미에 씌우려 하기도 합니다.(예레 18,18)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했던 것처럼(마태 22,18) 말입니다.
나아가서, ‘위선’은 마음을 완고하게 하고, 하느님의 명을 자신의 탐욕과 방종을 위해 이용하며, 더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에게 믿게 하려던 허위를 자기 자신이 진실로서 생각해버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의롭다고 여기고’(루카 18,9;20,20), 마치 무대 위의 배우처럼(ùποκριτησ) 자기의 배역을 계속하면서 결국 그들은 ‘눈 먼 길잡이’(마태 15,3-14)가 되고, 그들의 가르침은 ‘나쁜 누룩’(루카 12,1)에 불과하게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먼 이들’이라고 부르십니다.(마태 23,25-26) 다른 사람들을 속이려고 애쓰면서 자신을 속이게 되며 자신의 모습에 눈을 감고 빛을 볼 수 없게 되어 오히려 빛을 핍박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위선자들을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째 불행선언’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예언자들의 무덤은 꾸미면서도 실은 그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듯이, 지혜이신 당신을 핍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듯 진실을 가려보지만, 진리는 어김없이 가리고 있는 허울을 벗기고 맙니다.
진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가로막고, 드러난 진실마저 덮고 조작하려 해도, 빛은 끝내 가려지지 않고 오히려 가림 막을 태울 뿐, 감추어진 탐욕과 위선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겉을 그럴싸하게 꾸미고 치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더러운 속을 감추고, 은폐하고, 기만하고, 심지어는 조작하기도 하는 우리의 위선을 하느님께서는 환히 아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위선의 껍데기를 벗게 하소서!
당신이 담아주신 마음 속 진리를 행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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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마태 23,31)
주님!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듯 진실을 가려보지만,
진리는 어김없이 가리고 있는 허울을 벗깁니다.
감추어진 진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가로막고 드러난 진실마저 덮으려 앙탈이지만,
빛은 끝내 가려지지 않고 오히려 가림 막을 태울 뿐, 감추어진 탐욕과 위선을 드러냅니다.
위선의 껍데기를 벗고 진리 편에 서게 하소서!
핍박과 폭행을 당해도 물러서지 않게 하소서!
불의에 대한 무관심과 침묵으로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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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하여라>
“무지의 불행에 대한 답은 회개뿐이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시편 128,1)
오늘 화답송 시편입니다. 행복도 불행도 선택입니다. 주님을 선택하여 주님 중심의 행복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국민 절반이 울분상태 ‘30대 심각’”, 새벽 인터넷 뉴스를 일별하는 순간 들어온 말마디입니다. 어제 유투브에서 본 70대 이후에 땅을 치고 후회하지 않도록 준비하라는 10가지 지침도 일부 공감이 갔고 유익했습니다. “1.저축, 2.배우자, 3.건강, 4.친구, 5.취미, 6.배움, 7.연금, 8.도전, 9.일기(기록), 10.대화(자녀간)”로 아주 현실적인 지혜로운 처방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볼 때, 가장 결정적으로 중요한 하나가 빠졌음을 봅니다. 삶의 목표이자 방향, 삶의 중심이자 의미인 “하느님”이 빠졌습니다.
이어 제가 주장해온 노년의 품위있는 삶을 위한 3대 우선 순위, “1.하느님 믿음, 2.건강, 3.돈”도 생각이 났습니다. 더불어 오랫동안 강조해온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란 말마디도 생각이 났습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혼란할수록 하느님 중심의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무지의 탐욕에, 어리석음에 눈이 가려 길을 잃은, 희망과 꿈을, 빛을 잃은 중생들입니다. 그러니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이요 국민 절반이 울분상태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관상적 삶과 쉼의 선택과 훈련이 참으로 절박한 시점입니다.
‘살 줄 알면 행복인데 살 줄 몰라 불행’인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어제에 이은 마지막 둘의 불행선언으로 마태복음 13장 7개의 불행선언은 모두 끝납니다. 마태복음 5장 서두의 “행복하여라”로 시작하는 참행복선언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6.“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7.“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저주’가 아니라 깊은 좌절감의 반영인 ‘깊은 아픔’이자 ‘분노’입니다. 인간의 위선적 무지의 병이 너무 깊습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죄, 무지의 악에 대해 참 많이 강조했습니다. 참 쉬운 것이 남판단하는 것이요 참 힘든 것이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입니다. 무지의 탐욕에 중독되어 눈멀면, 광신과 맹신의 무지에 눈멀면 백약이 무효입니다.
이래서 참으로 살기를 바란다면 적극적 자발적 회개의 선택과 훈련이 필수입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불행선언은 회개의 촉구입니다. 회개의 은총을 입을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주님을 삶의 중심에 받아들이는 회개의 선택과 실천이, 그리고 계속된 회개의 여정을 사는 것이 참으로 절실합니다.
회개의 여정은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자아초월의 겸손과 지혜의 여정입니다. 참으로 회개 없이는 자기를 아는 겸손도 지혜도 없습니다. 참된 회개를 통한 하느님 중심의 진실과 겸손, 지혜의 삶만이 표리부동의 위선적 무지의 병에 대한 유일한 처방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회심의 대가이자 달인이 오늘 제1독서의 주인공인 바오로 사도요,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주교 학자입니다.
어제 성인의 모친 모니카에 이어 아드님의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성인이 제 나이와 같은 76세에 선종하셨다는 사실이 더욱 분발하게 합니다. 17년 동안 모니카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가 주효하여 마침내 아드님을 결정적 회심으로 이끈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사건은 너무 잘 아실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회심의 열매는 하느님 중심의 질서와 전통의 강조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바로 바오로의 이런 모범적 삶과 더불어 다음 성도들에 대한 평화의 축복이 회개의 열매입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친히 온갖 방식으로 여러분에게 언제나 평화를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계시기를 빕니다.”
한번의 결정적 회심에 이은 부단한 회심의 여정을 통해 주님의 ‘축복의 통로’가 된 사도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진리의 연인’이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극적 회심 사건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밀라노 정원에서 앉아있을 때 보이지는 않지만 소년의 “Tolle, lege(집어 읽어라)”소리가 노래처럼 들려왔고 되는 대로 성서를 펼쳤을 때 한눈에 들어온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로마13,12-14)
이어지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 나오는 두 대표적 아름다운 고백을 나누고 싶습니다. 바로 오늘 아침과 저녁성무일도에 나오는 내용으로 최민순 신부 번역입니다.
“주여, 당신을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에, 우리가 당신을 찬양하는 일에 기쁨을 느끼게 하시나이다. 당신 안에 쉬게 될 때 까지는 우리 마음이 평온치 못하리이다.”(즈가리야의 노래 후렴)
“옛 것이나 항상 새로운 주님의 아름다움이여, 늦게서야 당신을 사랑했나이다. 주님은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게 하셨나이다.”(성모의 노래 후렴)
바오로 사도 이후 최고의 신학자가 성 아우구스티누스요 천주교, 개신교에서 최고로 존경받는 두 성인입니다. 두 분의 생애를 보면 결정적 회심후에도 죽을 때까지 회심의 여정에 항구했음을 보며 회심의 여정은 동시에 보속의 여정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구원 은총에 감사하며 보속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주님을 사랑했던 두 성인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심의 여정에 항구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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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마태 23,27.29)
<돌아가자!>
오늘 복음(마태 23,27-32)도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여섯 번째 책망, '겉과 속이 다른 모습, 겉은 의인처럼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한 모습에 대한 책망'입니다.
일곱 번째 책망,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을 따르지 않는, 더 나아가 그들을 죽이는 일에 동참하는 모습에 대한 책망'입니다.
3일에 걸쳐서 위선에 대한 책망을 듣고 있습니다.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이 강한 책망이 '회개하라!'는 '회개의 강한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그들은 끝끝내 회개하지 않고 자기 조상들이 했던 것처럼 참예언자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아우구스티노(성 아오스딩)는 회개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성인'이십니다. 그는 아들의 회개를 바라는 어머니 모니카의 간절하고도 끊임없는 기도와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도움으로 방탕한 길에서 생명의 길로 돌아왔습니다. 탕자의 비유(루카15,11-32)에서 등장하는 작은 아들처럼 아버지이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돌아와 한 때 자신이 푹 빠져있었던 이단을 물리치고, 교회를 수호하는 일에 일생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참회의 자서전인 '고백록' 등 많은 저서를 남기셨습니다.
오늘 독서(2테살 3,6-10.16-18)에서 사도 바오로는 '무질서한 삶을 멀리하라.'고 권고합니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라.'고, 더 나아가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권고합니다.
회개는 '무질서하게 사는 삶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회개는 '나태(게으름)하게 사는 삶에서 성실하게 사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처럼 우리도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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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 28)
회개는 죄를
보지만
죄는 죄를
보지 못합니다.
악습으로
자신을
찌르는 것은
언제나 우리
자신이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회개도
다 때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회개의 시작은
하느님 말씀을
읽고 빛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더 좋은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처럼
어머니의 기도에
빚진 우리들 삶입니다.
회개의
사람이 되는 것이
복음이며
구원입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죄와 함께
진솔한 고백으로
주님의 은총을
가득 체험합니다.
들어주시는
주님을 통해
행복한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어둡고
무질서한 생활과
이별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우리 삶에 오신
예수님을 놓치지
마십시오.
주님께로
돌아선 삶은
예전의 삶과
다릅니다.
어제와 다른
우리들 삶이
펼쳐집니다.
회개와 은총은
마음을 닦는
거기에서
자라납니다.
내면의 자유가
곧 외변의 자유가
됩니다.
진실로 회개한
한 사람
성 아우구스티노가
있습니다.
진실한 자기고백과
회개를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의
믿음이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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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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