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찾아서] 매화 꽃 앞세운 남도는 지금 꽃대궐입니다

[산장]

[나무를 찾아서] 매화 꽃 앞세운 남도는 지금 꽃대궐입니다

  그새 남도는 꽃대궐을 이뤘습니다. 이 계절에 가장 화려한 봄꽃 잔치로 광양의 꽃 축제를 빼놓을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매화를 찾아나선 길 끝에 광양 꽃 잔치도 찾았습니다. 처음은 아니지만, 이 즈음 광양의 꽃잔치를 찾아나서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잔칫집으로 들어서는 길은 주말을 맞아 전국에서 찾아온 상춘객들의 발걸음으로 가득해 오도가도 못하고 동동거려야 했습니다. 꽃 동산 앞 임시주차장으로 들어서는 데에만도 굉장히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서녘으로 넘어가는 해를 길 위에서 바라만 보다가 겨우 땅거미 지는 꽃동산에 올랐습니다. 매실을 얻기 위해 산비탈 전체에 심은 매실나무들이 꽃 피운 동산은 그야말로 꽃대궐이었습니다. 이리 많은 꽃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광경은 흔치 않습니다.

  그 동산에 피어있는 꽃들을 우리는 매화라 부르고, 꽃잔치를 흔히 ‘매화축제’라고 부르긴 합니다만, 이 곳에서 우리 옛 어른들이 완상하던 매화를 이야기하기에는 조금 꺼려집니다. 매화는 결코 번거로운 것을 좋아하는 꽃이 아니라는 걸 아는 때문입니다. 그토록 많은 나무의 화려한 꽃을 볼 수 있다는 즐거움을 다른 어떤 상춘 잔치에 비할 바 없는 게 분명합니다만, 마음 한 구석에는 우리 매화를 매화 그 자체로 바라보기 어렵다는 아쉬움이 피어오릅니다. 이 동산이 매실의 최대 산지이고, 매실을 맺기 위해 먼저 피어나는 매실나무 꽃을 화려하게 즐길 수 있는 곳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자주 들르게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예전의 매화가 풍겨주던 참 멋을 느낄 수 있는 곳을 딱히 짚어내 이야기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나마 제가 탐매행의 가장 적당한 장소로 첫손에 꼽는 곳은 전남 순천 조계산의 선암사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매실나무가 여전히 싱그러운 모습으로 서 있는 곳이지요. ‘선암매’라는 이름이 붙은 이 고매 곁에는 다른 여러 그루의 오래된 매실나무가 함께 서 있어 더 아름답습니다. 오래 된 절집의 고아한 분위기를 함께 느낄 수 있어 가장 좋다고 여기는 곳입니다.

  ‘매화는 번거로움보다 희귀함을, 젊음보다 늙음을, 비만보다 수척을, 활짝 피어난 것보다 꽃봉오리를 귀하게 여기는 꽃’입니다. 옛 선비들이 그렇게 매화를 즐겼습니다. 게다가 매화를 즐기는 법으로 옛 사람들은 매우 고요한 정원에서 홀로 피어난 매화의 은은한 향을 고요히 즐겨야 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선비들은 ‘문향(聞香)’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향기를 맡는다’가 아니라, ‘향기를 듣는다’고 한 거죠. 물론 문향의 문(聞)에 냄새를 맡는다는 뜻이 없는 건 아니지만, 유난히 매화 향을 이야기할 때에 문향이라는 표현을 쓴 데에는 필경 매화만의 남다름이 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선암사라고 해서 사람의 발길이 적은 건 아닙니다. 상춘객이 가득입니다. 육백 년을 고요히 홀로 살아온 선암매도 매화 꽃 피우자, 해마다 그랬던 것처럼 상춘객들의 왁자한 발걸음에 둘러 싸입니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이만큼 많은 분들이 찾던 곳은 아니었건만, 그 사이에 선암매는 이 땅에서 봄의 매화를 즐길 수 있는 대표나무가 된 모양입니다. 주말이어서 더 그랬을 겁니다. 나무 곁에 머무르는 발걸음은 그치지 않았고, 선암매가 피워낸 아름다운 매화 꽃을 향한 카메라 렌즈는 번갈아가며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선암매가 피워올린 봄의 정경을 오래도록 마음에 간직하려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나무 곁에 정겹게 그러나 힘겹게 머무릅니다.

  상춘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선암매와 각황전 돌담의 고매에서 조금 떨어진 곳, 각황전 조그마한 대문 앞에는 한 그루의 홍매가 있습니다. 조금 떨어진 탓일까요. 화려함에 몰입한 상춘객들의 시선에서는 좀 떨어져 오히려 더 근사합니다. 매화가 더 매화답습니다. 번거로움의 건너편에 서서 희귀한 옛 매화의 멋을 풍기는 듯한 자태로 가만히 선암매 쪽으로 가지를 내밀었습니다. 화사한 꽃분홍 빛깔로 피어난 꽃을 촘촘히 매단 나뭇가지는 각황전 대문 기와 위로 늘어졌습니다. 기와의 탁한 빛깔에 어우러진 꽃분홍 빛깔은 바라볼 수록 그윽합니다. 담장 너머의 야단법석에도 각황전 대문 앞 홍매의 그윽한 향기는 홀로 가만가만 흐릅니다.

  이 즈음의 순천 조계산 선암사는 봄의 절정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절집입니다. 이 땅의 누구라도 선암사 경내에 들면, 온갖 세상 시름 다 내려놓고, 평안함을 얻을 만합니다. 매화 뿐 아닙니다. 동백나무 산수유가 한창 꽃을 피우고 있으며, 절집 오르는 길섶에는 보랏빛의 현호색, 푸른 개불알풀꽃이 환하게 봄노래를 피워올렸고, 절집 돌담 틈 곳곳에서는 제비꽃이 제 노래의 흥에 겨워 환히 웃음짓고 있습니다. ‘자연이 빚은 수목원’이라는 수사가 결코 허사가 아님을 누구라도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오가는 분들이 많고, 나무마다 꽂혀 드는 카메라 렌즈의 시선을 피할 길 없습니다만, 선암사의 봄은 언제나 좋습니다. 가장 좋은 봄입니다.

  이 아름다운 절집 순천 선암사가 홀로 그윽하게 매화 향을 풍기던 그때를 더 그리워 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만, 아름다운 곳을 찾아 사람들이 찾아드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 걸요. 게다가 아름다움을 즐길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니, 아쉬움도 내려놓아야 하겠지요. 그저 무심한 발길과 나뭇가지에 기대어 한 컷의 사진을 남기려는 사람들의 무심한 손길에 나무가 힘겨워 하지 않을 수 있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또 사람들의 눈길 밖 낮은 곳에서 피어난 여린 풀꽃들이 짓밟히지 않기를요.

  긴 휴지기를 거쳐 지난 주에 띄운 나무편지에서는 제 아버지 어머니를 멀리 보내드린 슬픈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참으로 많은 분들의 위로 편지를 받았습니다. 지난 한 주 내내 받아 들게 된 많은 분들의 위로 편지에 진심으로 감사 인사 드립니다. 지난 해에 먼저 아버지 소식을 전해드렸을 때에도 일일이 답장 드리지 못했습니다만, 이번 편지에 대해서는 더 그랬습니다. 너무나 많은 분들의 편지에 도저히 인사 드리기 어려웠습니다. 남도의 매화 소식으로 감사의 마음 대신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남도의 꽃 소식은 이제 빠른 속도로 북으로 북으로 올라오겠지요. 이미 서울 근처에서도 길가의 목련이 꽃망울을 터트렸습니다. 서둘러 이 땅의 나무들을 더 꼼꼼히 살펴보고, 봄 이야기 가득 채워 나무편지 올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남도의 꽃 대궐에 다녀와서 3월 28일 아침에 ……
솔숲(http://solsup.com)에서 고규홍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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