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붙은 기업 돈줄… ‘잉여현금’ 1년새 48조 증발
268곳 작년 3분기보다 77% 줄어
한전 ―23조… 감소 규모 가장 커
올 한 해 산업계를 강타한 고유가와 고원자재가, 소비 침체의 여파로 기업의 ‘돈줄’이 급속히 말라붙고 있다. 기업이 보유한 유동성을 가리키는 지표인 잉여현금흐름에도 빨간불이 들어왔다.
14일 기업데이터연구소 CEO스코어 자료와 본보 취재를 종합하면 국내 매출 500대 기업의 상장사 중 전년도와 비교가 가능한 268곳의 올해 3분기(7∼9월) 개별기준 누적 잉여현금흐름을 조사한 결과 1년 새 48조 원 가까이 ‘증발’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르면 268개 기업의 올 3분기 잉여현금흐름은 14조1824억 원으로 전년 동기 62조1110억 원 대비 47조9286억 원(77.2%) 감소한 수치다. 조사 대상 기업 중 절반이 넘는 148곳(55.2%)에서 잉여현금흐름이 줄었다.
감소 규모로는 한국전력공사가 1위를 차지했다. 한전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에너지 가격 폭등의 직격탄을 맞아 올 3분기까지 역대 최대 영업손실을 냈다. 한전의 잉여현금흐름은 지난해 3분기 ―4조2321억 원에서 올해 3분기 ―23조6922억 원으로 적자가 19조4601억 원 확대됐다.
경기 침체 여파로 다운사이클(불황기)에 접어든 반도체 업계도 잉여현금흐름이 쪼그라들었다. 삼성전자의 잉여현금흐름은 올 3분기 3조9453억 원으로 전년 동기(10조7207억 원) 대비 6조7754억 원이 줄어들었다. SK하이닉스도 지난해 3분기 3조5496억 원에서 올 3분기 ―8552억 원으로 4조4048억 원 감소하며 적자로 돌아섰다.
잉여현금흐름은 기업이 영업을 통해 벌어들인 영업활동 현금흐름에서 설비투자를 포함한 유·무형자산 순지출(취득비용―처분소득)을 제외한 금액으로 향후 신규 투자나 인수합병 등을 위한 여유 자금에 해당한다.
곽도영 기자, 구특교 기자
삼성전자 여유자금 10.7조→3.9조, SK하이닉스 3.5조→―8500억
21개 업종중 15개 업종서 감소
투자 늘렸는데 경기침체 덮친 탓
기업들 비상경영 ‘허리띠 졸라매기’
“출장 줄이고 프린트 용지도 아껴라”
주요 기업들 중에는 포스코홀딩스의 잉여현금흐름이 지난해 3분기 1조7990억 원에서 올해 3분기 ―1조4667억 원으로 적자 전환됐다. LG화학도 같은 기간 1조8014억 원에서 ―1조1208억 원으로 현금흐름이 3조 원 가까이 악화됐다. 이외 LG에너지솔루션(2조6309억 원 감소·적자 확대), 삼성중공업(2조1946억 원 감소·적자 전환), 대우조선해양(1조2455억 원 감소·적자 전환) 등도 잉여현금흐름이 크게 악화된 기업이었다.
업종별로는 총 21개 업종 중 15개 업종(71.4%)의 잉여현금흐름이 감소한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공기업이 지난해 3분기 ―3조5770억 원에서 올해 3분기 ―30조2319억 원으로 적자폭이 8.5배로 확대됐다. IT전기전자(16조8539억 원 감소), 석유화학(8조991억 원 감소), 건설·건자재(5조3998억 원 감소)가 그 뒤를 이었다.
기업들의 잉여현금흐름이 악화되는 데에는 주요 산업 부문에서 영업현금흐름이 설비 투자 지출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어서라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반도체, 배터리 등 주요 신산업 분야의 경우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가전 및 정보기술(IT) 제품들의 단기 수요 폭증으로 설비 투자를 대폭 늘렸다. 하지만 올 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여파와 하반기(7∼12월) 경기 침체가 본격화하면서 현금 유동성이 경색됐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추세가 단기간에 해소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경영환경 악화는 물론 각 국가들의 경쟁적 금리 인상에 따라 자금 시장도 급격하게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강민석 교보증권 연구원은 이달 7일 낸 보고서에서 “자금 조달 비용이 급격하게 높아져 회사채 발행을 통한 신규 자금 조달도 녹록지 않다”며 “55% 이상의 국내 기업들은 잉여현금흐름이 마이너스인 상황이며, 향후 기업들의 이익 개선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주요 기업들은 이미 보릿고개를 넘기 위한 비상 경영에 들어갔다. 내년 설비 투자를 대폭 줄이는 것은 물론이고 인력 감축을 위한 구조조정에도 나서고 있다.
삼성전자는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잇단 투자 감축 발표에도 불구하고 투자 규모 축소나 감산 등의 계획을 밝힌 적이 없다. 다만 “시장 상황에 따라 생산라인은 유동적으로 운용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3분기 실적 발표 콘퍼런스콜에서 내년 투자 규모를 올해 대비 50% 줄이겠다고 했다. 1∼3분기 누적 적자 1조 원을 넘긴 LG디스플레이는 내년 시설 투자를 1조 원가량 줄일 예정이다. 지난달부터 타 계열사로 인력 재배치 작업에도 들어갔다.
업무 현장의 ‘허리띠 졸라매기’도 현실화됐다. 삼성전자는 최근 임원들에게 “새해에는 비상경영 체제로 전환한다”며 경상비용 감축을 주문했다. 출장자 비율을 올해 대비 절반으로 줄이고 컨설팅비, 시장조사 비용 등도 대폭 축소한다는 방침이다. 프린트 용지 등 사무용품을 50%로 절감한다는 내용까지 포함됐다. 이에 따라 실제 내년 1월 개최되는 ‘CES 2023’ 출장자 규모도 긴급하게 축소 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LG전자 등 LG그룹 주요 계열사에서도 출장 규모를 축소하거나 영업 접대비 지출을 줄이는 등 긴축 경영에 들어갔다. 전자업계의 가장 큰 프로모션 기간인 4분기(10∼12월) 블랙프라이데이 기간에도 내년엔 마케팅 비용 효율화 작업에 나설 예정이다. 한 전자업계 대기업 임원 A 씨는 “내년 총무 비용을 80% 줄이라는 지침이 내려왔다. 우스개처럼 올 연말에 사무실 휴지, A4용지를 미리미리 충분히 사두라고 할 정도”라고 말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기업의 여유자금인 잉여현금흐름이 감소하면 중장기적인 리스크에 대응하기 어려워진다”며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하고 현금흐름을 최대한 지켜놔야 경기가 회복됐을 때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곽도영 기자, 구특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