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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길리성
전국으로 연결됐던 서울의 봉수대"
인간은 예로부터 의사를 전달하고자 하는 통신수단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서로간의 의사소통을 위해 기호나 표현 언어를 사용하였다. 인간의 활동영역이 넓어지면서 언어만으로는 통신수단의 한계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바위나 벽 등에 기호를 새겨 기록하거나 북·나발·깃발 등의 신호체계를 발전시켜왔다.
이후 문자의 발명은 통신수단에 있어서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문자는 특히 기록성이 강하다는 점에서 큰 가치를 가진다. 그러나 문자 전달에 많은 이동시간과 거리의 제한 등 제약요소가 따랐다. 이를 극복하고자 신호전달 체계를 만들어 내게 되었는데 그 중의 대표적인 예가 불을 이용하여 정보를 전달하는 시각신호체계의 하나인 봉수제도이다.
봉수, 최초의 통신수단
봉수제도는 다른 나라의 침략이나 위협으로부터 나라의 안전을 지키는데 적의 침략을 막거나 미리 알리는데 통신망으로서의 역할을 했다는데 그 목적이 있다. 봉수제도는 옛 통신수단 중에서 가장 체계적인 중계방식으로 나라의 중요한 일을 연기나 불을 이용하여 원거리까지 빠르게 전달할 수 있도록 했던 통신망의 하나이다. 우리나라 봉수제도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중요한 군사통신 목적으로 널리 이용하였다.
봉수를 전달하는 봉수대는 조선시대에 전국적으로 약 643개 달한다고 증보문헌비고에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8도 328개의 고을 수록에는 빠짐없이 봉수대가 등장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각종 읍지에도 봉수대의 위치정보가 고을마다 수록되어 있다.
전달방법으로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을 이용하여(晝烟夜火) 그 갯수를 정해 변방의 정세를 중앙에 전달했다. 이 방법은 사람이 눈으로 직접 관측할 수 있어야하며, 멀리 바라보기 좋은 시야 장애가 없는 높은 산정상에 위치해야 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여서 해안에 접근하는 외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군사시설 축조와 동시에 봉수대를 설치하여 해안방어를 했다. 육지에는 산성과 봉수대를 축조하여 영토를 보전하는데 중요한 기능을 맡았다.
이와 같은 봉수제도는 국가차원의 기간통신의 기능을 갖고 있었으며, 정보를 신속하게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만약 비가 오거나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면 연기와 횃불은 무용지물이 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봉수는 인편이나 역마를 이용하는 것보다 그만큼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시간상 효율적이였다.
이를 보완하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북소리·호각소리와 같은 청각매체 전달방식과 깃발·연을 이용하는 시각매체 전달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비둘기나 매와 같은 조류를 이용하여 정보를 전달하기도 했다. 이러한 봉수는 우역과 더불어 근대 전기통신이 사용되기 이전에 가장 보편적인 통신방법 이었다.
봉수제도는 적군의 침입이나 반란과 같은 위급한 상황을 중앙 및 변방 각지에 알리는 군사적 목적의 통신체계의 하나이다. 산 정상에 봉수대를 설치하고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로 급한 소식을 전했다.
봉수는 성격에 따라 경봉수, 연변봉수, 내지봉수로 구분된다. 경봉수는 임금이 위치한 중앙 봉수로서 전국의 5개 봉수 모두가 이곳으로 집결된다. 지금 서울의 남산(목멱산)봉수대가 경봉수였다. 연변봉수는 국경이나 해안가 최전방에 설치되어 적의 침입을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내지봉수는 육지의 내륙에 설치되어 연변봉수와 경봉수를 연결하는 역할로 가장 많았다.
조선시대 전국의 봉수 노선은 다섯 갈래의 직선봉수(직봉)을 중심으로 연결된다. 직봉 사이에는 중간의 신호불통을 우려하여 직봉으로 전달되는 작은 갈래의 간선봉수(간봉)라는 보조노선이 있었다. 간봉은 봉수대 사이의 중간지역을 연결하거나 국경 초소로부터 각 마을에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하였다.
조선시대 전국의 봉수 노선은 ▲제1로 : 함경도 경흥→ 강원도→ 경기도→ 중랑구 아차산 → 남산봉수 ▲제2로 : 부산 다대포→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 성남 천림산 → 남산봉수 ▲제3로 : 평안도 강계→ 황해도→ 경기도→ 서대문 무악동봉수 → 남산봉수 ▲제4로 : 평안도 의주→ 황해도→ 경기도→ 서대문 무악서봉수 → 남산봉수 ▲제5로 : 전라도 순천→ 충청도→ 경기도→ 양천구 개화산 → 남산봉수 등 5개의 노선이었다.
▲ 서울 남산 봉수대로 연결되는 최종 5개 봉수로
서울 남산(목멱산) 봉수대
서울 남산 봉수대의 소재지는 서울 중구 회현동 (남산, 262m)이며, 1993년 9월 20일 서울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었다.
[목멱산 지명유래] 서울 외곽에 있는 동쪽의 용마산, 서쪽의 덕양산, 남쪽의 관악산, 북쪽의 북한산을 외사산 이라고 하였다. 또한 동쪽의 낙타산, 서쪽의 인왕산, 남쪽의 목멱산, 북쪽의 백악산을 내사산 이라 말한다.
남쪽의 목멱산은 서울 내사산의 하나로 지금 서울 중심가 남쪽에 있는 서울타워가 있는 남산이다. 남산을 목멱산이라고 한 것은 산정상에 목멱신사가 있었던데서 얻어진 이름이다.
한양으로 천도후 북산인 백악산신을 진국백(鎭國伯), 남산의 산신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관직을 주어 목멱대왕을 나라에서 제사를 받들게 하니 이 목멱대왕 사당을 목멱신사라 하였다. 이 목멱신사가 있는 산을 목멱산으로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 목멱신사는 흔히 국사당(國師堂)이라고 불렀는데 남산 정상 동쪽 넓은 터(지금의 남산박물관)로 추정한다. 도성 남쪽에 있다하여 남산으로 더 알려졌다.
[남산봉수대의 역할] 조선 세종 5년(1423) 남산의 정상 5곳에 전국 다섯 갈래로 봉수대를 설치하였다. 남산의 옛 이름을 따서 목멱산 봉수대라 하였다. 서울에 위치 한다하여 경봉수대라 부르기도 하였다(경국대전).
전국 다섯 갈래 봉수로에서 도달하게 되는 각지의 상황을 병조에 종합 보고하는 중앙 봉수대로의 역할을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봉수대였다. 남산 정상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하여 제1봉수로, 제2봉수로, 제3봉수로, 제4봉수로, 제5봉수로의 5개 방향으로 연결되는 봉수대가 있었다.
현재 봉수대는 없어지고 옛 청구도 등의 관련자료를 종합하여 남산 정상에 봉수대 1개소를 복원해 설치한 것이 지금의 남산봉수대이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남산봉수대는 병조 무비사에서 관장하였으며 봉수군(봉화군, 봉군, 봉졸)과 그들을 통솔하고 감독하는 오원(五員)을 배치하여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관리하였다. 남산봉수대의 오원이 병조에 종합보고하면 병조에서는 매일 승정원에 알려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 서울 남산(목멱산) 봉수대
봉수대의 시설인 연대(煙臺)는 조선시대의 기록에 따르면 높이가 7.5m, 둘레가 21m이며 연대의 아래 4면은 각 9m라고 전해지고 있다. 한편, 도성에서는 따로 병조에서 사람을 배치하여 남산봉수대를 지켜보고 있다가 위급한 상황은 승정원에 알려 임금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남산은 다섯 갈래 전국의 봉수로와 연결
남산 제1봉수대(180곳 봉수연결) 조선 한성부를 5부 52방으로 구획한 그 52방 중 명철방 방향으로 남산 남부 쪽 산마루에 있어(지금의 미군통신탑 추정) 중랑구 아차산(봉화산) 봉수대와 연결하여 강원도, 함경도 방면을 통하였고 여기에 연결되는 직봉이 120곳 간봉이 60곳 이었다. 명철방은 지금의 을지로5·6·7, 방산동, 오장동, 광희동1·2가, 쌍림동, 장충동1·2가, 충무로5가 각 일원에 해당한다.
남산 제2봉수대(163곳 봉수연결) 성명방 방향으로 뻗은 산줄기의 뿌리를 이루는 산마루에 있어(남산골 한옥마을이 보이는 곳) 경기 성남시 천림산(천천령) 봉수대와 연결하여 충청도, 경상도 방면을 통하는 것으로 여기에 연결되는 직봉이 40곳 간봉이 123곳 이다. 성명방은 지금의 입정동, 을지로4가, 산림동, 주교동, 인현동1·2가, 충무로2·3가, 예장동, 필동1·2가 각 일원에 해당한다.
남산 제3봉수대(93곳 봉수연결) 훈도방 방향으로 산 줄기의 뿌리가 되는 산마루에 있어(지금의 봉수대 복원위치) 서대문구 안산 무악의 동쪽 봉우리의 봉수대와 연결하여 황해도, 평안도 방면의 육로를 통하는 곳으로 직봉이 71곳 간봉이 22곳이다. 훈도방은 지금의 을지로3가, 수표동, 관수동, 저동2가, 입정동, 초동, 충무로2·3가, 예장동, 주자동 각 일원에 해당한다.
남산 제4봉수대(106곳 봉수연결) 명례방 방향으로 뻗은 산줄기의 뿌리가 되는 산마루에 있어(지금의 남산 케이블카 정상부근 추정) 서대문구 안산 무악의 서쪽 봉우리의 봉수대와 연결하여 황해도, 평안도 방면의 해로를 통하는 것으로 직봉이 71곳 간봉이 35곳이다. 명례방은 지금의 충무로1·2가, 장교동, 저동1가, 남산동1·2·3가 각 일원에 해당한다.
남산 제5봉수대(95곳 봉수연결) 회현방 방향으로 뻗은 산줄기의 뿌리가 되는 산마루에 있어(지금의 남산 분수대 추정) 양천구 개화산 봉수대와 연결하여 충청도, 전라도 방면의 해로를 통하는 것으로 직봉이 60곳 간봉이 35곳이 있었던 곳이다. 회현방(호현방)은 지금의 태평로2가, 소공동, 명동1·2가, 북창동, 남대문1·2·3·4·5가, 수표동, 회현동1·2·3가, 충무로1가, 을지로1·2가 각 일원에 해당한다.
이들 5개 봉수로가 도착하는 서울남산 봉수대 5곳은 왕궁에서 볼 때 한눈에 보이는 장소이다. 남산의 봉수대는 500여 년 간이나 존속 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남산의 북쪽 산기슭 일대에 왜군들이 머무르게 되었다. 왜군은 서울 성안으로 들어와 차지함과 함께 북촌의 왕궁과 관아 주택들을 폭력 등으로 억지로 빼앗아 갔다.
이 남산 산록지역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봉수대가 그들에 의해 파손됨으로서 임진왜란 이후에 봉수대의 기능 마비를 초래하게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봉수제도가 폐지된 후에도 1930년대까지 남산 정상(남산 박물관 위치로 추정)에는 5개의 봉수대 자리가 일렬식으로 남아 있었으나 6.25전쟁으로 모두 파괴·소실되었다.
제1봉수로, 중랑구 아차산봉수대(봉화산)
중랑구 아차산봉수대의 소재지는 서울 중랑구 묵동 산46-19번지(봉화산, 160m)로 1993년 11월 30일 서울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었다.
▲ 제1봉수로, 중랑구 아차산봉수대(봉화산)
[아차산봉수대 지명유래] 조선시대의 문헌에 아차산 주봉위에 북쪽으로 벗어난 능선의 서쪽 봉우리에 있다고 표시되어 있는 이곳이 아차산 봉수대터로 밝혀졌다. 한동안 광진구 아차산성 위에 봉수대가 있는 것으로 믿어 왔으나 대동여지도나 옛지도에 나타난 아차산봉수의 위치는 아차산 서쪽에 있어 그 위치가 현재의 봉화산임이 확인 되었다.
그리고 양주부의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북쪽으로는 대이산과 서쪽으로는 도성의 목멱산에 이어진다는 기록이 있어 봉화산의 원지명이 가구산 이였다(세종실록지리지). 아차산봉수는 북으로 대이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도성의 목멱산 제1봉수대에 응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
아차산 봉수대는 봉화산 봉수대라고도 하는데 봉화산 위에 봉수대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평지에 도출되어 있는 구릉지 이다보니 봉우재라고도 한다. 봉화산은 불암산과 용마봉으로 이루어지는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낮은 산이지만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 전망이 좋아 봉수를 올리면 눈에 잘 띄는 곳이다. 봉화산 정상부근에는 고구려 때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둘레 200m, 높이 2m 정도의 석축보루가 있다.
[아차산 봉수대의 역할] 아차산 봉수는 제1봉수로에 속하여 함경도 경흥에서 시작하여 강원도를 거쳐 양주의 대이산(한이산)에서 온 봉수를 남산 제1봉에 최종적으로 보고하던 제1봉수로의 마지막 봉수대이다. 직봉(直烽)이 120곳 간봉(間峯)이 60곳의 제1봉수로이다.
봉화산 정상부에는 본래의 봉수시설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서울정도 600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1994년 11월 모형을 설치하였다. 기록에 4개의 발화하는 석축대 시설이 있었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후대에 모두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봉화산 정상 바로 아랫부분에 봉화산 도당굿을 준비하는 민가가 한 채 있는데 그 한쪽 기단부를 이루는 곳에 길이 20m, 높이 1m 정도의 석축단이 있다.
세종실록에는 봉수대에 가옥을 지어 병기와 아침 저녁으로 공급하는 물과 불을 담는데 필요한 그릇을 보관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봉수대와 가까운 거리에 가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봉수대 옆 산신각 자리가 옛날 봉수군들이 사용하였던 가옥으로 추정된다. 400년 전부터 주민들의 도당굿과 산신제를 지내던 곳이기도 하다. 1992년 화재로 소실된 산신각 자리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 있다. 무형문화재 제34호 봉화산 도당굿(2005.1.10.일 지정)이 있는 곳이다.
제2봉수로, 성남 천림산봉수대
성남 천림산봉수대의 소재지는 경기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산35번지 일원(천림산, 170m)으로 2002년 9월 경기도 문화재 제179호로 지정되었다.
▲ 제2봉수로, 성남 천림산봉수대
[천림산봉수대 지명유래] 천림산은 서울지명사전에서 서울 서초구 신원동과 성남시 금토동 일대에 있는 월천현(천천현) 봉수대가 있는 곳으로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산 지명이다.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성남시 금토동과 상적동 옛골 간의 청계산 동쪽 기슭인 낮은 구릉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청계산의 주봉인 망경대와 국사봉 사이의 봉우리가 봉수대가 있는 방향으로 길게 뻗어 내려오면서 완만한 능선에 평지를 이루고 있는 목배등능선 일원이 바로 천림산이다. 천천산봉수(세종실록지리지), 천천현봉수, 월천현봉수, 천림산봉수(중정남한지) 등으로 여러 차레 명칭 변경이 있었다.
[천림산 봉수대의 역할] 천림산 봉수는 제2봉수로에 속하여 부산 다대포진 응봉에서 보내온 봉수는 경상도, 충청도를 통하여 용인 석성산 봉수에서 보내온 신호를 받아 최종 남산봉수대 제2봉에 신호를 보냈던 제2봉수로의 마지막 봉수대이다.
제2봉수로는 직봉이 40곳 간봉이 123곳으로 일본의 동향을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봉수의 전체 규모는 둘레가 80m 가량이다. 봉수대 아래쪽에는 봉수를 올릴 때 사용했던 쑥을 기르던 밭의 흔적과 봉군들이 생활했던 터도 발견되었다.
경기도 광주군읍지 장서각 도서(1846년, 중정 남한지) 봉수조에 의하면 이 봉수에 근무하였던 봉수군의 인원은 봉군 25명, 봉군보 75명이라 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봉군 5명이 조를 이루어 5교대로 월평균 6일씩 근무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봉군보 75명은 실제 근무를 하지 않은 대신 봉군들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제3.제4봉수로, 서대문 무악봉수대(毋岳烽燧臺) 서대문 무악봉수대의 소재지는 서울 서대문구 봉원동 산1(안산, 296m)로 1993년 9월 20일 서울특별시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었다.
▲ 제3·제4봉수로, 서대문 무악봉수대
[무악봉수대 지명유래] 서울 서대문구 봉원동 안산(무악산) 정상에 있는 봉수대이다. 안산(鞍山)은 낮은 산으로 인왕산자락에 솟아오른 바위 산이다. 형상이 말안장처럼 생겼다 해서 무악(毋岳), 갈마재로도 불렸으며 정상에 봉화대가 있어서 봉우재로 부르기도 한다.
안산 정상에 자리잡은 봉수대에서는 서울 시내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무악봉수대는 동봉수와 서봉수의 2개의 봉수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중 동봉수대는 서울 정도 600년 기념사업 일환으로 1994년 8월 모형을 설치하여 서울시 기념물 제13호로 지정하였다.
[무악 동봉수대(毋岳東烽燧臺)] 무악 동봉수는 제3봉수로에 속하여 조선 세종 24년(1438년) 무악산에 만든 봉수대 가운데 동쪽 봉수대이다. 평안북도 강계에서 시작하여 한반도 서쪽의 황해도와 경기도 내륙을 따라 고양 독산봉수를 거쳐 무악동봉수에서 남산봉수대 제3봉으로 최종 연락하는 봉수대이다.
터 만 남아있던 것을 서울정도 600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1994년에 복원하였다. 이 봉수대의 면적은 381㎡, 상부 연대(烟臺) 108㎡, 하부연대 307㎡ 봉화연조대의 높이 3.2m로 자연석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직봉 78곳 간봉 22곳을 거치는 제3봉수로이다.
[무악 서봉수대(毋岳西烽燧臺)] 무악 서봉수는 제4봉수로에 속하여 동봉수대로부터 70여 미터 떨어진 서쪽 산정상에 현재의 통신탑이 자리한 곳에 있었던 것으로 무악 서봉수대이다.
무악산은 서쪽으로 서해안지역으로 펼쳐지는 김포평야를 한눈에 볼 수 있고, 고양 고봉산봉수에서 전달받아 남산봉수대에 직선으로 이어져 봉수대의 위치로 적합하였다. 평안도 의주에서 시작하여 서해안을 따라 직봉 71 간봉 35곳을 거쳐 무악 서봉수에 전해져 남산 제4봉으로 최종 보고되었다.
제5봉수로, 강서구 개화산봉수대(開花山烽燧臺) 개화산봉수대의 소재지는 서울 강서구 방화동 산153-1(개화동 산91-4, 132m)이며, 2013년 11월 모형이 설치되었다.
▲ 제5봉수로, 강서구 개화산봉수대
[개화산봉수대 지명유래] 서울 강서구 방화2동(개화동)에 있는 낮은 높이의 산에 있는 봉수대이다. 원래 이름은 주룡산, 개화산(開火山), 개화산(開化山), 봉화뚝 이라고도 한다. 산의 형상이 꽃피는 형국이라 하여 개화산이라고 한다.
개화산은 낮은 산이지만 전망이 좋아 남산이 또렷하게 보여 한강에서 전망 좋은 5대 명소중 하나로 봉수대가 자리했었다. 더구나 한강건너 행주산성이 있어 임진왜란 당시에는 군사적 중요한 요충지 역할을 했던 곳으로 여겨진다. 신라시대 주룡(主龍) 선생이라는 한 도인이 이 산에 살면서 구일용산음이라 하였으므로 주룡산 이라고도 하였다.
[개화산 봉수대의 역할] 개화산봉수는 제5봉수로에 속하여 서해로 빠지는 한강서부와 서울을 잇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던 조선시대 봉수대로서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개화산 봉수는 동쪽으로 남산 제5봉과 응하고 서쪽으로는 김포현 북성산과 응한다 라고하여 봉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라도 순천의 방답진(防踏鎭)에서 봉화가 시작하여 전라도와 충청도 해안가를 거쳐 경기도, 김포, 개화산봉수에 이르러 남산 제5봉으로 최종 보고되었다. 전라도, 충청도 방면의 해로를 통하는데 직봉이 60곳 간봉이 35곳이다.
개화산 봉수터에는 지름 약 10m의 타원형 흔적만이 확인 되었다. 개화산 봉수대는 원래 개화산 128m 정상에 자리해 있었다. 그러나 구한말 봉수대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나중에 군부대가 들어섰다. 원래 봉수대가 있었던 터에 1991년 1월 표석을 세웠다. 봉수대 재현의 필요성이 생기면서 이 곳으로부터 250m 정도 떨어진 봉화정 옆에 처음의 봉수대가 아닌 상징적인 의미로 높이 2m, 폭 1.5m의 봉수대 모형 2기를 2013년 11월 설치하여 봉수대 터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봉수제도는 4차 산업혁명의 기반
봉수제도는 적의 침입 등 나라의 위태로움을 전달하는 것만 아니라, 평상시 나라가 평화로움을 알려 백성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였으므로 생업안정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4차 산업혁명을 통해 통신이 모든 산업과 생활로 연결되어 우리가 쉽게 느끼는 편리함은 옛날 불을 이용하여 전국 통신망을 구성하였던 봉수제도가 최첨단 통신의 기반이 된 것이다. 앞서 보았던 봉수제도는 과학적이며 체계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현대 최첨단 통신의 시초였다.
이세훈 KT 마이크로웨이브중계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