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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10월 22일 한 일본인 역사학자가 평양중학교 역사진열실에 들어섰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 유물을 발견한 인물은 세키노 타다시[關野貞:1867년~1935년]. 그에겐 여섯번째 찾아온 우연이었고 행운이었다. 이 유물의 중요성은 거기에 새겨진 글자…….
‘나는 대정 12년(서기 1923년) 10월 22일 평양중학교의 진열실에 보존된 동종의 동물 고리 옆에 아래와 같은 3행의 각명(刻銘)을 발견하였다.’
한문체로 된 3행의 명문(銘文) 해독 결과 기원전 41년 전한(前漢) 태종(太宗) 효문황제(孝文皇帝) 시기에 만들어졌다하여 효문묘동종(孝文墓銅鐘)이라 명명되었다. 발견되기 3년전 평양외곽 선교리에서 철도선로 부설공사 중에 목곽묘(木槨墓)로부터 우연히 출토됐다는 이 유물은 이때부터 역사적 유물로 화려한 조명을 받게 된다. 이른바 낙랑군(樂浪郡)이 오늘날의 평양에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제1급 유물로 인정된 것이다.
정인성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효문묘동종의 유물은 세키노를 포함하는 당시의 일본 역사학자들이 낙랑군재평양설(樂浪郡在平壤說)을 이야기하는 아주 중요한 물적인 증거가 되었던 건 분명하죠."
복기대 국제뇌교육대학원 국학과 교수 "효문묘동종, 그러니까 중국 역사에 나오는 효문황제 있잖아요. 그 동종이 거기서 나왔다고 그러면 확실하게 중국의 영역이 거기까지 도달했다라는 표현을 해줄 수 있는 하나의 상징적인 유물이 되었던 것이죠."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져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고대사. 일본 야마토 정권의 한반도 남부 지배와 낙랑군(樂浪郡)·대방군(帶方郡) 구도가 당시 이렇게 완성되어 갔으며, 그 중심에 이러한 유물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 평양지역의 낙랑군 열기는 정점에 이르러 1923년과 24년 사이에 6백여기 이상의 이른바 낙랑고분이 도굴되는 초유의 사태를 초래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낙랑유물들, 특히 명문이 있는 유물들이 천문학적인 가격에 팔리면서 온갖 모조품들이 판을 치기 시작했다.
정인성 교수 "일제강점기에 이런 위작들이 엄청나게 만들어집니다. 특히 청동물건, 그 다음에 기와, 제일 많은 게 명문이 들어간 물건들은 비싸거든요. 이런 물건들은 필사적으로 만들 수 있는 거죠."
이런 분위기 속에서 효문묘동종의 인기 또한 가히 폭발적이었다. 이 유물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신경전이 당시 경성박물관과 평양 사이에 벌어진 것이다. “총독 각하, 이 동종을 만약 누군가가 평양으로부터 옮겨갈 때에는 평양부민은 부민대회를 열어서 반대하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이후 이 동종을 비롯한 낙랑유물들을 전시하기 위한 별도의 공간이 마련되니 일명 낙랑박물관으로도 불린 평양부립박물관이 그것이다.
이러한 일들의 중심에 그가 있었다. 세키노 타다시, 그는 누구인가?
정인성 교수 "어쨌거나 한반도를 일본 땅으로 영원히 지배해야 하기 때문에 적어도 한반도에 있는 유적 상황, 오래된 건축물의 상황을 폭넓게 조사하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국가에서 파견한 사람이고 그렇죠? 국가기관인 동경제국대학의 교원을 보낸 거에요."
그렇게 해서 그 결과물들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주관하에 책으로 계속 발간되었으니 조선 역사의 첫 장은 낙랑군(樂浪郡)으로 장식됐다. 이러한 조사 작업을 이끈 세키노를 중심으로 한 야츠이 세이이치[谷井濟一] 등 일단의 학자들은 이른바 ‘세키노 조사단’으로 불렸다. 일년에 한두번씩 잠깐 다녀가는 일정임에도 그들의 행동반경은 놀라울 만큼 넓었다. 1902년부터 시작된 이 여정의 결과물들도 인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민족의 고대사가 만들어져 간 것이다.
세키노 조사단에 의해 특히 1911년부터 시작된 낙랑군 관련 증거 유적 유물들의 관심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리고 예정된 것인양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우연의 결과물들이었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이 발굴보고서만 해도 이러한 발견들이 모두 우연에 의한 것이었음을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일본 사람들이 마치 신의 손처럼 움직이면 움직이는대로 2천여년 동안 아무도 발견못했던 게 하루만에 발견하고 우연히 발견하고 그 발견한 것들을 조금만 세밀히 들어가보면 상당히 의심스럽단 말이죠."
그랬다. 의심스러웠다. 효문묘동종(孝文墓銅鐘)의 경우 이 두 보고서에 실린 사진이 달라 보인다.
정인성 교수 "이거는 복제품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엔 똑같은 진품이라고 제시를 한 것 같네요."
똑같은 진품이라 제시된 이 사진들, 그 속에서 이 두개가 달라 보인다. 점제현신사비(粘蟬縣神祠碑) 또한 마찬가지였다. 달라 보이는 두 장의 사진, SBS-TV 다큐멘터리팀은 발견 이후 지금까지 한번도 한국 학계에서 그 진위여부를 검증하지 않았던 점제현신사비와 효문묘동종의 진실을 추적해보기로 했다. 이를 위해 가능한 한 이 두 유물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하는 각 분야 전문가를 섭외했다. 이 유물들이 가지는 역사적 가치에 대한 선입견을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효문묘동종의 경우 서로 달라 보이는 유물이 같은 것이란 전제하에 편의상 명문이 있는 부분을 앞, 명문이 보이지 않는 이 사진의 경우를 뒷부분이라 부르기로 한다. 유의할 점은 이 동종의 경우 밑부분 3분의 1이 이처럼 깨어진 것으로 발견됐다는 것이다.
다카쿠 겐지 일본 센슈대학교 교수 "이것이 앞부분이고 이것이 뒷부분이네요. 이곳이 부셔져 있어서……, 명문이 씌여 있는 것은 이 부분입니다. 사진상으로는 이 앵글입니다. 이 부분이 남아 있어서 고고학 사진은 부서진 부분이 안 나오게 찍는게 기본입니다."
서로 달라 보이는 이유는 동종의 앞면과 뒷면을 찍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고미술품을 사고파는 상인들은 누구보다 물건 감식안을 가져야 한다. 위작품을 사면 큰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이런 상인들의 연합체를 이끌고 있는 김종춘 회장의 감식안에는 어떻게 보일까?
김종춘 한국고미술협회장 "지금 눈이 다르지 않습니까? 이것하고 눈이 여기가 이렇게…, 그리고 만약 이쪽이 뒷면이라면 눈 자체가 이렇게 내려왔고 꼬리가 여긴 내려오지 않았어요. 여기도 보면 위의 이 부분이 뚜렷하게 윤곽이 나타나잖아요. 여기는 없지 않습니까? 저는 다른 물건이라고 봐요. 그럼 여기에서 여기까지 다 깨졌는데, 이 뒤에도 지금 깨졌다고 봐야 하는데 여기에선 깨진 흔적이 없잖아요."
한쪽은 깨진 흔적이 분명한데, 다른 사진은 깨어진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물건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중앙대학 첨단영상연구원의 황민구 선임연구원은 각각 동종거리와 아래 테두리 선까지의 픽셀 비율을 측정했다. 그 비율은 같은 라인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같은 물건이라면 사진상의 왜곡을 감안하더라도 같은 비율이 나와야 한다는 설명이다.
황민구 중앙대학교 첨담영상연구원 선임연구원 "그래서 아까 이 두개를 봤을 때는 1:2:3, 1:2:4 거의 같다고 보시면 되거든요. 지금 이 사진 같은 경우에는 이 부분이 1:2:0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같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이 부분에서…"
이 비율만으로 추정하면 뒷면 사진은 다른 물건으로 판정될 수 있었다.
황민구 박사"사진에서 봤을 때도 어느 앵글에서 찍었든간에 그 비율은 다 똑같이 나와야 합니다."
서울예술대학의 황선구 교수는 사진을 보는 순간부터 단정을 내린다.
황선구 서울예술대학교 사진학과 교수 "이것 같은 경우는 전혀 다른 사진이죠. 왜냐하면 이 물건의 모양은 같지만 아무리 카메라 앵글을 바꾸고 조명을 바꾼다고 해도 이 부분 자체가 나와 줘야 되거든요. 그런데 전혀 안 나왔잖아요? 이 부분은 안 깨진 상태잖아요? 그러니까 이것과 이것은 다른 물건을 찍은 사진이겠죠. 전혀 깨진 부분이 없이 그대로 다 있는데……."
SBS-TV 다큐멘터리팀 "이건 사진을 분석할 필요도 없는 건가요?"
황선구 교수 "그렇죠. 전혀 분석할 필요도 없죠. 그냥 전혀 다른 물건을 찍은 사진이죠. 벌써 고리가 이만큼 올라가잖아요? 이건 고리가 밑에 있고……."
육안으로도 확연하게 달라 보이는 이 두 개의 물건은 비록 사진상의 왜곡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문양뿐만 아니라 크기 자체가 달랐다. 사실 더 이상 분석을 진행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정도다. 이로써 효문묘동종(孝文墓銅鐘)은 앞면과 뒷면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개가 존재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당시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SBS-TV 다큐멘터리팀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김종춘 회장 "이거하고 저거하고 조각 자체가 완전히 다르군요."
SBS-TV 다큐멘터리팀이 같은 물건이라고 의심치 않았던 동종의 명문이 있는 앞부분 전면 사진과 부분 사진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하게 살펴봐 줄 것을 부탁했다. 긴장된 시간이 흘렀다.
김종춘 회장 "이건 아니에요. 달라요. 조각 자체가 전혀 다른데요. 여긴 눈인데 눈 언저리가 여기는 또록또록하니 탁 뚜렷하게 나와 있고 여기는 없지 않습니까?"
같아야 할 동종 귀면의 눈 부위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김종춘 회장 "이거는 눈알을 덮었지 않습니까? 여기는 공간이 떨어져 있지 않습니까? 1밀미미터 이상 떨어져 있고 이거는 눈알을 딱 덮고 가렸지 않습니까? 이건 후에 수리를 했다면 몰라도 이런 물건에 수리를 할 리가 없거든요. 저는 분명히 이건 아니라고 봅니다. 이거하고 저거하고는 다르다…"
SBS-TV 다큐멘터리팀의 눈에도 이제는 그 차이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면 사진분석상으로는 어떻게 나올까? 그래픽 장치를 이용해 두 눈 부위를 겹쳐 보았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일정부분 왜곡을 감안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형태상의 왜곡은 있을 수 있으며 그것으로 두 유물의 같고 다름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황민구 박사 "네 눈알 부분은 확실히 달라 보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여기 보면 알겠지만 눈썹 부분이 이렇게 확 튀어나왔잖아요? 뒤의 이미지를 보게 되면 눈 부분이 눈 동공보다도 눈썹이 더 뒤로 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되지요."
두 문양을 옆에 나란히 놓고 비교해보자. 그 차이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진상의 왜곡 현상을 감안하더라도 이미지의 차이로 보아 결코 같은 유물로는 판단되지 않았다. 그러면 이제 효문묘동종의 사진은 서로 다른 물건이 3개가 되는 것인가? 글자 부분을 비교해 보고 싶었다. 왜곡된 현상을 최대한 보정해서 글자 부분을 서로 겹쳐 보았다.
황민구 박사 "그래서 지금 두 개를 비교해 보았는데요. 불투명도를 조절해서 두 개가 어떻게 많이 다른가를 비교했는데, 지금 보시면 알겠지만 다른 점이 보이시나요? 거의 똑같은 문구 형태입니다."
명문 부분은 또 거의 일치를 보이고 있었다. 완벽하게 다른 물건이라 하기엔 애매해지는 순간이었다. 고서체, 특히 중국 한대(漢代) 와당(瓦當) 명문(銘文)의 전문가인 허선영 안산대학교 교수는 서체문을 지적했다. 예서체(隸書體)로 된 명문 중에 ‘면(免)’과 ‘조(趙)’라는 글자가 기원전 41년에 제작됐다는 동종(銅鐘) 시기에는 등장하기 어렵다는 지적이었다.
허선영 안산 제1대학교 관광중국어학과 교수 "한국인들은 책받침변이라고 하지요. 이건 거의 흘려 썼잖아요. 그 시대에 이렇게 흘려 쓴 글씨를 찾기 힘들 것 같아요. 이 ‘연(年)’ 글자에서 ‘화(禾)’자에 맨 위의 편방이 여기는 꺾여 있죠. 그냥 보아도 꺾여 있는데 여기는 안 꺾여 있어요."
다음으로 허선영 교수가 지적한 것은 두 명문간의 글자 차이. 특히 ‘연(年)’자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허선영 교수 "어쨌든 ‘연(年)’자는 확실히 달라요. 이거하고 이거랑 확실한 거 같고요."
두 명문간의 ‘연(年)’자는 확실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사진상의 왜곡이 아닌 한 같은 물건이라면 글자 한자 한획조차 달라서는 안 된다.
SBS-TV 다큐멘터리팀 "선명도는 어떻습니까?"
황선구 교수 "아주 깨끗하네요."
당시 전한(前漢) 태종(太宗)의 문묘(文廟)에 사용됐을 이 동종이 평양 인근의 목곽묘에서 출토된 것에 논란이 일었다. 그래서 발견 1년 후인 1924년에 진술조사가 작성되기도 했다.
황선구 교수 "아니 세상에 2천년이나 되었는데 이렇게 선명하게, 전혀 부식이 안 되게, 여기도 이렇게 이런 상황이 된다는 게 거의 만들어진 듯한 느낌이 드는군요. 이 글씨는 느낌이 너무 다르지 않아요? 여기는 부식되어서 이렇게 다 뭉게졌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이게 나중에 글씨를 새겨 넣은 게 아닌가 저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지금까지의 결과로 보면 역사적 유물로 한 하나여야 할 효문묘동종(孝文墓銅鐘)은 2개 또는 3개까지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SBS-TV 다큐멘터리팀은 효문묘동종이 날조됐다고 판단내릴 수밖에 없었다.
정인성 교수 "제가 최근에 논문으로 썼지만 대방태수(帶方太守)라고 하는 장무이묘(張撫夷墓)는 고구려식 무덤이거든요."
지난해 8월에 정인성 영남대학교 교수는 ‘대방태수 장무이묘에 대한 재검토’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기차를 타고 가던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에 의해 1911년 10월 우연히 발견된 이 장무이묘는 그의 조수 야츠이 세이이치[谷井濟一]가 발굴을 통해 ‘대방태수(帶方太守) 장무이(張撫夷)’라는 명문정도를 수습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대방군의 태수가 이곳에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대방군 치지의 발견은 그 며칠후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그들이 지니고 다녔던 육지측량부 지도를 들여다보던 세이이치가 ‘당토성(唐土城)’이라는 글자에 눈이 번쩍 뜨인 것이다. 그리고 장무이묘와의 관계상 이 토성 일대가 대방군 측이라는 것을 상상하였다고 했다.
정인성 교수 "이 가설이 아무런 의심 없이 쭉 이렇게 정설로 인정되면서 정말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또 하나의 재령강 유역에 있었다는 근거가 되어왔던 것이죠."
세키노 타다시는 이후 재발굴을 통해 무덤 사진들과 실축 평면도를 남겼다. 여기에 따르면 무덤은 전형적인 낙랑고분으로 천정은 궁륭형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궁륭형 천정은 타다시의 상상력에 의한 것으로 그 실체가 밝혀지기까지 1백년이 걸렸다.
정인성 교수 "그런데 누구도 발굴 과정을 꼼꼼하게 따져보는 사람이 없었다는 거죠. 그런데 발굴 과정을 조사해봤더니 사진이 있어요. 이 사진에는…"
대형 판석이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는 사진이었다. 타다시가 바닥 돌로 추정한 이 판석을 정인성 교수는 이렇게 판단한다.
정인성 교수 "천장에서 떨어진 거에요. 그러니까 이 무덤은 벽돌무덤처럼 만들어져 있습니다만 천장은 돌이었다는 말이죠."
이렇게 해서 새로운 복원안이 제시됐다. 대형판석은 천장을 덮는 돌이었던 것이다.
정인성 교수 "이런 벽돌로 몸을 만들고 천장에 돌을 덮는 무덤들이 해방 후에 최근에 북한에서 많이 발굴되었다는 거에요."
그뿐만 아니라 만주 집안현에서도 같은 양식의 고구려 고분이 발견됐다.
정인성 교수 "고구려 무덤으로 사례가 최근에 발굴되었고, 고구려식 무덤으로 봐서 하등 문제가 없는 무덤이기 때문에 대방군의 태수 무덤이라는 이야기는 고고학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죠."
남겨진 한 장의 사진에 대한 재해석. 대방태수의 무덤이 고구려식 고분으로 다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이덕일 박사 "일제강점기 낙랑군의 가장 큰 문제는 낙랑군 자체가 무조건 고대 중국의 식민지이고 낙랑군이 지배했던 평양에서 나오는 물건은 전부 중국식이다 이런 것들을 수십년간 쭉 강조하고 그와 관련된 자료를 양산해왔기 때문에 이게 고착이 되어 버렸어요."
1913년에 발견됐다는 낙랑군 치지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곳의 발견 또한 대방군 치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육지측량부 지도상에서 대동강 인근에 토성리라는 명칭을 보고 그곳이 낙랑군과 관련된 유적지임을 이들 조사단은 이미 상상하고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다시의 명령을 받은 세이이치와 그의 동료는 강을 건너는 그 선상에서 명칭을 재치 확인하고 그들 표현대로 한다면 놀랍게도 낙랑군 유적지란 것을 직감한다. 이때 이들이 낙랑군치지임을 확인한 증거물들은 그들이 그렇게 이름붙인 한식기와들뿐이었다.
세키노 조사단은 아이들에게 상금을 걸고 수집한 기와들은 중국 한대(漢代)의 것들과 완전히 같다고 판단했다.
허선영 교수 "한식기와라고 100% 단정지을 수는 없어요. 일단 딱 맞는 거 하나는 이 구획선 나눈 것밖에는 없어요."
토성리에서 수집된 이 기와들은 중국 쪽과 닮은 점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허선영 교수 "중국 와당을 보면…, 한대에는 이 당심이 이렇게 동그랗거나 저렇게 크지 않거든요. 당심이 이렇게 동그랗고 큰 것은 북방계통 와당, 즉 고구려식 와당밖에는 안 나오고 혹은 내몽골 지역에서도 이런 와당이 조금 나오는데 거기도 당심이 좀 크게 나타나기는 해요. 그런데 이제 이런 건 좀 말려있으니까, 이 문양 같은 건 중국에는 없다고 봐야 옳죠. 이미 우리가 낙랑군이 거기 들어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자꾸 중국 쪽과 맞추려고 하는데 만약 그걸 모르고 거기도 원래 하나의 나라가 있었다라고 한다면, 서로 문화적으로 교류가 있었네 이런 생각이 들지요."
허선영 교수가 이 기와들에서 중요한 특징으로 지적한 것들 중에 양각문 무늬의 기와들이 있었다.
허선영 교수 "이런 식으로 된 게 한대에는 태종(太宗:劉恆) 재위기 이전에만 등장해요."
중국에서 전한(前漢) 세종(世宗) 재위기에는 거의 사라진 양의 뿔처럼 생겼다 하여 양각문이라 이름 붙여진 이 기와들이 토성리에서 다량으로 출토된 까닭은 무엇일까?
허선영 교수 "이렇게 많은 양각문이 그 시대(낙랑군(樂浪郡)이 설치됐다는 전한(前漢) 세종(世宗) 시기)에는 나타나지 않는데 중국은 평양 일대에서 왜 이런 양각문 형태를 썼느냐 이런 의문이 들고 여기 보시면 다예요."
당시 낙랑군치지(樂浪郡治地)가 되어버린 토성리, 거기서 출토된 한식기와는 이처럼 의문점이 많다. 낙랑군치지 발견 3일 후에 점제현신사비(粘蟬縣神祠碑)가 발견된다. 실로 우연이었다.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1권에는 이때 점제현신사비의 모습과 탁본이 사진으로 남겨져 있다.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학계의 평가는 이 점제현신사비의 발견으로 고조선 영토를 흘렀던 열수 및 낙랑군 점제현의 위치가 밝혀져 관련 논쟁을 일단락 지은 것으로 결론짓는다. 발견 당시나 지금이나 이 신사비에 대한 평가가 한결같은 것이다.
이처럼 중요한 점제현신사비는 세키노 타다시의 명령을 받은 이마니시 류[今西龍]에 의해 발견됐다. 그는 이상하게도 일행과 떨어져 혼자서 어을동 토성으로 갔다. 이곳에서 류는 한식문양기와를 찾아보려 했지만 수습한 것은 그저 한대 평기와 몇점 뿐, 극히 실망하던 차에 면장에게 이곳에 뭔가 옛 물건이 없는지를 물었다.
이덕일 박사 "발견한 경위를 보면 면장에게 물어봤더니 면장이 하는 말이 옛날 고비(古碑)가 있는데, 그 비석의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아래에 있는 막대한 황금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면장에게 듣고 가서 발견했다는 것인데……"
류는 그 즉시 어을동 토성에서 4,5백미터 떨어진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들판에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는 이 비석을 발견한다. 이미 황혼 무렵에 글자를 읽을 수 없어 4시간 거리의 용강읍으로 되돌아갔다가 다음날 다시 와서 탁본을 뜨게 됐고 그런데 이때까지는 아무도 이 비석의 중요성을 알지 못할 때였다. 탁본을 지니고 현장을 출발한 류가 평양의 세키노 일행과 합류한 것은 9월 29일 저녁이었다. 세키노 타다시는 등불 아래서 이 탁본 판독을 하여 그 내용에 의해 점제현신사비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것이다.
이마니시 류가 당시 현장에서 찍었을 이 한 장의 사진, 여기에 담긴 정보와 의미를 알아내는 데 SBS-TV 다큐멘터리팀은 많은 시행착오를 해야 했다. 선입견이 올바른 판단을 방해한 것이다. 사진 속의 비석은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비석의 자연스러운 모습은 이와 같다. 글자가 음각된 부분이든 비면이든 같은 색으로 이끼 낀 상태에서 조금씩 달라 보일 뿐이다.
진한용 고려금석원장 "글씨가 희게 보이고 바탕이 검은색인데 일반적으로 비석 상태는 이렇게 나올 수 없다는 얘기죠. 이미 비석을 탁본한 상태에서 그 광경을 증명하기 위해서 어린이를 비석 옆에 세워두고 찍은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인위적으로 종이를 떼어내게 되면 이 글씨가 선명하게 안 보이죠."
조동원 성균관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돌에 대고 직접 먹을 묻힌 게 아니고 한지를 붙인 걸로 판독이 됩니다."
조선고적도보 1권에는 이외에도 두 장의 사진이 실려 있다. 그 중에 처음과 두번째 사진은 같은 것으로 보인다. 해상도가 좋은 사진 한 장을 더 찾아냈는데 그로 보아 이 두번째 사진 역시 탁본을 한 상태에서 현장에서 찍은 사진으로 판명됐다. 즉 이마니시 류는 현장에서 먹을 입힌 상태에서 두 장의 사진을 찍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SBS-TV 다큐멘터리팀은 지금까지 알게 된 정보를 정리할 수 있었다. 첫번째와 두번째는 탁본이 붙은 사진, 세번째는 거기에서 떼어냈을 때 탁본이 되는 것이었다.
조동원 교수 "하여튼 보관은 굉장히 잘 된 겁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다른 화강암과 비교했을 때는 이 상태가 굉장히 좋다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조작됐다고 하기에는 지금으로서는 명확한 증거가 없으니까…"
그런데 이 세번째 탁본이 과연 두번째 사진상에 붙어 있는 탁본에서 떼어낸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편의상 이제부터 이 둘을 구분하여 각각 사진과 탁본이라 부르기로 하자.
진한용 원장 "(사진에서) 떼어낸 탁본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놓고 이 부분만 살펴보자고요. 앞부분의 간지에 대한 거 여기서는 지금 ‘오(午)’자에 대한 글씨만 보입니다. 그러면 여기 ‘무(戊)’자 같은 경우는 판독이 안되고 있어요."
확실히 사진과 탁본은 달랐다. 특히 연대를 추정하는 부분에서 차이가 컸다.
진한용 원장 "그 비석에서 안 보이는 글씨가, 이 한지를 탁본으로 떼어냈다고 해도 나올 수는 없어요. 이러면 그 글씨가 이 탁본도 아니고 별도로 다시, 사후에라도 다시 뜬 탁본이라야만 이야기가 되는 것이지."
허선영 교수 "어떻게 이걸 탁본이 떠지죠? 이렇게 깨져 있는 상태인데 탁본이 되나요? 저는 이거 두 개가 완전히 다르다고 보는데요."
그러면 왜 다른 것일까?
이재순 중요무형문화재 제120호 석상 "이끼가 덜 제거된 상태에서는 아무리 기술이 좋은 사람이라도 거의 탁본이 잘 되지 않는다고 봐야 정확합니다."
이끼의 제거 정도의 차이로 인해 사진과 탁본이 달라질 것이란 설명이다. 그런데 돌이끼는 종류도 다양해서 아예 원석을 상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간단한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비석에서 이끼를 제거하지 않은 채 탁본을 떠보면 어떨까? 비석에 한지를 붙이고 비면과의 밀착을 위해 물을 뿌린다. 그리고 두드려서 한지와 비면간의 공간을 없앤다.
이재순 석상 "이거 한번 보세요. 안에 이끼가 있으면 들어가지 않고 이렇게 늘어져요. 이게 문제라고요. 글씨도 안 보이게 되고 이 한지가 밀착이 안돼요. 이끼가 떨어지면서 이 상태가 되기 때문에 이끼를 제거하지 않고는 탁본을 뜨기 어렵습니다."
이 상태에서 먹을 먹이면 이끼 낀 부분은 검게 나올 수밖에 없다. 탁본을 뜰 때 이끼 제거는 어느 정도 기본이었다. 또한 이 사진상에서 희게 보이는 부분은 이끼 제거가 다 된 부분으로 비석의 흠이나 글자의 음각이 잘 드러났다는 의미였다.
진한용 원장 "잘못된 부분이 없어요. 잘 뜬 탁본이에요."
이재순 석상 "이 정도 상황에 탁본을 찍을 정도면 아주 잘한 탁본이거든요."
결국 사진상의 탁본 상태는 잘 뜬 탁본으로 보아야 했다. SBS-TV 다큐멘터리팀은 다시 미궁에 빠졌다. 탁본도 둘 다 잘했고 이끼 제거도 잘 됐는데 왜 다를까? 혹시 원석이 달랐던 것은 아닐까?
다카쿠 교수 "일단 프로의 입장에서 말씀드려도 될까요? 같은 것처럼 보입니다. 이거(사진) 찌그러진 것입니다. 그 탁본을 뜰 때 탁본을 뜰 시기가 달랐던 것입니다. 이 탁본을 벗긴 것이 이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이것들의 글자는 같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사진상의 왜곡을 보정해 가면서 두 사진을 겹쳐 보았다. 만약 원석이 같거나 다르다면 어떤 결론이 내려지지 않을까 기대를 했다. 하지만 차이는 보였지만 그것으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는 없었다.
황선구 교수 "상당한 기간이 흘렀던 거죠. 자연스러운 상태라면 그렇지 않고, 인위적인 거라면 뭔가 이걸 원본으로 삼아서 이걸 만들어낸 것 같은…. 더군다나 탁본이니까, 사진도 아니고…."
진한용 원장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같은 물건에 손을 댔어요. 이 원돌에 손을 댔다고요. 이게 처음에는 후대에 글씨들이 판독이 안 됐는데 이 탁본 다음에 나온 것이 이 탁본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가 간지와 연호가 분명히 같다는 걸 증명한다는 거에요. 연도 추정이 안 되는데 ‘점제(粘蟬)’ 글자만 가지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여기서 SBS-TV 다큐멘터리팀은 같은 원석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최소한 시간적인 차이가 현저한 두 개의 탁본이 존재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정보가 추가됐다.
진한용 원장 "처음에 비의 내용을 모른다면 (비문에) 손을 댈 수가 없어요. 그런데 비의 내용을 알고 이 글씨를 만들 때는 얼마든지 가능해요. 처음부터 어느 정도 파악을 하고 손을 대면서 가마를 하는 거지."
다카쿠 교수 "이쪽(탁본)은 저도 예상을 못했는데 분명히 어느 정도 해독한 후에 탁본을 떴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본체의 비석은 같은 것입니다."
사진과 탁본의 상태 차이. 1차 탁본을 뜬 다음, 내용 파악을 하고 나서 글자를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지 구상을 한 다음 이루어진 작업이었다. 시간이 많이 걸렸을 것이다. 비를 처음 발견한 이마니시 류가 탁본을 두번 떴을 가능성은 없다. 그는 탁본을 뜬 다음 평양으로 달려갔다. 이틀 후에는 평양에 있는 세키노 타다시와 합류하여 첫 탁본에 대해 해독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현장을 재방문한 사람은 타다시였다. 그는 첫 발견 이후 70여일이 지난 그해 12월 6일 현장을 방문했다고 했다. 만일 이때 타다시가 이 잘 보이는 쪽 탁본의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면 큰 문제점이 생긴다.
먼저 남겨진 기록을 꼼꼼이 살펴보자. 타다시가 점제현신사비(粘蟬縣神祠碑) 앞에 섰을 때 그는 이 사진에 섰을 때 그는 이 사진에 붙어 있었을 첫 탁본으로는 알기 힘든 ‘년 4월 무오(戊午)’라는 글자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읽으려 애쓴 것은 비문의 상부에 있는 어느 탁본에서도 보이지 않거나 깨어져 나간 부분이었다. 두번째 글자는 남아있는 필획으로 화(和)로 추정하고 세번째 글자는 그 아래 글자를 그가 이미 알고 있던 ‘년 4월’이란 글자들과의 간격 등으로 판단하여 이(二)자로 추정해냈다.
이 사진상에 붙어 있었을 탁본만으론 이와 같은 말을 하기가 어렵다. 이쪽 탁본을 이미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만일 타다시가 이때 새로운 탁본을 뜨기 위해 비문을 수정하는 작업을 했다면 그에 따른 비문에 대한 왜곡 또는 조작을 행한 것이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이 대목에서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한 정황은 첫 발견 후 비문을 판독하던 그 시점에서 이미 있었다. 타다시가 보았을 첫 탁본에 의해 점제현신사비라 단정내린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가 한예체(漢隸體)이다. ‘점제(粘蟬)’라는 글자를 두 군데서 발견했으며 문자도 대부분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인데 우선 첫 사진상 탁본에 의해서는 문자를 대부분 읽을 수 있다고 할수는 없다. 또한 사진 쪽에서 나왔을 탁본만으로는 점제란 글자가 두 군데 있음을 발견하기도 어렵다.
첫번째 점제 글자는 판독 가능한 부분이다. 그러나 두번째 글자는 누구도 발견이라는 말을 쓰기가 어렵다. 추정이 가능할 뿐이다.
조동원 교수 "‘제(蟬)’자는 볼 수가 있지만 ‘점(粘)’자는 안 보이죠."
그렇다면 이쪽 탁본에서는 어떨까?
허선영 교수 "여기에 ‘점제’라는 글자가 어느 정도 보이고요, 이쪽도 ‘점제’가 보이네요. 음, 그런데……이거는 힘들어요. 앞 글자가 파손되었기 때문에 뒤의 글자를 ‘제’자로 읽었으면 앞 글자를 이 옆의 편방으로 봤을 때 아, ‘점제’였을 거다 이렇게 유추한 것 같아요."
결국 세키노 타다시는 이때는 볼 수 없었던 탁본을 보고 있었을 가능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첫번째 ‘점제’라는 글자는 비슷한 모양이다. 그러나 두번째 ‘점제’ 글자 상태는 확실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타다시가 처음에 어느 쪽 탁본을 먼저 보았을까 고심하던 그때 허 교수가 뜻밖의 지적을 했다.
허선영 교수 "이거는 지금 보면 완연한, 지금 근현대식 서예가가 예서를 쓰는 거랑 거의 똑같은 것 같아요. 그 정도로 굉장히 완벽한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이거랑 이거는 다른 서체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봐도 같다고는 여겨지지 않아요. 이걸 놓고 이걸 뜬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사진상의 서체는 전형적인 예서체가 아니라고 했다.
허선영 교수 "예서와 해서, 그 다음에 전서, 그 다음에 예변 현상도 조금씩 섞여 있어요. 그런데 예서가 위주로 된 것이고……"
허 교수의 말이 맞는다면 하나의 원석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런데 SBS-TV 다큐멘터리팀이 지금까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이 사진상에 붙어 있었을 탁본이 없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체마저 달라 보이는 이 탁본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순 석상 "아, 그러네요. 이제보니까 진짜 그 탁본이 없어져 버렸네요. 비문 사진만 있고 그 탁본은 없고……, 다른 글씨체의 탁본만 있고…, 그러고 보니까 조금 분위기가 이상한데요."
금석문 발견 후 첫 탁본의 중요성은 더 이상 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이유로든 보존돼 있어야 하고 공개됐어야 한다. 그런데 그토록 중요한 최초의 탁본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황선구 교수 "여러 가지로 봤을 때 누군가가 무언가 조작을 하려고 했든, 뭔가 속이려고 했든, 또 다른 어떤 이론을 세우려고 했든, 사진상으로 봤을 때 정말 앞뒤가 안 맞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또 하나 지적해둘 것이 있다. 세키노 조사단은 판독을 하기도 전에 처음부터 이 비문의 중요성을 마치 알고 있엇다는 듯이 행동했다는 점이다. 글자가 가장 잘 보이는 상태를 만들어 비석 사진을 두 장이나 찍었다. 그리고 그들은 첫 탁본은 없애 버렸다. 의도가 있었다는 뜻이다.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1권에 실린 이 석비에 대한 사진 분석은 여기서 멈췄다. 진위여부는 관련 전문가들의 몫이다. 그러나 이것이 날조됐을 가능성을 현단계에서는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다카쿠 교수 "(점제현신사비가) 만약 두개가 있었다면, 어째서 두개가 존재했던 것일까요? 의미가 그다지 없지 않나요? 원래 없던 것을 (차라리) 날조했다고 한다면 이해가 갑니다만 두개가 있었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나요?"
두가지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만 날조해도 될 것을 두개, 세개를 날조했다고 해서 날조가 아닌 것은 아니다. 날조 증거가 약해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하나만 만들어도 충분한 가짜 유물들을 왜 두개, 세개씩 만들었는지는 SBS-TV 다큐멘터리팀도 의문이었다.
정인성 교수 "이 사람에 대해서 인상을 이야기하자면 PD님이 생각하시는 방향하고는 조금 다를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하여튼 소위 뭐라 그럴까, 그 당시 자기들이 지키려고 했던 원칙을 지키기 위한 그런 노력들은 보이네요."
세키노 타다시는 현 학계의 평가에 의하면 대단히 정확함을 추구하는 학자였고, 세심한 연구자였다. 그가 남긴 발굴 도면 등이 해방 후 한국 학계에 역설적이게도 큰 도움이 됐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 그가 왜 이렇게 어이없는 유물 위조를 했으며 그것도 두개, 세개씩을 만들어 빌미를 제공했는지는 취재 내내 떠나지 않는 의문이었다.
효문묘동종을 발견하던 그 날의 일기를 보자. 동종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기록했다.
정인성 교수 "그 다음날 유물을 도청에 가져와서 촬영을 했네요."
그 즉시 동종 명문의 탁본도 뜨고 사진도 찍었다고 밝혔다. 이것이 명문이 있는 동종 사진이다. 이 사진만 실어 놓았어도 동종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추적할 단서는 없었다. 그런데 누구보다 이 동종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을 타다시는 자신의 저서에 엉뚱한 유물 사진을 실어 놓았다. 그가 편집을 주도한 이 책에서는 하나도 아니고 두개나 서로 다른 동종 사진을 실어놓았다.
황선구 교수 "이 서로 다른 사진을 굳이 두개나 여기에 넣은 이유는 뭐예요? 왜 그렇게 했을까?"
1915년에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고적도보 1권에 첫 장을 넘기면 당시 데라우치 총독의 휘호가 크게 눈에 들어온다. 개이경광(介爾景光). 식민지 조선을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한 상징적인 문구다.
정인성 교수 "결국 (조선은) 일본화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선 결국 이데올로기를 만들어야 하고 역사를 만들어야 하죠."
그러한 학문 외적인 강압 분위기 속에서 만일 세키노 타다시가 진정한 학자였다면 어떤 내적은 갈등을 겪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이때쯤 SBS-TV 다큐멘터리팀은 타다시가 실수를 했든 의도적이든 그가 남겨놓은 흔적을 따라가고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덕일 박사 "이것은 일종의 코드네. 세키노 타다시 코드."
그가 남겨놓은 흔적, 새로운 추적이 시작됐다. 1911년 점제현치지 발견으로부터 시작된 우연의 행진, 그의 책 곳곳에 과도할 정도로 강조된 우연(偶然)들. 우연히 두번, 세번만 겹쳐도 벌써 우연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는 이 우연을 강조함으로써 인위적인 뭔가가 있었음을 역설적으로 전하려 한 것일까? 이 비학문적인 발견의 패턴들 속에 거짓의 코드를 심어놓음으로써 진실된 뭔가를 알리려 한 것일까?
신호등에서 잠시 차량이 멈춰 섰다. 낮보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니 타마레이옌 공동묘지였다. 거기에 그가 있었다. 학자의 양심은 때론 종이 한장보다도 가볍고 때론 바위보다도 무겁다고 했다. 세키노 타다시. 그는 과연 어느 쪽에 서 있었는지 묻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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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 잘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