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무서운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망, 즉 죽음이다.
우리의 삶에서
내일과 내생 중에
어느 것이 먼저
찾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그것을 알면서도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다.
그리고 늙도록 살 수
있을지 확실히 모르면서
늙어서 편안하게
살 궁리라면
재테크니 뭐니 하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최희남(가명: 여, 42세) 씨는
여군 출신의 건강한 성품을
가진 평범한 가정주부이다.
그녀가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기 시작한 것은
1 년전 시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난 후 어느 날부터이다.
그녀는 시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자주 문병을 가서
간병을 많이 했는데,
말기암
상태였던 시어머니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무척이나
고통스러워 했다고 한다.
그런 시어머니를 간병하면서
그녀는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은 했지만,
하루하루 죽음과 시간을
다투는 그 당사자의
처절한 감정에 있어서는
어쩔 수 없는
제 3자의 입장이었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부터
매사에 의욕을 잃어가면서
서서히 우울증에
빠지기 시작했는데,
요즈음 들어서는 유난히
어둠이 싫고 두려워 지면서,
잠이 들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것 같은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다고 했다.
리딩은
그녀의 현재 상태는
시어머니의 빙의령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밝혔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죽기 얼마 전부터
잠드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이유는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것 같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살아 생전,
삶에 대한 애착과
집착으로 만들어낸 상념체가
---(인간의 생각이나 욕망의
방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어떤 비가시적인 형성물)
그가 죽고 난 후에
저승으로 떠나지 못한
혼과 함께 주위를 떠돌다가,
며느리인 최희남씨에게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고유한 영적 주파수가 있는데
그 영적 사이클이 맞는 사람에게는
빙의 현상이 쉽게 일어날 수 있다).
그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이
살아 생전에(죽기 전에)
강한 육체적 욕망으로
자신을 지배하였다면
----(예를 들면 식욕, 성욕,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이나 집착 등)
그 사람은 죽음을 통하여
물질적인 육체를 잃더라도
그러한 욕망이나 애착의
상념은 잃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감정들은 오히려
죽음을 통해서 더 활발해진다.
그 이유는 그 상념체들은
더 이상 움직여야 할
농밀한 물질(육체)의 무거운
분자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앞의 사례에서 다행한 것은,
어떤 문제에 있어 그에 대한
영적 점검과 진단이
바르게 나오기만 하면,
그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
죽음!
죽음은 밥을 먹다가
죽을 수도 있고
차를 타고 가다가
잠을 자다가
죽을 수도 있다.
그 죽음이 언제 어디에서
자신에게
찾아오는 지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죽음과 같이 살면서도
그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어떤 능력자나
권력자도 죽음을
피하거나 이길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은
생명의 종말, 두렵고 무서운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 등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죽음이 무엇인지
진실로 이해 하기 시작하면,
죽음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무섭고 두려운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죽음은 생명의
종말이 아니라
한 생애의 단계에서
다른 생애의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렇게 쉽고 편안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 하는
의문이 앞서지만,
근래에 와서
태어나기 이전의 삶에
대한 증거와 흔적들이
심령과학과
대체의학을 통하여
우리들 앞에
제시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죽음은 분명 두렵고
무서운 미지의 세계이지만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천명에 따라
죽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편안한
안식과 휴식의 시간이다
----(병사나 돌발사에 의해
죽는 사람도 천명에
따른 죽음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사건으로 인해
죽음 직전까지 갔거나,
임사체험을 통하여
죽음의 상태를 간접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에 따르면
그 상태에서 더할 수 없는
편안함과 자유를
느꼈다고 증언한다.
그 예를 한가지 소개하면,
뉴욕의 영화감독
빅터 소로우는
심장마비로 인하여
23분 동안 임상적인
죽음의 상태에 있었다.
그러다가 의료진의 결사적인
노력으로 다시 살아났다.
이전에는 사후의 생에
대해 믿지 않았던
그가 <리더스 다이제스트>
(1974년 10월호)에서
자신의 바르도
(Bardo-죽음의 문턱을 넘는 과정)
체험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두려움이나 아픔을
느끼거나 사고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매우 빠른 속도로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
밝은 빛의 그물 속으로 들어갔다.
내 가 그 빛에 닿는 순간,
그 진동하는 빛은
눈이 멀 정도로
강렬하게 밝아지더니
나를 완전하게
무기력하게 만들면서
흡수하고, 동시에
나를 변형시켰다.
거기에 고통은 없었다.
느낌은 무감각했으며,
나를 거대한 빛의
광장에 데려다 주었다.
그 빛은 나를
유형에서 무형으로,
시간을 뛰어넘은
곳으로 데려다 주었다.
이 새로운 '나는'
내가 알던 내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나로부터
추출된 정수였다.
그러면서도 어렴풋이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나의 개인적인 두려움이나
욕구, 희망, 욕망 속에
묻혀 있었서나
내가 항상
알고 있던 것이었다.
이 '나' 는 에고
(ego)와 아무 연관도 없다.
그것은 궁극적인 것,
변할 수 없고, 나누어지지 않고,
그 무엇으로부터도 파괴될 수 없는
순수한 영혼이다.
'나'는 손가락 지문처럼
완전히 고유하고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무한한
전체(Whole)의 한 부분이었다.
나는 이전에도
거기에 있었다.
진실은 진리에서 나오며
그 진리는
생명이며 영혼이다.
영적 진리에 따르면,
참다운 인간은 영혼이고
그의 육체는 부속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아침이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옷을 입듯이
육신은 영혼이 입는
외피(겉옷)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육신의 일부분 중에
영혼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영혼의 일부분이
육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한평생은 영혼의 길고 긴
큰 평생의
하루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들의 영혼은
어떻게
잘 죽어갈 것인가를
공부하기 위해
한평생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생명이 한시적이기에
그 단절의 두려움 때문에
영생과 깨달음의
종교가 생겨났고,
본능적인 부활의 욕구는
성스러운 신화를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생시에
종교적 신앙을 가져다
본적이 없었다해도
올바른 윤리, 도덕의 길을
따라가며 생을 살아왔다면.
주관적 가치관이 없는 신앙을
일삼은 사람보다는
휠씬 가치가 있는 삶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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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박진여
고구마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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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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