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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먹잇감 동해여진족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때려잡고 다니던 시기에는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이 강성하였고,
동해여진, 일명 야인여진은 소규모 부족들이 난립하여 이들의 먹잇감이 되었습니다.
1605년부터 시작된 우라 부잔타이와 건주 누르하치의 동해여진 강탈전은 수많은 동해여진족들의 목숨을 위협하였습니다.
이에 두만강 일대에 살던 여진족 상당수가 조선으로 도망쳐 조선 국적 여진인이 되었습니다.
여진인의 내투는 이성계가 함경도(갈라전)를 수복/점령하면서부터 이어졌고,
누르하치의 6대조 먼터무의 오도리 부족이 건주로 이주한 이후에도,
먼터무의 동복이부 동생인 소로가무와 부족민 350명은 회령에 정착하며 조선인으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앞서 수차례 언급했듯이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할 무렵 누르하치가 거느리던 여진족 장정은
고작 6만여 명밖에 되질 않았습니다.
누르하치는 만주 일대에 살던 여진족들을 깡그리 모아 거성인 허투아라 인근에 정착시켰습니다.
동해여진의 경우 누르하치 1625년까지 약 5만 명의 남녀가 끌려왔습니다.
이들은 누르하치의 병사들이 되었고, 니루 어전의 약 30%가 동해여진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2. 도망가자! 조선으로!
두만강 일대에 살던 동해여진족은 와르카 부족으로 통칭되었습니다.
누르하치와 부잔타이가 수시로 와르카 부족을 학살하고 끌고 가고 약탈하자
상당수 와르카 여진족들이 조선으로 도주하여 정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인원수는 수십, 수백 단위가 아니며 수천 단위였던 모양입니다.
누르하치는 이들의 송환을 수차례 요구하였고, 사서에는 무려 1천호를 돌려받았다고 하는데
조선의 기록에서는 제가 찾질 못하였습니다. 물론 과장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만문노당 1609년 2월 中
옛날 금 황제의 때에 흩어진 (동해여진) 와르카 부족민이 고려에 들어가서 고려의 경계에 늘어서서 살던 와르카를
수러 쿤두런 한(누르가치)이 조사하며 모두 가져오라! 하며 대명국의 만력제에 글 올려 고소한 후에
만력제는 고려의 임금(광해군)에 말하며 조사하게 하고 구 세대에 흩어진 여러 세대의 버려진 와르카 부족민을
고려 한이 조사하고 수러 쿤두런 한의 51세인 연황색 닭 해(기유년, 1609년) 2월에
와르카 부족민의 1000호(戶)를 구하여서 몰며 보냈다.
3. 뱃사람이 되다.
조선 조정에서는 내투한 여진족들을 전국에 분산 수용하였는데, 상당수가 경기도 서해안 일대에 살았던 모양입니다.
또 이들이 문제를 일으킬까 두려워서인지 누르하치의 소환 요구 때문이었는지
1609년 이해에는 아예 섬으로 이주시키자는 논의도 있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603년 3월 20일
누원(樓院)의 향화호(向化胡)를 경기(京畿) 음죽(陰竹) 등지와 충청도ㆍ경상도 등에 알맞게 분송(分送)하여
그들로 하여금 편히 살게 하고 몇 년간의 식량을 헤아려 지급할 것으로 예조에서 거행하도록 윤허하셨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609년 8월 25일
-지금 경기 감사 김신원(金信元)의 첩정(牒呈)을 보니 ‘용인(龍仁)에 거주하는 향화인(向化人) 박길상(朴吉祥) 등
10여 호의 남녀 합계 80여 명이 고을 5리 안에 있는 장터 큰 길가에 거주해 살아온 것이 이제까지 7, 8년입니다.
-향화 호인(向化胡人)들이 내지에 뒤섞여 있어 끝내 점차 세력이 커지는 걱정은 예로부터 있었다. 이제 마땅히 멀리 떨어진
절도(絶島)에 나누어 두어 진압하기 어려운 폐단이 없도록 해야 한다. 경기 근처에 살고 있는 종족은 점차로 딴 곳으로 옮기라.
해서 이들은 뱃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609년 4월 10일
사간원이 밀계하기를,
“조정이 강화(江華)로 보장(保障)의 땅을 삼고자 하여 마음먹고 설비하는 것이,
어찌 사방이 바다로 둘리고 오랑캐가 뱃길을 잘 이용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고려조가 이곳에 들어가 보장함에 몽고가 끝내 범하지 못한 것이 또한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와 같지 않아 크게 우려되는 바가 있고 바다로 둘린 요해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귀화한 호인(胡人)들이 해서(海西)로부터 경기ㆍ호남ㆍ호서의 해변 열읍에 이르기까지 없는 곳이 없으며,
그중에도 호남ㆍ호서에 더욱 많아 고기잡이로 생업을 삼으면서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드는 자가 날로 불어나,
4도에 퍼져 뿌리박고 있는 배가 2백여 척에 이르고, 해로에 익숙하여 배를 부리기를 말 부리듯하여
실로 우리 나라 사람이 미치지 못할 지경입니다.
만약에 급박한 경보가 있다면 반드시 두 마음을 품어 저들과 상통하기도 할 것이며 바다에 들어가 방해하기도 할 것이니
그 걱정이 어찌 적겠습니까. 조정이 만일 미리 조처하여 변란이 일어날 훗날을 대비하지 않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승정원일기 1625년 11월 17일
향화(向化) 어선이 무려 수백 척에 달하는데 모두 예조에 소속되어 있는지라 서호(西湖)에 남아 있는 배가 많지 않습니다.
승정원일기 1648년 7월 18일
정축년(1637, 인조15) 이후 향화선의 어세(魚稅)는 묘당의 계사로 인하여 본조에서 거둔 지가 이미 10년이나 되었습니다.
주석 : 향화선(向化船) : 귀화한 사람들의 고기잡이배이다.
사실 동해여진이 두만강 일대에 살던 때에 이들은 수렵 채집과 더불어 어업도 병행하고 있었습니다.
후술 하겠으나 이들은 배도 잘 만들고 잘 몰았다고 합니다.
사실 향화선을 모는 사람들이 모두 여진족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한족으로 조선에 들어온 사람들도 있는 듯싶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700년 10월 12일 기사中
-이른바 향화인(向化人)이란 자들은 옛날 중국 사람으로서 표류하여 우리 땅에 이르러 이내 우리의 백성이 된 자입니다.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백성이 된 지가 몇백 년이 되었는지 모르는데, 늘 향화인(向化人)이라 일컫고는
어업(漁業)을 하는 자나 농사를 짓는 자 모두 신역(身役)이 없습니다.
4. 병자호란 동족에게 투항하다!
홍 타이지는 1635년 6월에도 동해여진 정벌전을 펼쳐 후르하 부족민을 끌고 옵니다.
누르하치와 홍 타이지가 근 30년 동안 탈탈 털어왔는데도 몇몇 소수 부족민들은 남아있었던 모양입니다.
홍 타이지에겐 같은 말을 쓰는 동해 여진족들은 잡아오면 귀중한 병력자원이 되었기에
아버지가 하던 방식 그대로 모조리 심양으로 끌고 왔습니다.
하지만 이젠 거의 끝물이었고, 흑룡강 동북쪽 부족민들은 거리가 너무 멀어 방치하기 시작했습니다.
건륭제 당시에도 동북방 부족 50부족 2250호를 통칭하여 허저족이라 명칭하고 관리하였지요.
한편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남한산성을 포위 중이던 도도에게 조선에 살던 여진족 100호가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만문노당 1636년 12월 21일 기사中
1636년 12월 21일에 과일 구하러 보낸 사람이 고려에 들어간 100호에 이르는 와르카인. 예천과 마푸타 등 4명을 데려오며
청하여 오는 것을 마주치고 데려왔다.
와르카인이 아뢰길
<4지역의 군대가 연합해서 도우러 온다>
한 까닭에 8기의 바야라를 2니루당 바야라 1명씩, 2기당 잘안 장긴 1명씩을 내보내서 아르진을 수령 만들고
또 효기(기병)를 1니루당 갑사 1명씩, 1기당 장긴 1명씩을 내보내서 서러를 수령 만들고 (조선군이) 오는 길을 포위하러 보냈다.
만문노당 1636년 12월 30일
같은 30일에 항복한 와르카 마푸타와 예천이 무리를 데리고 성스러운 한에 3번 무릎 꿇고 9번 고두하였다.
예천과 마푸타에 비단의 겉옷 각각 1벌, 염색한 담비가죽의 두건 각각 1개씩 상내렸다.
청실록 1637년 10월 17일
○賜麻福塔巴圖魯葉辰巴圖魯牛彔下一百五十三戶瓦爾喀人。奴僕、牲畜、房舍、器皿什物俱全。以其自朝鮮來歸故也
마푸타 바투루와 예천 바투루 니루의 153호 와르카인에게 노복, 가축, 가옥, 살림살이를 전부 갖추게 하였다.
그들이 스스로 조선으로부터 내귀한 연고였다.
만주어 팔기씨족통보 마푸타(mafuta) 中
gulu fulgiyan i niyalma. jalan halame warka i bade tehe bihe.
구루 풀갼 이 냘마. 자란 하라머 와르카 이 바더 터허 비허.
정 홍 의 사람. 세대 바꾸며 와르카 의 땅에 삶 이었다.
amala coohiyan gurun de dosinafi uthai tuba i harangga oho.
아마라 초오햔 구룬 더 도시나피 웉하이 투바 이 하랑아 오호.
뒤에 조선 국 에 들어가서 곧바로 그곳 의 관하 되었다.
coohiyan gurun be toktobuha manggi. dasame emu tanggv gvsin ilan niyalma be gaifi.
초오햔 구룬 버 톸토부하 망이. 다사머 어무 탕우 구신 이란 냘마 버 가이피.
조선 국 을 평정한 뒤에. 다시한번 1 백 30 3 사람 을 데리고.
coohiyan gurun be waliyafi baime jihe manggi. baitalabure hafan obuha.
초오햔 구룬 버 와랴피 바이머 지허 망이. 바이타라부러 하판 오부하.
조선 국 을 버리고 청하며 온 뒤에. 바이타라부러 하판 되게하였다.
ini gajiha niyalma be niru banjibufi ere omolo bangnami de boxobuha.
이니 가지하 냘마 버 니루 반지부피 어러 오모로 방나미 더 보쇼부하.
그의 데려온 사람 을 니루 생기게하고 1 손자 방나미 에 관리하게하였다.
mafuta akv oho manggi. baitalabure hafan be inu bangnami de sirabuha.
마푸타 아쿠 오호 망이. 바이타라부러 하판 버 이누 방나미 더 시라부하.
마푸타 없게 된 후에. 바이타라부러 하판 을 또 방나미 에 잇게하였다.
*baitalabure hafan[바이타라부러 하판] : 기도위(騎都尉), 관직명.
마푸타는 정홍기 사람으로 대대로 와르카 땅에 살고 있었다.
뒤에 조선국에 들어가서 곧바로 그곳(조선)의 관하가 되었다.
조선국을 평정(병자호란)한 뒤에 다시 한번 133명을 데리고
조선국을 버리고 청하러 온 뒤에 기도위 되게 하였다.
그가 데려온 사람을 니루 만들고 손자 방나미에게 관리하게 하였다.
마푸타 죽은 뒤에 기도위를 또 방나미에게 잇게 하였다.
예천은 장백산 너옌 부족 출신으로 병자호란 140명을 이끌고 투항한 후에 니루 장긴에 임명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푸타는 133명이니 총 273명을 이끌고 옛 동족인 청나라에 투항한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병자호란 직후 달양아라는 무장의 호위하에 청나라로 오게 되었습니다.
5. 죽산산성 전투
향화호인 예천과 마푸타가 조선 근왕병이 모인다는 첩보를 전하자 도도는 서러와 아르진에게 5백 기병을 주어 토벌하게 합니다.
저는 이 서러와 아르진의 부대가 12월 27일경 충청병사 이의배가 죽산산성을 나오다 요격 당한 그 부대로 생각하였습니다.
만문노당 1636년 12월 29일 기사中
1636년 12월 29일 밤 호쇼이 예친왕(도도)이 성스러운 한(홍 타이지)의 곁에 와서 말 올리길
<고려의 바깥 지방의 군대가 그 왕이 포위되었다는 것을 듣고서
도당 1명이 1만 8천 군대를 가지고 도우러 와서 2영 세우고 있었던 것을
쇼토 버이서, 니칸 버이서, 보호토 버이서, 로토 버이서, 아시다르한 낰추 등에 군대 주고 보내서 격파하고 모두 죽였다.
다시 부장 1명이 5천 군대를 가지고 올 적에
다시 쇼토 버이서, 니칸 버이서, 보호토 버이서, 로토 버이서, 아시다르한 낰추 등을 보내서 격파했다.
서러와 아르진을 적이 올만한 길을 방비하러 보냈고 부장 1명이 500 남짓 군대를 가지고 오는 것을 만나고 격파했다.
남한성에 들어가러 오는 군대를 로오사 숑코로 바투루, 우바이 등이 만나고 가로막으며 격파하고 200 남짓 죽였다.
남한성으로부터 400 남짓 나간 군대를 로오사 숑코로 바투루가 격파하였다.>
승정원일기 1636년 12월 24일
이경증이 아뢰기를,
“감사가 수원(水原)에 도착하였다고 합니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병사(兵使)가 4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왔다고 하니, 그 나머지는 감사가 거느리고 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승정원일기 1636년 12월 24일
듣건대, 적병 500여 기(騎)가 병교(竝橋) 근처로 향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반드시 남군(南軍)을 공격하려는 것입니다.
*병교의 위치는 가늠하기 어려움
승정원일기 1636년 12월 28일
충청 감사 정세규가 마희천에 결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적병이 와서 전 영장 이근영이 전사하고 퇴각하였다는 내용의 장계를
올렸다
선전관 민진익(閔震益)이 승려와 함께 충청 감사 정세규(鄭世規)의 장계를 가지고 들어왔는데,
정세규는 본도(本道) 근방 고을의 군관(軍官)을 거느리고 먼저 마희천(麻喜川)에 나아가 결진하였고,
병사(兵使) 이의배(李義培)는 죽산의 성에 들어가 지키고 있다가 장차 진격하려고 할 때에
적병이 갑자기 이르러 전 영장(營將) 이근영(李根永)이 전사하였으므로 그대로 퇴각하여 감히 나아가지 않고 있다고 하였다.
절도사(節度使) 한천군(韓川君) 이공(李公/이의배) 신도비명(神道碑銘) 中
昔在崇禎丙子。淸人東猘。仁祖幸南漢。敵兵圍之數匝。八路援兵。望風奔竄。時則有公淸節度使李公義培提孤軍赴難。
引兵入竹山山城。報聞行朝。上曰。朝臣忠勇。豈有如某者乎。爲之嗟賞。其明日。發向南漢。軍未半出。猝遇賊兵。
前鋒將李次衡,李根永等皆戰死。賊騎遍滿。不可前進。聞嶺南勤王兵且至。欲待此爲聲援。遂還保竹山。有以逗遛不進爲言者。
옛날 숭정 병자년에 청인이 미친개 마냥 동쪽으로 왔다.
인조가 남한으로 행차하였는데, 적병이 수 겹으로 포위하였다.
팔도에서 원군이 왔으나 멀리 바라만 보고 도망쳤다.
이때 공청 절도사 이의배공이 외로운 군대를 이끌고 구하러 가서, 병을 이끌고 죽산산성으로 들어가
행조(남한산성)에 보고하였다.
상이 말하길
<조신이 충용하다 하나 어찌 이의배와 같은 자가 있겠는가?>하며 차상하였다.
그 다음날 남한으로 향하여 출발하였는데, 군의 반이 미처 출발하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적병을 만나 전봉장 이차형(李次衡), 이근영(李根永) 등이 모두 전사하였다.
적 기병이 그득 차니, 전진이 불가하였다.
영남 근왕병이 또한 이르렀다는 것을 듣고는 이를 기다려 성원하고자 하여,
마침내 돌아와 죽산을 보존하였는데, 도망쳐 물러나며 진군하지 않았다 말하는 자가 있었다.
*죽산산성 전투 추정
-날짜 : 12월 27일경
-청군 : 아르진+서러 516명(장교16명, 바야라 167명, 기병 333명)
-조선군 : 충청병사 이의배 4천
-전투상황 : 죽산산성의 이의배가 정세규의 명에 따라 북상하다 청군의 요격을 받고 퇴각함
-피해상황 : 불명(이차형李次衡, 이근영李根永 전사)
6. 남양 전투
그러나 구범진 교수의 저서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에서는
서러와 아르진이 급습한 부대가 남양의 조선군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당시 남양에는 윤계, 윤유, 윤명은, 심지원, 이시직, 신경빈, 박늑 등이 모여서 병력 규합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성안의 병사는 약 300명, 이외에 모병에 자원한 병력이 수군 100명, 육군 80명까지 합쳐 최대 500여명이 있었습니다.
청군은 남양을 12월 27일 급습하여 남양부사 윤계를 죽입니다.
개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남양부사 윤계 인근 마을 4곳에서 근왕병 모집
2. 윤계 관내에 살던 여진족들 박해
3. 여진족 예천, 마푸타 등 4명이 남한산성의 도도에게 와서 남양 근왕병 소식 전함
4. 도도 아르진+서러에게 병력 5백을 주어 남양격파 및 와르카 여진족 100호 호위 명령
5. 12월 27일 남양 급습 → 윤계 살해 → 와르카 여진족 100호 남한산성 옮김
속잡록 1636년 12월 27일 기록中
○ 남양 부사(南陽府使) 윤계(尹棨)가 흩어진 군사를 소집하여 근왕(勤王)을 하려고 하는데,
오랑캐에게 항복한 박이치(朴以致)라는 자가 적에게 밀고해서 불의에 엄습을 당하여 사로잡혔다.
적에게 칼로 찍혀 죽을 때에 꾸짖음이 입에서 끊어지지 아니했다.
승정원일기 1637년 1월 7일 기사中
부교리 윤집(尹集)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의 동생형(同生兄) 남양 부사(南陽府使) 윤계(尹棨)가 임소에 남아 있어야 했기 때문에
신의 팔십 된 조모 및 신의 처노(妻孥)와 여러 형제 가속이 모두 본부(本府)로 피란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방금 이 성의 사람 서흔남이라는 자가 수원(水原)에서 돌아와 말을 전하였는데,
남양(南陽) 지역의 귀화한 호인(胡人)들이 갑자기 들어와 소란을 피워서 부사 및 집안 전체가
모두 희생을 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남급(南礏) 남한일기(南漢日記) 1637년 1월 11일 기록中
或傳南陽守尹棨曾有向化胡禁戢之事向化等請兵相害云
혹 전하길 남양수 윤계가 일찍이 향화호(向化胡)를 단속하고 금한 일이 있었는데,
향화 등이 (오랑캐) 병을 청하여 서로 해하였다고 한다.
석지형(石之珩) 남한일기(南漢日記) 1637년 1월 7일 기록中
今者此城人徐欣男者, 自水原還傳言, 南陽地向化胡人, 猝入作賊, 府使及闔家, 盡陷兵鋒云,
지금에 있어서 이 성 사람 서흔남(徐欣男)이라는 자가 수원으로부터 돌아와 전하여 말하길
<남양 땅 향화호인(向化胡人)이 갑자기 들어와 노략질을 하였는데,
부사와 더불어 온 집안 가족이 모두 병의 칼날에 죽었다!>
하였습니다.
즉 구범진 교수가 추정한 대로 서러와 아르진의 5백 청군이 남양으로 향했다면
죽산산성을 나오던 이의배의 충청도 근왕군을 격파한 부대는 다른 부대가 되는데
12월 27일 당시 남한산성에서 근왕병 격파를 위해 파견된 부대는 로오사 3백, 쇼토 1천, 서러+아르진 5백뿐이었습니다.
도도+요토+양구리는 약3400의 병력으로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었고요.
쇼토의 부대가 2차례 근왕병을 격파하였는데 험천전투와 죽산산성 전투를 쇼토 부대가 공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남양을 급습한 서러와 아르진이 와르카 부족민 273명을 이끌고 다시 동진하여 죽산까지 이동하였다고는 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7. 강화도 물길을 알려주다
강화도 함락 시 청군이 물길과 물때를 어떻게 알고 도강하였냐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였습니다.
이에 대해 구범진 교수는 이 마푸타와 예천 일명 서해안 일대에 살선 향화선을 몰던 뱃사람들이
강화도의 물길과 물때를 알려주었을 것이라 여러 가지 사서의 파편을 모아 설명하였습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당시 여진족들은 서해안에서 어업에 종사했다.
2. 홍 타이지는 훗날 강화도 함락 유산선(뗏목) 건조를 동해여진족에게 맡겼다고 언급했다.
3. 강화도 함락 당시 첫 번째로 강화도에 상륙한 자는 서러와 아하니칸의 부대였다.
4. 서러는 남양 급습 주인공, 아하니칸 니루는 동해여진 출신 니루였다.
5. 강화도 인근에서도 배를 잘 타는 여진족들이 수두룩했다.
6. 도르곤은 강화도 앞 문수산에 도착해서 곧바로 공격하지 않고 홍이포 3~4문으로 위협사격을 하며
썰물이 오길 기다렸다.
7. 11시경 썰물이 오자 조선 수군의 판옥선 등은 움직이질 못했다.
이때를 틈타 도강을 시작하였다.
8. 병자호란 중 와르카 정벌군 편성
게다가 남한산성 포위 중에도 일부 병력을 빼 조선 동북방에 있는 와르카 부족민을 정벌하고
심양으로 끌고 가라는 명령도 내립니다.
이들 부대가 금화 백동전투에서 조선군을 격파하고, 다시 함경도 근왕병을 격파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시고요.
병자호란 내국사원당 29부-함경도 공략군 3700 출발!&강화도 함락!
병자호란 청실록 48부-함경도&와르카 공략군 개선!(안변전투 패전)
전쟁이 끝난 후 병자호란 최대패전 함경도군vs몽고군(안변전투)
총대장 : 니칸
기 | 기주 | 함경도 병력 | 병자호란 참전병력 | 기주 직속갑병 (추정) | 소속국 | |
팔기 만주군 | 8 | 100 | 청 | |||
내번 몽고군 | 4 | 청 | ||||
외번 몽고군 | 1 | 투셰투 친왕 | 200 | 936 | 936 | 코르친 |
2 | 자샄투 군왕 | 200 | 743 | 598 | ||
3 | 라마스히 타이지 | 200 | 633 | 158 | ||
4 | 다르한 호쇼오치 | 200 | 645 | 136 | 잘아이트 | |
5 | 서렁 | 200 | 974 | 137 | 두르버트 | |
6 | 조맄투 친왕 | 200 | 587 | 226 | ||
8 | 동오르 | 200 | 706 | 87 | ||
9 | 붐바 | 200 | 518 | 178 | 고르고스 | |
10 | 구무 | 200 | 505 | 123 | ||
11 | 다르한 군왕 | 300 | 245 | 163 | 나이만 | |
12 | 반디 | 300 | 210 | 210 | 아오한 | |
13 | 상아르 | 300 | 671 | 106 | 자루트 | |
14 | 너이치 | 300 | 438 | 130 | ||
15 | 무장 | 200 | 560 | 187 | 모오 밍안 | |
16 | 투바 | 200 | 650 | 53 | 우라트 | |
총합 | 3700 | 9021 | 3428 |
이때 별 소득이 없었는지 포획 규모에 대한 기록은 없고요.
이에 홍 타이지는 다시 1637년 와르카 정벌을 명하였고, 1638년 4월에 1500여 명을 끌고옵니다.
이로써 동해여진 정벌전을 일단락이 되었고, 1638년 공식적인 동해여진 통합 완수를 선언하게 됩니다.
청실록 1637년 12월 19일
○往征瓦爾喀諸將。遣六人奏捷言兩黃旗至瓦爾喀地方。(중략)
男子一百三十人家口三百三十。馬八十有七。
와르카를 정벌하러 간 제장들이 6명을 보내 승첩을 아뢰길
<양황기(정황기+양황기)가 와르카 지방에 이르러, (중략) 남자 130명과 인구 330명, 말 87마리를 사로잡았습니다.
청실록 1638년 4월 25일
○戊午。喀愷、塔海、尼噶里、恩古里朱馬喇、塔哈布、哈什談、滿都戶等、東征所獲瓦爾喀新滿洲男子六百九十二名。婦人五百五十七口。幼穉二百口。
○무모일에, 객개, 탑해, 니갈리, 은고리주마라, 탑합포, 합십담, 만도호 등이 동정하여
와르카의 신만주 남주 692명과 부인 557명, 어린이 200명를 사로잡았다.
청실록 1638년 7월 7일
蒙天眷佑。朝鮮已平蒙古瓦爾喀諸國皆附。今所存者止明國而已。
하늘의 보우를 받아 조선은 이미 평정되었고, 몽고, 와르카의 여러 나라는 모두 귀부하였다.
지금 아직 존재하는 것은 명국에 그칠 뿐이노라.
청실록 1638년 7월 16일
○又諭諸王貝勒貝子等曰。我國家蒙天眷佑。漢人、蒙古、虎爾哈、瓦爾喀、在在歸附。
또 여러 왕, 버이러, 버이서 등에게 유지를 내리길
우리 국가가 하늘의 보우를 입어 한인, 몽고, 후르하, 와르카 여러 곳이 내부하였다.
9. 조선은 와르카를 송환하라
삼전도 2일전 출성이 결정된 인조에게 홍 타이지는 종전 직후 조선에 살고 있는 여진족 송환을 요구합니다.
내국사원당 1637년 1월 28일
sini gurun i dolo bisire warkai boigon be wacihiyame tucibufi benju.
시니 구룬 이 도로 비시러 와르카이 보이곤 버 와치햐머 투치부피 번주!
너의 나라 의 안 있을 와르카의 호구 를 조사하며 내보내고 보내라!
뭐 인조도 나름 몇 명씩 잡아서 보내주곤 하였는데, 실상 거의 보내지 않았나 봅니다.
결국 입관 후 조선까지 신경쓸 여력이 없던 청나라는 홍 타이지의 유명이 있었다며
와르카 송환을 중단한다는 칙서를 보내게 됩니다.
조선왕조실록 1640년 1월 18일
청나라 칙서가 심양으로부터 왔는데, 그 대략에,
“원래 그대 나라가 떳떳하지 못한 일을 반복하기에 두 왕자를 인질로 삼았다.
그대가 만약 명을 준수하려 했다면 올량합(兀良合)의 인호(人戶)와 이곳에서 도망해 돌아간 자들을 모두 쇄환해 보내고
징집이나 조발(調發)하는 일을 지체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1644년 4월 26일
청사 어사개박씨(於士介博氏)와 정명수 등이 칙서를 가지고 왔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황제는 조선 국왕에게 칙유하노니 양지하라. 과거에 그대 나라가 올량합(几良哈)을 쇄환함에 있어서 미진한 점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황고(皇考)께서 생존하셨을 때, 조선은 어차피 나의 영토인데 어찌 반드시 쇄환하게 할 것이 있느냐고 하시었다.
그 당시에 미처 조서는 내리지 못하였으나 유지(遺旨)가 아직 남아 있다.
짐은 성의(聖意)를 삼가 받들어 이제 특별히 왕에게 조칙을 내리니,
대체로 전부터 그대 나라에 있는 자에 대하여 모두 송환을 면제한다.
★ 결론 : 누르하치의 박해를 피해 조선으로 넘어온 여진족은 수천 명 정도로 추정되며,
이들은 배를 잘 몰았고 서해안의 어부가 되었다.
어부가 된 이들 중에 청군에 투항하는 자도 있었고 강화도 함락에 물길과 물때를 알려주었다.
-귀화한 호인(胡人)들이 (중략) 4도에 퍼져 뿌리박고 있는 배가 2백여 척에 이르고,
해로에 익숙하여 배를 부리기를 말 부리듯하여 실로 우리 나라 사람이 미치지 못할 지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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