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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 (옵1:1-10절)
‘신이여, 저를 절망하게 해주소서. 당신에게가 아니라 저 자신에게 절망하게 하소서. 미친 듯 모든 슬픔을 맛보게 하시고 온갖 고뇌의 불꽃을 핥게 하소서. 모든 치욕을 맛보게 하소서. 저 자신을 지탱하기를 돕지 마시고 제가 뻗어나가는 것을 돕지 마소서. 그러나 저의 온 자아가 이지러질 때 그때에는 저에게 가르쳐 주소서. 당신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당신이 불꽃과 고뇌를 보내셨다는 것을. 기꺼이 멸망하고 기꺼이 죽어가고 싶습니다만, 저는 오직 당신 속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는 헤르만 헤세의 기도문이자 시입니다. 이 사람은 독일계 스위스인으로 인간의 외적인 성장에 대한 통렬한 성찰과 인간의 내면에 공존하는 양심, 이 양면성에 깊이 고뇌하였으며 그의 작품은 1946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아를 쳐서 복종하게 하여 인간의 참된 내면의 세계를 알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과 유기를 받은 사람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오바댜서는 소선지서 중 단 1장 21절로 되어있는 성경으로 성경 중 가장 짧은 책입니다. 이 짧은 글에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의 시작과 끝을 총 망라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받은 선민과 선택받지 못한 백성, 역사상에 있어서 두 줄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바댜서의 주제는 에서의 왕국 에돔의 운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선민 이스라엘에게 경고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갈 때 야곱을 만나러 나오는 형 에서는 에돔으로부터 왔습니다. 에돔은 에서와 그의 자손들이 건설한 왕국입니다. 그래서 에서를 에돔의 아비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창32:3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자기보다 앞서 사자들을 보내며..
에돔은 시리아와 애굽 사이에 있는 무역상들의 중개지였습니다. 그러기에 물질적으로 풍요를 누렸고, 또한 국토가 높은 산과 바위로 둘러싸인 요새지이기에 국방에도 문제가 없었던 부강한 나라였습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한 형제인데도 에돔은 항상 이스라엘을 박대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으로 향할 때였습니다.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고 대로로만 통과하겠다고 통행을 요청했을 때 그들은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트랜스 요르단까지의 지름길인 형제 족속 에돔의 지경을 통과하기를 원했지만 끝내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섭섭함을 참고 전쟁을 회피한 것은 에돔 땅은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 아니었고 그 백성을 해하지 말라는 여호와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한 뿌리 깊은 적의와 반목은 다윗 시대에 에돔을 정복하기에 이릅니다. 다윗이 이 에돔을 정복하여 이스라엘에 귀속시켜 버렸습니다.
*삼하8:13-14 다윗이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팔천 명을 쳐 죽이고 돌아와서 명성을 떨치니라.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되 온 에돔에 수비대를 두니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그전까지는 에돔은 장자 노릇을 계속해왔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정복으로 장자로서의 교만은 무너졌습니다. 에돔의 최후에 대해서는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으나 확실한 것은 에돔이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오바댜의 예언대로 되었습니다. 후에 성경 역사에 다시 한 번 나타났는데 예수님 탄생 시에 헤롯 대왕과 그 후손들이었습니다. 헤롯 왕가는 로마제국을 대신하여 팔레스타인을 통치한 이두메의 왕가입니다. 이 가문은 명목상으로는 유대인입니다. 왜냐면 B.C125년 로마의 요한 히르카누스가 이두메를 정복하고 나서 이두메인들을 강요하여 할례를 받게 하고 유대교를 신봉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헤롯 왕은 B.C47년 그의 나이 25세 때 갈릴리 통치자로 임명되었고, B.C4년 동맥경화증으로 죽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베들레헴에 두 살 난 어린 남자아이들을 모두 죽였던 사람입니다. 분봉 왕 헤롯이라고 부르는 헤롯 안디바는 헤롯 왕과 그의 사마리아인 아내 말타스 사이에 난 아들로서 예수님 당시 갈릴리와 베뢰아의 분봉 왕이었습니다. 자신의 이복형제의 아내이며 자신의 조카인 헤로디아의 매력에 빠져 본처와 이혼하고 그녀와 결혼함으로 세례요한의 비난을 샀고, 후에 본디오 빌라도의 요청으로 예수를 재판하기 위해 두 사람이 만나게 됩니다.
성경이 에서에 대해서 말할 때, 에서는 자기 평생에 있어서 신령한 가치를 인정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장자권을 팔 때부터 그는 현실주의자요, 감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속적이요, 경건하지 못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망령된 자라 규정합니다.
*히12:16-17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창세기 36장에는 ‘에서 곧 에돔의 대략이 이러하니라.’ 라고 시작하여 에서의 자손 81명의 이름이 나오는데 오직 두 사람의 이름만이 하나님의 이름과 연관된 뜻이었습니다. 그 외에는 전부 세상적인 이름입니다. 마지막으로 38절에 ‘사울이 죽고 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고.’ 라고 하면서 바알의 이름을 붙여 명명한 바알하난으로 이름이 끝이 납니다. 에서는 장자권을 팔 때부터 신령한 세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의 가족, 그의 후손의 모양이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에서의 에돔 왕국은 자연 요새화된 국방에다가 당시 세계적인 무역의 중추적인 중개지가 되면서 부를 누렸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에서와 그의 자손에게까지도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해 주신 것이 있습니다. 약속은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형이 동생을 섬길 것과, 둘째는 그의 삶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창27:39-40 그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 버리리라 하였더라.
에서가 장자권 축복을 잃어버렸을 때 칼을 믿고 살 것이라는 약속을 주었습니다.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계획까지 변동시키지는 못합니다. 에서의 자손들이 비록 하나님 없이는 살아도 에서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선택 밖에 있는 민족에게도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고 자연 은총의 축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에서는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도 대대로 하나님 없이 살아왔는데도 에돔 땅은 번창하고 강력했습니다. 에서는 승승장구의 세월을 보내는데 약속의 아들 야곱의 생애는 어떠했습니까. 야곱은 그의 삶의 시작부터가 순탄하지 못했습니다. 야곱의 생애를 셋으로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의 인생 초반은 추방의 생활입니다. 그가 외삼촌 라반의 집에 있을 때에 명분은 조카였지만 사실은 종살이를 했습니다. 나중에 그도 재물을 모으고 가족을 이루어 다시 아버지 이삭이 살았던 벧엘로 돌아가지만 그 때도 야곱은 처량한 목축 업자에 불과했습니다. 둘째, 그의 인생의 중반은 이민 생활입니다. 가나안 땅에 지독한 흉년이 들어 기근을 피해 아들 요셉이 있는 애굽으로 이민을 떠납니다. 정든 고향 산천과 집과 재산을 모두 버리고 가족만 데리고 떠납니다. 셋째, 애굽에 가서는 결국은 지독한 노예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야곱과 그 후손이 귀양살이, 이민살이, 노예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에서와 그의 자손은 왕국을 건설하여 부강한 나라를 이루고 왕족이 되어 있습니다. 이럴 때 야곱의 후손들은 무엇을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선택받지 못한 형의 후손은 저렇게 성공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고 사는데 그들은 이방의 노예입니다. 그들의 생각이 착잡하지 않았겠습니까. 여기서 이스마엘과 이삭의 세계로 올라가 봅시다.
*창17:20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이스마엘도 에서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약속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약속 하신대로 이스마엘 자손들도 북아라비아를 다 차지하면서 번창했습니다. 에서의 셋째 부인은 이스마엘 족속의 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어떻습니까. 이삭이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했으나 리브가가 잉태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삭도 그의 이복 형 이스마엘이 자식도 잘 낳고 재물도 있고 할 때에 나는 왜? 라는 물음이 가슴에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었을 때 몸종 하갈을 통하여 자손을 보려했으나 이삭은 아버지의 길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삭과 야곱이 메마른 세월을 보냈듯이 택한 백성에게는 불모의 세월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그 험한 환경을 통하여 이삭과 야곱의 성품을 키우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경배, 찬양하는 민족으로 훈련 시키셨습니다. 이삭도, 야곱도, 여러 모양의 내리막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은혜 속에서 자라고 있었으며, 결국은 이 땅의 최고의 민족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하는 민족들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나의 주변에 무엇이 일어나느냐. 라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답답함이 내 삶의 끝도 아니요 역사의 종말도 아닙니다. “내가 에서는 미워하였고 야곱은 사랑하였다.” 라고 하신 그 말씀이 내게 힘이요, 위로요 소망입니다. 내가 어려움에 있는 것은 나의 성품을 키우려는 하나님의 계획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려는 계획, 하나님의 훈련입니다. 바다와 육지는 말씀으로 만드셨지만 내 속에 있는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만드셨습니다. 그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향해 쏟아지고 있습니다.
오바댜의 주제는 에돔의 교만과 그의 운명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교만은 어떤 것일까요.
첫째, 나는 깨끗하여 죄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욥33:9-11 이르기를 나는 깨끗하여 악인이 아니며 순전하여 불의도 없거늘 참으로 하나님이 나에게서 잘못을 찾으시며 나를 자기의 원수로 여기사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
둘째,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시10:4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셋째, 다툼을 좋아합니다.
*잠17:19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요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
넷째, 스스로 높은 체, 큰 체하는 것입니다.
*잠25:6-7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 이는 사람이 네게 이리로 올라오라고 말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 말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
다섯째, 끝없이 자기 영예를 구하는 것입니다.
*잠25:27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
여섯째, 하나님과 자기를 동등시하는 것입니다.
*사14: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일곱 째, 자신의 힘과 지혜를 의지합니다.
*욥27:4-5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결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내가 죽기 전에는 나의 온전함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이러한 교만이 우리의 심령에 언제나 존재합니다. 바벨론의 왕들뿐만 아니라 욥에게도, 솔로몬에게도 이러한 교만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에돔의 교만이 세 가지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국방입니다.
에돔이 가진 국방의 교만은 난공불락의 그들의 자연 요새 때문이었습니다.
*옵1:3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에돔 족속의 중심 거주지는 사해 남방에 우뚝 솟아오른 세일 산이었습니다. 이곳은 지세가 워낙 가파르고 험난할 뿐 아니라 동굴과 같은 피난처가 많아 어떠한 적군도 침공하여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1816년 옛 에돔 땅이 발굴되었는데, 특히 에돔의 수도 페트라는 그 입구가 약 3.5km의 좁은 절벽 사이에 난 길이어서 적은 인원으로 많은 대적을 방어하기가 매우 용이했습니다. 페트라 내부는 길이가 20km, 넓이는 몇 마일이 됩니다. 에돔인들은 이러한 지형을 이용하여 어떤 적군도 방어해 낼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견고한 요새에 대한 믿음이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화근이 되어버렸습니다.
*옵1:4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라 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방 국가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피조물로서 창조주에 대해 가져야 할 기본자세의 여부에 따른 것입니다. 인류 역사 가운데 21개의 대문명이 있었는데 거의 다 교만으로 멸망했습니다. 고대 애굽이 그러했고, 바벨론도, 헬라도 그 문명이 찬란했으나 다 같은 길을 걷고 말았습니다.
둘째로, 우방입니다.
*옵1:7 너와 약조한 모든 자들이 나 너를 쫓아 변경에 이르게 하며 너와 화목하던 자들이 너를 속여 이기며 네 먹을 것을 먹는 자들이 네 아래에 함정을 파니 네 마음에 지각이 없음이로다.
에돔은 사람의 마음 바탕을 너무 몰랐던 것입니다. 속이고, 함정을 만들고, 마지막으로는 어제의 우방이 오늘은 침략자가 되는 사람의 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당시의 백성들에게 이 사실을 고하였습니다.
*사19:11 소안의 방백은 어리석었고 바로의 가장 지혜로운 모사의 책략은 우둔하여졌으니 너희가 어떻게 바로에게 이르기를 나는 지혜로운 자들의 자손이라 나는 옛 왕들의 후예라 할 수 있으랴.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방법은 세 가지인데 하나는 사회의 혼란이며, 그 다음은 자연재해이고 마지막으로 정신적 미혹입니다. 이 중에서 지도자의 정신적 미혹은 국가의 존망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소안의 방백들과 놉의 방백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며 사특한 마음이 들게 하고 무분별하고 우둔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방은 믿을 것이 되지 못합니다. 물론 우리에게 친구도 우방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친구, 우방 때문에 내가 교만해지면 그것이 나의 화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에돔은 자기들이 가장 지혜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옵1:8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내가 에돔에서 지혜 있는 자를 멸하며 에서의 산에서 지각 있는 자를 멸하지 아니하겠느냐.
에돔은 오만불손했습니다. 에돔은 동방으로 불리워졌습니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데만 사람인데 그는 에돔인이었습니다. 빌닷도 에돔사람이라 불리웠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사람들과 비교할 때 동방 사람들의 지혜보다 뛰어난다고 했습니다. 에돔 사람들이 그만큼 지혜가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에돔의 지혜 있는 자를 멸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인류 역사상 어느 누구도 인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낸 사람은 없었습니다. 컴퓨터를 보면 하드웨어, 소프트웨어라는 것이 있는데 하드웨어는 재료나 원료를 뜻하고, 소프트웨어는 그것을 쓸 수 있는 지혜, 지식, 정보를 말합니다. 한국은 하드웨어는 없고 소프트웨어만 있기 때문에 좋은 재품을 만들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즉 지식은 길러 놓았는데 원천 기술과 원자재가 없다는 뜻입니다. 에돔은 군사력이 좋고 동맹도 좋고 거기에다 소프트웨어 즉 인재를 길러놓았습니다. 교만할 만합니다.
저 겟세마네 동산을 생각하겠습니다. 겟세마네 동산까지, 피땀 흘린 동산까지 따라갔던 그 제자들. 더구나 주님의 오열과 통곡이 보이고 들리는 장소까지 따라갔던 그 제자들. 그런데 그 제자들이, 밤을 마다하지 않고 주의 곁에까지 갔던 그 제자들이 한 가지 몰랐던 것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의 필요성이었습니다. 기도를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려울수록, 세월이 사나워질수록, 지위가 높아질수록, 교회가 부흥할수록, 밤이 깊을수록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고 혼자 어디서나 무릎을 꿇는 그것이 겸손이 아니겠습니까. 수리아의 나아만 장군은 위대한 장군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한 마디 말이 더 있는데 그는 문둥병자더라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처럼 선과 악이 같이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에돔이 경고를 받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던 것은 그들의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기도의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무릎을 꿇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문제였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에돔만 교만했던 것 아닙니다. 유다 왕 아마샤도 교만했기 때문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아마샤의 근본 문제는 에돔 침공에 한 번 성공한 것으로 교만해졌습니다. 그는 선지자가 충고할 때 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대하25:16 선지자가 아직 그에게 말할 때에 왕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왕의 모사를 삼았느냐 그치라 어찌하여 맞으려 하느냐 하니 선지자가 그치며 이르되 왕이 이 일을 행하고 나의 경고를 듣지 아니하니 하나님이 왕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신 줄 아노라 하였더라.
아마샤는 하나님의 은혜에서도 떠나있었습니다. 그의 교만은 북쪽 이스라엘에게 도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돌아왔고 끝내는 그의 신하에게 피살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대하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때까지는 어느 민족도, 개인도 백 퍼센트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높이시고 축복하시고자 하는데 그 조건은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교만은 근본적인 죄요, 만 가지 죄악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교만할 틈이 없습니다. 이유는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심판받을 아담에게 메시야 약속을 하신 것도, 온 세상이 멸망 받을 때 노아를 건지신 것도, 온 세상이 하나님을 모를 때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들을 주시고 메시야를 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의 근본이 어떠하며 나를 어디서 들어 올려 주셨습니까. 나의 죄악의 웅덩이는 도저히 삐져나올 수 없는 우묵한 웅덩이입니다. 거기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건져 주셨습니다.
*사51:1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나를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모세의 웅덩이는 살인한 웅덩이요, 엘리야의 웅덩이는 낙담의 웅덩이요, 베드로의 웅덩이는 부인의 웅덩이요, 도마의 웅덩이는 의심의 웅덩이요, 야곱의 웅덩이는 속임수의 웅덩이요, 라합의 웅덩이는 기생의 웅덩이요, 야베스의 웅덩이는 사생아의 웅덩이었습니다. 이사야를 통한 말씀을 보면 우리를 떠낸 웅덩이, 그것을 볼 때 교만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나의 나 된 것은 나를 깊은 수렁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비록 험한 세월이 내 앞에 있다고 해도 이 은혜 속에서 스스로 겸비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주의 백성으로 기쁘게 살아갑시다. 우리가 에돔처럼 살면 에돔처럼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질 것이요,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로 살면 영원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거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선택 받은 주의 백성들입니다. 버림받은 망령된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뜻에 순종하면서 주님과 함께 날마다 천성을 향해 걸어가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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