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요한19;18-20
터키에서 실제로 있던 이야기입니다. 의가 좋은 두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동생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형 집을 찾아왔습니다. 싸우다가 사람을 죽였다는 것 이였습니다. 그래서 형은 급히 동생에게 자기의 깨끗한 옷을 입혀주고는 뒷문으로 도망을 보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조금 후에 경찰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경찰들은 피묻은 옷을 발견하고는 형을 범인으로 여기고 잡아갔습니다. 터키는 이슬람국가라서 살인하게 되면 곧바로 사형을 시켰습니다. 형은 자신이 아니라 동생이 범인이라고 증언하였다면 석방될 수 있었는데 마치 자신이 살인을 저지른 것처럼 잠잠했습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잠잠하셨던 것과 같았습니다. 결국 형이 동생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동생은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동생은 더 이상 자기 죄 값을 받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예화의 형처럼 당신의 깨끗한 의의 옷을 우리에게 입혀주시고 당신이 우리의 피묻은 죄의 옷을 입고 대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놀라운 회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바로 이 회복의 역사를 이루기 위함 이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꿈이요 계획이였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죄와 마귀를 제거하여 그 아래서 신음하던 인생들을 구원하시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놓는 것 이였습니다. 이는 마치 미국이 후세인이나 김정은같은 독재자를 제거하여 그 아래서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원하고 그 나라에 자유민주주의나라를 이루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미국은 이를 총칼로 이루고자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계획을 예수님의 십자가통해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침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너무도 기뻐서 그 고통스런 시간 중에서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운명하셨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말씀처럼 기쁘고 더 감격적인 말씀도 없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인류의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인류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사건이 있었다면 1,2차 세계대전도 아니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계획을 다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어떠한 계획을 다 이루었을까요? 오늘 말씀통해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놓으신 것을 믿고 우리성도님들은 아무 걱정 염려하지 마시고 믿음으로 다만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죄문제를 다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로마 군병들에게 채찍을 맞으시고 못박히신 것은 그들을 이길 힘이 없어서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피할려면 얼마든지 피할 시간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26장에 보면 예수님은 열두군단이나 더 되는 즉 8만명이 넘는 천군 천사를 불러와 얼마든지 로마군병쯤은 얼마든지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엄청난 양의 채찍을 맞으시기를 자청했을까요? 이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 이였습니다. 당시 십자가형을 당하는 죄수는 먼저 채찍을 맞았습니다. 당시의 로마법에는 유대인들은 채찍을 120대를 때리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옷을 벗기고 태형대에 묶어놓고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채찍은 12가닥으로 만들어졌고 채찍 끝에는 뼈조각이나 납조각을 매달았습니다. 먼저 등쪽을 때리다가 나중에는 엎어서 배쪽을 때립니다. 이런 채찍을 맞으면 살점이 떨어지고 피가 튑니다. 채찍을 맞다가 장이 터져 죽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무자비하게 채찍에 맞아서 온 몸이 걸레처럼 찢어지게 되었습니다. 채찍이 휘둘러질 때마다 예수님의 몸은 찢어지고 피가 튀었습니다. 예수님의 온 몸은 검게 멍들었고 부었고 찢어졌습니다. 채찍에 맞으신 예수님은 로마군병들에게 이끌려 총독관저 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조롱하기 위하여 왕복을 상징하는 홍포를 입혔습니다. 그리고 굵고 긴가시나무로 가시면류관을 엮어 예수님의 머리에 씌웠습니다. 가시면류관이 예수님의 이마를 긁으며 씌워지자 이마에서는 피가 줄줄줄 흘러 내렸습니다. 그들은 왕 앞에서 예를 표하는 것처럼 예수님 앞에서 “왕이요 평안할지어다” 하며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막대기로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그들은 이런 행위들을 낄낄거리며 재미있어 했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듯 심한 채찍과 조롱과 가시관을 써야만 합니까? 예수님이 무슨 잘못을 많이 해서 그렇게 당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는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인류의 가장 근본적이고 중대한 문제는 바로 죄문제입니다. 이 죄로 인하여 우리 인생에게 각종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이 죄를 짓게 되면서 불안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각종 두려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스트레스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컨디션이 나빠지게 되었습니다. 우울증같은 것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항체 면역력이 떨어져 우리인류에 좋지 못한 질병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지능이 현저히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내적인 자유와 평화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좋은 것을 많이 소유하고 살아도 그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인간들은 이 죄책감을 없애보려고 많은 노력을 기해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보아도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리 죄를 안짓고 살려고 해도 그것도 되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사상서도 어떤한 의학서도 이 죄책감을 해결해줄 수 없었습니다. 공자도 부처도 정신과의사도, 우리의 부모님도, 대통령도 도저히 이 죄책감을 해결해 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오직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하여만 가능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이 죄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이러한 채찍과 조롱과 가시관을 써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저지른 죄가 너무도 컸으므로 예수님이 받으셔야 했던 고통과 수치도 너무 컸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받으신 고난으로 우리의 죄를 흰눈보다 더 깨끗이 제거하여 주셨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죄가 제거되고 우리 심령에 하나님의 의가 임하자 죽었던 우리의 영이 꿈틀거리며 살아났습니다. 믿음이 살아났습니다. 영적인 감각이 살아났습니다. 내적 자유가 회복되었습니다. 용서받은데서 오는 지극한 평화가 임하였습니다. 면역력이 높아져서 어떠한 질병도 낫게 되었습니다. 머리가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축복들을 우리에게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이러한 고통과 수치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하여 우리는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은 이와 같이 우리에게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하여 의롭게 되었을 때 무엇보다 하나님과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관계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하여 이러한 큰 축복을 값없이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모든 죄는 예수님의 고통의 댓가로 모두 용서되었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 많은 죄문제를 다 이루신 것을 굳게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죽음문제를 다 해결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이 죄를 지은 댓가로 맞이하게 된 가장 큰 불행은 바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는 영생하는 존재로 지음 받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인간에게는 죽음을 싫어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범죄후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죽음을 선고하셨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찌니라” 그 후 우리 인간은 죽지 않으려고 갖은 노력을 해보았습니다. 죽지 않으려고 약도 만들고 죽지 않으려고 산삼이나 보약도 먹고 죽지 않으려고 배아복제연구도 해보고 어찌해서든 죽지 않고자 발버둥쳤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조금 연장시켰다는 것외에 죽음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옥 불에 떨어지는 둘째 사망은 더더욱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죽음앞에서는 한없이 무기력할 뿐 이였습니다. 얼마전 지하차도 일어난 사건에서도 보았듯이 물이 쏟아들어가는 지하차도를 차들이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생을 달리했습니다. 우리인간의 생명은 죽음의 재앙앞에서 얼마나 초라한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시관을 쓰시고 갖은 조롱과 모욕을 당하시고 이번에는 십자가에 지고자 끌려갔습니다. 당시 죄수들은 70kg이 넘는 십자가를 지고 온 성을 한 바퀴 돌아서 골고다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이는 국가반역을 한 죄수들에게 그같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경고하기 위한 것이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밤새도록 끌려다니시며 잠도 못주무시고 철야심문을 받으셨고 잔인한 채찍에 맞으셔서 지칠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비틀거리며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그러나 몇발자국 못가 쓰러지시고 다시 일어나 가시다가 쓰러지시고 그러기를 무려 14번을 거듭하셨습니다. 그때마다 채찍은 사정없이 가해졌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는 예수님을 눌렀고 무릎과 온 몸은 찍히고 또 찍히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인생들의 모든 죄를 지시고 묵묵히 골고다의 길을 가셨습니다 이는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한 마리의 양과 같았습니다. 이 때 시몬이라는 시골사람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군병들은 그를 지목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골고다에 이르셨습니다. 골고다란 해골이란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마태복음27장을 보면 쓸개 탄 포도주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것은 마취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것을 마시게 되면 육신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거절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는 맨정신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다 받고자 함 이였습니다. 군인들은 드디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 시작했습니다. 이때가 제 삼시 곧 오전9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우리는 병원에서 주사맞으려고 해도 긴장하는데 산채로 못에 박혀 달린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습니다. 십자가형은 인류가 사람을 죽이고자 만들어낸 방법 중에 가장 잔인하게 죽이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흉악한 강도나 국가 반역자들에게나 행하여지는 사형방법 이였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면 얼마나 그 고통이 심한지 1000번 이상 까무러친다고 합니다. 손바닥은 찢어지므로 흔히 손목관절에 박거나 손바닥에 대못을 박을 경우는 밧줄로 팔목을 형틀에 묶는다고 합니다. 손바닥은 온 몸의 신경이 집중되는 곳이라 고통이 가장 심합니다. “쾅!쾅!쾅!” 굵은 대못이 예수님의 손바닥을 뚫으며 십자가에 박혔습니다. 두발도 겹쳐져서 쾅쾅쾅 못박혔습니다. 검붉은 피가 솟구쳐 줄줄줄 흘러내렸습니다. 십자가를 곧추 세우자 체중이 아래로 쏠리며 예수님의 고통은 극에 달했습니다. 온몸을 뒤틀며 예수님은 고통스러워 하셨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눈이 뒤집히고 혀가 말려 입천장에 붙었습니다. 이 고통이 너무나 심하여 우리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고 글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그 고통을 표현했습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긋났으며 내 마음을 밀랍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음의 진토속에 두셨나이다” (시편22편:14,15)
예수님께서 왜 이런 고통을 받으시며 죽으셔야만 합니까? 이는 바로 우리의 죽음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함 이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고통스럽고 수치스런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에게는 죽음이 없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 죄로 인하여 죽어야할 죽음을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댓가로 우리에게는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우리대신 죽으셨으므로 우리가 죽을 죽음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명이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하기위하여 이러한 방식으로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행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루어 놓으신 영원한 생명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의 역사를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주신 것을 굳게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각종 저주를 다 해결하셨습니다. 우리인간은 처음 하나님께서 만드셨을 때는 건강한 존재였습니다. 세포가 노화되거나 죽거나 할 수 없었습니다. 에덴중앙에 생명나무가 있었으므로 이것을 먹으면 또 건강하고 늘 생명력이 넘쳤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에덴에서 추방될 때 우리 인간은 더 이상 이 생명나무 과실을 못먹게 되었습니다. 천사들은 두루도는 화영검으로 이 과실을 지켰습니다. 이로 인해 보잘 것 없는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들에게는 각종질병이 생기게 되었고 그 질병으로 고통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각종 질병을 해결해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에게 생명력을 소생시켜주는 생명나무과실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나는 생명의 떡이라 말씀하시며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하셨습니다(요한복음6:51).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순히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해주시는 십자가가 아니라 각종 질병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십자가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저주받으신 까닭은 우리 영혼만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도 구원받기 위한 것입니다. 바로 전인적인 구원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너는 영혼만 구원받아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육신도 질병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하며 예수님께서 모진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육체적인 질병으로부터 나음을 입게 되었노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마태는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고 마태복음 8:17절에서 기록하였습니다.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 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영혼만을 구원하시기 위한 십자가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육을 각종 질병으로부터 구원해주시기 위한 십자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십자가에서 각종 질병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을 다 이루신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넷째, 마귀문제를 다 해결하셨습니다. 마귀는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사였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타락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지상으로 쫒겨났습니다. 이 타락한 천사를 마귀라고 합니다. 이 타락한 천사들은 인간들도 타락시키고자 유혹하였고 우리 인간은 마귀의 유혹으로인해 범죄하고 타락하였습니다. 이 마귀는 지금도 살아서 우리 연약한 인생들을 공격하고 괴롭힙니다. 미혹하고 각종 두려움을 심습니다. 인간의 힘과 지혜로는 도저히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까닭은 마귀를 제거하시기 위함이였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뒤로부터는 마귀가 이상하게 힘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엘리야나 다윗같은 용감한 인물들도 마귀를 쫓아냈다는 기록이 없지만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는 믿는 자들은 누구나 마귀를 쫓아낼 수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죄가 있어야 기승을 부리는데 예수님으로 인하여 죄가 없어지니 설자리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마귀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귀의 유혹은 늘 경계하되 담대히 싸우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인하여 죄가 모두 용서되고 의롭게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질병으로부터 구원받아 건강하게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마귀를 이기게 된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