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시자
제자들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떠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보호자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다(복음).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남기신 유언입니다.
죄에 대해 잘못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많은 이가 죄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기는 것’을 먼저 연상합니다.
계명 준수에 젖어 ‘하지 말라는 말’에 익숙한 탓입니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먼저 믿으라고 하십니다.
죄는 그다음의 가르침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실천’을 우선적으로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하신 것이 ‘용서’였습니다.
사랑은 용서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죄와 연관된’ 믿음을 넘어
‘사랑과 연관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신앙생활이 됩니다.
죄를 피하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용서하려고 믿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늘 아픈 이들을 낫게 하셨습니다.
한 번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신앙인 또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힘을 받으면’ 가능해집니다.
그분의 사랑은 ‘실천하면’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활이 죄를 넘어서는 삶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의 모습이지요.
심판도 예수님을 떠나서는 생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신께서 모든 것을 좌우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죄와 연관된 심판이 아니라,
사랑과 연관된 심판을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겁주는 예수님은 그분을 폄하하는 일입니다.
샤를 드 푸코는 오늘날 프랑스가 낳은 위대한 수도자요,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는 이미 세속화가 시작되어 하느님을 잃어 가고 있는
프랑스의 문명사회를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세상에서 가장 버림받고 원시적인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으로 가서
그곳 토착민들과 15년 동안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다 1916년, 토착민이 쏜 총에 숨지게 됩니다.
샤를 드 푸코는 어느 날 나무를 보면서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나무는 떨어지는 잎에 대해
염려하거나 안달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재물이나 건강 때문에 근심한다는 것은
자신을 나무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샤를 드 푸코는 나무의 모습을 보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않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하고 말씀하시자 그들 마음에는 근심이 가득 찼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것을 영원한 이별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인간적인 정에 얽매여
하느님의 크신 뜻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평소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믿는 일이었나 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겪은 어려움이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의 어려움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