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통은 불씨를 손으로 점화·발사하는 화포(火砲)이다. 천(天)자는 천자문의 첫 자로 만든 순서를 표시하는 기호이다. 총 길이 1.31m, 통신 길이 1.16m, 포구 지름 12.8㎝로써 포 입구 띠를 제외한 마디는 모두 8개이다.
총신 포구 쪽에는 탄약을 장전하는 약실을 향하여 가로로 ‘가정을묘시월천사백구십삼근십냥장양내요동(嘉靖乙卯十月天四百九十三斤十兩匠梁內了同)’이라는 글이 음각 되어 있어, 조선 명종 10년(1555)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총통은 우리나라 화포 중 가장 큰 화기일 뿐 아니라, 그 명문이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국방 과학기술 문화재로 평가되고 있다.
〈융원필비 戎垣必備〉 천자총통조에 의하면, 화기 모양의 크고 작은 차이와 화약의 중량, 탄환수, 사정거리를 구별하기 위해 천자문 가운데 천(天)·지(地)·현(玄)·황(黃)이라는 글자를 따서 총통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천자총통은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제일 먼 거리까지 발사할 수 있다. 글자의 순서에 따르면 천자총통이 우선이나, 기록에는 태종 때 지자총통과 현자총통이 먼저 나타나고 가장 빨라야 할 천자총통은 1425년(세종 7) 1월에 비로소 나타난다.
그러나 같은 해 1월 전라도감사가 천자철탄자 1,104개를 새로 주조한 것으로 보아, 기록상으로만 나타나지 않을 뿐 먼저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화포식언해〉 천자총통조에는 중약선이 1조, 화약이 30냥, 격목이 8촌이며 대장군전(大將軍箭)을 발사할 때 그 무게가 56근 30냥으로서 900보에 이른다고 했고, 〈융원필비〉 천자총통조에는 중약선이 1조, 화약이 30냥, 격목이 7촌, 대장군전을 발사할 때 그 무게가 50근으로서 1,200보에 이른다고 실려 있어 두 기록에 많은 차이가 있다.
현재 전하는 천자총통으로는 보물 647호로 지정된 것이 있는데, 1555년(명종 10)에 제조된 것으로 총신에는 "嘉靖乙卯十月天四百九十三斤十兩匠梁內了同"이라는 명문이 실려 있다.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지자총통 [地字銃筒]
조선시대 손으로 불씨를 점화시켜 발사하는 유통식(有筒式) 화기.
현자총통 [玄字銃筒]
조선시대 손으로 불씨를 점화시켜 발사하는 유통식(有筒式) 화포.
태종 때 이미 지자총통과 함께 제조되어 사용되어오다가 개량되었다. 〈화포식언해 火砲式諺解〉 현자총통조에 의하면, 중약선 반조(半條), 격목 4촌이었다고 한다. 발사물로는 차대전(次大箭)·차중전(次中箭)·철환을 사용했는데, 차대전은 사정거리가 800보, 차중전은 1,500보에 이르렀으며, 철환은 100개를 동시에 장전해 발사했다.
현재 국립진주박물관, 아산 현충사, 육군사관학교, 동아대학교 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은 남한산성 주재 경찰관 파출소의 화단에 장식품으로 썼던 것을 당시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인수한 것이다. 그 가운데 국립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은 1984년 6월 8일 경상남도 거제군 신현읍 고현리 고현만에서 인양되었다.
이 총통은 1596년(선조 29)에 제조된 것으로 보물 제885호로 지정되었는데, 지금 남아 있는 총통 가운데 가장 상태가 좋은 편이며 "萬曆丙申七月□□營都會玄字重八十九斤京匠人李春回"라는 명문이 적혀 있다.
천자총통(天子銃筒) 다음으로 큰 우리나라 고유의 화포이다. 태종대에 이미 제작해 사용했으나, 화약 양도 많이 들고 사정거리도 짧아 좋은 화기는 못 되었다. 그러나 1445년(세종 27)에 개발하여 사정거리가 같은 화약 양으로 종전에 500보를 넘지 못하던 것을 8,900보로 늘리고 화살은 4발을 발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화살[箭]을 주로 발사했으나 연구·발전하면서 철환(鐵丸:鳥卵丸)·장군전(將軍箭)을 사용하게 되었다. 철환은 200개를 발사할 수 있게 했고, 장군전은 중량 33근짜리를 발사하면 800보에 이르렀다. 현재 전하는 지자총통으로는 보물 제862호로 지정된 것과 보물 제863호로 지정된 것이 있다. 모두 1557년(명종 12)에 만들어진 것으로 청동제이다.
보물 제862호에는 "地嘉靖三十六年三月日金海府都會監官柵管李大胤匠人金連"이라는 명문이 적혀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보물 제863호는 처음 것과 크기와 성능이 비슷하지만 손잡이의 위치나 도화선 구멍의 위치가 다르며,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우리나라 무기체계 역사 중에서 가장 자랑할 만한 것이 화포와 화약의 사용이다.
화포의 역사는 고려 말 발명가인 최무선의 화약 제조 성공으로 시작됐다. 이어 우왕 3년(1377년)에 공식적인 화약·화기 제조 기구로 설치된 화통도감(火筒都監)은 국내 화포시대를 열었다. 이후 급속도로 발전한 화기 제조술은 대장군포, 이장군포, 삼장군포, 육화석포, 화포, 신포 등 20여종을 양산하기에 이르렀다. 화기 발사 전문부대로 화통방사군(火筒放射軍)이 편성되기도 했다.
전함에도 화포를 설치하는 놀라운 시도가 이뤄졌다. 화포를 장착한 고려 전함은 중화기로 무장한 전투함의 시초였다. 이 전함은 왜구를 격퇴하는 데 동원됐고 불을 뿜는 전함을 보고 왜구는 도주하기에 바빴다고 기록은 전한다.
중국의 양식을 본떠 제조되던 화포가 새롭게 탈바꿈한 것은 조선 세종대에 이르러서다. 국가 통제 하에 화포 개조사업이 진행됐고, 규격화된 조선식 화포인 총통(銃筒)이 등장했다. 별대완구, 대완구 등의 대포보다 작은 총통은 불씨를 손으로 점화·발사하는 유통식(有筒式) 화포다.
크기와 사용되는 화약의 양, 발사거리에 따라 네 가지로 구분되는데, 천자문에서 이름을 따 천(天)·지(地)·현(玄)·황(黃)자 총통이라 불렸다.
총통 가운데 천자총통이 가장 컸다. 충무공 이순신이 거북선 등 전함에 배치해 왜선에 타격을 준 것도 바로 천자총통이다. 포탄은 화전(火箭·불화살)처럼 날아가는 대장군전(大將軍箭)으로 그 무게가 30㎏에 달했으며, 사거리는 1200보(960m)였다.
지자총통은 그 생김새가 천자총통과 비슷하나 크기가 다소 작았다.
현자총통은 차대전(次大箭)이라는 화살 끝에 화약 주머니를 매달아 쏘던 작은 대포로, 임진왜란 때는 거북선 용머리 입구에 장착해 적선을 향해 철환(鐵丸)을 발사하는 용도로 썼다. 사거리가 최대 1500보에 달했다. 총통 표면에는 7개의 띠마디가 있고, 셋째 마디와 넷째 마디 사이에 반달모양의 손잡이가 있다. 황자총통은 화약을 이용해 대형화살인 피령전(皮翎箭)을 쏘는 용도로 사용됐으며, 총통 중 크기가 가장 작아 이동이 편리하다는 장점을 지녔다.
서양 화포와 같은 구조와 모양으로 제조된 근대식 화포는 조선 말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고종 11년(1874)에 대원군의 군비강화책에 힘입어 제작된 국산 주조화포인 소포와 중포가 바로 그것이다.
관련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실물은 전해진다. 청동제인 소포와 중포는 포신 주조술이 매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포차 위에 설치해 기동력을 보유했고 포신을 상하로 움직여 사거리를 조절할 수 있도록 돼 있다.
하지만 19세기 말 조선은 국내 정세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외국의 개방 압력에 직면하게 된다. 1866년 천주교도 탄압을 명분으로 내건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한 병인양요와 1871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미국 함대가 일으킨 신미양요를 통해 조선은 서양 군대와 조우하게 된다.
이어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 수군을 공격한 사건을 계기로 조선은 문호를 개방했다. 신기술로 현대화된 서양 화포의 공격에 조선의 화포가 고개를 떨군 것이다.
유달산 천자총통 발사 체험현장에서,......
천자총통 (임진왜란 당시 외적함대를 물리치는데 사용하였던 총통)
이순신 장군이 외적을 물리치는데 사용하였던 천자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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