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 - 153. 부원세력 횡포, 얼마나 심했나?
▶ 국정 문란 가져온 부원세력
몽골공주들은 그렇다하더라도 그들이 고려로 출가해 올 때 따라온 많은 사속인(私屬人)들의 횡포도 만만치 않았다.
이들은 고려와 끈이 닿아 있는 부원세력과 결탁하기도 하고 고려 조정의 감시자 역할을 하는 등 폐해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고려 왕실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국정을 문란하게 한 집단은 몽골과 빈번한 교류 과정에서 생겨난
신진 부원세력(附元勢力)이었다.
이들은 몽골 세력을 등에 지고 왕위 계승문제나 정국 운영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 왕권을 흔든 부원세력의 횡포
[사진 = 기황후]
대표적인 부원세력은 기왕후의 가문인 행주 기씨(幸州 奇氏) 문중이었다.
기왕후의 오빠 기철(奇轍)은 그 세력이 왕을 능가할 지경에 이르렀으며 가족 모두가 권력의 정점을 차지했다.
기황후의 책립과 황태자 아유시리다라의 출생을 통해 정치적으로 성장한 기씨 일가는 충혜왕 폐위과정에 개입하면서 급성장했다.
[사진 = 매사냥]
이들의 정치적 성장은 이후에도 계속돼 기황후 세력의 영향력은 고려왕위의 계승 문제에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로 강화됐다.
역관으로서 세도가가 된 것으로 앞서 소개했던 조인규의 평양 조씨 가문 역시 부원세력으로 꼽을 수 있다.
매를 길러 몽골에 바치는 응방(鷹坊)을 이용해 신진 세력이 된 칠원(漆原) 윤씨(尹氏) 가문도 여기에 속한다.
[사진 = 윤수 관련 고려사]
"윤수(尹秀)는 칠원현 사람이다.
조국을 배반하고 몽골로 들어갔던 그는 충렬왕이 몽골에 있을 때 매와 사냥개로서 총애를 얻었다.
충렬왕이 즉위하자 심양에서 가족을 데리고 귀국해 응방을 관리하면서 권세를 믿고 제멋대로 행악했다.
사람들을 그를 금수(禽獸)로 여겼다."
(고려사124 열전37 윤수)
▶ 환관 일족도 부원세력 합류
[사진 = 환관 관련 고려사]
몽골 황실에 환관으로 들어간 다음 세력을 얻은 것을 배경으로 갑자기 부상한 환관의 일족도 있었다.
"원나라 정치가 점차 문란해지면서 고자가 권세를 쓰게 되니 이들 중에서 어떤 자는 벼슬이 대사도(大司徒:호조상서)에 이르렀다.
그자들의 저택과 수레, 의복은 외람 되게 모두 재상의 격식을 차렸다.
딱지도 떨어지지 않은 고자 놈들이 우리나라를 멸시했다.
예를 들어 고용보 이삼진 등은 모두 짖는 개처럼 원나라 황제에게 참소해 우리나라를 모해했다.
말만해도 가슴 아픈 일이다."
(고려사122 열전35 宦者總論)
역사의 기록에 깃들여 있는 울분을 감지해 봐도 그들의 횡포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 공민왕 들어 부원세력 척결
이들 부원세력의 일부는 아예 나라를 없애고 몽골의 직접 지배아래 두자는 이른바 입성론(入城論)을
일곱 차례나 들고 나서기도 했다.
입성론은 제기되는 시기마다 성격에서 약간씩 차이가 있다. 충숙왕 때 제기된 입성론은
고려왕에 대한 반대 운동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입성론의 요지는 고려국왕이 세습 직으로 맡았던 정동행성 승상 직을 임명직으로 바꿈으로써 왕의 위상을 약화시키자는 것이었다.
입성론은 결과적으로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왕을 비롯한 정치세력의 강력한 반대로 이들의 주장은 실현되지 못하면서 결국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몽골이 고려를 본격적으로 지배하던 시기는 이미 제국이 내리막길로 들어선 상황이어서 자국(自國) 사정도 복잡했다.
그런 상황에서 몽골로서도 구태여 고려를 직접 통치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1343년 제기된 마지막 입성론은 충혜왕의 폐위라는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어쨌든 이들의 존재는 왕이 의욕을 가지고 추진하려던 개혁정치를 번번이 무산 시켰다.
개혁은 기득권을 가진 세력의 희생을 요구하는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예나 지금이나 기득권층의 반발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충선왕이나 충목왕의 각 분야에 걸친 개혁 시도는 결국 이들의 벽에 막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결국 이들 부원 세력의 제거와 개혁정치의 실현은 몽골의 힘이 약해지던 공민왕 때 들어서야 비로소 결실을 맺게 된다.
▶ 1세기 지배의 희생
[사진 = 대도 적수담로]
어떤 나라가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면 경제적 수탈과 정치적 간섭을 감수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지배하는 쪽이 통제의 고삐를 어느 정도 조이느냐 또 얼마나 경제적 수탈을 혹독하게 하느냐에 따라 그 정도가 달라질 뿐이다.
몽골이 고려를 1세기 동안 다스렸으니 그만큼 희생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일제가 36년 간 강점했던 세월의 후유증을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고려 기반 흔든 인적․물적 수탈
[사진 = 舊 대도성 일대]
인적 수탈과 관련해 공녀와 환관을 요구한 것은 고려 사회에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가족이 평생 돌아오지 못할 남의 나라로 끌려간다고 했을 때 남은 사람들의 심적 고통이
사회적으로 어떤 현상을 가져왔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몽골제국으로 끌려간 사람들 중에는 특별한 지위까지 올라 호사를 누린 사람도 있었지만
그것은 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았다.
[사진 = 대도성터]
물적 수탈 또한 만만치 않았다. 해동청(매)와 호피, 인삼, 금, 은, 자기 등 고려의 특산품들을 각종 명목을 붙여 가져갔다.
왕이 수시로 대도로 들락거리는 동안 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따라다녔다.
[사진 = 고려진상품 인삼]
이들이 사용한 각종 비용과 함께 갈 때마다 싣고 간 막대한 물자의 부담은 결국 세금을 내는 백성들의 몫이었다.
왕이나 인질이 대도에 머무는 동안 사용하는 비용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세의 부담이 많아지면 그만큼 백성들의 삶이 황폐화되기 마련이다.
결국 몽골의 지배는 고려 왕실은 물론 하층민의 삶의 기반까지 흔들어 놓았다는 얘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