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역사의 장을 펼치는 이마당에 한가하게 지리산이나 갔다 왔다고 하기에는 좀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갔다온 인사치레로 대신하렵니다.
연하천에서 늦은 점심을 해먹고 출발한게 오후 3시경 벽소령까지는 얼마 안된다고 해도 걱정이 앞선다.
한참을 걸어 올라선곳이 형제봉

벽소령 도로위로 산장이 보이고 멀리 천왕봉이 구름에 둘러 싸여 있다.
밑에 보이는 바위가 형제바위
4년전에 노고단에서 아침을 해먹고 있는데
한무리의 사람들이 올라 왔다.
비가오는가운데 판쵸우의를 뒤집어쓴 모습이 무슨 패잔병 무리들 같았는데
다들 노랑머리 빨강머리에 귀거리를 한 어린애들이었다.
고등학생들쯤으로 보이는
길을가다가 물어보니 안산의 '푸른 들꽃 학교'에서 왔다고 했다.
이름하여 대안학교라는 것
다시 길을 가다가 저밑 형제 바위에서 그들을 보았다.
상급생인 듯한 여자아이가 힘들어 못가겠다고 주져 앉아 있으니
후배로 보이는 남자 아이가 달래고 있었다.
" 누나 ! 힘들어? 내가 뭘도와줄까?"
내가 그랬다
" 얘들아 모여 봐라 내가 사진 찍어줄께"
" 안찍을래요"
그 애들은 학교에 적응을 못하고 대안학교 라는 곳을 다니는 소위 문제아 들이라고 보는 게 일반적인 통념이지만 그들은 산에 와서 서로를 도우며 같이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러나 또 내게는 경계심을 보인것도 사실이다.
천왕봉에 올랐을때 그들은 산행일기를 비디오로 찍고 있었다.
부모님께 드리는 편지도 함께---
교육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생각 했었다.

오른 쪽은 대성골이다
한국 전쟁때 지리산으로 들어간 빨치산들이 국군의 공격으로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는 곳
비행기로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불바다가 되었었다는 그곳인가보다.
또 남부군 사령관이던 이현상이 숨졌다는 빗점골도 거기 어디쯤 되는 모양이다.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이 바위굴에 숨어 살아남았다는 그곳
지리산의 아픈 역사 중에서도 가장 많은 아픔과 슬픔을 간직한 곳이란다.
지척이라고 생각되던 곳인데 그만 후배가 다리가 고장이 났단다.
막내라고 무거운 짐을 혼자 짊어지고 수고를 하더니만 드뎌 탈이 난게다.
힘들게 벽소령에 도착해보니 벌써 저녘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산장 주변은 온통 사람들로 가득찬게 아마도 천명은 넘을 듯하다.
겨우 벽소령 도로를 따라 조금 더가서 바위 벼랑 및에다 짐을 풀었다.
간단히 저녘식사외 반주를 마치고 그야말로 노숙에 들어 갔다.
4년전에는 그래도 산장에서 잤다.
다람쥐처럼 재빠르고 때론 노루처럼 성큼성큼 걸음을 내딪는 그 아가씨를 뒤쫒느라고 정신없이 도착했던게 벽소령 산장이었는데
산에서 동무란 참
한참을 뒤떨어져 가다보면 혹시 못따라 온다고 버리고 간게 아닌가 하는 서운 함이 들때 쯤이면 저만치서 기다리고 있고
밥해먹을때 혼자 먹는 것보단 덜 외롭고
같이 술도 한잔 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도 나누고 해서 좋았는데
이게 사람이 많다 보면 뭐 그런 잔재미는 없는게다.
자다가 오줌이 마려 일어나보니 하늘이 벗어지고 별이 초롱 초롱 하다.
노래라도 부르고 싶지만 자는 사람 깨울까
조용히 읖조리며 다시 잠을 청했다.
' 별빛 찬란한 밤이면 나홀로 뜨락에 서서
조그만 나의 꿈하나 가슴속에 새겨 본다오'
쓸쓸한 나뭇가지 위로 따스한 달밫 한줄기 흐르고
작은 별빛하나 불러와 외로운 내맘 달래 본다.
어릴적 보고팟던 그런 세상을 잃어 버린 나의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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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저녘 별빛은 고요해도 이밤이 다하면 질터인데
그리운 내님은 어딜가고 저 별이 지기를 기다리나
손톱끝에 봉숭아 빨-개도 몇밤만 지나면 질터인데---------
손가락마다 무명실 매어주던 곱디고운 내님은 어데갔나'
4년 전 그날 나는 몹시도 하모니카를 불르고 싶었었다.
꼭 이럴때 하모니카 소리를 듣고 싶은 이유는 다소 처량한 듯한 그소리가.
절절이 가슴에 와 박힐것만 같아서
서울로 돌아 와서 낙원동 상가에 가서 거금 을 주고 꽤 좋다는 걸 구입했다.
그리고 이어진 설악산 행 중청산장에서 속초의 불빛을 보면서 불어 보았다.
글쎄다 그게 그런 감흥이 생기진 않아서 그만두고 말았는데
이번에도 배낭에다가 넣어는 왔는데 생각도 기회도 없었다.
빗소리에 놀라 잠을 깨니 새벽 2시
지나가는 여우비라고
산에선 의례 새벽에 생기는 비라고 해도 다들 짐싸기 바쁘다.
대충 누룽지로 아침요기를 하고
어제 탈이난 후배와 선배 그리고 호위병 한명 아렇게 셋은 가까운 음정으로 하산을 하기로 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구벽소령에서 본 화계면 쪽 대성골의 새벽이다.
산중에서 자연이 가장 장엄하고 묵직해 보일때가 아마도 이같은 새벽 어스름이 아닐까!.
곳곳에 노숙을 한 흔적들이 많이 보이는걸 보면 사람이 하여튼 많기는 많은 모양이다.

사위가 좀더 벍아질 무렵 덕평봉에서 뒤를 돌아 보았다.
벽소령 산장이 보이고 뒤로 두개의 동그란 봉우리가 반야봉 그리고 그 왼쪽으로 내려와 조그맣게 솟은 봉우리가 노고단이다.

반상의 슬픈 전설을 간직한 선비샘에서 다시 아침을 먹고 같이간 회사 산악회는 6명만 남기고 하산을 했다
그리고 세석을 향한 잰걸음을 걸었다.

칠선봉에서
세석고원 을 둘러싼 영신봉이 보이고 촛대봉도 보인 다.
많이 오기는 했어도 천황봉은 아직 멀기만 하다.
4년전 그날 여기어디쯤에서 쉬고 있는데 그 아가씨랑 둘이서
웬 두 아저씨가 나타났다 .
한 사람은 털보고 한 사람은 개 죽사발 핥아먹은 것처럼 뺀드름 하게 생겼는데
털보가 대뜸 묻는다
" 둘이 부부요?"
" 아니 이양반이 처녀 혼사길 막을일 있나! 여기와서 만났어요' 그러는 두 양반은 친구요?"
" 아니 우ㅡ리도 여기서 만나습니다."
그래서 다시 동행이 되었다.
사실 하산 할때까지 나와 그아가씨는 서로 이름도 몰랐다
장터목에서 자고 다시 천왕봉에서 대원사로 이어지는 하산길까지
그리고 서울에 와서도 죽
북한산으로 넷이서 정리 산행도 갔었다.

돌아 보니 반야봉은 한참을 멀어졌다.
노고단은 겨우 보일락 말락
왼쪽으로 길게 늘어선 능선은 왕시리봉 능선이다.
일제때 외국인 선교사들이 풍토병을 치료 하자고 지었다는 별장이 남아 있는곳
거기까지 올라가기가 힘들어 조선인 인부들이 지게에다가 안장을 얹어 거구의 서양인들을 져 날랐다는 슬픈역사를 간직한곳
선교를 하러 왔다는 사람들이 사람을 그리 부렸다는 게 참
그래서 이땅의 개신교가 보이는 행태의 뿌리가 보이는게 아닌지.
하여튼 역사가 참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영신봉을 넘어 세석고원 을 내려선다.
산장 지붕이 보이면서 또 4년전이 생각 난다.
그때 여기서 점심을 해먹다가 유명인사를 만났다.
탤런트 '이 훈'
거기도 종주중이라고 했는데
TV 에서 보는것 보다 훨씬 해맑은 얼굴이었다.
예의도 바르고
그친구 한테서 술도 한잔 얻어 먹은 기억이 떠오른다.
그래서 요즘도 TV 에서 그를 보면 반가운 생각이든다.
세석 고원이 철쭉으로 유명한 것은 세상이 다아는 거지만
한가지 유명한것이 더있다.
그것은 화장실이다.
화장실에 앉으면 바깥이 보이도록 지어졌다는것
그래서 편하게 푸른 숲을 보면서 볼일을 보게 되어있다.
선배님들에게 가보시라고 권하고나서.
나는 하산을 하기로 했다.
왜?
이까지 왔는데
사실 천왕봉은 두번이나 올라서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본다는 일출을 두번다 봤으니
한낮에 올라야 그져 그럴것이란 생각과
계곡을 좀 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고
사진도 찍고 싶다는 핑계로 하산을 결정했더니
회사 산악회서 한 친구가 같이 하겠단다.
그리하여 촛대봉으로 향하는 일행들을 멀리하고 한신계곡으로 내려섰다.

세석고원의 철쭉은 거의 지고 조금만 남아 있다.

대신 양지꽃이피었다.

별꽃도 피었다.
같이 동행을 한 친구는 88학번이란다.
대번에 형님으로 모시겠다니 이렇게 황송 할 수가
동생이 생겼다.
한신계곡이 험하단 얘기를 들은 기억은 나는 데 역시 상당히 가파르고 험하다
한시간여를 내려와서 폭포를 만났다.

시린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그간의 피로를 풀고
주위를 둘러보니

이름모를 풀이랑

날리는 폭포수를 맞으며 애처로이 홀로서서 꽃을 피운 야생화도 있었다.
생이란 참 질긴 것이다.
계곡은 시원한 물이 있고 다양한 생명들이 숨쉬고 있어 좋다.

가끔 산에서 보는 희안한 풍경
잎이 하얗게 변한 덩굴
저게 도대체 뭘까를 고민 했는데 드디어

풀렸다
다래 덩굴이었다
위는 다래꽃과 열매
신기하다.
그게 병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하여튼 별스럽다.
그리 그리 힘들게 5시간을 걸어 내려오니 벽소령에서 하산한 일행들이 냇가에서 놀고 있다
등산화 벗고 바로 계곡물에
풍덩 몹시 차다.
어이구 추워라!
건너편 산자락에는 산딸나무 꽃이 하얗게

내려 앉았다.
4년전에는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고 대원사로 하산을 했다
제대로 된 종주를 한셈인데
써리봉에서 브로캔을 만났었다.

또 써먹는다고 욕하진 마시라.
그래도 그날 셋이서 이걸 보고는 앞으로 행운이 함께 할거라고 했는데
아가씨는 시집가서 애낳고 잘살고 있고
나나 털보 아저씨나 별탈없이 살고 있으니 이게 행운이 아닌가!
우리만 브로캔을 본줄 알았는데

우리 선배는 더 멋있게 보셨단다.
치밭목 산장에서는 산장지기가 해주는 아침을 먹었다.
압력밥솥으로 지은 기름이 잘잘 흐르는 쌀밥을
근데 이밥솥에 대한 내력이 더 재밌었다'
작년 가을에 부천성당의 신부님들이 지리산 종주를 하느라고 노고단에서부터 여기까지 왔는데 이 압력밥솥을 지고 오셨더란다.
그래서 산장지기가 살살꼬셔서 기증을 받았다는데
내가 그랬다.
" 지리산 종주중에 압력밥솥 밥을 먹어본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산장지기는 민병태 씨라고 마산의 마차푸차레 산악회를 이끌고 히말라야 원정도 다녀온 경험이 있는 분이었다.
지금은 모두 국립공원으로 흡수가 되어서 안계신단다.
아무튼 치밭목산장으로 해서 대원사로 이어지는 하산길은 무지하게 지루 했었다.
그리고 다시 지리산을 찾기까지 항상 그리움으로 남아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부산으로 츨장을 갈때면 항상 그쪽 창가에 앉아서 산을 보고
일본을 갔다 올때는 한밤중에 구름위에 뜬 지리산을 본적도 있었다.
가을 쯤에는 조용히 평일날 시간을 내서 가고 싶다.
많지 않은 사람들과 조용히 얘기를 나누며
그때는 하모니카를 불수 있을까?
첫댓글 심뽀님! 지리산 산행시 밥짓는 솜씨와 선후배를 위한 희생,산행안내(설명),아름다운 사진까지 남겨주어 정말 고맙네. 수리산 산행에서도 정라진에서도 만나길 빌며,다시한번 감사를.......인왕산(인황) 올림
우와~사진으로한 지리산구경이 이렇게까지 멋있을수가 있네요...놀라버요. 심뽀님, 그나저나 하모니카를 불고 싶으니다고요? 저는 하모니카연주가 가득한 포크음악을 아주 좋아하는데요...저는 밥디런의 팬이기도 하답니다. 원래 저는 여자들의 음악에 많이 편중이 되어 있었는데요,모랄까, 여자들의 섬세함이 묻어나서라고 할까. 그런데, 요새는 남자들이 하는 음악에도 구슬픈 마음이 들더라구요. 요새는 닐다이아몬드를 들어요. 남자들의 세상격정을 통한 그 깊이가 느껴진다고 해야하나? 하여간에, 저는 포크음악이 좋아요. 잡종이긴하지만. ㅋㅋ~
아참, 심뽀님, 저의 Favourite은 파란새벽사진이예요. 짙은 파랑이 파랑치는 새벽사진을 보니, 마음이 훵~제가 파랑색을 왜 그다지도 좋아하는지 그 이유는 정확히 모르지만요. 파랑색은 제게 마치 열정같아요. 어디론가 미치도록 달리고픈 열정이요.그래서, 전 파랑색이 젤 좋아요. ㅋㅋ~
형님... 흠... 사진도 사진이지만요... 글이 더 멋진걸요. 또 열심히 사진을 펐습니다. 정라진에서 뵐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다리에 탈 난 놈이었습니다.
종영 형님, 좋은 글 마음으로 퍼 담아 갑니다. 사진 한 장 한 장에 담긴 일발필살의 휘광으로 눈이 부시네요.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 외모만은 보고 20대 후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제가 88학번이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곧 안드로메다로 귀향갈 수도 있으니, 가능한 비밀로... ^^ 20대 고정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