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조부 박치홍(朴致洪)(1831-1915) 할아버지께서 밀양 단장면에서 아들 삼형제를 데리고 할머니랑 황소 수레에
이삿짐을 싣고 4박5일을 걸어서 통영을 거쳐 배로 건너 거제 고현까지 오셨다 한다.
밀양 사실때 집에 큰 불이 나고 우환이 겹쳐 역슬인으로부터 먼 남쪽으로 피하지 않으면 자손이 끊길수 있다는 말에
여기저기 답사를 한 후에 당시로는 물 좋고(농사 짓기에 좋고), 나무 흔한(땔나무 구하기 쉬운) 거제로 정하셨다 한다.
그말은 맞다, 섬이라도 물이 흔해 지금도 양대 조선소에 공업용수를 능히 조달하고 그래서 숲도 우거져 내가 클 때만
해도 땔나무 걱정은 안하고 컸으니 말이다.
내까지 5대를 내려 오며 평균 3형제를 두었고 내 아들 6대에 이르러서 남자만 50명 훨 넘으니 자손도 번창하였다.
1910년에 일본 강점이 시작 되어 호구조사를 하고 호적령에 의해 시행된 호적의 원적을 떼어 보면 일본어로 기록되어
있고 1940년에 시행된 창씨개명령에 의해 박씨는 新井(아라이)로 개명 정정 되어 증조부 朴用先 할아버지는 新井用先
으로 개명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증조부 박용선(1856-1942) 할아버지는 87세까지 사셨는데 당시로는 장수하셨다고 일본 천황으로부터 술잔을 하사
받았는데 왜정 때에는 거제가 통영군 소속이라 일본인 통영군수가 거제 순례때마다 천황이 하사한 술잔에 술 한잔 하고
간다고 찾아와서 마당에 조아려 한잔 따라 마시고 갔다는 나무로 얇게 조각한 술잔을 아직 갖고 있는데 왜정때 것이라
가치는 그리 없다는데도 그냥 보관하고 있다.
80여년전 선친께서 서른살이 되실 무렵에 밀양서 내려 온지가 100년 가까이 되었는데 그동안 소원했던 밀양에서 어찌
살았는지도 궁금하고 윗대 산소들과 거제 올때 두고 왔다는 얘기만 들은 선친의 증조부 박치홍 할아버지의 동생 일가
소식도 알아 볼 겸 가첩(밀양서 내려온 이후 기록한 가족들 기록부)를 들고 밀양으로 찾아 나셨다 한다.
마산까지 배를 타고 기차로 삼랑진을 거쳐 밀양에 갔는데 버스도 없던 시절에 걸어서 단장면으로 가서 100여리를 여기
저기 오고가며 수소문 하였지만 100여년 전의 박치홍 일가를 아는 사람이 없어 낙담을 하고 있는데 밀양역 인근 유촌
마을에 9순이 넘는 노인이 살고 있으니 한번 찾아나 보라해서 물어물어 가서는, 마당에서 좌초지종을 얘기하는데
대청마루 봉창문이 꽈당 열리며 한 노인이
"네가 누군데 박치홍 어른 얘기를 하는고?"
"예 제 증조부님 이신데 밀양 사시다 거제로 오셨다는데 밀양 사신데를 찾아 다니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벗은 발로 마당으로 뛰어 나오시며 두손을 잡으시고,
"자네가 그 분의 증손자란 말인가, 내가 9남매의 막내인데 큰 누님이 그 분께 시집을 가서 먼 남쪽으로 이사를 갔다는
소식민 듣고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궁금하게 살아왔는데 자네가 기별을 갖고 와 반갑기 그지 없네, 증조모님은
돌아가시고 어데 좋은 곳에 잘 안장해 드렸는가?"
그러니까 박치홍 할아버지의 처남 되시는 분을 천재일우로 만나게 되어 융숭한 대접을 받게 되셨고, 박치홍 할아버지의
동생 박차범씨 손자 일가가 사는 곳을 가르쳐 주어 만나게 되었고, 관리해 온 밀양 단장면의 선산 산소도 찾아 보게 되었고
갖고 갔던 가첩을 밀양 박씨 정국군파 종친회에 등록하게도 되었다.
밀양박씨 파조 정국군 박위 장군은 고려말 이성계와 같이 위화도에 출정했다가 회군한 대장군으로 뒷날 김해부사로 재임
중에 왜적을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하기도 했으나 고려말 장군으로 훗날 화근이 될까봐 이방원이 정몽주를 처단할 무렵
아울러 숙청 당해 일족이 뿔뿔이 흩어졌다가 이조 중엽에 이르러 복권 되셨다 한다.
나는 志짜 항렬로 족보에는 朴志本으로 올려져 있고 고교때 박지하 선생님이 집안 형님 뻘이 되고 그 아들 23회 박채규가
圭짜 항렬로 조카 뻘이라 학교 때 나를 보면 아재 아재 하고 불렀었다.
志짜 항렬은 정국군파 19세손이되고 정국군께서는 박혁거세 44세 손이라 나는 박혁거세 63세손이 된다,
자손 번창을 위해 밀양에서 그 먼길 거제까지 걸어 와서 자리를 잡으신 박치홍 할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몇년전 入巨濟
할아버지로 모시고 거제에 널리 있는 친지들이 모여 致洪公波 종친회를 결성하여 가족묘지를 만들고 친목을 도모하고 있디,
그 종손이 나 朴志本이다.
고조부님은 85세, 증조부님은 87세, 조부님은 66세, 선친께서는 92세 장수를 누리셨는데, 나도 언제갈지 이제 마음으로 대비를
하고 있지만 마냥 아쉽기는 하다....
*巨濟島 ...클 거, 구할 제, 건널 제로 쓴다. 625 피난민 특히 흥남 피난민의 도피처 그리고 625 전쟁 포로 약 30만의 수용소로
많은 이들을 구한 섬이 된다는 것을 예지했는지도 모른다.
건널 제는 뭘까, 일본과의 해저 터널이 가끔 인구에 회자 되고 있는데 거리상으로는 일본 대마도와 부산 양정이
최단 거리이지만 해저 지질이 터널로 적합하지 않다고 판정이 나서 거제 대마도 구간이 거의 확정적이라 한다.
언젠가는 일본과의 해저터널이 연결되리라고 보고 인근의 가덕도에 국제공항이 건설되고 있는 걸 보니 아하 바로
이게 크게 건너는 巨濟라는 연유이지 싶다.
첫댓글 김해 박할배글은
아무런 꾸밈없이 그저 마치 낙동강에 물 흐르듯이 편하고 조용한 산길을 걷는것같습니다.
" 나도 언제갈지 이제 마음으로 대비를 하고 있지만 마냥 아쉽기는 하다...."
이 글이 요근래 가장 가슴에 와 닺습니다.
요사이 우리 산할배들 이런 마음으로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박힐배 다음글들이 기다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