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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을 고발함
24:1-9
1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니라
2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고발하여 이르되
3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4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6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6하반-8상반 없음)
8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9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행 24:1-9 / [바울에 대한 논고]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유대 지도자 몇 사람과 더둘로라는 법관을 데리고 와서 고소를 제기하였다. 2) 더둘로는 총독 앞에 불려 나오자 바울을 걸어 다음과 같이 고소하였다. `각하, 우리 유대인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는 것은 모두 각하의 덕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에 대한 차별 대우의 문제도 크게 개선되고 있어 3) 우리는 늘 깊이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4) 이제 각하를 오래 괴롭히지 않고자 간단히 이자에 대한 고소의 줄거리만을 말씀드리려고 하니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5) 이 자는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유대인들을 충동질하여 로마 정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는 소요의 주동자입니다. 게다가 이 자는 나사렛당이라고 알려진 종파의 두목이 되어 6) 성전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체포한 것도 그때문입니다. 우리는 정당하게 이 자를 처벌하려고 하였습니다. 7) 그런데 파견대장인 루시아가 이 자를 우리 손에서 강제로 빼앗아다가 8) 로마법으로 재판받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각하께서도 직접 이자를 심문해 보시면 우리의 고소가 정당하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9) 그러자 다른 유대인들도 모두 입을 모아서 더둘로의 말이 사실이라고 주장하였다.
바울은 안전하게 가이사랴로 왔지만, 5일 후 대제사장의 무리가 이곳까지 와서 세 가지 거짓 고소를 하며 바울을 처형할 것을 요구합니다.
변호사 더둘로(1) 종교지도자들은 바울을 암살하려는 계획이 좌절되자 이번에는 달변가 더둘로를 앞세워 바울을 고소합니다. 이때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100km가 넘는 먼 곳을 직접 찾아올 만큼 바울을 죽이려는 집념이 대단했습니다. 어둠의 세력들이 지난번에는 ‘칼’의 힘을 의지했다면 이번에는 ‘말’의 힘에 기대고 있습니다.
고발당한 바울(2-4) 더둘로는 총독의 마음을 훔치려고 사실이 아닌 말로 아첨합니다. 벨릭스는 역사가들에 의하면 태평이나 선견지명 등과는 거리가 먼 통치자였습니다. 폭정과 착취와 부정부패로 정치적 소요와 불안을 자초한 사람이었습니다. 예를 갖추는 것은 필요하지만 사실이 아닌 말이나 뇌물로 비위를 맞추거나 그런 말에 마음을 내주어 바른길에서 벗어나는 것은 마땅한 태도가 아닙니다.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5-9) 더둘로가 바울 사도를 고소한 핵심은 바울을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정치범으로 몰아서 바울에게 유죄선고를 내리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전염병 같은 자’라는 표현은 그의 활동을 방치할 경우, 유대 지역만이 아니라 로마 제국 전체가 위태로워질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순전히 종교적인 이유로 바울을 반대하면서도 그를 사회를 교란시키는 정치범으로 몰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일 때 쓰던 방식과 똑같습니다.
적용: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슈퍼 전파자’ 한 사람의 영향력을 실감하는 때입니다. 바울은 로마 제국에 하나님나라를 무섭게 확산시켜 갔습니다. 싸스, 에볼라, 메르스, 코로나 같은 이 세상의 바이러스는 사람을 죽이지만, 예수는 사람을 살립니다.
D. L. 무디가 하루는 서재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데 5살 먹은 그의 아들이 들어왔습니다. 무디는 그 아들이 자신을 방해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무얼 원하니, 얘야?’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꼬마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아요.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서 들어왔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는 마루에 앉아서 조용히 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정말이지 그는 아버지와의 교제만을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우리 아버지와의 교제를 사모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 설 교 >
바울의 변증
사도행전 24:1-27 / 정용섭 목사
데르딜로의 논고
유대교 근본주의자들에 의한 바울 살해 기도가 파견대장 글라우디오 리시아의 완벽한 조치로 헛수고로 끝난 다음, 바울은 훨씬 안전한 총독의 손에 넘겨졌다. 이제 바울은 유대교의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처리될 수 있는 그런 위험 지역을 벗어난 셈이다. 종교보다는 정치가 훨씬 안전하다는 사실이 아이러니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게 바로 초기 그리스도교가 처한 삶의 자리였다. 물론 여기에는 종교가 열광주의 형태를, 정치가 합리주의 형태를 지닐 때라는 전제가 놓여 있다.
펠릭스 총독이 주관하는 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은 완전히 로마 정치 체계가 지배한다는 점에서 예루살렘의 파견대장이 소집한 산헤드린 공의회와 성격이 전혀 다르다. 그래서 그런지 대사제는 전문적으로 법을 다루는 데르딜로 법관(변호사)을 대동했다. 데르딜로는 2,3절에서 우선 총독에게 아부에 가까운 발언으로 이 논고를 시작한다. “펠릭스 각하, 우리는 각하의 덕분으로 크게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는 각하의 선견지명으로 개선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각하를 환영하며 감사하여 마지않습니다.” 아첨에 가까운 발언 후에 그가 제시한 구체적인 고발 내용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이다. 1) 바울은 몹쓸 전염병 같은 자로서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이며, 나자렛 도당의 괴수이다. 2)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려고 했다.
이 고발은 그 당시 유대교 지도층의 마음을 그대로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발 연설로도 뛰어난 것이다. 두 내용을 한데 묶어 중요한 개념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전염병, 반란, 나자렛 도당, 성전 훼손. 그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리스도교를 페스트 같은 전염병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매우 모욕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별 볼일 없는 사람들로 생각했던 그리스도인들이 기원후 80년대에 상당한 정도로 불어난 사실에 대한 유대교의 놀라움도 반영된 게 아닐까 모르겠다. 정치적인 성격이 강한 ‘반란’이라는 단어는 총독이 가장 예민하게 생각하고 있는 요소인데, 만약 총독에게 이런 느낌을 강하게 줄 수 있다면 이 고발은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나자렛 도당’이라는 단어도 역시 그들의 불쾌한 심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누가가 데르딜로의 입을 통해서 열두 사도를 제쳐놓고 바울을 나자렛 도당의 괴수라고 설명한 건 객관적인 사실이라기보다는 누가 자신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누가의 이런 판단은 두 가지 배경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는 누가가 초기 그리스도교의 전반적인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며, 둘째는 누가가 활동하던 80년대는 예루살렘 그리스도교가 몰락하고 바울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된 헬라, 즉 아카이아와 마케도니아 그리스도교가 주류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바울의 자기 변론
데르딜로의 논고 후에 총독의 허락을 받아 바울이 자기변호에 나선다. 바울은 데르딜로가 제시한 죄목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을 중심으로 변론을 시작한다. 그 핵심은 ‘대중선동’에 관한 것이었다. 바울이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해명한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로마 정권이 가장 심각하게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주제가 바로 이것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성전, 회당, 거리에서 아무와도 논쟁을 벌이지 않았으며 군중을 선동한 일이 없다고 주장한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런 사실의 근거는 두 가지이다. 1)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온 지 겨우 12일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약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날짜는 이렇게 계산된다. 첫째 날: 예루살렘 도착, 둘째 날: 야고보 및 장로들과의 회의, 셋째-아홉째 날: 정결예식, 열째 날: 산헤드린 의회, 열한째 날: 살해음모, 열 이틀째 날: 가이사리아 이송. 이런 짧은 기간에 바울이 사회를 소란하게 할 만한 사건을 저지를 수 없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2) 바울에 대한 산헤드린의 고발은 아무런 증거가 없다.
자신을 향한 고발 내용을 원천적으로 부정한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더 규정한다. 물론 이 내용은 누가의 해석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14절을 보자. “다만 제가 각하 앞에서 시인하는 것은 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그리스도교를 따라 우리 조상의 하느님을 섬기고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몇 번 확인했듯이 80년대에 그리스도교는 이단, 또는 소종파라는 이름으로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누가는 지금 그 사실을 직시하고 있다.
누가에 의한 바울의 변론에 따르면 그리스도교를 따르는 사람은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는다. 구약은 율법서와 예언서와 성문서로 구성되어 있는데, 바울은 지금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두 부분을 언급하면서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중이다. 구약성서가 최종적으로 유대교의 경전으로 결정된 때는 사도행전이 기록되기 10여 년 전인 기원후 70년(얌니야 회의)이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경전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구약성서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오히려 도움을 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는다.”는 오늘 본문의 진술은 바로 이런 사실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는 왜 유대교로부터 분리 독립된 것일까? 여기에는 역사의 우연성이 작용한다. 정치, 종교, 사회적 충돌 사이에서 스스로 독립할 생각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밀려나올 수밖에 없었던 그리스도교의 운명이 우연하게 작동되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교의 출현이 우연하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동시에 필연성도 작용한다. 그것은 곧 예수 사건, 즉 그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오늘 본문은 주로 부활을 다루고 있는데, 부활이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해명하는 키워드인 것만은 분명하다. 예수의 부활에 근거해서 하나님과 인간 구원과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아무리 유대교와 그 뿌리를 같이 한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같이 갈 수는 없었다. 예수의 부활은 곧 구원이 율법의 성취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특히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이라 할 십자가 사건에서 일어난 부활 사건은 인간의 모든 행위와 업적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 사실에 자신들의 모든 희망을 걸어둔 공동체였기 때문에 율법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유대교와 불편한 동거생활을 지속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런 뉘앙스와 약간 차이가 나는 논리로 전개된다. 바울은 본문에서 예수의 부활에 관해서 언급하지 않고 부활 일반에 대해서만 언급한다. 15절 말씀을 보자. “그리고 저를 고소하는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하느님을 믿으며 올바른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 같이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들리는 이런 진술은 누가가 처한 삶의 자리를, 즉 유대교로부터의 박해를 피해야 한다는 위기상황을 전제하지 않으면 오해받기 안성맞춤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의 부활신앙의 토대는 기본적으로 예수의 부활에 놓여 있는데, 이 사실이 오늘 본문에서는 강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본문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다. 우리도 역시 죽은 자로부터의 보편적인 부활을 믿는다.
오늘 바울의 변론은 핵심적으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신이 유대인들을 선동한 적이 없다는 것이며, 둘째는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다. 데르딜로가 마지막으로 논고한 성전 훼손 문제는 아예 언급하지도 않았다. 아마 그 문제는 자신이 유대인을 선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포함된 것으로 보았는지 모른다. 이렇게 보면 바울은 지금 산헤드린 의회로부터 고소당할 이유가 전혀 없는 셈이다. 신앙의 본질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행위라는 점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누가는 지금 바울의 재판을 통해서 당시 그리스도교의 결백을 사람들에게 변론하고 있는 중이다.
총독 펠릭스
논고와 변호가 끝난 다음에 내려져야 할 총독의 선고가 유보되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파견대장 리시아가 내려 온 다음에 공판을 계속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누가에 따르면 그 이유는 펠릭스가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교를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누가가 설명하지 않지만 그런 주장은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총독은 치안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신흥 종교인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도 여러 정보망을 통해서 얻어들은 게 있었을 것이며, 더구나 며칠 후에 펠릭스와 함께 바울로부터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그의 아내 드루실라가 유대 여자라는 사실은(24절) 펠릭스의 종교적 취향을 어느 정도 암시한다. 그러나 신약학자들은 누가의 이런 글쓰기는 재판연기를 설명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라고 한다.
어쨌든지 펠릭스는 공판과 선고를 연기하면서 피고인 바울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바울에게 어느 정도 자유를 주고 친지들의 뒷바라지를 받을 수 있게 했다. 그렇다면 펠릭스는 비교적 사태를 원만하고 공정하게 처리하는 고위 관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유대인 로마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따르면 펠릭스는 부패한 총독이었다. 아내 문제만 하더라도 그렇다. 드루실라는 처음에 코마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와 약혼을 했다가, 나중에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수락한 에메사의 왕 아치스와 결혼했다. 펠릭스는 키프로스 출신의 유대인 마술사 아토모스를 통해서 이 여자로 하여금 남편을 버리고 자신과 결혼하게 했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가 뇌물을 좋아하는 관리였다는 것도(26절 참조) 사실이다.
누가는 펠릭스 총독이 공판을 연기한다는 자신의 약속을 지켰는지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다. 그는 후임 총독 보르기오 페스도가 부임할 때까지 2년 동안 바울을 감옥에 가두었다. 펠릭스는 뇌물을 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또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바울을 풀어주지 않았던 것 같다. 누가는 펠릭스의 상을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으로 구별한다. 이게 모순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실제 모습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의로운 사람인 바울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게 역사의 비극이며, 현실이다. 바울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이제 펠릭스를 역사에서 퇴장시키고 페스도를 등장시킨다. 그는 바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바울을 고소하는 더들로
사도행전 24:1-9 / 서금석 목사
한국어판 Reader's Digest 금년 7월호 표지 이야기로 「산 사나이 엄홍길의 끝없는 도전」 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대표적 산악인 엄홍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좋은 이웃, 금년 8월호에는 산악인 엄홍길에 대한 이야기가 두 페이지에 걸쳐 소개되고 있습니다. 지난 해 가을,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전 세계적으로 여덟 번째로 히말라야 산맥 중에 8000m 이상 되는 14고좌를 등반하는데 성공한 사람이 바로 우리 나라의 엄홍길입니다. 그의 나이 25세 되던 해인 1985년 에베레스트에 처음 올랐지만 첫 등정에 실패했습니다. 정상에 거의 다다랐지만 강풍에 몸이 50m나 날아갔다가 로프에 매달려 겨우 살았습니다. 그는 88년 세 번째 도전 끝에 정상을 밟았습니다. 그 후 4년 동안 여섯 번 도전해서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왜 나는 하는 것마다 안되나 싶어 그만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면 지금은 산에 다니지 않을 겁니다. 쓰러지는 것은 다시 일어서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자연 앞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죠. 그 뒤로는 정상만을 고집하는 욕심을 버렸습니다."
85년부터 15년 동안 오른 14고좌.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의 영광의 기록 뒤에는 꼭 14번의 실패가 있었습니다. 14번의 실패란 14번의 죽을 고비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틀 동안 눈 속에 갇혀 텐트 없이 야영을 해야 했고 (비바크) 92년 남가파르트 원정 때는 동상에 걸려 오른 쪽 엄지발가락을 잘라야 했습니다. 강풍에 몸이 날아가 죽을 뻔한 일은 부지기수. 98년 네 번째 시도한 안나푸르나 등정길에는 정상을 눈앞에 두고 크레바스에 미끄러진 셰르파를 구하려다 낭떠러지에 떨어져 오른 쪽 발목이 180°돌아가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 발목으로 응급조치를 하고는 이틀하고 반나절 동안 걸어 5100m의 베이스캠프로 돌아왔습니다.
더 이상 오를 산이 없다고 하는 산악인 엄홍길 그는 41세의 나이에 한국 외국어 대학 중국어과에 입학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도전과 모험-이것은 산악인 엄홍길 뿐만 아니라 의미있게 살아온 인류의 역사에서 볼 수 있는 정신입니다. 도전과 모험의 치열한 정신을 잃어버릴 때 삶은 평안해질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동시에 건조해지고 의미도 상실되기 쉽습니다. 산악인 엄홍길의 끝없는 도전 정신이 저와 여러분 속에 언제나 살아 있었으면 합니다.
바울은 가이사랴에 2년이나 머물게 됩니다. 로마 시민권자로서 정당한 재판을 받고 빨리 자유의 몸이 되기를 원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의 벨릭스 총독에게로 온 후에 세 번의 재판을 받습니다. 첫 번째는 벨릭스 총독에게, 두 번째는 벨릭스의 후임이었던 베스도 총독에게 세 번째는 아그립바 왕에게 재판을 받습니다.
24장은 벨릭스 총독에게 재판 받는 내용이고 25장은 베스도에게 재판받는 내용이고 26장은 아그립바 왕에게 재판받는 내용입니다. 재판받는다는 것은 좋은 일 때문이든 나쁜 일 때문이든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요.
"1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사(辯士)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니라. 2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송사하여 가로되"
2절에 총독 벨릭스가 바울을 부르고 아나니아가 데려온 더둘로가 고소 이유를 말하는 것으로 정식 재판은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변사 더둘로에 대한 설명을 합니다. 변사란 한마디로 변호사와 같은 것인데 그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변호사 제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더둘로는 헬라계 유대인으로 유대법과 로마법 모두에 정통한 사람으로 추측됩니다. 왜 아나니아가 변사 더둘로와 함께 왔을까요? 바울을 제대로 고소하려면 로마법 절차를 잘 아는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고 더구나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려면 뛰어난 언변이 있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더둘로를 앞세워 가이사랴의 벨릭스 총독에게 와서 바울을 고소합니다. 그러고도 부족했는지 몇몇 장로들까지 함께 왔습니다. 대제사장이란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까? 대제사장은 본래 성전에 있어야 할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이 대제사장의 중요 직능입니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성전을 떠나서는 안되지요. 그런데 그는 가이사랴로 갔습니다. 왜 갔습니까? 바울을 고소하려고. 어떻게 하든 바울을 죽이겠다는 일념뿐입니다. 누구에게 재판을 받아야 합니까? 총독 벨릭스. 총독 벨릭스는 분명 유대인이 아닙니다. 이방인입니다. 정통적인 유대 사람은 이방인 만나는 것조차도 꺼려합니다.
더구나 자기발로 이방인이 거하는 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더더욱 말도 되지 않습니다.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발로 갔습니다. 이방인 총독 앞에 자기 민족인 바울을 고소하는 고소인 자격으로 섭니다. 여러모로 보아 마땅치 않은 일입니다. 자 이제 재판이 시작되어 더둘로가 바울을 고소하는 말을 시작합니다.
1. 벨릭스에게 아부하는 더둘로
"3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무지(感謝無地)하옵나이다. 4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더둘로가 서두에 벨릭스 총독에게 인사를 하는데 내용은 대충 세 가지입니다. 우리는 각하의 덕분에 크게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다. 각하의 선견지명의 덕택으로 이 나라에서는 개혁을 많이 이룰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면으로나, 또 어디에서나, 이것을 인정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낯간지러운 아첨입니다. 왜 더둘로의 말이 낯간지러운 아첨인가는 벨릭스 총독의 사람됨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총독 벨릭스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지난 시간에 이미 말씀드렸지요. 노예출신으로 총독까지된 사람이었습니다. 노예가 총독이 되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총독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마음쓰고 하는 짓은 노예 같았다는 말입니다. 잔인했습니다. 못된 짓 많이 했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대제사장 요나단이 벨릭스가 하도 정치를 악하게 하자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벨릭스는 암살단을 보내 대제사장을 죽이기도 한 사람입니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아나니아는 더둘로를 앞세워 그런 사람에게 '우리는 각하 덕분에 평안을 누리고 있소. 각하의 선견지명으로 이 나라가 많이 개혁됐습니다. 누구나, 어디서나 이것을 인정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하고 있으니 어디 제정신 가진 사람입니까? 제정신 가진 사람이라면 유대민족의 자존심을 포기하면서 이런 말 쉽게 못하지요. 생각해 보면 이런 말하는 것은 반민족적 행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커다란 잘못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따져보면 로마총독과 대제사장과는 사이가 좋을 수가 없습니다. 전혀 화해하기가 어려운 관계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 앞에 가서 "당신 덕분에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다. 당신 덕분에 이 나라와 민족이 많이 개혁되었습니다. 어디에 가나, 누구나 다 인정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체면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믿음도 없는 짓 아닙니까?
어찌하다가 대제사장이 이리되었습니까? 그들에겐 단 한가지 굳은 목적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바울을 죽여야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바울을 꼭 죽여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민족의 자존심도 신앙도 다 팽개쳐버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원수 앞에서 '당신 덕분에 평안을 누리고 이 민족이 크게 개혁되어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아첨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어떻게 하든 총독 벨릭스의 비위를 맞춰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판단을 얻어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바울을 이 세상에서 없애야겠다는 일념에 도무지 해서는 안 될 아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동족인 바울과 그렇게 원수될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바울을 죽이겠다고 민족의식, 민족의 자존심을 모두 던져 버리고는 입에 담기 어려운 아부를 하고 있습니다.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있다' - 무서운 일입니다.
4절에서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이시기 원하나이다"
이 말씀은 '당신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힘들지 않도록 간단하게 말씀드릴 터이니 너그럽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할 말이 많지만 총독을 불편하게 하지 않기 위해 간단하게 핵심만 말하겠다는 의미이긴 하지만, 변사로서 재판 절차 과정에서 총독에게 유리한 결론을 이끌어 내려는 대단한 노련함을 나타냅니다.
2. 더둘로가 고소하는 바울에 대한 세 가지 죄
"5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6저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7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8우리의 송사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9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더둘로는 바울에 대한 고소 이유를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1. 소요죄입니다.
바울은 온 천하에 있는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말썽을 일으키는 자라는 것입니다. 더 심하게 말하면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라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로마 총독들이 점령국을 지배하면서 다른 문제들은 비교적 너그럽게 지나가면서도 소요사건에 대해서는 잔인하게 진압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나니아 일행이 얼마나 치밀하게 재판을 준비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어떻게 하면 총독 벨릭스가 화가 나서 자기들에게 유리한 판결, 자기들이 원하는 판결을 내리게 할 수 있는지를 연구했습니다. 그게 뭡니까? 바울을 소요죄로 고발하는 것입니다. 당시 총독 벨릭스는 유대를 통치하는 동안 로마의 평화를 깨뜨리는 여러 소요 사건의 주동자들과 추종자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거나 학살했습니다. 소요죄는 결국 반란 음모죄이고 사실이라면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습니다. 아나니아 일행은 바울의 순수한 신앙고백적 행위를 정치적 혁명세력과 연관시켜 바울을 처벌당하게 하려고 합니다. 자신들의 종교적인 불만을 정치적 선동죄로 뒤집어 씌워 로마로 하여금 바울을 처형토록 하려고 온갖 짓을 다하고 있습니다.
2. 나사렛 이단(異端)의 괴수(魁首)라는 것입니다.
나사렛이란 말은 예수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당시 예수의 제자들 및 그리스도인들을 일컫는 말로서 그들을 무시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던 표현이 나사렛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예수가 나사렛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가 거짓 메시야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이단이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이단이라기보다 한 당파를 의미합니다. 나사렛 이단이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집단을 의미하는 바, 유대인들이 볼 때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전통을 파괴하는 이단적 당파였고 목숨을 걸고 예수의 도(道)를 전하는 바울을 나사렛 이단의 괴수로 보았던 것입니다. 당시 팔레스틴은 거짓 메시야들이 출현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민심을 소란케 함으로 로마 당국의 골치를 썩이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천부장 루시아도 21장에서 바울을 전에 반란을 일으켰던 애굽의 거짓 선지자로 오인한 적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만일 바울이 거짓 메시야를 추종하는 이단의 우두머리라면 로마에 의하여 반드시 처벌받아야 할 중죄인임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3. 성전 모독 죄입니다.
성전 모독 죄는 직접적으로 로마법과 관련된 것은 아니었으나 로마 제국은 유대 종교에 대하여 최대의 관용을 베풀고 있었으므로 유대법 상으로 사형에 해당되는 성전 모독 죄를 강력히 내세운 것입니다. 즉 성전을 더럽히는 자는 로마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유대 당국의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천부장 루시아가 바울을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이송한 것 자체가 부당하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더둘로는 바울이 로마법 상으로나 유대법 상으로나 반드시 죽어야 할 죄인이라고 완벽한 논리로 고소하고 있습니다.
3. 이 사람은 염병(染病)이라- 이 자는 염병 같은 자요.
더둘로는 바울을 일컬어 염병같은 자라 했습니다. 염병이 무슨 병입니까? 보통 장티프스를 염병이라 하는데 원어로 보면 염병, 로이모스(λοιμ?s)는 흑사병을 가리킵니다. 이 병에 감염되기만 하면 치명적입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형편없는 사람을 욕할 때 쓰이기도 하는 말이지요. '염병 앓 놈.' 더둘로가 바울에게 '염병 같은 자'라고 말한 뜻은 바울이 세상에 해로운 사상을, 위험한 사상을 퍼뜨린다는 이야기인데 몇 가지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기도 하고 몇 가지 의미에서는 틀린 말입니다.
염병 걸리면 변합니다. 염병 걸렸는데 안 걸린 사람과 같겠습니까? 아니지요. '복음은 염병과도 같다' 좀 느낌은 이상하지만 그래도 그 속에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마태복음 13:33에서 '천국은 마치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루 속에 누룩을 넣으면 어찌됩니까? 시간이 지나면 가루 전체를 부풀게 합니다. 지금 반대하는 사람들은 바울에게 나쁜 의미로 '염병 같은 자'라 했지만, 생각해 보면 이 말은 아주 좋은 말입니다. 복음을 제대로 받으면 반드시 변합니다. 예수 제대로 믿게 되면 반드시 변합니다. 안 변하는 것이 문제이지 변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믿으면 반드시 변해야 합니다. 반드시 변합니다. 성격도 변합니다. 생각도 변합니다. 세상 보는 눈도 달라지고 취미도 바뀝니다. 인간관계도 달라지고 세계관, 가치관도 변합니다.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예수 믿고도 달라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 오래 믿어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지요. 어떤 사람입니까?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는 사람. 말씀을 바로 듣지 않는데 믿어지겠어요?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데 변하겠어요? 말씀이 들어가면 반드시 변합니다. 병균이 들어가면 병 걸리지요. 복음은 염병 같아 했지요. 병은 변화를 반드시 일으킵니다.
기왕에 예수 믿는 것,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점잖게 예수 믿는 것을 좋게 여깁니다. 점잖게 예수 믿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주일에 점잖게 차려 입고 교회에 가서 점잖게 예배드리는 것. 1주일에 딱 한 번. 그러다가 은혜 받고 주일 저녁, 수요일 저녁 예배드리고, 거기다가 새벽기도 나오고 무슨 훈련이다 봉사다 나설라치면, '예수 꼭 그렇게 믿어야 되느냐? 빠지지 마라' 빠질까봐 겁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매일 운동합니다. Golf를 치는데 1주일에 2번씩 Green에 나갑니다. 그러면서도 Golf 칠 때마다 자기는 Golf에 갈증을 느낀대요. 중증이지요. 운동은 하면 할수록 좋지요. 형편만 되면. 그런데 신앙생활 1주일에 한번 딱, 점잖게 예배드리고 나서 변화되기를 바란다면 욕심이지요. 오래 걸리지요. 나는 먼저 우리 성도들이 예수병에 걸렸으면 좋겠어요. (이미 걸린 사람도 있긴 하겠지만) 그것도 이왕이면 중증 예수 병에 걸렸으면 좋겠어요. 예수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고 가만히 있으면 찬송이 입에서 저절로 나오고 새벽마다 기도하면 하루 종일 힘이 넘쳐 나고 토요일이면 주일 예배와 말씀이 기다려지고 하나님 사랑 생각하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말씀을 읽으면 은혜가 마음에 흘러 넘치고 누군가 만나면 내가 받은 은혜를 전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고 이것 저것 생각해도 그저 감사하기만 하고 며칠 만 보지 않아도 속도원이 보고 싶고, 선교회원이 보고 싶고, 장로님, 목사님이 보고 싶어지고. - 이런 증상이 예수병 걸린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내가 예수병에 심하게 걸렸다면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게 됩니다. 역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이 병을 심하게 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소금 먹으면 반드시 물먹게 되어 있습니다. 7월 마지막 주간(8월 초에 걸쳐)에 서울 관악지방 여름 산상 부흥회가 강화도에 있는 성광 수도원에서 있었습니다. 저는 사실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춘천중앙교회와 교회 건축을 알고 있었습니다. 잘못하면 지나친 자랑이 될 것 같아 아예 얘기를 꺼내지 않았는데 사실은 얼마나 교회 얘기가 하고 싶었던 지요. 두 가지 때문에 말 잘 못했어요. 교회 부지가 1만 8천 평이라면 서울 사람들 그냥 기죽지요. 이만한 시설과 조건 쉽지가 않지요. 가끔 집에 있으면 교회가 오고 싶어져요. 누가 교회 건축에 대해 묻기만 하면 (묻는데 대답 안 할 수야 없지요) 신나요.
교회 생각하면 말 안 하기가 쉽지 않아요. 시험 잘 본 학생, 성적 얘기 안 하기가 쉽지 않아요. 마찬가지로 예수 믿고 은혜 받았는데 그 은혜 말 안 할 수 있어요? 전하지 않을 수 있어요? 예수 제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전해야 합니다. 어떻게 소금 먹었는데 물 안 먹어요? 어떻게 그렇게 좋고 귀한 은혜를 받았는데 전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자신도 변해야 하지만 이웃도 변화시켜야 합니다. 누룩이 가루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하지 않습니까? 은혜 받으셨습니까? 전하세요. 나누세요.
더둘로가 바울을 가리켜 염병같은 자라고 한 말은 맞는 말입니다. 병은 반드시 전염됩니다. 병 걸리면 반드시 변화됩니다. 그러나 염병은 나쁜 병이지만 예수병은 좋은 병 아닙니까?
정리
민족의 자존심과 신앙까지도 접어두고 어떻게 하든 바울 하나 죽이려고 더둘로를 앞세워 아부하는 대제사장 아나니아, 그가 고발하는 바울의 세 가지 죄. 그러나 저는 바울을 일컬어 '염병이라'고 한 말이 가슴을 울립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병으로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받은 은혜를 나누어 이웃도 변화시켜야 합니다.
은혜 받읍시다. 깊은 은혜 속에서 예수를 믿읍시다. 그 예수를 소금 먹고 물먹는 것처럼 전하며 / 나누며 사시는 성도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이웃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입니다.
나사렛 사람처럼
행 24:1-9 / 이윤재 목사
일년중 가장 무더운 8월 첫주입니다. 전국의 날씨가 매일 경신되는 뜨거운 날씨에 여러분을 시원한 곳으로 모시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한강이 발원되는 강원도 태백에 가 보셨습니까? 제가 오래전 태백에 있는 예수원을 다녀왔는 데 예수원 방문을 마치고 한강이 발원한 곳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습니다. 이름을 검룡소라고 부르는 곳이었습니다. 함께 가 보시죠(동영상). 여러분, 한강이 얼마나 큰 강입니까? 남한강, 북한강 모두 합쳐서 총 길이가 497,25Km입니다. 이 큰 강이 이렇게 작은 수원지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태백에는 한강 수원지 뿐 아니라 낙동강 수원지도 있습니다(사진1). 황지 연못이라고. 낙동강은 한강보다 더 깁니다. 그 큰 강이 이 작은 연못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제가 왜 수원지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하는지 아십니까? 8월은 우리 교회가 시작된지 입당 20년 기념주일이 있습니다. 1996. 10.13, 허허벌판 판교의 빈들에서 기공식을 가진 우리 교회는 약 2년만인 1998.8.15, 민족이 해방을 맞은 역사적인 광복절에 봉헌예배를 드리고, 그 다음 날, 8.16, 주일에 입당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20주년이 바로 다음 주, 8.12(일)입니다. 그러면 어느 교회나 공동체나 그를 존재하게 한 수원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한신교회가 여기 있다면 그것이 시작된 수원지는 어디 일까요?
“우물물을 마시는 자는 그 우물을 판자를 기억하라”라는 유대인 속담이 있습니다. 한신의 우물이 여기 있다면 그 우물을 판 자는 누구일까요? 그 분은 당연히 이 교회를 창립한 고 이중표목사님입니다. 그러나 우물의 근원은 어디일까요? 우물을 판 자와 우물 물의 근원은 다르지 않습니까? 목사님은 우물을 팟으나 그 우물에서 나온 샘의 근원은 조금 더 올라가야 합니다. 그 근원을 찾아 올라가면 우리는 강원도 태백에서 사도 바울을 만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에게 가장 잘 베워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복음과 삶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실제로 이중표목사님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했던 분도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저는 이번 8월에 5주에 걸쳐 우리 신앙의 샘의 근원이 된 사도 바울의 믿음과 삶을 추적하고 그 뿌리에서 우리 교회의 영적 수원지를 탐험하는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바울이 로마에 끌려가기 전 총독앞에서 재판받는 장면입니다. 바울은 모두 다섯 번 재판받았는 데 그중의 한번이 오늘 벨릭스 총독에게 받은 것입니다. 이 재판은 더둘로란 사람이 바울을 고발하여 그를 총독앞에 세움으로 재판이 시작되었는 데 더둘로는 이렇게 바울을 고발합니다. 행24:5절입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을 전염병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여기에 “나사렛 이단”이란 말이 옵니다. 여기서 “나사렛 이단”은 누굴까? 나사렛 이단과 사도 바울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다가 초대교회가 시작된 후 처음으로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부른 사람들을 만납니다. 행11장입니다. 행11:26,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았더라”. 이 교회가 바로 안디옥교회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핍박때문에 흩어진 사람들로서 지금 터키 남부 지역에 있는 안디옥에 피난민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처음으로 예수믿은 사람들이 생겼는 데 그들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렀습니다. 그것이 대략 주후 50년경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주후 30년경에 죽고 부활했는 데 주후 30년에서 50년, 약 20년동안 예수믿었던 사람들은 누구일까? 자, 이 도표를 보시죠.
주후30년경(예수님 죽고 부활) ? 주후 50년경(안디옥의 “그리스도인”)
예수님이 주후 30년경에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고, 안디옥의 성도들이 주후 50년경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이었다면 그 사이 20년간 초대교회를 이룬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그 사람들이 “나사렛 사람들”입니다. 다시 도표를 보시죠.
유대인: 나사렛 사람들(주후 30년-주후 300년경)
예수님(주후 30년경)
이방인: 안디옥의 “그리스도인” (주후 50년경-현대)
예수님이 주후 30년경 죽고 부활하신 후 처음 믿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12제자가 대부분 유대인이었고 성도들도 대부분 유대인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성경은 “나사렛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다가 주후 50년경 스테반의 순교 이후 유대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그래서 새롭게 형성된 기독교 중심지가 지금의 터키 안디옥입니다. 이때 유대인들의 전도로 많은 헬라인, 로마인등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이었지만 유대인들이 전도한 이방인 교회를 이끌며 오늘까지 2천년 교회 역사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에 두 종류의 성도가 있었습니다. 처음에 믿은 유대인을 중심으로 “나사렛 사람들”, 안디옥을 중심한 이방인 중심의 “그리스도인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나사렛 사람이 먼저였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유대인이었고 예수님도 나사렛 출신이라 “나사렛 사람”이라 불렀습니다. 사도 바울은 직접적으로 나사렛 사람은 아니었으나 이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의 신앙과 삶을 본받아 거의 그들과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재판에서 더둘로가 이 사람은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요 가는 곳마다 마치 전염병처럼 예수를 퍼뜨려 천하를 어지럽게 한 자라고 고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나사렛”이 어딘지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나사렛은 이스라엘 갈릴리 남쪽 지역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인 보금자리형 도시입니다(사진). 이 도시가 지금은 이스라엘의 5대 도시이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1955년부터 기독교인 고고학자가 이 지역에 대한 고고학 발굴을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 시대의 나사렛은 인구 겨우 120명에서 150명 정도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후 500년이 지난 6세기 중엽에 쓰여진 바빌로니아 탈무드에 갈릴리 지역의 마을 65개의 명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도 나사렛은 빠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후 6세기 까지 나사렛은 갈릴리지역의 65개 마을 속에 들지 못한 어주 작은 마을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이 빌립에게 말합니다. 요1:46,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말했겠습니까? 그 정도로 나사렛이 작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스라엘중에서 가장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삽니다. 주일이면 거의 모든 가게가 문닫습니다. 성지순례할 때 반드시 빼놓지 않고 가는 곳이 나사렛입니다. 문제는 나사렛 사람들이 가졌던 신앙입니다. 예수님 부활후, 나사렛을 중심으로 살았던 초대교회 나사렛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것이 우리의 우물의 근원입니다. 우리 믿음의 수원지입니다. 우리가 마셔야 할 나사렛 사람의 우물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1. 열심있는 믿음
먼저 열심있는 믿음입니다. 5절을 다시 보십시오. 행24: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을 전염병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당시 믿지 않던 사람들이 볼 때 초대교회 나사렛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열심이었습니다. 그것을 5절은 “전염병 같다”고 말합니다. 옛날 말로 하면 이 말은 “염병 걸렸다”는 말입니다. 열병은 열이 심하게 나 헛소리하고 머리가 빠질만큼 아픈 병입니다. 너무 열이 나니까 머리가 돌아버린 것입니다. 글자 그대로 미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온 몸에 열이 날만큼 열병이 걸린 적이 있습니까? 무엇인가 한 가지를 열심히 하다가 미쳐본 적도 있습니까? “열심”이란 말을 영어로 “인슈지애지즘”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인테오스” 즉 “하나님 안에 있다”라는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열심 있다는 것은 하나님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에게 붙들리면 그때부터 사람은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미친다”, “미쳤다”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보고 자주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막3:20-22,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기에 미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삭사할 겨를도 없이 정신없이 다니는 바람에 사람들이 그를 미쳤다고 본 것입니다. 혹 어떤 사람은 예수안에 바알세불 귀신이 들어간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인테오스”, 신이 들어가면 사람은 미치기 때문입니다.
어떤 책에 보니까 “미친 여자 시리즈”라는 것이 있습니다. “10억도 없으면서 강남에 사는 여자, 20억도 없으면서 자식을 유학 보내는 여자, 30억이 있으면서 손자 봐주는 여자”. 이런 여자는 미친 여자라는 겁니다. 부산에 있는 태종대가 대학이라고 우기는 여자, 안중근 의사가 내과의사라고 우기는 여자도 미친 여자랍니다. “미친 남자”시리즈도 있습니다. “50대에 사업하겠다고 대출받는 남자, 60대에 이민 가겠다고 영어공부 하는 남자, 70대에 골프 선수 되겠다고 레슨 받는 남자, 80대에 장수하겠다고 보약 지어먹는 남자, 90대에 한 오백년 살겠다고 종합검진 받는 남자”, 우리 생각에 “미쳤다”는 말은 보통의 상식을 뛰어 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살아서 어떻게 성공합니까? 미치지 않고 성공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미쳐야 미치고 안 미치면 못미칩니다”. 바울도 미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고후5: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저는 25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많이 고생하고 힘도 들었지만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한 힘이 무엇인가 생각하면 그것은 제 가슴속에 타는 불입니다. 제 가슴에 속에 타는 불이 최고의 자산입니다. 가슴의 불꺼지면 다 끝난 것입니다. 그래서 늘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제 속에 타는 불, 꺼지지 않게 도와 주세요. 제 가슴에 타는 불, 계속 타오르게 하옵소서”.
비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줄 아십니까? 우리속에 타는 불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존 맥스웰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힘은 가슴에 타는 불이다. 만일 어떤 사람을 감옥에 넣어 보라. 거기에 ”천로역정“을 쓴 죤 번연이 있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을 눈속에 파묻어 보라. 거기에 죠지 와싱턴이 있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을 가난한 통나무집에 태어나게 해보라. 거기에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있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을 소아마미에 걸리게 해보라. 거기에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있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을 귀머거리가 되게 해보라. 거기에 악성 베토벤이 있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을 지진아가 되게 해보라. 거기에 아인쉬타인이 있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을 삼진 1330개의 실패한 야구선수가 되게 해보라. 거기에 베이비 루스가 있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을 귀먹고 말못하고 앞 못보게 해보라. 거기에 헬렌 켈러가 있을 것이다. 언제나 사람의 꿈을 이루게 한 것은 가슴에 타는 불이다”. 여라분에게도 이 불이 있습니까? 가슴속에 인생의 불도 신앙의 불도 타오릅니까?
5절 중간을 다시 보십시오.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소요케 하는 자요”. “소요케 한다”는 말은 나사렛 사람들이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나쁜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뒤집어 말하면 나사렛 사람들은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상식적인 삶으로는 세상을 놀라게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뒤집기 전에 우리가 미쳐야 합니다. 염병결려야 합니다. “인테오스”, 하나님의 신안에 있으면 우리가 미칩니다. 인생이나 신앙이나 이 하나님의 불이 여러분 속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예수님을 사랑하는 믿음
그러면 나사렛 사람들이 열심이 있었는 데 그 열심은 어떤 열심이었습니까? 열심은 좋은 것이지만 무엇을 위한 열심이냐가 더 중요합니다. 중세시대 어느 수도원에서 줄리어스라는 수도자가 평생 기도하며 살았답니다. 이 사람이 한번은 꿈을 꾸었는 데 꿈에 어떤 사람이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가를 자랑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줄리어스에게 그 열심을 보여달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줄리어스는 자기 품에서 열심덩어리를 꺼내 그에게 주었습니다. 줄리어스의 열심덩어리를 받은 손님은 저울에 꺼내 달아보더니 “100근이나 되는군요” 했습니다. 그래서 줄리어스는 속으로 매우 기뻤습니다. “내 열심이 100근이나 되다니…”. 그런데 그 사람이 그 열심덩어리를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참동안 분석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열심을 분석했더니 야심이 20근, 의심이 19근, 명예심이 30근, 기타 28근,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단 3근도 안되는군요” 하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열심히 중요하지만 대부분 나를 위한 열심히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사렛 사람들의 열심은 달랐습니다. 그들의 열심은 예수님에게서 왔고, 예수님을 위한 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히3:1절을 저는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여기서 “깊히 생각하라”는 말을 헬라어로 “카타노에사테”라고 합니다. 이 말은 “give attention to”,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군대에서 상관이 말할 때 부하가 차례 자세로 듣는 자세입니다. 한 눈 팔지 않고 마음과 생각과 관심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집중은 의도적인 것입니다. 언제나 좋은 일은 의도적으로 집중할 때 생깁니다. 신앙은 예수님을 향한 의도적인 집중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께 집중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우리는 눈만 뜨면 세상을 생각하고 생각하면 나만 생각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열정은 집중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를 깊히 생각하라”. 깊히 생각해야 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깊히 생각하지 않으면 저절로 생각나지는 않습니다.
타락한 육체적 본성은 우리가 예수님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생각은 우리가 결심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우리가 세상의 모든 일을 예수님과 관련시키는 훈련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늘 물어야 합니다. 미국의 챨스 쉘던이라는 분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겠는가?”라는 책을 썻습니다. 이 책은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의 기준을 오직 예수님께만 두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학시험, 취직시험을 앞두고 피곤에 지친 사람이 있습니까? 너무 지치고 피곤하여 그만 때려 치우고 싶습니다. 그때 여러분은 예수님을 생각합니까? 당연히 열받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 생각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의식적으로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래야 해답이 나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간신히 회사에 취직했는 데 까다로운 상관을 만나 마음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회사를 그만 둘까를 말까를 고민하는 데 그때 가장 먼저 누가 떠오릅니까? 예수님입니까? 아마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떠오른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잘 안됩니다. “예수를 깊히 생각하라”. “Give attention to Jesus ”, 예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어느날 사소한 일로 아내와 다투었습니다. 그리고 화가 나서 집을 나갔습니다. ”다시는 집에 들어오나 봐라“. 큰 소리도 쳤습니다. 막상 집을 나갔는데 갈 데가 없습니다. 할 수 없이 아무도 안보는 곳에서 소주 한병을 마셨습니다. 시간은 점점 12시가 가까워 오는 데 정말 갈 데가 없습니다. 그때 여러분에게 누가 떠오릅니까? 예수님입니까? 확실히 아닐 것입니다. 슬퍼서 어머니가 떠오를지 모릅니다. 속상해서 친구가 떠오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떠올라야 해답이 있습니다. Jesus is the answer for everything. 예수님은 모든 것에 해답이기 때문입니다.
이 원칙은 신앙생활의 모든 영역에 해답됩니다. 중국 선교의 아버지 허드슨 테일러가 선교사 지원자를 면접할 때 늘 하는 질문이 있었답니다. “당신은 왜 선교사로 가기를 원합니까?” 대부분의 선교사 후보자는 이렇게 말한답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전 세계에 나가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순종하여 가기를 원합니다”. “나는 아직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예수님 밖에서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선교사로 나갑니다”. 그때 허드슨 테일러가 이렇게 말한답니다. “모든 동기가 다 좋지만, 시험과 시련 그리고 고생, 심지어 죽음의 순간을 당할 때 그것이 당신을 구하지 못합니다. 당신을 끝까지 시련과 고통으로부터 지켜줄 것은 당신이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주 빠지는 함정입니다. “왜 목회합니까?” “사명을 받았으니까요”. “왜 장로가 되었지요?” “교회 일할라고요”. “왜 성가대에서 찬양하죠?” “찬양을 좋아하니까요”. “왜 어린이 교사 하지요” “다음 세대가 우리의 희망이니까요”. 다 맞지만 이 대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험과 지루함과 인내의 한계와 모독과 고난을 충분히 이기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해답이 있습니다. “Because I love Jesus”.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또 하나 이야기한다면 “ And he loves me, too”. “예수님도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할 때 아주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우리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바꾸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완전히 고쳐준 사건아니라 나를 완전히 바꿔준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오른편 강도를 고쳐주셨습니까? 그의 모든 악행, 범죄, 나쁜 생각, 쩌들은 습관, 다 고쳐주셨습니까? 고쳐주지 않고 낙원에 갈 자로 운명을 바꿔주셨습니다. 민란을 꾸미고 사람을 죽인 강도 바라바를 다 고쳐주셨습니까? 그의 잘못된 가치관, 생활태도, 악한 습관, 생각을 다 고치셨습니까? 그대로 두고 예수님과 운명을 바꿔치기했습니다. 죽어야 할 바라바를 살리고 살아야 할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고치지 않고 바꿔주십니까? 고쳐서는 새로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생이란 고치는 것이 바뀌는 것입니다. 나와 예수님이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죽을 때, 우리가 살고 예수님이 대신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어 우리가 살면 그때부터 성령으로 고치기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성경적 변화는 고쳐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바꿔서 고칩니다. 먼저 예수님과 바꿔서 살리고 살린 우리는 성령으로 고치십니다. 모든 신앙의 중심에 예수님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안에 지금 살고 예수님을 위하여 살 것입니다. 예수님 사랑이 최고의 은혜요 능력입니다.
3. 순교하는 믿음
나사렛 사람들이 가졌던 믿음의 마지막은 순교하는 믿음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하면 그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나사렛에 가면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잉태했을 때 천사의 방문을 받은 수태고지교회가 있습니다(사진). 그 교회의 지하에 가면 이스라엘에 남아 있는 기독교 유적중 가장 오래된 동굴이 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이가 실제 살았던 동굴이라고 합니다. 그 동굴 기둥에는 낙서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여, 게노스와 엘피스를 도우러 오셔서.’ 그리고 거기에 많은 이름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아칼레스, 엘피디, 바울, 안토니스...”. 이 중에서 게노스와 엘피스는 열심히 주님을 믿던 나사렛사람이었습니다. 핍박의 시대에 그들은 붙잡혀 순교의 나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남아 있던 성도들이 그를 위한 간절한 기도를 낙서로 기둥에 쓴 것입니다. “주님, 오늘 순교하기 위해 잡혀간 게노스와 엘피스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희를 도와주소서.” 당시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잡혀 죽던 시대였습니다. 잡혀서 맹수의 밥이 되든지 십자가형에 처해지든지 그들은 순교의 제물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 핍박의 시대에 잡혀간 사람도 순교자요 남은 자도 순교자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사건건 예수님의 사역을 반대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던 그들이 부활 후에 변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형제들은 변화되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주님을 좇았습니다.
이들은 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나사렛에 남아 살다가 결국은 다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 유다서를 쓴 유다가 예수님의 친동생입니다. 다 순교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의 사촌인 시므온은 120살까지 나사렛에 살다가 주후 107년 트라잔황제에 의해 순교를 당했고, 친동생 유다의 두 손자도 도미치안황제에 의해 순교당하고 말았습니다. 예수의 먼 친척 코논은 주후 249년 밤빌리아에서 순교의 제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사람들은 순교의 믿음을 지키며 대략 주후 300여년,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할 때까지 이스라엘을 지켰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을 위해 죽는다는 사실도 아십니까?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은 사람들, 그들이 초대교회 성도들이요 나사렛 사람들이며 또한 우리들입니다. 루마니아의 기독교 지도자 요시프 톤이 차우세스쿠 독재 정권하에서 비밀경찰에게 붙잡혀 목숨의 위협을 받았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최대 무기는 죽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최대 무기는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꼭 목숨을 바쳐야 순교는 아닙니다. 죽지는 않지만 주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순교적 삶이 있습니다. 오래전에 일본에 한 나가노라는 유명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가 한번도 교회가 들어가지 않은 지역에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다고 해서 저 북해도의 아주 작은 마을에 텐트를 치고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5년동안 신자가 한 명도 없었는 데 어느날 한 청년이 천막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나가노 목사가 반가워 달려갔는 데 콜록 콜록하면서 입에서 피가 나옵니다. 폐병환자도 중한 폐병환자였습니다. 나가노 목사는 실망했지만 그를 있는 힘을 다해 간호했습니다. 그가 다름아닌 ”가가와 도요히꼬“, 곧 ”하천풍언“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아버지가 방탕하다가 기생에게서 난 아들이었습니다. 그나마 5살에 부모가 죽고 큰 어머니, 곧 아버지의 첫 번 부인에게 얹혀 살다가 그나마 쫓겨나서 고아원을 전전하다가 못먹어 폐병에 걸렸던 것입니다. 인생을 한탄하고 죽기고 마음먹고 흐르는 피를 손으로 틀어 막으며 멀리 이곳까지 걸어온 것입니다. 부모없이 살던 그에게 나가노 목사는 아버지처럼 대했고 못배운 그에게 나가노 목사는 훌륭한 선생이 되었습니다. 몸이 아프면 밤새워 간호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먼 훗날 그가 어떤 사람이 일본 최고의 성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거지, 부랑아, 문둥이, 실직자들을 가슴에 안고 함께 먹고 함께 살았습니다. 어떤 환자가운데는 심한 치질 때문에 변이 나오지 않은 환자도 있었는 데 그때마다 가가와는 꼬창이로 변을 빼주고 하고 심지어 안되면 입으로 변을 빨아주기까지 했습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에게 너무 지나치게 한다고 하면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배운대로 합니다. 우리 선생님은 나에게 그보다 더 큰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그는 내가 아플 때 한 잠도 자지 않고 나를 간호했습니다. 어떤 날은 내 속에서 나오는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주기도 했습니다. 우리 선생님이 나에게 그렇게 했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합니다”. 나가노 목사는 일생 한 사람의 신자를 키웠지만 그 제자는 그 선생을 간데마다 자랑하고 다녀 나가노 목사는 결국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목사가 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20년을 맞은 한신교회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에게서 배운대로 삽니까? 비울에게 배운대로 삽니까? 돌아가신 이중표 목사님을 기억하시는 분들, “나는 목사님께 배운대로 합니다. 목사님이 나에게 그렇게 보여주셨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몸에서 오직 에수님만 존귀히 되기를 원합니까?
나사렛 사람, 비록 적고 보잘 것 없는 무리였지만 오로지 예수님만 사랑하는 열심히 초대교회 순교의 시대 300년을 지킨 사람들, 그들의 열심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믿음이 결국 죽음으로 로마를 이기고 세계를 소요케 하여 마침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를 만든 것을 믿습니까? 우리도 이 믿음의 수원지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고 순교적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겠습니까? 그렇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