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64
8월29일[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연중 제21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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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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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G6eowloaJkw
[의정부교구 백종하 바오로(능곡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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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허무한 죽음,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죽음에는 참으로 다양한 유형의 죽음이 있습니다. 살아생전 국가와 이웃을 위해 큰 족적을 남겼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애도와 눈물 속에 떠나는 황홀한 죽음이 있습니다. 건강하게 백수를 누리면서 평생 잘 지내다가 후손들의 환송을 받으며 떠나는 편안한 죽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죽음은 죽었다 깨어나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납득할 수 없는 죽음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부주의로 인한 한 청춘의 안타까운 죽음 앞에 우리는 할 말을 잃습니다. 난폭하고 오만한 지도자의 그릇된 정책, 게으름과 무성의, 안일무사함으로 인해 벌어진 대참사, 그로 인한 희생자들의 죽음도 정말 이해가 안됩니다.
오늘 수난 기념일을 맞이하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도 그런 것 같습니다. 구약 시대 마지막 대 예언자, 자기 뒤에 오시는 구원자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잘 닦은 선구자가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한때 타오르는 횃불 같이 찬란했던 그의 삶이었습니다. 죽는 모습도 그에 못지 않게 장엄하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사악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헤로디나의 간계와 허당 기질이 다분한 헤로데의 허언 한 마디로 인해, 세례자 요한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어이없는 참수형을 당하고 맙니다. 요한의 머리는 댕강 잘려져 쟁반에 담깁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담긴 쟁반을 받아든 헤로디아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이 얼마나 비참하고 수치스런 죽음인지요. 대예언자의 결말이 너무나 초라하게 끝이 나는 것 같아 도무지 받아들이기가 힘든 분위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허무한 죽음,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참으로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것이 예언자로서의 삶과 죽음의 본모습인 듯합니다. 쓸쓸하고 아쉽고 드러나지 않는 삶과 죽음, 자신이 아니라 자기 뒤에 오시는 주인공이신 주님을 빛내게 해주는 존재로서의 삶과 죽음이 곧 예언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무척이나 신산하고 을씨년스런 삶, 씁쓸하고 고독한 현실, 그래서 오직 주님에게로만 초점이 맞춰지는 삶 그것이 참 예언자로서의 삶이 분명합니다. 예언자들이 대단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느님으로부터 등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예언자로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너무나 괴로울 때는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하소연했습니다. 항상 하느님과 소통하며 그분의 뜻을 찾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 또 다른 예언자들인 사제들과 수도자들, 선구자들을 바라봅니다. 그들이 보다 가난해지도록 그들이 좀 더 고독해지도록 도와줘야겠습니다. 그들이 갖출 것 안 갖출 것 다 갖추고 떵떵거리며 산다면, 그것처럼 예언자로서 부끄럽고 비참한 삶이 다시 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예언자로 산다는 것,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쩌면 박해받는 의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메시지를 가감 없이 전달하는 일, 사회 정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외치는 일, 남들이 마다하는 선행과 봉사를 실천하는 일, 세상 사람들 눈으로 볼 때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일, 손해 보는듯한 느낌이 드는 일, 그 일을 하고 계신다면 제대로 된 예언자의 삶을 사는 것이 분명합니다.
오랜 역사 안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참 신앙인의 길은 세상의 논리와 이치를 뛰어넘습니다. 나와 내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납니다. 결국 바보처럼 살게 합니다. 손해 보는 삶을 선택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결국 주님께서 원하시는 예언자의 길이요 의인의 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비록 비극적이었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조차도 예수님의 구원사업 성취의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출생은 물론 생애 전체, 죽음까지도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 예수님을 위해 온전히 봉헌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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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wqLvbD3Or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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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안 읽는 이유는 이 습관을 버렸기 때문이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이 순교한 날을 기념합니다. 헤로데는 왜 세례자 요한을 존경하면서도 목을 자르게 명령했을까요? 우리도 살다 보면 옳은 일이지만, 알면서도 그 일을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인데,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성경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목을 치지는 않지만, 먼지가 쌓이게 두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성경이 좋은 걸 알면서도 읽지 않는 것이나 헤로데가 하느님 말씀을 듣기 싫어 목을 치는 것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개신교에 비해 가톨릭 신자가 성경을 읽는 시간은 반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하는데 왜 그런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책을 읽는 것은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데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독서 시간은 세계적으로 매우 낮은 수준입니다. 성인 10명 가운데 6명 정도는 1년 동안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습니다. 그러나 책이 좋다는 것은 다 압니다. 유명인들 몇 명의 말을 들어봅시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모두 책에 있다. 내가 읽지 않은 책을 찾아주는 사람이 바로 나의 가장 좋은 친구이다.”(에이브러햄 링컨) “당신은 결코 독서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워렌 버핏)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우리 마을 도서관이었다. 하버드 졸업장보다 소중한 것이 독서 하는 습관이다.”(빌 게이츠) “남의 책을 많이 읽어라 남이 고생하여 얻은 지식을 아주 쉽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고 그것으로 자기 발전을 이룰 수 있다.”(소크라테스) 이렇게 책은 마음의 양식만이 되는 것만이 아니라 돈도 많이 벌게 해 주는 길이 됩니다. 그런데도 읽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책을 읽고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한 사람 중 대표적인 인물이 ‘오프라 윈프리’입니다. 그런데 오프라 윈프리는 ‘감사일기’도 강조합니다. 신기한 것은 감사일기를 쓰는 사람 중에 독서를 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미라클 모닝’으로 유명한 할 엘로드도 감사를 강조하는데 아침엔 반드시 책을 읽으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왜 감사와 책읽기가 함께 갈까요?
책은 마치 세례자 요한처럼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지침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지침은 내가 그 사람에게 감사할 때만 관심이 생깁니다. 부모에게 감사하지 않을 때인 사춘기 때 부모의 모든 말은 잔소리가 됩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감사할 때는 부모의 가르침에 귀를 쫑긋 세웁니다. 고마울 때만 듣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지 않는 이유는 그저 이해하기 어려워서라기보다는 하느님께 감사하는 습관이 들여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감사는 저절로 일어나는 감정이 아닙니다. 부모가 똑같이 사랑해줘도 어떤 아이는 감사해하고 어떤 아이는 불만스럽습니다.
EBS에서 한 달간 부모를 칭찬하는 숙제를 사춘기 아이들에게 시켰을 때 아이들은 처음엔 힘들었지만, 나중엔 잘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만큼 집과 부모가 좋아져서 말을 잘 듣게 되었습니다. 감사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감사일기를 억지로라도 써야 하는 것입니다.
저희 성당은 감사일기를 나누어주고 매일 그날 읽은 성경 구절이나 하.사.시. 한 문장씩을 쓰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감사가 말씀을 읽게 하여 헤로데처럼 좋은 걸 알면서도 예언자의 목을 치는 사람은 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신앙은 이렇게 선순환됩니다. 감사하면 성경을 읽게 되고 성경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며 우리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사명을 받습니다. 그 사명 때문에라도 삶이 의리있어집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실행할 힘을 얻기 위해 성체성사나 고해성사에서 멀어지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게 감사하려는 노력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감사는 태도입니다.어린이처럼 되려는 태도입니다. 하느님 자녀가 되려는 태도입니다. 그러니 감사일기를 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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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병자성사를 다니면서 안타까운 사연을 들었습니다. 한분은 아들과 함께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수술도 하고, 여러 고비를 넘겼지만 6개월 정도 재활 운동하면 어느 정도 좋아질 거라고 합니다. 형제님은 자신의 불행을 원망했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습니다. 몸도 아프지만, 마음까지 아파했습니다. 재활 운동하면 걸을 수 있고, 좋아질 거라는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오고, 불행은 원망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하는데 형제님은 몸도 아픈데, 마음까지 아프니 안타까웠습니다. 형제님을 간호하는 가족들도 안타까워했습니다. 다른 한분은 7년 전에 근 무력증이 찾아왔습니다. 스티븐 호킹이 걸렸던 병(루게릭병)입니다. 천천히 근육이 마비가 되면서 지금은 손가락만 겨우 움직일 정도였습니다. 병원에서도 호전될 가능성은 없다고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고통을 형제님은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아직은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음에 감사하다고 하였습니다. 딸들이 잘 자라주는 것도 감사하다고 하였습니다. 눈으로 움직이는 마우스가 있어서 텔레비전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살아서 딸들이 자라는 걸 보는 것도 감사하다고 합니다. 비록 몸은 마비가 찾아왔지만 형제님의 마음은 순수했고, 열정이 넘쳤습니다. 생각을 바꾸니, 마음이 편해졌다고 합니다. 마치 욥과 같았습니다. 욥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했다면, 나쁜 것을 주셨을지라도 감사드립니다.”
동료 사제들 중에도 불평과 원망 때문에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재능을 아깝게 소진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뜻을 몰라주는 본당 신부 때문에 힘들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았던 교우들 때문에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새로 성전을 신축하는 곳에 가서는 성전신축 기금 마련이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기존의 성당으로 가서는 조직과 시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보좌 신부님의 행동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뜻하지 않았는데 병이 찾아왔고, 오랜 시간 휴양 중에 있는데, 그것도 자신을 힘들게 했던 사람들 때문이라고 원망했습니다. 몸이 불편하니 운동도 하지 못하고, 운동을 하지 못하니 몸은 더욱 불편해지는 상황이 반복되었습니다. 시간도 많이 흘렀고, 우리도 이제 모두 익어가는 때입니다. 아름다웠던 젊은 날을 회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면 좋겠습니다.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동료 사제도 있습니다. 성전 신축하는 성당으로 3번이나 갔는데도 항상 싱글벙글 이었습니다. 일이 적으면 책 읽을 시간이 많아서 좋다고 합니다. 일이 많으면 결과를 볼 수 있어서 좋다고 합니다. 간수치가 높아서 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전화위복이 되어서 매일 꾸준히 운동했고, 지금은 누구보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행복 바이러스가 있는 것처럼 그 신부님이 있는 곳에는 늘 웃음과 평화가 넘쳐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항상 기도하십시오, 늘 기뻐하십시오, 언제나 감사하십시오.”
휠체어에 앉아서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던 형제님의 말이 생각납니다. “모든 것,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수난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습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왔습니다. 제자들도 세례자 요한을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존경과 사랑을 듬뿍 받고,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운명처럼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기꺼이 자신의 자리를 예수님께 내어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광야의 소리입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습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질 것입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겁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인공이 되는 것을 기꺼이 포기했고, 조연의 자리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 교회는 세례자 요한의 축일을 세상을 떠난 날이 아니라, 이 세상에 태어난 날로 정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역시 성령의 이끄심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일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여인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에서 복된 요한을 뽑으시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특별한 영예를 주셨으니 그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송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선구자 요한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인류 구원이 다가왔음을 기뻐하였고 태어날 때에 구원의 큰 기쁨을 알렸으며 모든 예언자 가운데에서 그 홀로 속죄의 어린양을 보여 주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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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17-29: 요한 세례자의 죽음
오늘은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이다. 세례자 요한의 삶은 모두 그리스도께 대한 증거였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가실 길을 닦아드린 다음, 그 길을 예수님께 내어드리고 자기의 제자들을 그분께 인도하고 순교하신 분이다. 그분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피를 흘리기까지 견디어낸 사람들과 수도자들의 아버지이다. 요한 세례자는 고행과 순교의 두 면을 보여준 분이다. 그는 권력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말하였고,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순교하였다. 그분은 당신의 삶으로 그리스도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피로써 주님을 증거하신 분이다. 헤로데 왕의 잘못을 간하다가 잡힌 몸이 되었는데, 이제는 헤로데의 만용이 세례자 요한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
왕의 잘못에 대해 자신의 위험을 생각지 않고 끝까지 지적할 수 있었던 그분의 예언자적 정신과 자세를 볼 수 있다. 예언자는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항상 하느님의 뜻을 전한 사람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들은 항상 진리 편에서 그것을 증거했기 때문에 항상 박해를 받았고 죽임을 당했다. 그래도 그 예언자적 정신은 항상 계속됐다. 예언자의 삶은 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박해를 받았다. 그래서 권력은 진리를 외치는 입을 막아 침묵하게 하고, 또한 침묵을 강요하곤 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예언자들은 그 권력에 맞서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진리를 외쳐왔고 지금도 외치고 있다. 그 예언자적 삶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계승해야 한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자기들이 바라고 기다리고 있던 엘리야라고 알기도 하였고, 예언자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였다. 예수님 안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로마의 억압에서 해방하여 자유를 주고 세계를 지배할 승리를 가져다줄 정복자로서 엘리야를 생각할 수도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면서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능력과 말씀을 전하던 예언자의 모습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분은 엘리야를 무한히 능가하시고 예언자들을 초월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기도와 신앙 안에서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그분이 누구시라고 말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진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만에 빠져 죄 없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헤로데와 같은 잘못은 범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요한 세례자의 자세를 본받고, 예언자적 삶을 살아가며 주님을 우리의 참 구세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대하고 모시는 우리 되도록 하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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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입니다. 그런데 복음에서 요한의 죽음 자체는 아주 간략하게 서술됩니다. 그가 죽을 때 무슨 말을 하였는지,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였는지도 일러 주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어처구니없는 죽음입니다. 요한의 입장에서 생각하였을 때, 차라리 헤로데가 처음부터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면 죽는 이유가 더 명백하였을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오히려 요한의 주장이 더 두드러지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헤로디아가 요한을 죽이고 싶어 하였을 때까지도 헤로데는 요한을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헤로디아가 헤로데를 설득해서 요한을 죽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약속한 선물을 주려고 요한의 목을 가져오게 합니다.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고 나서 반지 하나를 달라고 하였든 요한의 목을 달라고 하였든 헤로데는 똑같이 행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한을 죽일 어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헤로디아가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주려고 죽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경비병은 감옥에 가서, 마치 반지 하나를 가져오듯이 담담하게 요한의 목을 베어 들고 옵니다.
그러나 경비병이 감옥으로 요한을 찾아간 날, 요한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그가 맞게 될 예언자의 운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정당한 명분으로는 요한을 죽일 수 없었기에, 불의는 어떻게든 진리의 목소리를 죽이는 길을 찾습니다. 요한은 그에게 걸맞지 않은 이유로 소리 없이 죽임을 당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그가 죽어야 할 이유가 없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예레 1,19). 요한은 헤로데에게 꺾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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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박해와 순교는 예언자의 운명이 아닙니다.>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마르 6,17-21ㄱ)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마르 6,26-29)
1) 여기서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라는 말만 보고,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보호하려고 했고, 헤로디아만 세례자 요한을 죽이려고 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것은 죽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잠깐 가두어 놓았다가 다시 풀어 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헤로데는 백성의 여론을 살피면서 세례자 요한을 죽이기에 적당한 때가 되기를 기다렸는데, 헤로디아는 기다리지 못하고 당장 죽이려고 했습니다. 헤로데가 그런 헤로디아를 막은 것은, 요한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의 반응을 지켜보기 위해서였습니다. 20절의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는, “백성들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헤로데가 백성의 여론을 두려워하며”입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권력을 잃고 쫓겨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임금 자리를 유지하려면 로마 황제에게 잘 보여야 하는데, 그러려면 백성의 지지가 중요했습니다. 만일에 반란이나 폭동이 일어나면, 로마 황제는 그 책임을 헤로데에게 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다.”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기 싫어했으면서도 경청하는 척 했다는 뜻입니다. 21절의 “좋은 기회가 왔다.”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을 죽이기에 좋은 기회가 왔다는 뜻입니다.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둔 것에 대해서 당시의 백성들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헤로데는 자기 생일에 세례자 요한을 처형하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헤로디아가 생각한 것이 아니라.>
2)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이라는 말은, 요한을 죽이는 것을 괴로워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경솔함과 경망스러움을 의식하면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체면과 자존심이 손상된 것을 괴로워했다는 뜻입니다. 사실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23절) 라는 말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식민지의 영주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왕국’ 자체가 없었고, 자기가 다스리는 갈릴래아 지역의 절반을 로마 황제의 허락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누군가에게 줄 권한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천벌이라도 받겠다고 ‘맹세’까지 했습니다. 헤로데 자신도 자기의 약속이 헛되다는 것과 자기의 맹세가 거짓 맹세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3)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사람들을 회개시키려다가 권력자에 의해서 살해당한 ‘순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예언자가 그렇게 박해받고 순교하는 것을 ‘예언자의 운명’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미리 정해져 있는 운명 같은 것은 없습니다. 또 그렇게 박해받고 순교하라고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보내시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에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사람들이 받아들여서 모두 회개했다면, 또 헤로데와 헤로디아도 회개했다면, 요한이 박해받고 순교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것, 사람들이 모두 회개하고 당신에게로 돌아서서 사는 것을 바라십니다. <예언자들의 순교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인간들의 범죄입니다.>
우리 교회가 수없이 겪었고, 지금도 일부 지역에서 겪고 있는 박해와 고난들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그 뜻을 거역하는 범죄일 뿐입니다. 물론 순교자 자신은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 기꺼이 하나의 밀알이 된 분들입니다. 그래도 박해와 순교를 하느님의 뜻이라고, 또는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살인죄를 지은 헤로데 같은 자들을, 하느님께서는 왜 내버려 두시는가? 그런 박해자들에게 바로 천벌을 내리셔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헤로데 같은 자들도 하느님의 자녀이고, 잃은 양이고,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곧바로 천벌을 내리지 않고 기다리시는 것은 죄인들이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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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수난을 기념하는 우리 교회>
오늘은 세례자 요한 수난 기념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별 것을 다 기념하지요? 수난을 기념하는 날로는 예수님을 기리는 성주간과 성모님의 통고 축일이 떠오릅니다.
수난이라는 말 자체는 큰 고통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고통을 기념하는 것인데 우리 교회는 왜 이렇게 고통까지 기념하는 것일까요?
모든 사람이 나에게 있어서는 안될 것처럼 생각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고통이 없을 수가 없고, 또 그것을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가 없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한편 고통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의로운 고통이 있는가 하면 치욕스런 고통도 있지요.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고통을 받았거나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순국 선열로 추앙하며 기립니다. 그 고귀한 희생과 의로운 모습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하지요.
집안의 아버지나 어머니는 가정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습니다. 가정이 어렵고 힘들 때 부모들은 자기 목숨을 희생하기까지 노력하며 그것을 치욕스럽다거나 그 행위가 무의미하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가정을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고통이라도 행복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요. 이 또한 의로운 고통이며 의미 있는 희생입니다.
반면 치욕스런 고통도 많습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다가 어느 날 감옥으로 가는 대통령과 그 측근의 모습을 보면 정말 치욕스럽지요. 그때의 고통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함께 받을 수밖에 없는 무의미한 고통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 역시 얼마나 많은 국민들에게 고통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가 세례자 요한의 수난을 기념하는 것은 이런 무의미한 고통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 즉 하느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의로운 고통을 기리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고귀한 수난을 우리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는 날이 오늘 세례자 요한 수난 기념일의 의미인 것이지요.
복음에서 보면 세례자 요한은 어느 날 갑자기 죽게 된 것이 아니라 권력자의 눈에 가시 같은 존재로서 벌써 죽었어야 될 사람이었습니다.
죽이기에 적당한 시간을 보기 위해서 감옥에 가두어 놓았을 뿐이지요. 헤로데 임금이 좀 더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다면 감옥에 가둬두거나 적당한 때를 기다리지 않고 당장에 죽여버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왜냐하면 헤로데 임금은 임금으로서 해서는 안될 부정한 결혼을 했기 때문입니다.
임금이 불의하면 그 밑의 신하들이 그렇게 되고, 그러다 보면 온 나라 사람들이 다 그렇게 흘러가게 되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것이 안타까운 것이지요. 그러므로 한 나라의 지도자는 불의와 타협하면 안됩니다. 그 파급 효과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렇게 멍이 든 이유는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총체적으로 지도자들이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니까 그 아래 장관들이 그렇고, 장관들이 흔들거리니까 그 아래 사람들이 그렇고, 그래서 온 나라가 온통 진흙탕물 같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그 일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해야 할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목숨보다는 하느님의 뜻과 바른 삶을 추구하다가 목숨을 잃었지요.
오늘 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 역시 하느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다가 어려운 처지에 빠져들게 됩니다. 두 예언자 모두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생각하고 또 세상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봉헌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이럴 수 있어야 합니다. 불의를 보고도 눈을 감고 또 피해서 간다면 수많은 이웃들이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막아야 할 것이 있고 또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 사회를 민주주의 사회로 생각하고 또 민주주의를 하늘의 뜻인 것처럼 알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다수의 의견이 존중을 받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그 다수의 의견이 반드시 옳고 다 맞는 것은 아닌 것이지요.
우매한 대중이라는 말도 있듯이 다수의 의견에 절대 가치를 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천주교회도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고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절대 민주주의가 될 수가 없습니다. 민주주의란 무엇입니까? 민주주의란 다수의 의견에 의해 사안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 천주교가 결코 민주주의가 될 수 없는 것이 하느님의 확고한 뜻이 다수의 의견에 의해 바뀌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천주교는 독재주의일까요? 아닙니다. 독재주의가 아니라 '복음주의'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흔들림 없는 중심으로 자리잡아야지 그것이 다수의 의견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칫 민주주의라는 우상을 섬길 수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를 박해했던 사람들 역시 다수였습니다. 온 나라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반대했고 정치 지도자들 역시 이에 가세하였지요. 그러나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지키기 위해서 이에 맞서서 저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이 온통 썩어도 소금과 빛은 썩거나 꺼져서는 안됩니다. 바로 이러한 역할을 해야 되는 사람들 중에 사제와 수도자가 있습니다.
지도자나 가르치는 사람, 또 사제와 수도자와 같이 모범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 그 역할을 놓쳐서는 안되지요.
특히 사제와 수도자는 하느님과 신자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른 것을 위해서 나의 고통은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집에서, 사회에서, 교회에서도 불의를 보고 피해 가는 것은 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이런 의로운 고통은 성당 내에서 특히 자주 접하게 됩니다.
단체장이나 반장, 봉사자로서의 역할을 하다보면 공동체의 일부가 바르지 않은 흐름으로 가는 것을 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잘못된 길을 따라가면 안 되지요. 바꾸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욕을 먹고 힘에 겨운 난관에 부딪히게 되더라도 끝까지 내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동체는 바르지 못한 흐름으로 흘러가 버리고 많은 이웃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 수난 기념일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고 신자 생활을 하면서 겪게 되는 고통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해 줍니다.
고통은 피해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그저 둥글둥글 모나지 않게 살아가고 부정과 불의는 피해가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선택이라는 것이지요.
삶의 현장에서 의롭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내 고통이 수반되더라도 바로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오늘 세례자 요한 수난 기념일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때 따라오는 수고와 고통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듯이 우리도 인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고, 또 예수님께서 그에 맞갖은 힘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의로운 고통이고 의로운 죽음인 것입니다. 바르고 의롭게 살고자 노력하며 그 과정 중에 받게 되는 어려움은 하느님께 봉헌하며 살아갈 때 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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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경덕 베드로 신부님]
찬미예수님,
우리 신자분들은 혹시 누군가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해보신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고등학생때 조금은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 특별한 일이라는 것은 이렇습니다. 어느날 학교에서 도난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담임 선생님께서 모두 책상 위에 무릎을 꿇고 눈을 감으라고 했고, “누가 친구의 돈을 훔쳐갔는지, 조용히 손을 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책상에 오른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담임 선생님은 저희에게 책상에서 내려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혼자 “누군가가 손을 들어서 자수를 했나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도난사건이 또 다시 일어나게 되었고, 우리 반은 거의 짜증에 가까운 불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담임 선생님은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되었는데, 또다시 금새 책상 위에서 내려오라고 하시는 것이였습니다. 그러더니 한 학생에게 다가가서 뺨을 힘껏 치시는 것이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크게 소리치셨습니다.
“지난 번에도 그러더니 이번에 또 너냐?” 하시는 것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였습니다.
“선생님, 저는 돈이 얼마나 없어진지는 알 수 없지만 도둑으로 의심받기도 싫고, 다른 동급생들이 도둑으로 몰리는 것도 싫습니다. 잃어버린 돈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제가 물어드리죠!”하면서 소리를 쳤습니다.
일순간 반은 조용해졌고, 담임선생님께서도 말씀이 없어지셨고, 그 학생을 끌고 교무실로 가셨습니다. 그 친구가 반으로 다시 돌아왔고, 그 이후에는 도난 사건도 없었고, 담임선생님도 다시는 저희 모두를 단체로 기합주거나 의심하는 일은 없어졌습니다.
오늘 세례자 성 요한의 수난 기념일을 통해서 요한은 누구를 위해서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게 되는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더불어서 하느님의 외아드님. 이사야서에서 예언하고 있는 야훼의 종을 위해서 그는 주님의 앞길을 닦아놓았습니다. 진정 그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일지는 몰라도 이 세상에서 그만한 사람은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는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이는 가장 커다란 사랑을 하는 것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진정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에는 분명 많은 어려움과 조건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기억해야 할 것이란 바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작은 것이라도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과 더불어 그 희생의 댓가를 희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바로 우리 모두에게 그 갚음을 해주시기에 그러한 것입니다. 오늘의 기념일 강론을 준비하면서 저 역시 무엇을 위해, 그리고 어떠한 마음으로 희생을 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실상 제 자신이 희생을 한다고 하지만 그 또한 하느님의 은총없이, 그리고 하느님의 살펴보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슴에 새겨봅니다.
“저의 입은 주님의 행적을 이야기 하리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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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임문철 시몬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죽음>
신구약을 잇는 위대한 예언자라면, 주님의 머리에 물을 부어 세례를 베푼 이라면, 그 죽음도 뭔가 비장한 의미가 있어야 어울림직한데,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너무나 허무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헤로데가 그저 호기로 말한 것뿐인데, 그만 헤로디아의 술수에 넘어가 세례자 요한은 그렇게 목이 잘리우고 말았습니다.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고, 애도하는 이도 없는 죽음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에 저는 제 죽음이 폼 나기를 바랐습니다. 풍선 바람 빠지듯이 이 세상을 떠나기보다는, 콜베 신부님처럼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죽거나, 배문한 신부님처럼 강물에서 교우를 살리려다 죽기를 바랐습니다.
위대한 죽음이었다는 애도의 물결 속에 장례가 치러졌으면 했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시신 기증으로 몇 사람이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면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철이 들었는지, 그저 하느님께 순응하는 죽음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 그저 “예, 갑니다” 하고 달려갈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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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6,25)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수난 기념일입니다. 교회가 세례자 요한 성인의 탄생과 죽음을 기념하는 일은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이는 곧 세례자 요한의 삶이 예수님의 구원 활동에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감사송에 이렇게 세례자 요한을 증언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여인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에서, 복된 요한을 뽑으시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특별한 영예를 주셨나이다. 그리스도의 선구자 요한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인류 구원이 다가왔음을 기뻐하였고, 태어날 때에 구원의 큰 기쁨을 알렸으며, 모든 예언자 가운데에서 그 홀로, 속죄의 어린양을 보여 주었나이다. 또한 그는 흐르는 물을 거룩하게 하시는 세례의 제정자 주님께 세례를 베풀었으며, 피를 흘려 주님을 드높이 증언하였나이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저는 여러분도 잘 아시는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가 먼저 생각났습니다. 이 우화는 아무도 임금님께 진실을 말하지 않았잖아요. 왜냐하면 힘이 있는 사람들은 자주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나쁘게 쓸 수 있다, 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는 임금이 벌거벗었다고 소리칠 수 있었던 것은 어린아이는 거짓을 모르기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순수한 눈과 솔직한 목소리를 가져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권력이나 지위, 계급이 가진 힘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잘못을 고발하고 폭로하는 것은 솔직함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확신과 절대 권력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 정의와 진실을 향한 의지의 문제라고 세례자 순교 축일 복음을 묵상하면서 다가옵니다.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대목은 예수님의 공생활 가운데 열두 제자의 파견((마르 6,7-13)과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6,30-44) 사이에 삽입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이미 과거사가 되어 버린 요한의 죽음에 관한 기록을 굳이 여기에 삽입한 이유는 많은 사람이 예수를 두고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난 것이다.”(6,14) 하고 착각하고 있었으며, 이 소문을 들은 헤로데 역시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6,16)라고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시점에 요한은 헤로데의 군사들에게 잡혀서 감옥에 갇혔고(1,14), 오늘 복음에 기록된 것처럼 공교롭게도 헤로데가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헤로디아의 꾐(6,19-28)에 빠져 세례자 요한을 목 베어 죽임으로서 그의 사망일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도덕적으로 건전하지 못하고 부적절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세례자 요한의 질책을 들은 것은 하느님의 꾸짖음이었건만 그는 오히려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고 그의 목을 베어 죽임으로 하느님을 대적하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먼저 그는 자기 동생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취한 것은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일이었습니다. 율법에도 “네 형제의 아내의 치부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네 형제의 치부이다.”(레18,16)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무력한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은 것입니다. 이런 패륜이 어디 있습니까? 또한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의 충언을 무시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점이 다윗 왕과의 차이점인지 모릅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를 취함으로 인해 나단 예언자로부터 질책을 들었을 때, 담요가 젖도록 밤새 회개하는 통회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의 질책을 거절하고 오히려 그를 감옥에 가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헤로데는 사람들 앞에서 경솔한 맹세를 해서 인생 일대 최악의 실수, 대형 사고를 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부하신 것처럼 맹세는 함부로 하면 아니 되는데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석에서 자기 기분에 들뜨고 살로메의 춤에 매료되어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6,22)라는 약속을 맹세한 것입니다. 그 맹세가 올무가 되어 결국 그는 의인인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는 엄청난 역사적 범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잘못을 범하고서도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후, 번민은 했지만 회개하지는 아니했습니다. 그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서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자마자,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나 활동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그는 두려움에 떨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세례자 요한의 순교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있다면, 세례자 요한은 불의한 일을 질책하는 일에 주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절대 권력자인 왕을 찾아가 그의 면전에서 그의 부도덕함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질책하였다는 점입니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여러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예언자로서의 사명에 충실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세례자 요한은 진리와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기꺼이 순교로 하느님을 증거하다가 순교하신 것입니다. 이는 곧 미구에 예수님 또한 그렇게 하느님 나라를 위해 죽으실 것을 예표하는 죽음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주님으로 하여금 이제 요한이 준비하고 마련한 그 길을 통해 적극적으로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 모두 그리스도가 아니지만, 그리스도가 오실 길을 준비하고 마련하는 세례자 요한과 같이 진리와 정의를 위해 몸 바치는 사람이 될 수 있고, 예언자적 삶을 살도록 불림 받았음을 오늘 기념일은 우리를 자극하고 도전합니다.
“악인은 제 악함 때문에 망하지만, 의인은 죽음에서도 피신처를 얻는다.”(잠14,32)라는 말처럼, 헤로데는 자신이 범한 그 죄로 인해 영원한 죽음의 심판을, 그와 반대로 세례자 요한은 한낱 못나고 치사한 임금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하지만 이로써 요한은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결과로 말미암은 순교를 통하여 그가 바라던 하느님의 피난처, 성채이며 보루인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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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연인 사이에 나눌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표현은 무엇일까요? 분명히 “I Love You”(사랑해)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가득한 곳은 아름답고 보기에도 좋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해’라는 말의 의미가 축소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사랑해’라는 말 뒤에 ‘그런데, 하지만’ 등의 단어가 붙을 때입니다. 이런 단어가 따라오자마자, ‘사랑해’라는 멋진 말의 아름다움이 축소되고 의미도 대폭 줄어듭니다. 순수한 단어가 교묘하고 이기적인 말로 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해. 하지만 네가 이렇게 변한다면 더 사랑할 거야.”
“당신을 사랑해. 그런데 너는 약속을 잘 지키지 않아.”
이 사랑에 조건이 덧붙여지면서 그 가치가 축소되고 원 의미도 줄어듭니다. 실제로 이런 조건적 사랑을 외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사람들에게 더 나아가 주님께도 이렇게 조건적 사랑을 말해서 의미가 없게 만듭니다.
사랑이란 조건이 붙지 않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나에게 잘해야, 나에게 도움을 줘야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랑, 조건 없는 사랑, 더 나눌 수 있는 사랑,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에 가까운 진짜 사랑에 집중해야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입니다. 예수님에 앞서서 그분의 길을 닦고 준비한 위대한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 임금의 불륜을 책망하다가 헤로데의 아내 헤로디아의 간계로 순교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복음에서 헤로데 임금은 세례자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했다고 전해줍니다. 실제로 그의 말을 들으면서 그를 보호해 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세례자 요한의 목을 건네줍니다. 바로 사람들에서 했던 맹세에 대한 행동이었지요. 맹세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자기 체면이 손상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존중하는데 조건이 붙자, 그 존중의 행동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주님에 대한 사랑도 그렇지 않을까요? 주님을 사랑한다고 계속 외치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조건이 붙게 되면, 사랑이 사라지고 맙니다. 사랑의 의미는 사라지고 나의 욕심과 이기심만 그 자리에 남게 될 것입니다.
헤로데 임금은 자기 행동이 옳지 않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나중에 예수님 소문에 세례자 요한이 살아난 것이라면서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 역시 사랑에 조건이 붙게 되면 불안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진짜 사랑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조건 없는 진짜 사랑에 집중하는 오늘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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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매일 정답만 얘기하지 마시고 다른 얘기할 수 없나요? 참 답답합니다. 정답은 저도 알고 있는데 실천하려고 하니까 왜 나만 손해를 보며 살아야 하나? 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참을 만큼 참았고 기다릴 만큼 기다렸는데 아직도 저 모양이니 어쩌면 좋습니까?
정답을 알고 있는데 다른 것을 요구하면 어찌합니까? 물론 뒤집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결국은 그리로 가야 하지 않나요. 그래서 말이죠. 성경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사람의 생각은 흔들릴 수 있고 오류를 범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힘이 있고, 살아있으니 그 말씀에서 해답을 얻어야 명확합니다. 그리고 해답을 얻었으면 그리 사는 것입니다. 손해를 보고, 가슴이 아프고, 고통스럽고 억울해도 인내하면서 하늘을 보는 것입니다. 천상에 보화를 쌓고 위로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하늘나리이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여러 차례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고, 요한은 결국 목이 베어지는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요한은 바른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의로운 죽음으로 기억합니다. 그는 육으로는 죽었지만, 그의 의로움은 끊임없이 오늘도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육적인 죽음과 영적인 죽음을 동시에 마주하게 됩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그였지만 몹시 괴로운 마음으로 요한의 목을 베어 오라고 명하였습니다. 생일 잔치에서 춤을 추는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엇이든지 청하는 것을 주겠다.’ 고 맹세까지 하였고 손님들이 보는 앞이어서 ‘요한의 머리를 갖다 달라’는 그의 청을 물리치지 못하였습니다. 생일 파티에서 한마디 약속한 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취중에 한마디 한 것으로 볼 수도 있는데… 정말 얼마나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무모한 권력을 내세우지 않고 참된 권위를 회복해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약속이 잘못되었으면 거두어들여야지, 위신 체면 때문에 덮어버리면 결국은 파멸을 만나게 됩니다. 의인의 삶은 영광스럽게 기억되고, 자기의 영달과 안전을 지키려 급급해하는 사람은 결국 패배한 사람으로 남게 됩니다. 오늘 우리 정치의 현실을 보면 걱정됩니다. 미래가 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이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일을 대면하며 밑지고 손해를 보는, 불이익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내하고 기다리며 주님의 뜻을 찾는 이를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승리자로 인정하십니다. 우리는 이미 하늘나라의 시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헛된 장담을 하거나 앙심을 품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마음 안에 좋지 못한 감정들을 몰아내고 나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사람이 있다면 상처를 치유해 주시기를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요한처럼 어떤 처지나 상황 안에서도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 제가 숨 쉬는 것만으로도 당신께는 더 좋은 기도가 되게 하소서. 입술보다는 발걸음이 더 좋은 기도가 되게 하소서.”(토마스 머튼)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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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죽였습니다>
마르코 6,17-29 (세례자 요한의 죽음)
그때에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내가 죽였다>
사람이
죽었습니다
아니
사람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죽임을 막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내가
죽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죽임을 막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였습니다
참회하는 이가
늘어날수록
제 탓 없이
죽임을 당하는 이는
줄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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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참행복-
“주님,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할 산성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보루시옵니다.”(시편71,3)
사제생활 35년 동안 처음부터 지금까지는 물론 앞으로도 계속 강조될 “삶의 중심, 하느님”입니다. 어제 수도공동체 소풍은 참 풍요롭고 충만하고 유익한 날이었습니다. 저에게 원내 매일 소풍을 제외한 외부 소풍은 이날이 유일합니다.
이번 주는 미사주례가 아니기에 자유롭게 일기쓰듯, 기록을 남기듯 쓰는 강론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강론 주제와 일치합니다.
“중심이 바로 선 사람은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서 찾는다. 이런 사람만이 경쟁에 임할 자격이 있다.”<다산>
르네상스형 인간인 다산 어른의 말씀입니다. 르네상스형 인간이란 삶과 예술과 학문의 모든 분야에 정통한 사람”, 백과사전적 인간을 말합니다. 지금은 물론 앞으로의 챗gpt 세상에서 이런 인간의 출현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스스로 바로 잡은 후에 활을 쏘고, 적중하지 않더라도 이긴 자를 원망하지 않고 자신을 돌이켜 본다.”<맹자>
삶의 중심을 확고히 하는 회개와 겸손의 미사전 참회의 기도는 정말 귀하고 고맙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제탓이요, 제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평생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와 모든 천사와 성인과 형제들은 저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 주소서.”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기도문의 깊이입니다.
하늘 보며 기도하며 살라고 직립인간이요, 세상 어디서나 눈들면 하늘입니다. 밤 12:30분경 어김없이 잠깨어 수도원 자비의 집 본원 숙소 현관문을 열자 마자 눈들어 헤아리는 하늘의 별들입니다.
이어 집무실에 들어와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 만세칠창입니다. 아주 오래 전 “땅의 행복”이란 시가 고맙게 떠올랐습니다.
“땅의 행복은 밤마다 누워
하늘 바라보며
별들 가득 담아 두었다가
꽃들로 피어내는 것이다.”<2001.8.20.>
이래서 하늘에는 별들이요 땅에는 꽃들이라 믿습니다. 또 아주 오래전 41세 늦은 나이에 사제서품 받고 신림본당(지금은 서원동본당으로 바뀜)에서 첫미사, “사람이 되는 길” 강론시 마지막 인용했던 <김준태>의 시가 반갑게 떠올라 나눕니다.
“하늘을 보면서 삽시다
땅 바닥을 보면서 삽시다
눈이 내리면
하늘을 보면서 삽시다
비가 내리면
땅 바닥을 보면서 삽시다
하늘과 땅 바닥을 보지 않으면
사람 몸뚱이는 총알이 돼 버립니다
사람 몸뚱이는 짐승이 돼 버립니다
두 눈에 하늘을 넣지 않고
가슴에 풀꽃 향기를 넣지 않으면
사람 목숨에는 늑대의 피가 흐르기 마련입니다
아, 이제 우리는 제발!
하늘을 보면서
사람을 보면서 사람이 됩시다”<1989.7.16. 신림본당에서 첫 미사날>
어제는 계속되는 폭염이라지만 처서와 말복이 지나 성큼 가을 문턱에 들어선 느낌의 높고 푸른 하늘에 흰구를 두둥실 뜬 그림같은 장면같았습니다. 마침 어느 자매가 이런 풍경의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 줬고 제가 보낸 시와 함께 시화를 만들어 보내줘 많은 친지들에게 소풍 선물로 나눴습니다. 역시 오래 전 시입니다.
“하늘 보면
마음은
훨훨 날아
흰구름 되네”<2006.8.>
푸른 하늘 품에 안겨 있는 흰구름처럼, 푸른 하늘 보면 누구나 푸른 하느님 품안에 두둥실 흰구름 되어 자유로이 노닐고 싶음은 인지상정입니다. 강화도 공동체 소풍 참 알뜰하게 보낸 하루였습니다. 세속의 푸른 하늘안에 흰구름 자유인 되어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며 떠돌며 지낸 하루였습니다. 1.온수리 성공회 성당, 2.전등사, 3.동검도 채플, 4.강화도 케이블카, 5.조양방직(미술관 카폐), 6.샤브 올데이(저녁식사)
알게 모르게 많이 먹다보니 새벽 체중계에 올라서니 어제보다 1.4kg 늘었고 곧 감량할 계획입니다. 1906년에 건립된 대한성공회 한옥 건물이니 100년이 훨씬 넘었고 이젠 활력을 잃어 유적으로 전환되는 느낌이었지만 감회가 깊었습니다. 여기서도 100년을 훨씬 노송이 성당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었습니다.
이어 전등사였는데 곳곳의 건물에서 부처님 앞에서 불경을 드리는 스님들의 모습에서 살아 있는 절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경이로웠던 것은 700년에서 250년 수령의 무수한 나무들이 전등사의 역사를 알리는 듯 했습니다.
사람이 오지 않으면 망합니다. 중이 절이 싫어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오지 않아 중이 절을 떠난다 합니다. 작금의 인구감소의 심각한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아무리 전통좋고 자연좋고 건물좋아도 사람이 오지 않으면 망합니다. 사찰, 수도원, 학교, 교회, 병원, 음식점, 적용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바야흐로 베네딕도 수도회의 정주와 환대의 영성이 빛을 발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동검도 채플의 주인공은 조광호 신부님입니다. 신부님은 지금은 저명한 화가에 속합니다만 제 수도원 입회후 지원자 시절 담당 책임신부였습니다. 저보다 2년 연상이지만 제가 늦깎기로 입회한 까닭입니다.
채플의 운영도 자유로웠습니다. 물욕이 전혀 없는 신부님이 평생 벌었던 모두를 교회에 봉헌하는 마음으로 지은 채플입니다. 넓은 갯벌 넘어 마니산이 보이는 풍광좋고 전망 좋은 동검도 채플에서 공동낮기도를 바쳤고 카페에서 빵과 커피도 먹으며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대화의 소재는 챗gpt 였고 경악할 내용이었습니다. 인류가 망한다면 인공지능의 챗gpt 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하느님 중심의 지혜로운 분별이 없으면 비인간의 괴물로 변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 싶지만 인공지능에는 땀과 눈물의 개인과 공동체의 역사가, 사랑이, 생명이, 만남이, 친교가, 감정이, 영성이 없고 인간은 날로 불통의 외롭고 외로운 홀로의 인간이 될 수뿐이 없으니 새롭게 도래할 자업자득의 지옥입니다.
판도라의 열린 상자처럼 남은 것은 하느님 희망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날로 새롭게 함이 챗gpt에 대한 유일한 대안임을 깨닫습니다. 정말 영적인 것의 선택과 영적훈련 및 습관화가 절실하다 싶었습니다.
강화 케일블카를 통해 산정상에 올라가 강화도 인근을 조망할 수 있었습니다. 59년생 이전 노인들은 내려올 때 차를 탈 수 없다기에 저를 포함 세분의 연노한 형제들은 케이블카를 타고 다시 내려왔습니다. 세월의 나이에 순응하는 것도 자기를 비운 겸손임을 배웁니다.
이어 조양방직 미술 카페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옛 추억과 역사가 가득 담긴 낡은 건물과 고물들 즐비한 카페가 새삼 뿌리의 고향을 찾는 인간 실존을, 원시와 최첨단,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균형과 조화의 공존을 추구하는 역설적, 모순적 인간 실존을 보여준다 싶었습니다.
여기서도 빵과 음료수를 먹었습니다. 곳곳에 카페였습니다. 수도원 방문하는 형제와 함께 1년 2회 정도 점심식사후는 꼭 배부른 상태에도 시간을 낭비하며 왜 굳이 카페에 가서 비싼 빵과 음료수를 먹는지 몰랐는데, 요즘의 관행이라는 것을 어제야 조신부님의 설명을 듣고 알았습니다.
도대체 세상 어렵다는 것을 실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가의 카페에 음식점이었습니다. 먹는 재미로 살다 싶을 정도로 정말 맛집에 먹는 것을 너무 밝히는 사람들이요, 날로 빈약해지고 척박해지는 문화, 예술, 인문, 출판 풍토가 정말 우려스러웠습니다. 이 먹는 돈으로 책을 사 본다면, 불우한 문화 예술가들을 돕는 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많이 생각했습니다.
너무 물질적인 식욕, 성욕, 물욕 추구의 삶에 날로 빈약해지는 영성과 날로 쇠퇴하는 정신문화 풍토는 인류사회를 낙관할 수 없게 합니다. 죄도 많은 세상에 정신 질환은 일상적인 현실이 되었습니다. 정말 쓸만한 사람들이 날로 사라져가는, 서사를 지닌 거목들은 없고 얄팍한 잡목들 우거진 야산같은 세상이 전개된다 싶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지옥도를 보는 듯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사람은, 제대로의 참사람은 순교자 세례자 요한뿐이요, 나머지는 사람의 탈을 쓴 괴물들입니다. 헤로디아와 그의 딸 살로메는 물론이고 예수님께 호감을 지닌 듯한 헤로데이지만 하느님 중심이 없기에 경박하고 우유부단하며 부족한 분별의 지혜로 의인 세례자 요한을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광야 인생 여정, 하느님 중심의 성인도 있겠고 중심을 잃어 세상 것들에 중독되었을 때 괴물도, 야수도, 악마도, 폐인도 될 수 있겠습니다. 얼굴은 사람이지만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말도 있듯이 축생(畜生; 사람답지 못한 짓을 하는 사람의 비유) 같은 인생도 얼마나 많은지요.
인면마심(人面魔心)이라는 말도 나올 듯 합니다. 저절로 불교의 윤회설을 연상하게 됩니다. 이 모두가 하느님 중심의 파스카의 삶이 얼마나 절박한지 깨닫게 합니다. 제1독서 예레미야 예언자가 하느님 중심의 일당백의 주님의 전사, 참사람의 원형을 보여줍니다.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겠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인공지능이 뛰어나다 해도 하느님께서 만드신 저만은 어림도 없을 것입니다. 인공지능이 저처럼 76세 나이에 하루종일 소풍후 8:40분에 취침하여 12:30분에 일어나 01시부터 04시까지 제가 저절로 알아 강론을 쓸 수 있겠는지요?
이건 제 자랑이 아니라 하느님 자랑입니다. 소풍을 통해 한 젊은 형제와는 열린 친교를 통해 한 젊은 형제와는 많은 허심탄회한 대화를 통해 내적 오해를 해소하여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강론 끝나는 대로 다시 감사의 만세칠창을 바칠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참사람이 되어 살게 합니다.
“주 하느님, 당신은 저의 희망, 어릴적부터 당신만을 믿었나이다. 저는 태중에서부터 당신께 의지해 왔나이다. 어미 배속에서부터 당신은 저의 보호자시옵니다.”(시편71,5-6ㄱ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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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내게도 예언자의 운명이?>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의 불의한 결혼에 대해 예언하다가 죽게 된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어제도 얘기했고 여러 번 얘기한 바 있듯이 이것이 예언자의 운명입니다. 사실 하느님 뜻대로 잘살고 있는데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보내실 리 없고, 그러므로 예언자의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올 리 없 없으며, 그 말을 듣는 사람이 그 말 곧 예언을 듣고서 고마워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어떤 예언자도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고향에서만 환영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나 환영받지 못합니다.
사실 예언을 들을 때 성인이 아닌 한 꽤 괜찮은 사람도 예언자를 피하고, 못된 놈은 되레 비난하거나 공격하고 특히 오늘 헤로데처럼 힘이 있거나 권력을 가진 자들은 예언자들을 없애버리려고 하지요.
그러니 이런 예언자의 운명을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고, 그런데도 예언한다면 그것은 좋아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좋아서가 아니라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개인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서 예언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그저 개인적인 희생으로 폄하하지 않고, 주님을 위한 죽음과 공동체를 위한 죽음으로 칭송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언은 그 사람의 잘못을 고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개인의 잘못을 공동체가 눈감아주거나 내버려 둬서는 안 되고, 누군가 얘기해줘야 하는데 그 누군가가 바로 예언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사랑은 개인의 잘못을 눈감아주거나 인내해주는 것보다 개인에게도 더 큰 사랑일 뿐 아니라 공동체에게도 더 큰 사랑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생각게 됩니다. 나도 예언자가 될 것인가? 세례를 받는 우리는 모두 사제직, 왕직, 예언직을 받는다고 하는데 예언자의 운명을 나는 거부할 것인가?
예언자의 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운명을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억지로 할 것인가? 사랑으로 할 것인가?
물론 우리는 이 운명을 거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 때문에 용기 내어 예언자의 운명을 받아들이되 겸손이 밑바탕이 되어야 함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인 양 예언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언자에게 더 필요하고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하느님께서 파견하셨기에 한다는 자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나를 잘못하는 그를 위해서 파견하셨고 공동체의 의를 세우기 위해서 나를 파견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나를 싫어하고 미워할 것이기에 이것이 싫고 두렵습니다. 사랑으로 예언하려고 용기 내 보지만 무척 떨립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주님 없으면 떨려서 예언할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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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마르6,25)
<선구자(협조자)!>
오늘 복음(마르6,17-29)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불의를 고발하며 정의를 외치던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간계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마리아와 함께 하느님 구원 계획의 결정적인 도구'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 예수에게 인류 구원이라는 큰 사명을 주시고 그를 이 세상 안으로 파견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야 했기 때문에 '나자렛 처녀 마리아의 태'가 필요했고, 그분의 길을 마련해야 할 '선구자 세례자 요한'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앞서 태어났고, 그분께서 오실 길(회개의 선포)을 미리 닦아 놓았습니다. 요르단 강에서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으며, 헤로데의 불륜을 지적하고 책망하다가 예수님에 앞선 죽음(순교)을 맞이했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11,11)
세례자 요한은 참예언자이신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참으로 위대한 예언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길을 닦고 준비하기 위해 파견된 '구약의 마지막 위대한 예언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선구자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을 미리 알려주었고, 끝까지 진리와 정의를 외치다가 진리와 정의이신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끝까지 하느님의 진리를 믿고 증언하도록 합시다!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예레1,17)
본당 신부는 그리스도의 직무대리자로 파견된 사목자입니다. 이런 사목자 곁에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닮은 협조자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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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마르 6, 25)
선을 행하는 데는
더디지만
악을 행하는 데는
너무도 빠릅니다.
소중한 생명을 두고
흥정하고 거래하는
몹쓸 인간들의
사악한 마음입니다.
가장 위험한 존재또한
사악한 인간입니다.
사람이 곧
하늘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하늘을 죽이는 것입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파괴는
멈추어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랑이 목마른
시대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생명에 대한
존엄한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더는 방해하거나
왜곡시키지 맙시다.
우리의 죄를
속죄하듯
요한 세례자가
수난을 받으십니다.
아름다운 정의를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당신 삶으로
당신 수난으로 정의를
보여주십니다.
사람에 대한
증오를 치유하는 것은
비폭력과 용서입니다.
수난은 가장 강력한
용서이며 봉헌입니다.
우리 마음을
치유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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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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