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동
맥도날드 앞, 새끼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인 남자가 가방을
들고 서있었다. 생진 갈아본 적이 없는 묵은 밭 같은
행장으로, 언제나 반대편에 서 있는 듯한 소쇄한
얼굴로 그는, 패스트 푸드 점에서 커피를 마시는 건
처음이라고 주저하며 말했다.
기억할 지 모르겠지만, 서태지가 <하여가>를
부를 때 태평소를 불기도 하던, '94 전주 대 사습에선 '금산농악'
태평소 연주로 장원을 한, 사물놀이팀 '노름마치'에서
태평소를 불던, 가끔 임동창과 협연을 하던, 갈피마다
수줍게 포효하던 그 사람이 장사익이다. 그리고 오랜
잠복기를 거쳐 지난해 그가 발표한 생애 첫 음반 <하늘가는
길>은 이제 사상을 갖고싶은 사람들의 가슴에
조용히 용납되고 있다.
"난 한사람이 듣고 만족하는게 중요해요.
백사람의 만족은 필요없어요."
클론이나, 김건모에 도발된 이들은 이 세상 모든
노래가 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바라보는 세상처럼
소스라쳐야 하는 줄만 알았겠지만 (그 끔찍한 왜곡!),
미안하게도 장사익은 너무 구별돼 차라리 도망칠 수
없다. 백만개의 시름을 내장한 목청, 심연에서의 외침,
가슴 속 침전물들을 가만히 닦아주는 보컬로 상대가
비틀거리도록 내버려두면서. 누군가 그의 노래가 장강(長江)같다더니
과연, 이라는 찬양시가 저절로 튀어나온다. 아무리
그가 "나한텐 슬픔이 별로 없슈"라고 말해도.
그가 가수로 '데뷔'한 건 마흔 일곱 살 때. 이
조로증에 시들어가는 대한민국에서, 치사하게 나이를
속이기 바쁜 꿈의 영웅들을 같잖아 하다가 그렇게 '연로한'
가수를 만나다니... 친절한 손바닥으로 등을
두드려주고 싶다. 하지만 그는 말하기를, 젊은
가수보다 며칠 더 살았다는 것으로 할 애기가 더
많다고, 지금이 노래를 부르기 가장 좋은 나이라고.
"나한텐 인생의 높낮이가 있어요. 그
내용들이. 내 얘기가 가슴 속에 묻혀진 것들일 때 전
사람들이 교감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가슴 속에
숨긴 걸 끄집어내 개운해지도록 풀어내는 노랠 하고
싶어요. 한을 풀어주는."
참 생산적인 숨통이다. 그는 자본, 가요시장,
팔린다는 것, 개런티, 그리고 대체로 운좋은 삶과 너무
무관하다. 차라리 책 몇권을 만들 만큼의 고단한
사연들이 그를 수식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그 흔한
한국 남자로 다가올 뿐. 그러니까, 충남 홍성군 광천,
기민하지 못한 농부의 아들로 나, 풍요가 아니라 풍경
속에서 장성하면서 (때론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이
풍경에 매혹되긴 오히려 쉽지 않지만), 노래깨나
한다는 소릴 곧잘 들었고, 급기야 신사동 중국성
옆에서 '밧데리' 가게를 하던, 그다지 양명하지 못한
서른일곱 한가운데서 인생의 딱 3년을 태평소 부는 데
바치자고 작정했고, 그 길로 소리와 대금과 피리를
배우고, 전주대사습에서 태평소로 장원을 하고,
사물놀이패와 임동창을 만났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리하여 지난해 어느 하루 그는 음반제작 제의를
ㄱ절하지 못한 채 만가 <하늘 가는 길>과, <찔레꽃>
<귀가> <꽃> <섬> <국밥집에서> 같은
그가 지은 노래 다섯 곡과, <봄비> <빛과
그림자> <님은 먼곳에>같은, 그야말로 불후의
유행가들을 리바이벌 했다. 악보도 없이. 그 앨범은
고립되어 '그밖의 앨범'이었다가, 그의 노래에
흡반처럼 달라붙은 사람들에게 발굴되어 이제 밝은
천지를 보게 되었다.
"사회에 나온 30년 동안 회사생활 열심히
했어요. 그래서 난 지금 내 길을 찾은 거예요. 노래를
하는건... 내가 유일하게 숨을 쉬고 잘 할 수 있는 것.
난 노래한다는 것 때문에 딴 건 다 거둬버렸어요.
그래서 마음이 좋죠. 크게 생각할 것 없고."
그가 쓴 가사들은 조용하다. 조용하면 많은 게
들린다.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내 노랜 반주를 종소리로 할 수 있고,
파도소리로도 할 수 있고, 장터소리로도 할 수 있어요.
이게 다 자연예요. 전 꼭 그렇게 할 거예요. 장사익
스타일이 다른거죠 뭐."
촬영할 때 그는 <산바람 강바람>과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을 불러주었다. 산 위에서 부는
시원하고 곰운 바람이 그렇게 불길하게 삐걱거리는
부두처럼, 폭풍의 언덕에서 맞는 광포한 바람처럼
육박해 올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장난으로라도
생각할까? 그렇게 갑자기 기습해오는 그가
사랑스럽다. "저유? Y세대쥬. X세대 담엔 Y세대 아뉴?
하고
눙칠 줄 아는 그, 맥도날드에서 다 먹지 못한 프렌치
프라이드 포테이토를 아까워하는 그가, 촬영을 위해
미안할 만큼 깨끗하게 손질한 한복을 꺼내는 그가,
그리하여 사람들의 맺힌것을 풀어주리라는 그가.
그리고, 잊기힘든 그 사람의 한마디를 보태고
싶다.
;나는 노래를 하지 않고 노래를 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