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문을 여는데 모기가 한 마리 엥-, 하며 인사를 한다. 12월에 모기라니. 밤새 차 안에서 지낸 모양이다. 주거침입죄로 고소하기는 뭣하지만 괘씸한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저 혼자인지, 친구 혹은 가족이 함께 있는지 의심스럽다. 남아있는 동거인이 깔개나 쿠션을 베개 삼아 낮잠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밤새 남의 차 안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도 수상쩍다. 무단 침입한 놈이 아무려면 휴식만 취하고 있었을까.
아니다, 어쩌면 혼자일 수도 있겠다. 혼자이면서 휴식만 취했을 수도 있겠다. 친구들과 가족을 다 떠나보내고 저 혼자 차 안으로 숨어들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지능이 낮은 놈일 것이다. 여름 지나 가을 동안 가족과 친구들이 길 떠날 때 미처 합류하지 못하고 뒤처진 놈일지도 모른다. 자동차같이 위험한 공간은 영악한 놈이 선택할 장소가 아니다. 자세히 보니 며칠 굶은 모양으로 바짝 마른 것이 비실거리기까지 한다. 차 문을 열어 주어도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군, 적군의 구분이 안 되는 모양이다.
초등 시절의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당시에는 ‘글 읽기 릴레이’가 유행이었다. 한 아이가 일어나서 책을 읽다가 틀리는 글자가 나오면 다른 아이가 잽싸게 받아서 읽는 것이었다. 미처 한 줄도 못 읽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한, 두 페이지를 글자 하나 틀리는 법 없이 거뜬하게 읽어내는 아이도 있었다. 공부 같기도 하고 놀이 같기도 한 그것은 몇 아이로 건너감에 따라 묘한 긴장감과 경쟁심을 유발하여 반 분위기를 순식간에 뜨겁게 달구어놓곤 했었다.
그중 한 아이, 참으로 잘 읽는 아이가 있었다. 그는 우선 ‘받는’ 솜씨가 남달랐다. 릴레이 선수가 남보다 0.0001초 먼저 출발하듯이, 괭이가 병아리를 순식간에 낚아채듯이, 틀렸다 싶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받아내는 것이었다. 읽기 시작하면 틀리는 법 또한 없었다. 한 페이지든지 두 페이지든지 낭랑한 목소리로 자신 있게 읽어내는 솜씨라니.
또 한 아이, 나는 참 그 놀이가 서툴렀다. 한 줄이던지 한 페이지던지 우선 ‘잽싸게' 받는 일부터 어려웠다. 기질적으로 순발력이 남보다 못했던 모양으로 틀리는 글자가 나와 기회를 포착했더라도 남보다 0.0001초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순서를 놓치고 마는 것이었다.
한번은 나의 실수였는지 그 아이의 실수였는지 모르지만 둘이서 동시에 일어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 아이는 날카롭게 나를 흘겨보았고, 주눅 든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 앉고 말았다. 주제넘게 남의 영역으로 발을 들이민 것 같아 한없이 눈치가 보이면서 ~.
세상이 공평하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신의 입장에서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돈에서건 재능에서건 80부터 시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30부터 시작하여 각고의 노력 끝에 가까스로 70에 이를까 말까 한 사람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이다.
살리에리는 18세기 중엽 이탈리아의 궁정 작곡가이다. 능력과 성실로 궁정악장까지 지내는 영광을 누리지만 천재 소년 모차르트가 나타나고부터 강렬한 흠모와 질투에 시달린다. 음악인으로서는 당대 최고의 지위까지 올랐으나 평생을 바쳐 이룩한 그 모든 것을 어린 모차르트가 한달음에 넘어 버린 것이다. 방탕하고 경박한 모차르트였지만 사람들은 그의 천재성에 열광하고, 그를 질투하는 장년의 살리에리에게는 동정과 경멸을 보내게 된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작품인 레퀴엠(진혼곡) 작곡에 깊이 연루되어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살리에리는 신을 향해 절규한다.
“신이시여! 나에게는 어찌하여 재능을 주시지 않으시나이까?”
살리에리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넘고 싶은 장대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산다. 올림픽 경기장에서 장대높이뛰기를 하는 바로 그 모습이다. 정치인에게는 국민의 사랑이 장대일 것이고 야구선수에게는 기분 좋은 홈런이 장대가 될 것이다.
나에게는 글 쓰는 일이 넘고 싶은 장대인데, 30부터 시작한 출발점이 언제쯤이면 70에라도 닿을지 생각할수록 아득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져 도망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형국이다. 깊은 밤 잠 못 들고 살리에리의 비애에 젖어 한숨 쉬지만, 넘을 수 있는 장대도 아니고 포기할 수 있는 장대는 더욱 아니다.
발코니에 장미가 너덧 송이 피어 있다. 12월의 장미이다. 초봄에 꽃집에서 모종해 온 것인데, 봄부터 늦여름까지 제철에는 무엇 하다가 이제야 피기 시작하는지 신기하고도 한심하다. 제법 참하게, 꽃잎도 튼실하다.
온실 아닌 바깥에서 겨울에 피는 꽃이야 너무 빤해서 차라리 아이비나 스킨다브스 같은 잎 식물을 즐기게 마련인데, 게으르고 못난 나의 장미는 이제야 슬그머니 세상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들여다보고, 만져도 보다가 마시다 남은 맥주에 물을 타서 주어 본다. 늦게 핀 장미지만 혹여 꽃이나마 충실해질까 하여.
(박기옥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