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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첫사랑, 눈물이 아름답던 날 --이민영
(백석시인의 여인 란편-2.백석의 첫사랑, 통영으로 가는 남행)
명정샘을 앞에 두고 있는 백석이 돌계단에 주저앉아 란을 그렸다는 충렬사 사당(초원)
충렬사 안에는 정갈한 모습으로 삼백년 넘게 꽃을 피었다는 동백이 저런 고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초원)
일몰이 아름답다는 달아공원에서 바라본 통영의 바다는 참 신비로웠다(초원) [이상 편집과 글--초원님 제공] 白石 시인 연보 1935년(24세) 6월의 어느날, 친구 허준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평생 구원의 여인으로 남을 '란(蘭)'이라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당시 이화고 학생이었던 통영 출신의 란은 백석의 마음을 온통 휘어잡는다. 1936년(25세) 1월 20일 시집 {사슴}을 선광인쇄주식회사에서 200부 한정판으로 발간. 4월에 조선일보사 사직.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보의 영어 교사로 옮겨 감 조선일보에 <남행시초(南行詩抄)>를 4회에 걸쳐 연재. 3월5일에는 <창원도(昌原道), 6월에는 <통영(統營)>, <고성가도(固城街道)>, 8월에는 <삼천포(三千浦)> 등이었다. 이 시들은 백석이 조선일보를 떠나면서 마음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발표한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2월 9일경에 다시 통영쪽으로 여행을 한 느낌도 받으나 속단할 수는 없다. 남행시초는 그 여정이 삼랑진에서 마산(馬山)으로 오는 길목인 창원도(昌原道)에서 시작하고 있다. 창원은 교통의 요지로 고추와 고구마가 유명한 곳이며 사방으로 작은 산들이 둘러 쳐진 곳이었다. 창원도(昌原道) ― 남행시초(南行詩抄) 1 솔포기에 숨었다 //토끼나 꿩을 놀래주고 싶은 산허리의 길은/ 엎데서 따스하니 손 녹히고 싶은 길이다// 개 데리고 호이호이 회파람 불며/ 시름 놓고 가고 싶은 길이다 // 궤나리봇짐 벗고 따ㅅ불 놓고 앉어 / 담배 한 대 피우고 싶은 길이다 //승냥이 줄레줄레 달고 가며 / 덕신덕신 이야기하고 싶은 길이다// 덕거머리총각은 정든 님 업고 오고 싶은 길이다 ,,,,./궤나리봇짐 : 개나리 봇짐. 양쪽 어깨에 매는 봇짐 /따ㅅ불 : 땅에 피우는 막불 /덕신덕신 : 덩실덩실, 흥겹게. 사람이나 동물들이 떼로 모여 움직이는 모양 /덕거머리 총각 : 장가들 나이가 지난 사내로 머리를 땋아 늘어뜨린 총각 차창에서 바라본 창원도의 길에서 산길을 따라 한없이 가고 싶다는 백석의 소망이 표출되고 있다. 그리고 덕거머리 총각인 자신은 벌써 그 님을 업고 오고 싶다고 여행의 숨은 의도를 밝히고 있다. 창원군을 지나 기차편으로 마산에 도착했다. 마산은 당시에 두 쪽으로 나뉘어 있었다. 일본인이 주로 사는 남쪽의 신마산(新馬山)이 있고 북동쪽에는 한국인들이 사는 구시가지인 구마산(舊馬山)이 있었다. 구마산은 어항(漁港)을 끼고 있으며 선창가도 있어 배를 이 곳에서 탔다. 선창에서 배를 타고 서너 시간 가면 통영이 나온다. 서울서 오면 마산에 아침 10시 ~ 11시 사이에 도착하여 점심을 사 먹고 오후 2시가 넘어서 통영가는 배를 타면 초저녁에 통영에 도착한다. 통영에서 백석은 그의 유명한 세 번째 <통영(統營)> 詩를 발표했다. /...통 영 --백석 (남행시초(南行詩抄) 2 ) 통영장 낫대들엇다 /갓한닙쓰고 건시한접사고 홍공단단기한감끈코 술한병바더들고/ 화룬선 만저보려 선창갓다/ 오다 가수내 들어가는 주막압헤 /문둥이 품바타령 듯다가/ 열닐헤달이 올라서 나루배타고/ 판데목 지나간다 간다 ///낫대들었다 : 장이 열리자마자 나아가 대들 듯이 구경하였다/ 건시 : 곶감. 마른 감/ 홍공단단기 : 붉은 공단 댕기 /화룬선 :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기선/ 가수내 : 여자아이. 가시내라고도 함/ 판데목 : 경상남도 통영의 앞바다에 있는 수도 이름으로 1932년 해저터널이 완성된 곳 (출처--1936.3.5. 조선일보)/ ‘서병직氏 에게’ 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는 통영장에 뛰어들다시피 하여 유난히 관심이 많은 장거리에서 물건을 구경하는 백석의 독특한 취미를 보여준다. 당시 장날에는 나병환자들이 거지타령을 많이 했다. 그 곳에는 주막집도 있어 처녀들이 밥을 먹으러 들어가곤 하는데 이를 따라간 백석은 문둥이 품바타령을 듣다가 밤에는 통영의 유명한 명소인 판데목 다리 아래를 음역 17일날 (양력으로 1월 11일) 지나갔다. 서병직은 1910년생으로 당시 명정동에 살았다. 부산의 동래고보를 졸업하고 통영에서 일찍 장가를 들어 살고 있었는데 뚜렷한 직업이 없이 젊은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통영에서 다시 진주나 삼천포로 가는 길목인 고성(固城)은 경남 중앙 남부에 자리잡은 작은 고을이었다. 통영에서 버스로 1시간 넘게 걸리는 이 곳을 백석은 거닐면서 고성장(固城場) 가는길을 생각했다. 고성가도(固城街道) ― 남행시초(南行詩抄) 3 //고성(固城)장 가는 길 / 해는 둥둥 높고 //개 하나 얼린하지 않는 마을은 /해발은 마당귀에 맷방석 하나 / 빨갛고 노랗고 /눈이 서울은 곱기도 한 건반밥 //아 진달래 개나리 한창 피었구나 // 가까이 잔치가 있어서 /곱디고운 건반밥을 말리우는 마을은 / 얼마나 즐거운 마을인가 //어쩐지 당홍치마 노란저고리 입은 새악시들이 / 웃고 살을 것만 같은 마을이다 //..얼린하지 않는 : 얼씬도 하지 않는.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는. /시울은 : 환하게 눈이 부신. /건반밥 : 잔치 때 쓰는 약밥. 이 詩의 압권은 백석의 감탄하는 구절을 들 수 있다. “아 진달래 개나리 한창 퓌엿구나 ” 이 구절을 생각해 보면 백석은 1월에 통영을 방문했고 2월말이나 3월초에도 통영으로 여행을 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만큼 백석은 사랑하는 란을 생각하며 통영을 위시한 남해안의 작은 도시들을 다시 방문하여 그의 시정을 진하게 읊었으리라. 시를 통해서 한 여인에 대한 관심을 유도한 시인 백석의 모습은 그만큼 순수한 면을 보이고 있다. 기후가 매우 따뜻한 삼천포는 비도 많이 오고 참대(竹)를 비롯한 난대성 식물도 많아 통영 등과 함께 겨울에도 따뜻한 날씨의 연속이다. 눈이 간헐적으로 내리나 한겨울에 국한된다. 백석은 삼천포에 대한 눈의 기록을 남행시초의 마지막 시<삼천포(三千浦)>로 나타내고 있다 ........................................................... 란(蘭)의 결혼과 백석 1937년 4월에는 백석에게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4월 7일에 백석이 그렇게도 그리워하고 마음에 두고 있었던 처녀 란(蘭)이 결혼을 해 버린 것이다. 그것도 백석과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신현중과..... 백석이 통영을 다녀간 뒤 몇 달이 채 되기도 전에 란의 모친은 어느덧 딸의 장래를 생각하게 되었다. 더구나 시인 백석이 직접 통영까지 내려와 구혼을 할 정도로 딸이 자랐고 고등학교까지 졸업했으니 생각하면 할수록 딸의 장래에 대하여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또한 란의 모친은 외동딸의 일본 유학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몇날 며칠을 고민하던 끝에 우선 백석에 대해 알아보려는 마음을 굳혔다. 또한 란의 결혼 여부를 상의하기 위해 친오빠가 있는 서울로 올라오기로 했다. 37년 3월 중순경 란의 모친은 외동딸의 혼사 문제로 서울에 있는 친오빠인 죽사(竹史) 서상호(徐相灝)와 상의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죽사는 통영 출신의 거물급 인사로 서울의 가회동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란의 모친은 제일 먼저 백석에 대해 알아 보도록 부탁을 했다. 집안이나 학벌 그리고 여러 가지를 세심히 따져 보기위해서 오빠인 죽사에게 부탁을 했고 죽사는 그가 가장 아끼는 신현중에게 백석에 대해서 알아 오도록 요구했던 것이다. 예비신랑 후보 백석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신현중은 허준에게 문의를 하였다고 한다. 허준에게서 더욱 자세한 백석의 집안 문제를 듣고 신현중은 죽사에게 백석이 조선일보에 다니다가 지금은 함흥영생고보에서 영어 선생으로 교편을 잡고 있다는 사실과, 그의 나이 많은 부친이 현재 조선일보에 근무하고 있으며 백석은 매우 똑똑하고 사람은 좋으나 그의 모친이 기생 출신이라는 소문까지 전해주었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죽사는 여동생 서씨와 의논하여 백석은 신랑감으로 부적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당시 내노라 하는 신랑감을 물색하면서 란의 혼사 문제로 고민을 하던 중 죽사는 신현중의 말에 귀를 의심했다. "어르신, 제가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죽사는 그 자리에서 승낙을 했다. 신현중은 이미 애국지사로서 소문이 나 있었고 자신을 가장 잘 따르던 청년일 뿐만 아니라 안정된 직장인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있었기 때문에 더욱 만족했다고 한다. 또한 신현중은 조선일보 사회부 내에서도 명기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34년 10월에 신현중은 출옥한 지 보름이 못되어 빡빡깍은 머리로 조선일보 교정부 기자로 입사하였다. 그러다가 35년 1월부터 사회부 기자로 자리를 옮긴 후 더욱 업무에 충실하여 다양한 사건기사와 발굴기사로 여러 가지 특종을 터뜨리며 명성을 얻어 결국 37년 2월 8일에는 조선일보 사장인 계초의 금일봉까지 받으며 조선일보 자체에서 제정하는 「영예의 수상자」로 뽑히기까지 했다. 특히 1월 중의 이화여자전문학교 살인 사건을 특종으로 보도하여 명성을 나렸다. 거기에다가 반일(反日)감정이 출중한 신현중은 총독부의 일인(日人) 고관들을 상대하여 그들의 기를 꺽는 인터뷰와 대담한 취재행동으로 더욱 유명하였다. 일본인들은 신현중을 누구보다도 잘알고 있었다. 반제동맹사건의 주모자로 옥고를 치른 그가 당당히 기자로서 활동할 때 모두 그의 역량에 놀랄 뿐이었고 오히려 감복하여 고개를 숙이는 일본인들이 많았다. 죽사는 이런 유능한 청년 신현중을 유심히 보아 두었던 것이다. 죽사로서는 신현중이 세상에서 더 없이 훌륭한 인물(人物)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죽사 자신도 보성전문학교의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중의 하나이고 시대일보(時代日報)를 창간하는 물밑 주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지역의 유지 행세를 자처해 온 거물급 인물이었으나 옥고를 6개월 가량 치른 투쟁 경력면에서는 항일경력으로 옥고를 3년이나 치른 신현중보다는 한 수 낮은 단계였다. 그래서 평소에 유능한 사회부 기자인 신현중을 높게 평가하던 죽사로서는 자신이 아끼는 여동생의 외동딸에 대한 사위감으로는 더없이 훌륭한 청년으로 보았던 것이었다. 당시 신현중도 낭산 김준연의 딸인 김자옥과 약혼이 2년째 지속 되다가 갑자기 파혼을 했던 터였다. 그래서 모든 책임은 죽사가 지고 일사천리로 밀어붙여 여동생을 설득했다. 남편을 잃고 의지할 때 없던 란의 모친으로서는 항상 미더워했던 오빠의 권유에 마다할 리 없었다. 바로 며칠 후에 통영으로 내려가 란의 집 안마당에서 일가친척과 가족들만 초대하여 4월 7일 수요일에 결혼식을 전격적으로 올려버렸다. 신혼여행도 진주 촉석루로 갔다 온 뒤 신혼집은 아예 가회동 죽사의 바로 옆집에 조그마한 방 한 칸을 얻어 살림을 차렸다. 사실 너무나 급하게 치루어진 결혼식이라 신현중은, 백석에게도 그 밖의 친구들에게도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허준은 연락을 받았으나 참석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서야 모든 사실을 안 백석은 그 충격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백석에게는 참으로 섧은 충격이였다. 허준조차도 충격을 받았을 정도였다고한다. 그 후 허준은 무슨 연유인지 당시로서는 가장 보수가 좋은 조선일보를 8월 30일에 퇴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의 분위기는 신현중과 같이 반제동맹(反帝同盟)에 참여한 조규찬의 증언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 김자옥과 신현중이 약혼을 했다가 신현중이 파혼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 이유로는 김준연의 장기간의 옥고로 인해 집안이 파산하여 몰락한 그녀의 집이 가난했기 때문이었고 또한 이화여전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를 졸업후 결혼하겠다는 그녀의 제의에 신현중이 거부한 까닭이었다. 당시 신현중은 집안형편상 빨리 결혼했어야 할 입장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돈 때문에 파혼한 것도 배제할 수 없다. 통영의 여자와 결혼한 것도 그녀의 집이 부유했다는 것을 고려해 두었던 것 같다. 신(愼)은 애국자 이지만 친구 관계에서는 실패했다고 본다. 김자옥은 그 후 신원중을 원망하다가 나와 결혼을 했다. 그래서 내가 그 때의 정황을 그녀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그 사건 이후로 나도 신(愼)과는 사이가 나빠졌다." 그러나 주변 인사들의 놀라움 속에서도 신현중과 [란]은 원앙부부처럼 금슬 좋게 살았다 . 신현중도 결코 란을 놓치기 싫었던 것이었으리라. 그때의 심경을 부인 박씨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 워낙 급하게 치루어진 결혼이라 아무 것도 모르고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했다. 나는 그 때 신현중씨나 백석씨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무리하게 강행된 결혼은 약간의 말썽이 생겼다. 신현중의 부인이 된 란은 결혼하고 나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도대체 아무 것도 없는 집안이었다. 생활이 곤궁한 것은 물론이고 모든것이 엉망이었다." 신현중의 집안은 신현중 자신이 반일운동으로 투옥되고 나서 일찍 돌아가신 모친을 대신하여 생활을 이끌고 나가던 부친마저 실직을하게 되어 생활이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더구나 신현중의 3년간의 옥바라지로 집안을 제대로 돌볼 사람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란의 모친 서씨는 결혼 직후 오빠인 서상호에게 강력하게 항의를 했다. "어떻게 이런 집에 주선을 했느냐"고...... 그러나 새로 가정을 이룬 신현중과 부인 박씨는 이 난관을 극복하고 신혼을 잘 꾸려가고 있었다. 이리하여 신문사에서는 최고의 사회부 기자라는 명성을 얻었으며 거기에다 란을 부인으로 맞이한 신현중은 37년이 본인에게는 최고의 해였다. 이 모든 사실을 안 백석은 비통 그 자체였다. 가장 아끼는 친구가 아무 연락도 없이 결혼한 그 자체가 더욱 서운 했을 것이다. 백석은 이때의 쓸쓸하고 외로운 심정을 그의 <함주시초(咸州詩抄)> 중 <북관>,<선우사>에서나마 간간히 내비치고 있다. (출처-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2 / 송준 / 도서출판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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