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조선군 전략 '제승방략' 이 나라를 망친 이유는?
문성근 법무법인 길 변호사 2018-03-13 09:20
역사는, 공직자로 하여금 현장과 국민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위만 바라보게 만드는 이기적인 권력의 통제야말로
나라를 망치는 원흉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기에 우리는 역사를 제대로 알고, 끊임 없이 교훈을 얻어야 한다.
▲ 釜山鎭殉節圖, 대한민국 보물 제391호 / photo by 위키피디아
제승방략은 임진왜란 때 조선군의 전략이다.
제목을 풀이하면 ‘승리를 만드는 포괄적 전략’이고,
사전적 설명에 의하면
‘적의 침입 시 각 지방의 군사를 요충지에 집결시킨 다음
중앙에서 파견된 장수의 통솔에 따라 전쟁을 수행하는 전략’이다.
그런데 제승방략은 실전에서 조선군을 망치고도 부족해 국제적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제승방략은 전략이라기보다는
현장을 외면하고 국난의 즉각 대처를 막는 권력의 통제였다.
전선의 군사들에게 싸움을 못하게 하고, 후퇴를 부추겼다.
실례를 보자.
왜군 침공 후 처음 이루어진 대규모 공방전은 동래성 전투였다.
그런데 조선군은 동래에서 총력을 기울이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후방지원없는 승전 기대는 상식 밖이다.
동래성 전투가 그랬다.
후방지원은커녕 동래성에 주둔한 중앙(병조) 군사들마저
중앙에서 지정한 집결지로 이동하느라 전선을 이탈했다.
제승방략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동래성에서는 정규군이 빠진 채
지방관아 소속 수백 군사들이 백성들과 함께 15만 일본군과 맞서야 했다.
후퇴하는 중앙군은 남은 아군과 백성의 사기를 죽였고,
후방 지원은 기대도 못할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일치단결하여 적을 감동 시킬만큼 처절하게 싸웠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그 후에도 제승방략의 폐해는 개선되지 않았다.
왜군침공 며칠 후 조선조정은 이일을 경상도순변사로 임명하고,
문경새재의 지형을 이용한 방어를 명했다.
그런데 그는 지휘부를 구성할 병사를 모은다며 3일을 허비한 후
60명의 병사를 이끌고 상주의 경상감영에 이르지만
지방지휘관인 상주목사가 중앙의 장수를 기다리다 지쳐
틀렸다 싶어 도주를 하는 바람에 제대로 군사를 지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포자기에 이른 이일은
“왜군이 새재로 몰려온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백성 다섯의 머리를
도리깨로 깨서 죽여 입을 막은 후 새재방어선을 포기하고,
제승방략에 따라 삼도순변사로 갓 임명된 신립이 도착했다는 충주로 달아났다.
당시 신립의 막하 군졸인 김여물은
새재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한 매복과 유격전을 건의했다.
그러나 이일은
“매복전을 펴면 억지 동원되어 애착이 없는 병사들이 도망을 칠 것”이라는 이유로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자 신립은 장수의 말을 무시하고 군졸의 의견을 따랐다가는
뒷감당이 어렵다는 생각에 후퇴가 불가능한 배수진으로 전투를 결정했다.
그 결과 창검을 든 3만여 조선군은
10만여 일본군의 집단총격을 받아 탄금대의 강물을 온통 피로 물들였다.
그 와중에 이일은 “왕을 모서야 한다”는 핑계로 전선을 빠져나와 한양에 온 뒤
일본군의 전투력을 과장하면서 왕에게 한시 바삐 북으로 피신하라고 일렀다.
한양방어전도 마찬가지였다.
도원수 김명원은 왜군이 몰려오자 싸우지도 않고 어가를 지킨다는 핑계로
임진강으로 물러나 방어선을 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명령에 즉시 복종 않고 매복을 했다가
적 선발대 70여명의 목을 벤 부원수 신각을 항명으로 단죄했다.
이로 인해 육전 최초의 승리를 기록한 장수는 영문도 모르고 참형을 당했다.
역사는 공직자로 하여금 백성이나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오직 위만 바라보게 만드는 이기적인 권력의 통제야말로
백성을 해치고 나라를 망치는 가장 큰 원흉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의 부당한 통제가
지금도 우리사회에 난무하다는 사실도 알게 해 준다.
연평해전 예를 보자.
제2차연평해전 때 중앙의 명령 없이는 사격을 못하는 교전수칙에 따라
해군장병들은 NLL을 침입한 북한함정을 선체로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방법은 한번으로 족했다.
다음날, 또다시 영해를 침범한 북한함정을 밀어내려 하다가
북한군의 선제사격을 받는 바람에 꽃다운 장병들이 희생되었다.
세월호도 마찬가지다.
공직자들이 재난을 맞아 중앙 눈치를 살피기보다는 위급한 현장상황에 전념했더라면,
온 국민을 무기력과 비통함에 빠지게 한 그런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역사를 제대로 알고, 역사로부터 끊임없이 교훈을 얻어야 한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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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승밤략 진관제도
https://ko.m.wikipedia.org/wiki/%EA%B9%80%EB%AA%85%EC%9B%90 위키를 보니 김명원이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네요 필자가 예를 잘못든거같네요
제승방략체제가 나쁜 체제인 건 아닙니다. 제승방략체제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한 게 문제였지요. 가령 이순신이 지휘한 수군도 제승방략체제로 동원된 군대였지만 엄청난 성과를 거뒀다는 걸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똑같은 제승방략체제인데 육군은 고전하고 수군은 승승장구한 거죠. 그렇다면 제승방략체제 자체가 근본적으로 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제승방략체제는 기존의 진관체제의 한계를 보완한 방법입니다. 진관체제는 병력을 각 군, 읍 단위로 흩뿌려 놓고는 자전자수하는 방식이라 소규모 외침에 대해 신속한 대응은 쉽지만, 일정 이상의 규모가 되는 외적에게는 각개격파당하기 좋습니다. 조선 중기가 되어가면서 북방의 여진족이든, 남방의 왜적이든 침입 규모가 커짐에 따라 기존의 진관체제로 각개격파되어 지는 일이 늘어나자 외침이 발생하면 각 진관에서 각자 대응하기보다 군을 한곳에 모아서 대군을 만든 뒤 대응하자는 방식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게 제승방략체제입니다.
근데 제승방략체제라 해서 반드시 군을 모아 놓은 뒤에 중앙에서 지휘관 파견할 때까지 기다리는 방식이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그건 제승방략을 운용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일 뿐이죠. 조선 육군을 보자면, 여진 상대하던 조선 북방군은 현지 지휘관이 대군을 지휘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여진족 침입이 발생하면 함경도 쪽 병마사가 (외침과 관계없는 후방인) 함경도 남쪽의 군대까지 다 모아서 지휘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조선 남방군은 대군을 모은 뒤 중앙에서 지휘관이 파견되어 지휘하는 방식이었지요. (이럴 거라면 각 도에 병마사를 왜 임명했는가 하는 의문도 듭니다.)
수군 또한 조선 북부군과 비슷하게 현지 지휘관이 모아 놓은
대군을 지휘하는 방식이었는데, 이순신이 지휘하던 전라좌수영의 실적과 원균이 지휘하던 경상우수영의 실적은 다들 잘 아실 테니 굳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똑같이 병력을 모아 대응할 수 있게 해도 결과가 달라진다는 겁니다. 나아가 나중에는 도 단위를 넘어 삼남(충청, 전라, 경상)의 수군병력 지휘권을 모두 통합하여 '삼도수군통제사' 라는 자리까지 마련해 병력을 집중하여 일본에 대응하지요.
만약 조선 남방 육군의 경우에도 미리 전투경험이 많은 장수가 경상도 병마사로 임명되어 있었고, 중앙에서 장수를 보낼 게 아니라 그 경상도 병마사가 도 병력을 집중하여 지휘하게끔 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합니다. 나아가 일본의 부산상륙
이후 중앙의 대응이 더 빨랐어도 결과는 조금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요.
비유하자면..... 메르스 때에도 질병관리본부는 있었고, 현재 코로나 사태 때에도 질병관리본부는 있습니다. 메르스 때에 질병관리본부라는 전문적 감염병 관리 총괄기관이 제 역할 못하고 어리버리했다고 해체한 뒤 그 이전처럼 보건소에서 각 지자체 지휘 받아 알아서 대응하게끔 했으면 과연 현 코로나 사태에 대응이 잘 되었을까요? 질병관리본부의 구성원이 메르스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음에도, 제도를 좀더 가다듬고 법률을 좀더 정비하고 대응태세를 좀더 보완하는 것만으로 질병관리본부는 현 사태에서 엄청난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