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의 구덩이
원제 : The Snake Pit
1948년 미국영화
제작, 감독 : 아나톨 리트박
음악 : 알프레드 뉴만
출연 :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레오 겐, 마크 스티븐스
셀리스트 홈, 벳시 블레어, 헬렌 크레이그
비울라 본디, 레이프 에릭슨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아카데미 녹음상 수상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가 2020년 7월 25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올해 나이 무려 104살, 작년 사망한 커크 더글러스에 이어서 살아있는 할리우드 클래식이랄 수 있는 100세 이상의 원로 배우가 사망한 것입니다. 이로서 1939년 발표된 불멸의 명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함께 했던 사람 중 유일하게 남아있던 인물이 역사속으로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오늘은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의 출연작 중 한 편을 소개합니다. 오랜 세월, 워낙 여러 영화에 출연했지만 오늘 고른 영화는 1948년 작품 '뱀의 구덩이' 입니다. 에롤 플린과 출연한 여러 오락물들, 아카데미상을 받은 영화들 등이 있지만 본인이 원톱 주연을 하며 좋은 연기를 보인 작품이 '뱀의 구덩이' 입니다. 이 영화에서도 아카데미 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아카데미상 수상자는 '조니 벨린다' 에서 농아연기를 했던 제인 와이먼이었습니다.)
'뱀의 구덩이'는 제목만 보면 당시 활발히 만들어지던 필름 느와르 장르로 연상되지만 정신병원을 무대로 한 이야기입니다. 한 여인이 어딘가에 앉아서 뭔가 혼잣말 같은 독백을 하는데 마치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듯한 태도입니다. 그 여인은 그 곳이 어디인지조자, 자신이 왜 거기었는지 조차 모르는 느낌입니다. 영화 시작하고 1-2분도 안 지나서 관객들은 그 곳이 정신병원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여기가 어디이며 나는 왜 이곳에 있는 것인가?
정신병원을 무대로 한 작품
남편을 만나 행복했던 시절
버지니아 스튜어트 커닝햄(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그녀는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치료중입니다. 처음에는 그곳에 온 과정조차 기억을 못하고 남편을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그곳이 병원이라는 인식조차 못하지요. 대체 그녀는 누구이며 왜 그렇게 된 것일까요?
영화는 두 가지 과정을 차례로 풀어주는데 첫 번째는 버지니아가 병원에 오기까지의 간단한 삶이 남편의 회상형식으로 보여집니다. 그 과정은 앞 부분에 짧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과정은 대체 버지니아가 왜 정신이상에 걸렸는지, 그 내막을 파헤치는 부분입니다. 이 내용은 영화 전편에 의해서 조금씩 베일이 벗져지고 있고, 그런 와중에 버지니아의 정신병원에서의 삶이 함께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버지니아의 병의 원인을 푸는 방법은 헌신적인 의사 킥 박사(레오 겐)의 자상하고 인내심있는 치료에 의해서인데, 결정적으로 '최면치료'가 그 역할을 합니다. 킥 박사는 최면치료를 통해서 버지니아의 과거와 어릴때의 영향 등을 분석하여 그 원인을 찾아내지요.
아내의 정신이상을 발견하는 남편
혼신의 연기로 베니스 영화제 주연상을 수상한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자상한 의사의 인내심있는 치료가
많은 도움이 된다.
최면치료를 하는 장면
사실, 오락영화를 기대한 관객들의 방향으로 흘러간 작품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 영화가 어떤 장르인지 모르고 단지 제목으로 유추할 경우 버지니아가 뭔가 음모에 걸려서 그 곳에 오게 되었고, 배후에 어떤 비밀이 있을거라는 기대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반전이나 의외성 없이 영화는 시종일관 꾸준히 '환자의 치료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버지니아가 어떻게 병원에서 적응하고 생활하며 어떻게 치료를 받는지, 그리고 과거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등이 순차적으로 조금씩 보여지고 있습니다.
일종의 여성판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 라고 볼 수 도 있지만 두 영화의 방향과 주제는 확연히 다릅니다. '뻐꾸기....' 가 정신병원과 수간호사를 부정적으로 다루고 있는 사회고발성 작품이라면 '뱀의 구덩이'는 휴먼드라마 입니다. 자상하고 인내심 있는 킥 박사라는 의사의 따뜻한 치료과정을 통해서 버지니아는 차츰 안정을 되찾아 가고 서서히 치료되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후반부에 버지니아는 오히려 동료 환자들을 위로하고 돌보기도 하지요. 처음에 무척 혼란스럽고 당황했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며 적응을 잘 못하는 헤스터(벳시 블레어) 라는 환자에게 특히 각별하게 대합니다. 병원에서 버지니아가 유일하게 마음을 열고 의지했던 의사 킥 박사, 그의 인내심있는 치료도 버지니아의 회복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1940년대에 두 번의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과
베니스 영화제 주연상 수상 등
연기파 여배우로 자리를 굳힌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어릴때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과 죄의식이 결국
어른이 되어서 남자에 대한 장벽과 죄의식으로 자리한다.
정신병원을 무대로 한 유명한 작품들,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 '충격의 복도' '지난 여름 갑자기' 등의 작품들이 모두 굉장히 도발적이고 파격적인 굴곡이 보여지는 영화라면 '뱀의 구덩이'는 훨씬 차분한 영화입니다. 물론 이 작품도 간호사와의 대립, 혼란, 소동 등이 보여지긴 합니다. 그럼에도 꽤 중립적으로 다루어지는 내용입니다. 병원의 시스템을 크게 비판하지도 찬양하지도 않고 버지니아를 중심으로 입원 환자들간의 삶을 비교적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동일 주제 영화에 비하면 약간 밋밋할 수 있지요. 대신 버지니아가 어릴적 겪은 아버지와의 문제로 인하여 병이 발생하는 과정을 차근히 풀어나가는 내용이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관객들 모두 의사 혹은 버지니아의 입장이 되어서 마치 미스테리한 사건의 실타래를 풀듯이 함께 참여하게 되지요.
당시 32세의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는 전혀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로 등장하고 있는데 여배우로서 미모가 아닌 초췌한 모습으로 연기의 승부를 하고 있습니다. 1930년대 에롤 플린표 활극 여러편에 등장하며 '미모의 배우'로 활동했던 그녀는 40년대에는 연기에 물이 올라 두 번이나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게 되는데 이 영화도 그 시기에 걸쳐진 작품입니다. 쉽지 않은 정신이상자 역할을 하며 오로지 본인의 연기에 의존하여 원톱으로 영화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백경'에서 현재 '스타벅스 커피점' 상호의 동기가 되는 1등 항해사 '스타벅' 역으로 기억되는 배우 레오 겐이 자상하고 인내심있는 의사로 등장하여 버지니아의 치료과정을 연기합니다. 의사와 환자가 주축이 되어 차분히 치료하고 인내하는 과정을 보면 '이브의 세 얼굴'과 유사한 면이 있고, 어릴적 영향으로 남자에 대한 마음을 쉽게 열지 못하는 영향을 받는 것은 히치콕의 '마니'나 엘리자베스 테얼러의 '지난 여름 갑자기'와 조금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즉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 '마니' ''이브의 세 얼굴' '지난 여름 갑자기' 등과 모두 유사한 면이 있는 독특한 소재 영화입니다.
버지니아의 위기
병원을 '뱀의 구덩이'로 표현한 부분
마티에서 어네스트 보그나인의 연인으로 출연한
벳시 블레어(오른쪽)가 버지니아에게 보살핌을 받는
동료 환자로 출연한다.
'뱀의 구덩이' 라는 제목은 버지니아가 의사와의 대화중에 여러 환자들 틈에 서 있다보니 자신이 마치 뱀의 구덩이 속에 갇힌 느낌이다 라는 말을 하는데 그 대사에서 인용된 제목입니다. 여기서 버지니아는 중요한 말을 하는데 멀쩡한 사람이 환자들의 모습을 보며 함께 미쳐갈 수 있고, 반대로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정신이 돌아올 수 있다 는 이야기를 합니다. '남의 모습이 내 모습의 거울' 이 될 수 있다는 중요한 대사지요.
그다지 흔치 않은 소재를 다룬 영화로 미인 배우가 아닌 '연기파 배우'로서의 진가를 보여준 작품입니다. 30년대 활극 주인공의 예쁜 들러리 역할을 많이 한 미인 여배우가 본인 스스로의 역할로 영화를 이끄는 연기파 배우로 톡톡히 역할을 했던 작품이고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는 배우로서 그런 성장과정을 겪으면서 오래 장수하는 명배우가 되었습니다. 러시아 출신 감독 아나톨 리트박이 연출했는데 그는 율 브리너 주연의 '여로'나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이수' 같은 작품으로 우리나라에 알려진 인물이지요. 이 영화는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의 여우주연상 후보를 비롯하여 아카데미 5개 부문 후보에 올랐고 녹음상을 수상했습니다. 베니스 영화제에서는 아나톨 리트박 감독과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가 모두 수상을 하는 등 비교적 호평을 받은 40년대 흑백영화로 국내에는 개봉되지 않은 작품입니다.
ps1 : 개인적으로 정신병원을 무대로 한 영화중 최고 걸작은 사무엘 풀러의 '충격의 복도'라고 생각합니다.
ps2 :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는 착한 멜라니 이미지 때문에 선역이 어울리는 배우지만 나이가 들면서 악역도 능하게 했던 배우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화장기 없는 초췌한 얼굴로 일관하고 있는데 예쁘게 보이고 싶은 여배우로서 그런 역할을 스스럼없이 하는 부분이 높이 살만 합니다. 특히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직후라서 주가가 오른 상태였음에도.
[출처] 뱀의 구덩이(The Snake Pit, 48년) 올리비아 드 해빌런드 원톱 주연 작품|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