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죽음에 담긴 의미
''저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까요?"
60대 중반의 한 남성이 자신이
맞게 될 죽음에 대해 물어왔습니다.
제가 되물었습니다.
--- "그거 미리 알면
오히려 불안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그는 무덤덤하게
''괜찮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를 찾아오는 분들 중에는
더러 자기 죽음의 시기에 대해
물어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부분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주변을 잘 정리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또 지병을 앓고 계신 분은
항상 머리를 짓누르고
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고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대부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기원전 3000년대 메소포타미아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그 두려움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길가메시는
인류 최초로 성숙한
문명을 만들어냈던
고대 메소포타미아
도시국가 수메르의
실재했던 왕이었습니다.
그들이 점토판에 쓴
인류 최초의 책이
(길가메시 서사시)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3분의 2가 신이고
3분의 1은
인간으로 나옵니다.
그는 3분의 1이
인간이기 때문에
죽어야 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두려움 때문에 절망합니다.
그리고 형제처럼 지냈던
엔키두의 죽음
앞에서 절규합니다.
어찌 내가 편히 쉬며,
어찌 내가 평화를 누리랴?
절망이 내 마음 속에 있거늘!
지금 내 형제가 된 것을 보라.
나 또한 죽고 나면 이 같이 될 것이다.
죽음이 두렵다.
<성경>의
<시편> 22편 1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두 발과 두 팔을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죽음을
기다리던 예수,
예언된 운명을
충실히 따랐던 예수,
그러나
신의 아들이었던 예수도
마지막 순간에는 하나님께
---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하고
외쳤습니다.
예수가 숨을 거두기까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기 전에 이미
아버지 뜻대로 따르겠다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했던 예수도
자신이 처한
비극적 죽음 앞에서,
왜 자신을 버리시는지
하나님께
절규하듯 묻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도
죽음 앞에서
순간 두려워했는데.
하물며 범부인 우리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죽은 황제보다는
살아 있는 거지가 났다"라거나
---"개뚱발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는
우리 속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봐야
죽음은 한 발 한 발
누구에게나
소리 없이 다가옵니다.
그래서
---'인생 참 덧없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조선 초기의 함허대사(1376-143)는
---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자취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뜬구름이란 본래
그 속이 텅 빈 것이니,
덧없는 인간의 태어남과
죽음 또한 이와 같도다"라고 했지요
한마디로
우리가 그토록 매달리는
인생은 알고 보면
오는 바도 없고 가는 바도 없는
허망하고 무상한
것이란 말씀입니다.
신라 문무왕 같은 임금도
눈을 감으면서 인생의
허망함을 진하게 토로했습니다.
---- "지난날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된다.
나무꾼과 목동이 그 무덤 위에서
땅을 구르며 노래를 부르고,
여우와 토끼는 그 무덤
옆구리에 굴을 판다" 고
한탄한 것입니다.
저한테 자신의
죽음에 대해 물은
60대 남성은 뭔가 독특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저는 저절로
그 기운을 감지하곤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하는 많은 영혼
(보통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존재)이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그 사람 뒤로 마치
안개 커튼 같은 것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사람의
전생 리딩을 시작하자
커튼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주위의 풍경과
그 존재가 나타났습니다.
전생 리딩에서
그는 고대 그리스(희랍)의
대단히 존경받는 철학자이자
웅변가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주위에는 항상
많은 사람이 따랐습니다.
반백의 그가 돌로
장식한 어느 분수대 옆에서
군중에게 열변을
토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전생에서는
중세 독일에서 백성에게
선정을 베푸는 성주로 살았습니다.
또한 조선 중기에는
금강산 암자에서 수행하는
비구 스님으로 살았는데,
당시는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혼란스럽고
민심이 흉흉할 때였습니다.
리딩을 하면서 그때
스님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고 이야기하자
그는 순간 묘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러곤 자신의
윗대 할아버지 중에
의병을 일으킨 스님이
계시다고 말했습니다.
어릴 때 집안 어른들로부터
그 얘기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사람의 전생
앞뒤 맥락을 살피면서
미래에 다가올 죽음의
시기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중소기업을 경영하면서
사회복지를 위해
많은 기여를 하며 살아왔는데.
지금은 섬에 들어가
요가 수행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현생에서의 삶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인생의 마감 시간을
미리 알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서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전생이 있다면
수백 생을 살았던 사람은
수백 번의
죽음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수많은 죽음의 경험에
익숙해지지 않을까요?
한두 번 경험한 것도 아닌데,
왜 두려위하며 공포에 떨까요?
그 이유는 바로
우리의 영적 성숙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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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자유게시판
인간의 죽음에 담긴 의미----박진여
고구마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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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6 09:06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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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도 예전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무척이나 많았는데 지금은 수행하면서 나아졌다
윤회도 얄고 큰스님 처럼 헌옷을 벋고 새옷을 갈아입듯이 초연하지는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