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곡 이달은 중종 34년(1539)에 나서 광해왕 4년(1612)에 죽은 풍운의 大시인이었다. 중종 조에서 광
해 조까지는 조선 정치사에서 가장 격랑의 시기였다. 연산군을 폐한 반란군에 의해 보위에 오른 중종
은 실권을 훈구파들에게 빼앗긴 허수아비 임금이었으며, 뒤를 이은 인종과 명종 역시 외척과 문정대
비에게 실권을 빼앗긴 채 아무 업적도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선조는 적손이 아니라는 이유
로 신하들에게 홀대를 받다가, 급기야 당쟁에 휘말려 국방을 소홀히 한 탓에 임진왜란이라는 최대의
국란을 맞았다. 광해 역시 적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신하들에게 휘둘리다가, 끝내 역도들에게 보위
를 내주고 만 비운의 왕이었다.
이달의 아버지는 충청도 홍주목에서 제일가는 명문가 자손으로서 봉상시(나라의 제사와 시호 제정에
관한 일을 보는 관아) 부정(종3품)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홍주목의 관기 출신이었다. 신분이 얼자이
다 보니 아버지를 ‘나으리’라고 불러야 하는 고달픈 신세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신분의 벽을 넘어
사랑을 나눈 로맨티스트들이었지만, 그 소생은 죽었다 깨어나도 신분의 벽을 넘을 수 없는 것이 개떡
같은 조선의 법도였다. 태어나자마자 양반가의 체면을 구긴다고 눈총을 받고 자란 이달은 일찌감치
자신의 한계를 깨우치고, 벼슬 따위는 꿈도 꿔보지 않은 채 문학과 예술세계에 빠져들었다. 다행히
시에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다.
[불후의 명곡]에서 <혼자 한 사랑>을 불러 내 혼을 쏙 빼간 정유지
山寺
寺在白雲中 산사는 흰 구름 한가운데 있지만
白雲僧不掃 중들은 그 구름 쓸지도 않네.
客來門始開 손이 찾아오니 비로소 문이 열리고
萬壑松花老 골짜기마다 송홧가루가 휘날리누나.
이달은 불과 일곱 살 때 이 시를 지었다. 운을 가지고 놀면서 한가로운 산사의 정경을 짚어내는 솜씨
가 일품이다. 이달은 얼자라고 막 대하는 주변의 푸대접도 아랑곳하지 않고 글을 익히고 시를 지으며
때를 기다렸다. 언젠가는 운명이 자신을 이끌어줄 것이었다. 이달은 잠시 번역을 맡은 관서인 사역원
에서 중국어를 번역하는 한리학관(漢吏學官)을 지내기도 했다. 물론 과거에 응시할 수 없으니 음서
(蔭敍)로 1년 남짓 일한 뒤 맡은 일을 마무리하고 그만두었다. 재주가 워낙 탁월하여 어느 고관의 천
거로 복에 없는 벼슬살이를 했던 것이다.
벼슬에서 물러난 직후 이달은 사암 박순의 문하에 들어가 고죽 최경창과 옥봉 백광훈을 사귀게 되었
다. 박순은 대제학‧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선조 때는 영의정을 지낸 시와 문장의 대가였다. 얼자로서
그의 문하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만도 여간한 행운이 아니었다. 박순은 특히 당나라 시인 맹호‧왕유‧
이태백을 높이 평가하여 그들의 시세계에 통달해 있었다. 이달은 박순의 문하에서 5년 동안 시세계
의 폭을 넓히고 시재(詩才)를 깊이 있게 다듬었다. 최경창과 백광훈은 ‘삼당시인’으로 불린 조선 중기
의 大시인들로, 이달은 평생을 두고 그 양반 시인들의 신세를 지며 살았다. 그들은 신분의 차별 같은
건 개념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이달은 차차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여 멀리서 시객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허균의
형 하복 허봉도 이달을 찾아와 교류한 선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달이 조선의 천재 남매 허균과
그의 여동생 난설헌 허초희의 스승이 된 것은 순전히 허봉과의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허균은 형 허봉
의 집에 놀러왔다가 이달이 즉석에서 지은 시를 보고 감복하여 그 자리에서 가르침을 청했다. 이달이
가르침을 허락하자 허균은 여동생 난설헌을 이달의 집으로 데려와 함께 배우기 시작했다. 명문가의
천재 삼남매 역시 전혀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이달은 떠돌이 생활을 많이 했다. 원채가 가난한 집안이라 무일푼으로 집을 나서 팔도를 돌아다니면
서 풍찬노숙을 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는 산천경개에서 얻는 게 많아 언제든지 기꺼이 고생을 감수
하며 즐거운 발걸음으로 전국을 주유했다. 더러 지인의 집에 머물기도 했지만 눈치가 보여 오래는 못
있었다. 그에게는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시재(詩材)였다. 고달픈 백성들의 삶, 그 속에서도 아
름다운 관계를 맺는 서민들의 정 깊은 이야기, 어린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 등도 모두가 특별한 시
재였다. 그가 찾아가 잠깐씩 신세를 진 양사언‧최경창‧손여성‧백광훈 등은 모두가 지방관으로서 이달
에게 풍성한 추억을 안겨주었다.
기. 성. 전. 나연
이달은 시가 인연이 되어 세종의 증손자인 벽계수 이종숙과도 잠시 교우한 적이 있었다. 바로 황진이
가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하면서 유혹했던 멋쟁이 선비다. 벽계수는 이달이 알려준
대로 황진이를 유혹하러 갔다가, 그녀가 청아한 목소리로 위의 시를 읊자 도리어 그녀에게 홀려 말에
서 굴러 떨어졌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칠순을 넘기자 후배 시인 김삿갓과 달리 이달은 집에 칩
거하며 조용히 죽음을 맞이했다. 얼자라는 태생적 멍에를 안고 한평생 한을 삭이며 살아온 이달은 74
세에 눈을 감았다. 참으로 고달펐지만 고결한 선비의 삶이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법무장관 파면과 현정권 의 헌정 유린 중단을 촉구하며 제1 야당대표가 대정부 투쟁 차원에서 삭발하는 장면을 TV를 통해 보았습니다. 사회 정의.윤리가 무너졌다며 교수 1000명이 시국선언 서명을 하는등 나라가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이런 국민의 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는 좌파.운동권 의 실상이 이념으로 결집되어 세월따라 그러려니로 귀착 시키는 다반사 입니다. 한치앞을 못보는 세계흐름 속에 내분으로 시들어 가는 우리 위상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