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의 세레나데
고성환
대구에서 공업고등학교 전기과를 졸업하고, 대구3공단 모 자동차부품회사 변전실에 취직했던 나는 1980년 1월. 졸업과 동시에 자석에 끌리듯이 3년 대구 자취생활을 작파하고 고향 문경으로 돌아왔다.
무슨 대책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니었다. 집안 형편이 좋아 농사지을 땅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공장이 많아 일자리가 넘쳐나는 것도 아니었다. 20여명의 동네 친구들 대부분이 집에 온다고 해서 그냥 친구들과 놀기 위해 집으로 왔다.
그리고 참으로 마음껏 4년을 놀았다. 대구에서 같이 자취도 하며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녔던 한 친구가 서울 유명대학 법학과에 가고, 한 친구가 경북대에 갔고, 깨인 부모를 둔 친구 몇은 재수하러 서울로 갔다. 그래도 열 명 남짓 친구들은 남았다.
겨울부터 시작된 내 스무 살의 청춘은 그렇게 시작됐다. 백화산 자락이 마을을 휘돌아 감싸고, 앞에는 주지봉이 빼쪽이 붓끝처럼 솟아 있는 솥골이라는 심심산골. 겨울 낮에는 땔감을 하기 위해 질매재를 넘어 깊은 산속에 민다리를 꺾어 오거나 장작불을 피우기 위해 큰 소나무 가지를 따 둥글 토막을 해 오기도 했다.
그것은 우리들이 마음 놓고 놀기 위해 부모님께 드리는 일종의 선심이었다. 그러면 어른들은 그 나무로 밥을 짓고, 군불을 때며, 그 속에 동삼 석 달 모여 앉아 화토치고, 모둠밥을 해 먹는 등 눈 속에 갇힌 마을 안에서는 따스한 정들이 집집마다 피어올랐다.
그 중에 우리 집은 할머니, 어머니, 나 셋이 방 두 개에 살았는데, 한 방은 어른들이, 다른 한 방은 우리들이 진을 치고 놀던 문화회관, 복지회관이었다. 때로는 어머님이 우리 노는데 방해된다며 따로 나가 노시기도 했으나, 다른 집보다 우리 집이 편안했던지 곧 모여서 다시 오기도 했다.
그 가운데서도 진정 내가 솥골에 머물고 있었던 것은 여자 친구들이 있었던 까닭이었고, 그 중에서도 상상도 할 수 없던 한 여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여친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갔었고,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녀 우리 촌뜨기들과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됐을 거라는 경외(敬畏)의 대상이었다. 그런 그녀가 스무 살에 상상과 달리 주로 고향에 머물게 되었던 것이다. 황순원의 ‘소나기’를 생각하면 딱 맞을 그런 관계였다고나 할까? 소녀를 지나 스무 살의 처녀가 이 땅에 같이 있다는 것은 정말 상상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 몰래 속으로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갖은 방법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가장 빛났던 방법은 4-H활동이었다. 젊은이들이 버글버글하던 그때 나는 마을 4-H회장이 됐고, 면 농촌지도소를 출입하면서 마을에서 수행할 과제들을 한 아름씩 가지고 왔다.
그 중에 마을탁아소 운영은 그녀와 내가 가까이에서 한 곳을 향해 달려갔던 소중한 시기였다. 이장님한테 이야기해서 마을회관 회의실을 교실로, 동사무실을 교무실로 하고, 여름방학 때 탁아소를 열었다. 농촌지도소에서 준 괘도와 책, 학습도구들을 걸고, 꽂고 하니 제법 학교다운 모습을 갖추게 됐다.
점심을 먹고 오후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일찌감치 회관으로 가 사무실 청소도 하고, 수업을 준비했다. 아이들을 기다려야 할 선생인 나는 여 선생님을 기다리는 몫이 더 컸다. 여 선생님은 피부가 고왔다. 자연스러운 서울 말씨에 고음의 목소리와 오랜 반가(班家)의 가풍에서 묻어나온 행신(行身)은 어느 선생님도 갖추기 어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취학하기 전의 아이들 여나무 명이 입학했고, 그 아이들에게 글자와 더하기 빼기, 음악, 미술을 가르쳤다. 그 때 가르치던 노래 중 ‘자동차가 붕붕 자동차가 붕붕’하던 소리는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그런 여름방학이 가면서 마을탁아소도 끝나가자 나는 조바심이 났다. 그녀와 만날 수 있는 도구가 닳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더 만날 수 있는가하는 문제는 아주 절박하게 나를 옥좨왔다.
그래서 나는 다시 추석에 ‘콩쿨대회’를 열기로 했다. 아주 어렸을 적에 형, 누나들이 열던 콩쿨대회를 즐겁게 본 추억이 살아나 이걸 준비하면서 자연스러운 만남을 예비하였던 것. 그녀도 아주 흔쾌히 내 제안을 수락했다.
그래서 탁아소 운영을 성공시킨 우리는 다시 힘을 모아 콩쿨대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무대는 도라무깡(드럼통) 몇 개를 밑에 놓고, 그 위에 합판을 까는 것으로 했으며, 그 위에 나무로 기둥을 세워 천으로 뒤와 옆을 가렸더니 점점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무대 뒷면에는 ‘정리1리 추석 콩쿨대회’라고 정성들여 글자를 만들어 붙였고, 반짝이를 사다가 주렁주렁 매달았다.
그리고 객석엔 멍석을 구해다 깔고, 집집마다 다니며 경품을 구했다. 그리고 마을 방송용 앰프를 옮겨 설치하고, 기타 잘 치는 형님을 모셔와 노래 반주를 맡겼다. 그리고 추석 날 밤. 우리는 꿈에 그리던 무대의 막을 열었다.
대회는 성공이었다. 오랜만에 열리는 축제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150호 대부분의 가정에서 나왔다. 열에서는 술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 흥겨운 마당을 만든 그녀는 누구보다도 만족해했다. 거기에다가 찬조수입도 꽤 많아 대회에 들어간 경비를 제하고 4-H기금으로 들여놓게 되자 기쁨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러나 시간은 자꾸 흘렀고, 그녀를 붙들어 둘 다른 장치들은 이어지지 않았다. 스무 살의 내 청춘은 그렇게 흘러갔다. 저녁에 연인의 창밑에서 노래하거나 연주하던 내 청춘의 세레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