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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언급한, 지난 십수년 동안 대안교육이 양적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은 ‘대안적 교육’을 표방한 학교(즉, 대안학교)들이 많이 생겨났다는 뜻인 반면, 양적 성장에 비해 질적 발전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함은 교육의 전 과정에서의 ‘대안’ 모색이 매우 부진했다는 의미이다. ‘대안적 교육’을 실천하기 위한 ‘형식(形式)’은 많이 생겨났지만, 그 형식들(즉, 대안학교들) 안에서 진행되는 ‘내용(內容)’들이 진정 ‘대안적(代案的)’인가를 평가하면 기대에 많이 미치지 못한다는 말인데, 만약 이런 평가가 크게 잘못되지 않았다면, 대안교육의 ‘대안성(代案性)’을 높일 수 있는 길 찾기야말로 대안교육의 질적 발전을 위한 관건이라 할 수 있다.
3. 예측되는 미래와 원하는 미래
기존의 것과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다 ‘대안’으로서의 가치를 갖는 것은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그러면 그 판단 기준은 무엇인가? 물론 여러 가지 기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기준은 ‘그것이 미래사회 변화의 성격을 정확하게 반영한 대안인가’하는 것이다. 어떤 교육실천이 ‘대안적’이라고 평가받기 위해서는 기존의 것과의 질적 차별성뿐만 아니라, 동시에 미래사회에서도 작동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대안’이어야 한다. 세계화를 예로 들어 생각해보자.
하나의 시장 | → | 영어 교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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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 5.31 교육개혁안 탄생 | ⇒ | 이후(제7차, 제8차, …) 국정교육과정의 방향과 구성에 영향을 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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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주의 | → | 창의성 교육 |
세계화는 시장(市長)의 환경을 두 가지 측면에서 변화시켰다. 한편으로는 전 세계의 시장을 ‘하나의 시장’으로 만들어가는 반면, 또 한편으로는 시장을 매우 다양화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시장의 성격 변화는 기업들에게 새로운 ‘기업(직업)능력’을 갖출 것을 요구하였다. 즉, ‘하나의 시장’은 ‘영어’를, ‘다양화된 시장’은 ‘창의성’을 필요로 한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부(富) 창출의 핵심 엔진이 에너지(산업화시대)에서 정보와 지식(지식정보사회)으로 옮겨가다보니 기업은 교육의 효용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고,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몰라도 최근 추진되는 교육개혁의 기본 방향을 설정했던 ‘1995년 5월 31일 교육개혁안’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이 바로 ‘초등학교 3학년에 영어를 전격적으로 도입’한 것과 ‘창의성교육을 강조’한 것이다. 한때 공중파에서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을 쏟아내던 때가 있었는데, 바로 다양화된 시장에서는 평균 99점은 아무런 소용이 없고 오직 그 부문에서 1등만이 살아남는다는 기업의 ‘비장함’을 여과 없이 반영한 말일 것이다.
생애주기(生涯週期)적 측면에서도, 생물학적 생애주기의 변화와 더불어 노동・학습・여가를 포함하는 사회적인 생애주기 역시 크나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산업사회에서는 ‘출생→성장→교육→취업→퇴직→은퇴생활’로 이어지는 단선형 생애주기가 보편적이었다. 이러한 단선형 생애주기에서는 교육은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었다. 그러나 세계화시대, 정보사회, 지식기반사회, 고령사회에서는 취업과 전직, 퇴직이 반복되는 나선형 생애주기로 변화한다. 그리고 ‘평생직장’ 개념이 ‘평생직업’ 개념으로 대체되는 나선형 생애과정에서는 새로운 지식을 늘 습득할 수 있어야 하며, 따라서 교육은 생애과정 중 일정한 연령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연령통합적 형태로 일상화 될 것이다.
자, 이런 상황을 목전에 두고, 우리 대안학교들이 그동안 모색, 실천해 온 대안들은 우리 교육의 발전 방향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세계화의 ‘힘’과 과연 길항작용해서 우리의 삶의 질을 지켜낼 수 있는 ‘힘’이 있는가? 그런데 미래사회가 세계화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세계화시대, 특히 2000년 이후의 ‘개인의 세계화’시대에 개인의 양극화가 예측되고 있고, 지식기반사회에는 지식의 ‘독점’이 우려되는 우리 사회에서 지금의 대안교육은 세계화시대, 지식기반사회, 고령사회 등을 대비하여, 앞으로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기존 교육으로부터 가장 불이익을 받게 될지, 달리 표현하면 지금의 것과는 다른 ‘대안적’ 교육을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누구라고 전망하고 있으며, 그들의 필요에 가장 잘 부응할 수 있는 ‘대안’의 내용이 무엇이어야 한다고 분석하고 있는가? 분명한 사실은, 지금까지처럼 학교 울타리 ‘안’에 갇혀있는 ‘대안’은 결코 ‘현실적 힘’을 갖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미래사회 변화의 핵심적 성격을 고려하지 않은 대안교육 실천은 이미 지나가고 있는 산업화시대에서나 어울릴 수 있는 내용의 것을 ‘대안’이라고 믿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이렇듯 미래사회 변화의 성격을 분석하고 반영하는 것은 대안교육 실천의 ‘대안성’을 확고히 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미래사회의 변화에 대한 관심은 두 가지 방향에서 이뤄질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는 ‘어떤 미래가 올 것인가(possible future)’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트렌드(trend)’ 분석이라고도 하는데, 흔히 기업들이 이러한 미래분석에 초미의 관심을 갖고 있다. 우리 대안교육 진영에서도 소위 ‘튀는 것’을 ‘대안적’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이런 부류의 대안교육 실천은 기존의 것과 ‘거리 둠’에 있어서는 성공했을지 모르겠지만, 사회의 영향력과 길항작용 할 수 있는 ‘힘’이 처음부터 결여되어 있음은 물론, 거시적으로도 기업이 주도하는 ‘부의 창출 시스템’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원하는 미래’에 기초해서 미래사회 변화에 대응하는 방식이다. 대안교육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미래사회에 대해서 반드시 관심을 갖되, 우리가 ‘원하는 미래(preferable future)’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예측되는 미래’를 분석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는 점은 미래사회 변화를 주도하는 세력이 갖고 있는 ‘트렌드’ 분석 능력을 따라잡는 데 그치지 않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가 녹아난 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전략을 부단히 강구한다는 것이다. ‘예측되는 미래’ 분석에서는 ‘부의 창출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할 것인지가 관심의 초점이지만, ‘원하는 미래’ 분석에서는 ‘부의 창출 시스템’과 ‘생존 시스템’ 간의 조화로운 균형을 어떻게 이룰 것이며, 그 과정에서 교육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가 관심의 초점이 된다. 그리고 여기서 대안교육의 ‘대안성’은 그 ‘대안’ 속에 ‘원하는 미래’를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 내재되어 있는가 여부로 결정된다.
전망(vision) = 원하는 미래(예측되는 미래 + 지향하는 가치) + 실현 능력
전망은 미래에 대한 단순한 계획과는 다르다. 전망은 미래를 예측하고(예측되는 미래), 그렇게 분석된 미래 조건에서 지향하는 가치가 녹아난 사회(원하는 미래)를 실현할 수 있는 전략을 세울 수 있어야 하고, 실제로 그런 실현 능력을 갖췄을 때 비로소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대안교육은 기존 교육의 ‘대안적 전망’이어야 한다.
4. ‘앎’과 ‘삶’의 통합의 ‘대안성’ 논의
‘앎’과 ‘삶’의 결합과 분리, 통합의 과정은 시대변화의 특성과 그 궤를 같이한다. 앨빈 토플러는 시대변화를 ‘부(富)의 창출’이라는 관점에서 세 종류의 물결로 묘사하였는데, 그 각각의 물결에서 ‘앎’과 ‘삶’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변화를 겪는다:
• 농경사회(제1물결): 앎과 삶과 일의 미(未)분리 상태
• 산업사회(제2물결): 삶터와 일터의 분리 → 앎과 삶이 멀어짐 → 삶과 앎의 통합 필요
• 지식기반사회(제3물결): 일터가 앎터와 삶터를 흡수 → 삶터(생존 시스템)와 일터(부의 가치 창출 시스템)의 조화로운 공존이 필요
앨빈 토플러는 「부의 미래」에서 인류가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부(富)’의 개념이 생겨났고, 그러한 부를 창출하는 시스템의 핵심 엔진이 농경사회(제1물결)에서는 토지이던 것이 산업사회(제2물결)에서는 에너지로, 그리고 지식기반사회에서는 다시 ‘지식’으로 바뀐다고 설명한다. 이렇듯 부 창출 시스템의 핵심 엔진이 에너지에서 지식으로 바뀌는 지식기반사회를 달리 표현하면 결국 “앎의 재생(rebirth of learning)”, 혹은 “제2차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앎(knowledge)’이란 “인간이 중심이 되어 자연을 인식하고, 인간을 인식하며, 심지어 신(神)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식기반사회에서의 성패는 결국 앎의 주체로 등장한, 혁신과 변화의 가장 중요한 자원으로서의 ‘인간’에 달려있는 것이다. 최근 경제 선진국들이 하나 같이 평생학습, 그 중에서도 특히 인적자원개발(HRD: Human Resource Development)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부의 창출 시스템’은 농경사회 이전 사회들에서는 없었다. 농경사회에서부터 ‘부의 창출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해서 점차 그 영향력을 확대해가다가 산업사회가 발전할수록 두 시스템 사이의 균형이 심하게 손상된다. 그리고 이러한 불균형 상태에서 ‘앎’은 과도하게 ‘일’을 위해 기능하는 반면, ‘삶’과의 연계는 갈수록 옅어져만 간다.(위의 그림 참조) 대안교육 진영이나 가톨릭학교교육이 ‘앎’과 ‘삶’의 유기적 통합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연유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부의 창출 시스템’과 ‘생존 시스템’의 불균형이 아니라 ‘앎’과 ‘삶’이 각각 ‘일’ 영역(부 창출의 핵심 영역)의 영향력 안에 완전히 갇혀서 서로가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전례 없이 희박해지는 상황이 예측되는 세계화․지식기반사회에서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방식처럼 교육과정이나 교육내용, 교육방법의 개선 등 교육 영역 안에서의 노력만으로는 결코 ‘앎’과 ‘삶’의 통합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5. ‘앎’의 적용의 실패와 ‘앎’ 자체의 실패
그러면 기존의 대응 방식에서 무엇이 문제인가? 지금까지의 대응 방식은 ‘앎’의 ‘삶’에서의 적용 실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현대문명은 인류의 창조적 지식 생산과 그렇게 생산된 지식의 다음세대로의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전달, 계승 과정을 통해서 이룩되었다. 그리고 교육은 그 전달체계에서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해왔다. 그런데 현대문명이 위기라고들 한다. 이는 인류가 생산한 지식이 인간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혹은 집단), 그리고 자연에 대해서 선용(善用)되기보다는 악용(惡用)되어 왔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흔히 ‘지식’을 “우리를 둘러싼 혼돈에 정신적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출현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파커 파머(Parker J. Palmer)는 “인간과 동물을 구별 짓는다는 바로 그 지식이 오히려 인간 세계를 자연 세계보다 훨씬 더 비인간적이고 훨씬 더 야만적인 곳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라고 회의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오늘의 현실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현대 지식의 실패는 일차적으로는 윤리의 실패 즉 아는 것을 적용하는 문제에서 실패한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것은 지식의 좀 더 깊은 원천과 열정을 인정하고 추구하지 못하고, 우리의 지식이 창조하는 관계들-자기 자신, 이웃, 전체 유․무생물 세계와의 관계-에 사랑이 거하도록 하지 못한, 앎 자체의 실패”라는 것이다. 그러면 지식의 좀 더 깊은 원천은 무엇일까?
이 문제에 대해서 파커 파머는 우리가 ‘지식(knowledge)’을 가치중립적 재료, 즉 ‘사실(facts)’에서 시작한다고 가정함으로써 지식의 기원 문제를 무시해왔는데,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 한, 중요한 것은 ‘가치중립적’인 ‘사실’을 어떻게 사용하고 적용하는가 하는 문제이지, 우리의 지식이 어디서 비롯하는가는 별 문제가 안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관(知識觀)에 기초한 교육은 획득한 지식의 사용에 대해서는 그저 가끔씩 하는 ‘정신교육’ 혹은 ‘가치관교육’을 통해서 기술자나 기업가, 정치가 등과 같이 ‘사실’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소위 윤리나 도덕규범으로 둘러싸는 방식으로 그들의 열정이나 목적을 제어하는 정도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지식’이라는 것은 자체의 도덕(morality)을 갖고 있다는 사실, 즉 가치중립적이 아니라 가치내재적(價値內在的)이기 때문에, 교사가 수행하는 ‘가르치는 일’에는 단순히 교육하는 사람 자신이 ‘아는 것’을 그것이 필요할 것이라고 가정되는 학생들에게 ‘지식’을 제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전달되는 지식과 함께 자신의 ‘앎’의 인식체계와 특성도 함께 전달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흔히 데이터라고 하는 것은 소위 ‘사실들(facts)’의 집적과 분류 과정을 거쳐서 생산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사실들이 그대로 다 데이터로서의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똑같은 ‘사실들’을 가지고도 사람에 따라서 서로 다른 데이터를 가질 수 있는데, 이럴 수 있는 이유는 ‘사실들’이 ‘데이터’로 전환되는 과정인, ‘사실들’에 대한 선택․분석․해석 작업은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의 인식체계에 내재하고 있는 가치체계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치체계는 그 사람의 ‘학습’과 ‘경험’에 기초한다. ‘데이터’가 ‘정보’로, ‘정보’가 ‘지식’으로 전환되는 것도 이와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이처럼 정보와 지식의 생산 과정에서 그 과정을 주도하는 사람의 인식체계와 가치체계의 특성이 그 지식 안에 스며들기 때문에 ‘지식’은 결코 가치중립적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파커 팔머가 강조한 ‘앎’ 자체의 실패 못지않게 ‘앎’의 적용에서의 실패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교사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흔히 담당 교과에 대한 전문 지식이라고 답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담당 교과에 대한 전문 지식은 ‘기본’인 것이지 ‘핵심’이라는 단어는 적절한 수식어가 될 수 없다. 가르치는 사람이 갖춰야 할 핵심 능력은 ‘미래 예측 능력’이다. 이때 ‘미래’는 ‘경향(trend 혹은 possible future)으로서의 미래’가 아니라 ‘원하는 미래(preferable future)’를 말한다. 교사는 무엇보다도 ‘원하는 미래’가 있어야 하고, 그 미래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사회변화의 ‘경향’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전망(vision)’이란 그저 ‘계획(plan)’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원하는 미래가 있고 그러한 미래를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의 실천 의지’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이러한 해석에 기초해서 판단하면, 미래에 대한 대안적 전망을 결핍한 교사는 ‘앎’의 적용에 있어서의 실패, 즉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의 실패를 범하게 된다. 이런 ‘실패한’ 교사는 학생들이 ‘앎’과 ‘삶’을 통합할 수 있도록 의미 있는 도움을 줄 수 없다. 그런데 우리가 익숙해 있는 ‘표준적인 학습 패러다임’에서는 ‘앎의 적용에서의 실패’가 극복될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 ‘앎’ 자체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학습자가 가치내재적인 지식과 맺는 관계의 질이 바뀌어야 하는데, ‘표준적인 학습 패러다임’에서는 이미 남에 의해서 ‘해석된 지식’을 습득, 축적하는 것이 학습이기 때문에 학습과정에서 지식을 창조적으로 재생산하는 일은 거의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해석하는 법’을 학습하도록 하는 ‘대안적인 학습 패러다임’은 지식의 ‘기원’에 창의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기 때문에 ‘앎’ 자체와 ‘앎’의 적용에서의 실패를 교정할 수 있는 기회를 창출하며, 그럼으로써 ‘앎’과 ‘삶’의 통합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6. ‘앎’과 ‘삶’의 통합,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를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전략이 가능하다고 본다. 지식기반사회에서 학생들이 ‘앎’과 ‘삶’을 통합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식론적으로 ‘종합’할 수 있는 사고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야 하며, 그러한 학습이 ‘대안적 패러다임’ 맥락에서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1) 분석(分析)에서 종합(綜合)으로
“…… 정작 필요한 일은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종합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심층적인 변화들을 상호 연관 관계 속에서 인식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변화의 속도가 빨라져 우리와 시간의 관계가 변화하면 일부 지식의 무용화는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주위에 산재하는 무용지식은 점차 쌓여만 간다.”
“…… 이전에 관련이 없던 아이디어와 개념, 데이터와 정보, 지식을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할 때 상상력과 창의력이 생겨날 수 있다. 지식 노동자들은 폭넓고 다양한 개인의 경험과 노하우를 끌어 모아 일시적이면서도 새로운, 기존과는 다른 유추 방법을 사고와 의사결정 체계로 가져올 수 있다. 그동안 장기적이고 과도하게 전문화된 지식으로 인해 잃어버린 것들을 새로운 시스템을 통해서 향상된 창의력과 상상력을 보상받게 될 것이다.”
창조적 사고는 모든 분야를 아우르고 통합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그런데 전문화 추세가 가속화되면서 지식은 오히려 파편화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참으로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지만 정작 그것들의 기원이나 의미가 무엇인지,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거의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전(前)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이었고 현재 동화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진경은 우리 사회에서 지식에 대한 ‘종합적(綜合的)’ 접근의 중요성과 시급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요즘 ‘통합논술’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정말 웃긴 거죠. 고등학교에서 공통과학을 가르치는데, 교과서를 보면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이 1/4씩 들어가 있어요. 과학의 주요 개념을 통합적으로 가르치는 게 아니라 네 과목을 그냥 기계적으로 붙여 놓은 거예요. 어느 과목의 비중을 조금이라도 줄이면 난리가 납니다. 대학 교수들의 이권 싸움이 초중등교육을 왜곡시키는 데까지 이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통합과학’ 교육과정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대학이 ‘통합논술’로 아이들을 뽑겠다는 거예요. 정말 웃긴 일이죠. …… 좋은 애니메이션을 만들려면 그림만 잘 그려서는 안 되고, 광범위한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고, 세상을 보는 깊은 안목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 대학이 이런 부분에서 아주 취약합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만화학과 학생들에게 인문학, 신화를 가르쳐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 전반이 그런 요구를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에요. …… 통합적인 시야나 식견이 없으면 창조적인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 일반교육이든, 대안교육이든 교육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 사회의 문화적 역량과 성숙 정도를 넘어서기 어렵습니다. …… 대학이 분과학문의 틀을 고수하면서 기득권 유지에 골몰하는 한 해결책이 없습니다. …… 청소년들의 변화가 학교의 위기를 초래하는데 이 문제는 교육학만으로는 풀 수 없습니다. 현실의 중요한 문제들은 어떤 것이든 사회학, 경제학, 인류학 등 통합학문적인 접근을 조직해내지 않으면 풀 수 없습니다. 이런 문제를 풀 수 있는 시스템이 생기면 현실에 필요한 콘텐츠를 생산하는 힘도 생길 겁니다. ……”
위의 인용문은 선진국의 명문 대학들이 최근 하나같이 기초학문을 강조하는 까닭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21세기는 어떤 새로운 지식이라도 손쉽게 습득할 수 있는 이른바 ‘수학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즉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소양을 고루 갖춘 통섭형 인재를 원하기”(최재천․주일우, 2007: 304)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예로, 1978년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하버드대학교의 핵심교육과정(Core Curriculum)이 2007년에 새롭게 개정되어 2009년부터 새로운 핵심교육과정이 시행된다. 그런데 그 핵심 목표가 “지식의 내용 자체보다 지식을 탐구하는 사고의 방법을 교육하는 것”(1978년)에서 2009년부터 적용될 핵심교육과정은 “각종 기초학문을 실제 삶의 문제들과 연계하여 통섭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개편되었는데, 하버드대학교의 이러한 핵심교육과정 개편은 21세기 지식의 통섭 시대에 통섭형 리더십을 갖춘 인재를 교육하겠다는 의지의 반영이라는 것이 사회생물학자 최재천의 설명이다. 또한 호주는 얼마 전 ‘Edu-Vision 2020’을 발표했는데, 그 속에는 2020년에는 호주의 국정교육과정으로 국어, 수학, 과학, 시민교육(Citizenship Education) 등 네 과목으로 통폐합하겠다는 구상이 담겨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은, 지식에 대한 종합적 접근은 사실 제도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제로는, 분절되고 파편화된 지식 중심의 학습이 초래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새로운 방식으로 지식을 재통합하고, 이 통합을 이끌어낼 수 있는 신(新)르네상스인을 양성할 때 이겨낼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에서, ‘사유하는 교사’는 바로 이 신(新)르네상스인의 정체성을 공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2) 사유하는 교사, 사유하는 부모로 거듭나기
(1) 사유하는 교사
우선 사유하는 교사의 모습은 어떨까? 아마도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다.
• 창조적으로 상상하고 성찰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머리
a mind with creative imagination and reflective thinking
• 미래 사회를 예측할 수 있고 분별력 있는 눈
forecasting the future and discerning eyes
•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만드는 미소
a communicative smile
• 남의 이야기와 의견을 경청하는 귀
receptive ears
• 학생들의 애환을 함께 고민하고 감싸 안을 수 있는 따뜻한 손
sympathetic hands for solving difficulties
• 상황을 단번에 간파할 수 있는 섬세하고 민감한 코
a sensitive nose to smell the situation
• 학습을 촉진시키는 데 필요한 교수법적 이론과 방법들
methodological tools for encouraging learning
• 홀리스틱한 접근을 할 수 있는 신발
shoes for holistic approach
위의 그림은 ‘사유하는 교사’의 핵심적인 자질과 능력들을 시각적으로 이미지화한 것이다. 그러면 이 정도면 충분한가? 아직도 좀 더 정언적인 개념 정립이 필요한 듯해서 미국의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 강좌 ‘클레멘트 코스’의 창시자 얼 쇼리스(Earl Shorris)에게 성찰적 사유능력이 있는 교사에 대한 명확하고 간결한 정의를 부탁을 했고, 아래의 번역 글이 그가 보내온 답이다:
“위스콘신 주(州)에서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 강좌에서 강의하는 아우어바하(Auerbach)라는 박사가 있습니다. 아우어바하 박사 체구는 자그마한데, 그녀의 얼굴은 마치 달콤함과 열정이 함께 뒤엉켜 쏟아질 것 같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습니다. 그녀는 잘 웃었고, 사람들과 서로 부대끼고 안아주는 것의 힘을 믿는지라 학생과의 거리감이 전혀 없었습니다. 학생들이 힘들어 하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마치 자기의 일인 양 함께 힘들어하고 어려움을 같이 나눴습니다. 그녀는 학생들을 잘 대해줬고, 학습에서도 뒤쳐져서 도중하차하는 학생이 없도록 배려했습니다. 그래서 아우어바하 박사의 교실은 마치 하나의 자그마한 공동체와 같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교수와 학생 구별 없이, 그리고 학생끼리도 ‘대화’를 통해서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배려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교실에서는 모든 학생들이 조금만 지나면 ‘자유함’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은 말하고 싶을 때 거침없이 자유롭게 발언하였고, 글로 표현할 때는 자기 마음의 깊은 곳까지도 담아낼 정도가 되었습니다. 물론 문법도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고요. 때때로 함께 시를 읽기도 하는데, 학생들은 자기의 고통스런 삶을 드러내는 구절을 만나게 되면 엉엉 울기도 합니다. 하지만 수업의 대부분 시간은 웃음과 즐거움이 넘쳐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클레멘트 인문학 과정에서 가르치는 교수들 중에서 정말로 훌륭한 분들의 공통적 특성은 하나같이 성인학습자를 자기와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하는 ‘능력’을 가졌다고요.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는 ‘인간’은 상처받을 수는 있으나 결코 패배하지 않는, 그래서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뭔가 이뤄낼 수 있는 힘(power)을 가진 사람입니다. 좋은, 훌륭한 성인교육교사는 아무리 사회적․정치적 취약계층이라고 하더라도 자기의 성인학습자들이 끝내는 역경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을 가진 ‘인간’임을 신뢰하고, 그들 안에 잠재된 그 힘이 꽃필 수 있도록 그들과 기꺼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오랜 세월 동안,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많은 다양한 학습자를 만나고 교육해 온 얼 쇼리스가 던져준 위의 ‘비유적’ 대답에는 성찰적 사유능력이 있는 교사가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하는 정언적(定言的) 개념 정립도, 일반화된 이미지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대답으로부터 ‘사유하는 교사’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귀납적으로 유추해낼 수는 있다. 그는 어쩌면 우리들에게 성인교육교사를 정언적으로 개념 정립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 그리고 설사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를 반문하는 듯하다. 사실 데카르트식 교수법에 익숙해있는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일반화된 이론’이 중요하고 편하게 느껴지겠지만, 실제 교육현장에서는 일반화된 이론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어느 학생 한 명의 삶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사유하는 교사’가 어떤 자질과 능력을 갖춘 사람인지 분명하게 설명해주는 ‘이론’이 필요한 사람은 기껏해야 교사 자신일 뿐이며, 막상 우리의 학생들은 그런 ‘이론’으로 무장된 사람이 아니라 ‘아우어바하 박사’를 필요로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2) 사유하는 부모
사유하는 교사와는 달리 사유하는 부모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는데, 이는 부모가 성찰적 사유 능력을 갖추면 자녀의 인성과 품성에는 긍정적이겠지만, 결국 자녀의 사회적 경쟁력은 떨어져서 낙후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에서 주로 연유한다.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불안과 관련하여 하버드대학교 경제학과의 두 젊은 경제학자인 스티븐 레빗과 스테펀 더브너(Steven D. Levitt and Stephen J. Dubner)가 행한 재미있는 연구가 있다. 그들은 경제학을 ‘우리가 원하는 이상적인 세상을 대표한다’는 윤리학과 대비하여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적인 세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들에 따르면, 경제학은 “측정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학문의 상위에 위치하며, 두서없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정보를 신뢰성 높게 평가할 수 있는 강력하고 융통성 있는 도구로 구성되어 있어, 한 요인이 미친 영향 혹은 전체적인 결과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다음의 몇 가지 기본 전제에 기초하여 기존과는 다른, “아주 특별한 시각”으로 경제를 바라본다면, 경제학이 사용하는 도구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다양한 주제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첫째, 인센티브(incentive)는 현대의 삶을 지탱하는 초석이다. 그리고 인센티브를 이해하는 것, 혹은 그것을 탐색하는 것이야말로 폭력범죄에서 스포츠 부정행위, 온라인 데이트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모든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다.
둘째,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사회 통념 가운데는 잘못된 것들이 많다. 사회 통념은 대개 매우 교묘하게 만들어지기 때문에 진실을 꿰뚫어보는 일이 악마의 손을 빌려야 할 정도로 어렵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셋째, 전혀 예상치 못한 극적인 결과는 흔히 거리가 멀고 미묘한 요인을 원인으로 한다. 수수께끼의 해답이 항상 눈앞에 놓이는 것은 아니다.
넷째, 소위 ‘전문가들’(범죄학자에서 부동산 중개업자에 이르기까지)은 정보의 우위라는 강점을 자기 자신의 아젠다(agenda)를 위해 사용한다. 그러나 인터넷 시대에는 ‘정보의 우위’가 매일매일 감소하기 때문에 이들은 스스로의 게임에서 패배할 수도 있다.
다섯째, 무엇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를 알면 복잡한 세상이 훨씬 단순해진다. 혼란과 모순의 껍질을 벗겨낼 수 있는 도구로 숫자의 힘을 능가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적절한 방식으로 데이터를 파악하고 분석하는 방법을 배우면, 그 전에는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수수께끼들까지 풀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한 사례로, 학교 성적과 상관관계가 있는 ‘부모 요소들’에 대한 ‘상식’과 실제 데이터가 말해주는 것이 서로 차이가 있다고 레빗은 말한다. 레빗의 분석에 따르면, 상관관계가 있는 요소와 상관관계가 없는 요소는 다음과 같다:
• 상관관계가 있는 요소들
부모의 교육 수준이 높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다.
엄마가 첫아이를 출산한 나이가 30세 이상이었다.
아이의 출생 당시 몸무게가 적었다(저체중아였다).
아이의 부모가 집에서 영어를 쓴다.
입양된 아이다.
부모가 PTA 활동을 한다.
집에 책이 많다.
• 상관관계가 없는 요소들
가족 구성이 온전하다.
최근에 주변 환경이 더 좋은 곳으로 이사했다.
아이가 태어나서 유치원에 다니기까지 엄마가 직장에 다니지 않았다.
아이가 헤드 스타트에 다녔다.
부모가 아이를 박물관에 자주 데리고 간다.
아이를 정기적으로 체벌한다.
아이가 TV를 많이 본다.
부모가 거의 매일 아이에게 책을 읽어준다.
레빗은 상관관계가 있는 요소 목록은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를 묘사”하고 있고, 상관관계가 없는 목록은 “부모가 ‘아이에게 해주는 일’을 묘사”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즉, “아이를 박물관에 데려가든, 체벌을 가하든, 헤드 스타트에 보내든, 자주 책을 읽어주든, TV에 빠져 있게 하든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이며, “교육 수준이 높고 성공적이며 건강한 부모의 아이가 학교 성적이 높은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 결과는 “현실적으로 자녀 양육 기술이 지나치게 높게 평가되고 있다”는 시사점을 준다. 물론 부모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의 대부분은 이미 오래전에 결정되어 버리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녀 양육 책을 집어 드는 그 시기는 이미 너무 늦은 상태”라는 사실을 실제 데이터가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적절한 데이터 분석 방법을 통하면 부모로서 ‘무엇을 하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며,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하는 점이 자녀의 학업 성적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는 것이 레빗의 주장이다. 즉, 부모의 ‘사람됨’이 궁극적으로는 자녀의 학업 성취와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부모의 ‘사람됨’을 어떻게 질적(質的)으로 향상시킬 것인가? 결국 성찰적 사유 능력이 있는 부모가 소위 말하는 ‘자녀의 성적을 높여주는, 경쟁력 있는 부모’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젯밥에만 관심을 가지고 ‘흉내’만 내서는 결코 ‘사유하는 부모’가 될 수 없다. ‘생각 없는 아이히만’을, ‘학식 있는 괴물’을 만들지 않겠다는 선(善)한 의지를 가지고, 자녀에게 가르치고 싶은 삶을 앞서 살아 보이려는 부모라면 ‘덤’으로 학업성적도 좋은 자녀를 기대해도 좋겠다.
첫댓글 좋은건 알겠는데 어렵고 넘 길다, 성찰적 사유능력이 있는 부모 좋네요... 좀 읽어보게 1장으로 쉽게 요약해서 올려주삼요.....
ㅋㅋㅋ 마쌤의 지적능력이라면 요약이 필요없을 듯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