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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되는 공동체를 이루라 (마18:15-20절)
어린아이를 통해 겸손을 배우며 소자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우치신 예수님께서 이제는 성도가 자신에게 범죄한 사람에게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조치를 취해야 하지만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는 단계적이고도 신중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잘못한 일이 생기면 본문을 가지고 징계를 하기도 하고 권면도 합니다. 그러나 이 교훈을 주시는 주님의 진정한 의도는 범죄한 형제에 대한 징계나 권면보다도 앞서 믿는 자의 하나 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즉 공동체의 하나 됨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남이 모여서 하나를 이룬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신혼여행에서 막 돌아온 신부가 목사님을 찾아와 기가 막힌 사연을 털어놓았습니다. 결혼 전에 한동안 사귀던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그 사람과는 결혼이 성사되지 않아 헤어지고 중매를 하여 지금의 이 남편과 만났습니다. 물론 과거에 대해 미련이 남은 것도 아니고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새 출발을 했는데 신혼 여행을 다녀오는 동안에 며칠 동안 하룻밤도 거르지 않고 밤마다 전에 사귀던 그 남자 친구의 꿈을 꾸었다는 것입니다. 꿈은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또 꿈을 꿉니다. 잠에서 깨어나고 보면 마음이 그렇게 비참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내가 왜 이러는가, 이래서야 고통스러워 어떻게 평생을 살아가겠는가 싶어 한심스럽고, 둘째는 곁에 있는 남편을 보기에 너무도 미안해서 못 견디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신부는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한집에 산다고 해서 하나가 아닙니다. 평생을 같이 살아도 그 부부가 남남일 수가 있습니다. 자식을 많이 낳았다 해서 그 부부가 한 마음, 한 뜻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불행은 그 원인이 하나 되지 못하는 데에 있습니다. 현대인의 비극이 “한 집에 동숙자는 있는데 가족은 없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남편은 기숙사생이니, 하숙생이니 하지 않습니까. 미국 사람들이 제일 많이 쓰는 말이 “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불행하고 고독해 하고 심지어는 절망합니까. 그것은 입으로 아무리 사랑한다고 말해도 인생이란 내 마음을 남에게 줄 수 없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즉 마음과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부작용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가운데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집에 계시고 우리 사업체에 계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배에 모시고 깊은 바다에 그물을 내려 보았으면, 그리하여 두 배에 넘치도록 물고기를 잡아 보았으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러나 그 일이 어렵지마는 않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그 비결을 가르쳐 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가르침은 너무나 실제적이고도 심각한 내용입니다.
*마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내 이름으로” 라는 헬라어 의미는 “내 이름과 관련해서” 내 이름 안에서“ 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하나가 되기만 해도 내가 이미 그곳에 있다고 하십니다. 부모와 자식이 예수 이름 안에서 하나가 될 때 그곳에 주님은 함께 계십니다. 남편과 아내가 예수 이름 안에서 합심하여 살아갈 때 주님은 그들과 함께 동행해 주십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하나가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와를 이끌어 오시고 두 사람을 만나게 하셨을 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입니다. 두 사람이 하나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만나고 같이 살아갑니다. 그때 두 사람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다 노출시켜도 부끄럽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어찌 옷을 벗은 것만을 말하겠습니까. 자신들의 모든 내면의 세계를 다 내어놓아도 편안한 상태, 즉 마음으로 깨끗하게 벗은 상태가 바로 에덴이요, 낙원입니다. 여기에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두 생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한 마음을 이루고 한 몸을 이룰 뿐입니다.
인생은 어차피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인간관계 속에서 태어납니다.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모가 정해지고 자녀가 정해집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좋던지, 싫던지, 살다가 죽습니다. 그러기에 화목이라는 바른 관계가 나를 행복하게도 하고 문제를 해결해 주기도 합니다.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은 복잡합니다. 살아가기가 쉽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할 수 있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하나 되려고 노력한다면 이 세상은 한 번 살아 볼만한 곳입니다. 낭만도 있고 멋도 있습니다. 개척하고 도전하고 겨루어볼만한 곳입니다. 슬픔과 좌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쁨도 행복도 함께하는 곳입니다.
*마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사람이 합심하여”--합심이라는 단어 헬라어 ‘쉼포네오’ 는 함께 어우러져 멋진 조화를 이루어낸다는 뜻입니다.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오케스트라 연주를 하는 교향악을 “쉼포니” 라고 하는데 이 쉼포니가 바로 쉼포네오 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각각의 악기는 그 소리가 다르고 음정이 다릅니다. 그러나 지휘자의 지휘에 맞추어 각자의 아름다운 소리를 낼 때에 그것은 화음이 되어 멋진 교향곡을 연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만남도 이와 같습니다. 어떤 기계적이거나 물리적인 만남이 아니라 순전하게 영적인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신령한 가운데 영혼과 영혼의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얼마 전에 저의 고향 친구가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천주교에 다니는 친구인데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자기에게 영혼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이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사람에게 영혼이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에 대해 알고 있을까요. 이 영혼의 만남이 없으면 우리는 영원히 하나 되지 못합니다. 두 사람이 합심한다는 것은 단순히 두 사람의 진실한 마음의 일치와 조화를 말합니다. 이것은 유일하게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많은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 이웃과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과 하나 됨의 역사 없이는 예배도 헛것이요, 예물을 드리는 것도 소용이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은혜가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임재와 하나님의 은혜의 임재를 경험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그러면 두세 사람이 하나 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첫째: 온유하고 겸손하여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서로 만나야 합니다.
*마18: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우리 주위에 돈 많은 사람을 만나 보면 그때마다 느끼는 점이 하나 있는데 어느 모로 보나 돈을 많이 벌 사람 같지 않은데 부자가 된 것입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 사회에서 큰일을 하는 사람에게도 자주 그런 인상을 받습니다. “이토록 천진난만하고 촌뜨기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돈을 벌었을까, 어떻게 그런 큰일을 할까,” 싶은 것입니다. 알고 보면 그 사람들은 그저 타고 난 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깨끗하고 천진하고 때가 묻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순수합니다. “아!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쓰시는구나. 어린아이와 같은 이런 사람을 높이는구나” 이것을 피부로 직접 느끼는 것입니다. 변변치 않는 일을 하면서도 도도하고 교만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사람은 십중팔구는 실패합니다. 평안도, 능력도, 주님이 주시는 축복도,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일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는 고관이요, 바리새인입니다. 도도한 사람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 인사할 때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가 없음이니이다.” 라고 긴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니고데모야 사람은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우리 가정을 봅시다. 남편과 아내가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대하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부부인데도 아직도 교만하고, 체통을 세우고, 체면을 찾고, 위신을 세우려 든다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부부 사이인데도 아직도 못 믿고 서로 속이고, 의심하고,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살아간다면 그 가정은 가정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하여 어린아이가 됩시다. 온유하고 겸손하여 하나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둘째로: 회개하는 곳에 하나 됨의 역사가 있습니다.
*마18:15-17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참으로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간절히 권면하라 하시더니 나중에는 잊어버리라 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오묘한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권면하고 위로하고 회개하게 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머지 일은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내가 할 일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열심히 화해를 청하라 하십니다. 그래서 용서란 말은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① 지난날을 잊어주는 것입니다. ② 원망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③ 돌아올 때까지 인내해 주는 것입니다. ④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금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거기에 하나 됨의 역사가 있습니다. 모였다고 해서 하나가 아닙니다. 같이 산다고 해서 하나가 아닙니다. 진정한 하나는 서로가 회개하는 데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께로 마음을 열고 진리로 마음이 향할 때 입니다. 우리는 이웃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범죄한 형제를 권고한다는 것은 그를 향한 깊은 관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관심입니다. 사랑하는 자에게는 자연히 눈길이 끌립니다. 그의 행동 하나, 그의 말 한 마디에 신경을 쓰며, 그의 삶 전체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내 이웃의 즐거움에 같이 웃고, 내 이웃의 슬픔에 같이 울며, 내 이웃의 희생에 박수를 보내고 내 이웃의 범죄를 정중히 꾸짖어야 합니다. 권면은 조용히 시작되어야 하고, 사심을 버리고 진리에 바로 서서 행하는 권면이어야 합니다. 자녀에게 회초리를 드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아픈 마음으로 권면해야 합니다. 권면에 대해 야고보 기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약5:19-20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회개하지 않는 자를 주님은 ‘마귀의 자녀’라 하지 않고 ‘이방인과 세리 같이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 종류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마귀가 영원히 회복될 수 없는 멸망의 자식이라면 이방인과 세리는 언제든지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다시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신 것입니다. 참된 권면은 징계 후에도 그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즉 그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고 보살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막힌 담을 헐어버리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마음이 하나를 만듭니다.
*마18:18-19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주님은 성도에게 주어질 하늘과 땅의 권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종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자유자로 여겨 주셨고, 자녀로 삼아 주셨으며, 사역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권리를 위임해 주셨고 우리의 결정을 존중해 주셨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향해 ‘일어나라.’고 명한 베드로와 요한의 결정을 존중해 주시고 그 앉은뱅이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존중해 주시고 우리의 생각을 존중해 주시며 우리의 결정을 존중해 주십니다. 아담이 부르는 이름을 그 동물의 이름으로 삼아 주셨듯이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결정은 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쟁할 때에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면 승리라는 하늘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가나안 전쟁 때에 여호수아가 하늘을 향하여 선포할 때에 태양과 달이 그 자리에서 운행을 멈추는 하늘의 결정이 뒤따른 것입니다. 물론 그 결정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결정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하고 죄악이 없는 정결한 영의 결정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하늘의 응답을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아이성 정복에 실패한 여호수아와 같이, 바울의 능력을 흉내 내려던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와 그의 일곱 아들과 같이 그 결과는 패배와 실패 좌절과 절망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성취된 이후로 하나님의 일의 결정은 땅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최종 결정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최종적인 심판과 판단은 주께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의 인정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위를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일은 합심하여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더불어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창조와 삶의 원리는 인간의 범죄와 함께 깨어졌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서로 돕는 자로 살아가지 못하고 서로 헐뜯고 불화하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이러한 반목과 불화를 제거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화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불화도 제거하셨습니다. 주님은 더 이상 불화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고 서로 합심하여 살아갈 때에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께서 이루게 하신다고 하시고 두세 사람이 모여 기도하는 곳에, 주님이 그들 중에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두세 사람이 함께 기도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함께 하나님을 바라고 찬송하는 것처럼 귀한 것은 없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내 이름으로” 라는 헬라어는 “에이스 토 오노마 예수” 즉 “예수 이름으로” 라고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에이스” 라는 말이 조금 어려운 말인데 “내 이름을 향하여” “내 이름을 위하여” “내 이름 때문에” 이런 뜻입니다.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할 이유가 없지만 예수의 이름 때문에 사랑합니다. 내가 저 사람을 용서할 이유가 없지만 예수의 이름 때문에 용서합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 참아줄 이유가 없지만 예수의 이름 때문에 참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사랑하고 용서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날 사랑하셨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위하여, 너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허물을 덮을 때 거기에 하나 됨의 역사가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반드시 성전에 모여야만 모임입니까. 우리가 누구와 어디서 모였던 주의 이름 때문에 모였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모였고 주님을 향하여 모인 것이라면 그곳에는 하나 됨의 역사는 있습니다. 이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기 있으리라.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주님의 임재의 조건은 이것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어린아이 같은 마음,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마음, 주의 이름을 높이며 기도하는 마음, 이 세 가지입니다. 이러할 때 우리는 상대와 하나가 되고 그 순간 주님도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싶습니까. 여러분 가정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항상 그리스도가 동행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사역지에서 주의 영광과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려면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 됨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야곱과 에서가 서로 용서하고 끌어안을 때 야곱이 한 말이 “내가 형님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 라고 고백한 것처럼, 형제가 서로 하나가 될 때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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