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시아 필 무렵
/신인순
눈부신 아침햇살이 알람이 울리기 전 잠을 깨운다. 습관적으로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진한 꽃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히는 곳으로 눈길을 돌리니 창문 바로 밑에 있는 작은 동산에서 바람에 몸을 맡긴 아카시아와 흰 쌀을 뿌려놓은 듯한 이팝나무가 어우러져 진한 초록 사이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서울로 이사 온지 몇 달이 지났지만, 무엇이 그렇게 바쁜지 아파트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서울에 나머지는 부천에서 일하기에 항상 시간에 쫓긴다. 전철로 왕복 5시간 정도 걸리지만 무릎이 아프지 않아 건강하게 다닐 수 있어서 즐겁고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 행복하다.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코앞에 이렇게 좋은 곳이 있었는데 먼 곳으로 나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오늘은 마음먹고 아침부터 향기에 취하게 한 꽃을 찾아가 보기로 한다. 아이가 학교에 가고 난 다음 모자를 쓰고 운동화 끈을 조여 맨 다음 집을 나선다. 아파트와 연결된 오솔길을 따라 동산에 오르다 보니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뭇잎들이 무성하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주위의 작은 나무들은 잎이 시들어 타들어 가지만 뿌리 깊은 나무는 끄덕도 하지 않고 싱싱한 잎사귀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 떡갈나무 옆의 아카시아도 셀 수도 없는 꽃송이를 매달고 살랑대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한가로이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렇지만 상상한 꿀벌 떼들은 보이지 않고 몇 마리의 일벌만 윙윙거리고 바닥에 떨어진 꽃잎에서 화분을 나르는 개미가 바삐 움직일 뿐이다.
오월의 어느 날 그날도 동네 어귀 밭두렁에는 아카시아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나무 밑에는 몇 개의 벌통이 놓여있고 수많은 일벌이 꿀을 모으기 위해 바쁘게 주위를 맴돌고 있다. 친구들과 아카시아 잎으로 점을 치거나 가위, 바위, 보, 게임을 하기도 하고 초롱같이 생긴 꽃받침을 때고 달콤한 꿀을 빨아 먹기도 했지만 직접 꿀을 따는 모습은 처음이다. 그물같이 생긴 모자를 쓰고 연기를 풍겨 주인을 쫓아낸 다음 꿀이 가득 찬 육각형 벌집을 꽂고 물레 같은 것을 빙글빙글 돌리면 밑에 놓인 통으로 꿀이 쭈르르 흘러나오다. 벌이 무서워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면서 침만 꿀꺽꿀꺽 삼킨다. 입술이 갈라졌을 때 엄마가 벽장에서 꿀단지를 꺼내 숟가락총에 조금 묻혀 발라주던 싸한 꿀맛이 저절로 생각난다.
우리 동네에 있는 초등학교는 한 학년이 한 반밖에 없는 전형적인 농촌학교다. 전교생은 삼백 명 정도이니까 요즘 학급수로는 2반 정도의 숫자는 되는 것 같다. 5학년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새로 오셨다.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훤칠하고 남자다운 모습의 내 이상형이다. 그때부터 키 큰 남자를 좋아했었나 보다. 원래 부끄러움이 많고 앞에 잘 나서지 못하는 내성적인 성격이라 자세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다가 살짝 고개를 들어 보는 순간 무엇을 훔치다 들킨 것같이 가슴이 뛰었다. 어제 언덕배기에서
꿀을 따던 아저씨가 아닌가! 부업으로 양봉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후 학교생활이 놀이동산보다 즐거운 장소가 되었다. 초임인 그는 시내에서 십리 길을 자전거로 통근하고 있었다. 수업이 없는 일요일은 어김없이 벌통이 있는 우리 동네로 사모님과 어린 아들을 데리고 온다. 선생님을 보고 싶은 마음에 집안일을 거들라는 엄마 말을 뒤로하고 발길은 어느새 동네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먼 발치에서 왔다 갔다 눈길을 기다리지만 눈치 없는 벌들만 부지런히 아카시아 숲을 누비고 있다.
중학교로 진학 후 나는 시내로 걸어서 선생님은 시내에서 우리 동네로 아침마다 마주치며 인사를 주고받는 등굣길은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쩌다 만나지 못하는 날은 온 종일 공부에 집중할 수 없어 벌통이 놓여있는 동산을 찾기도 했다. 그러다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 자전거를 탄 선생님이 모습을 감추었다. 궁금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여 수소문을 하던 중에 학교를 그만두고 벌통을 가지고 꽃을 따라 전국으로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아 아쉬움에 크게 실망했다. 몇 년 후 어떻게 알았는지 꿈에도 그리던 박 선생이 퇴근 시간에 맞춰 내가 다니는 직장으로 찾아왔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근처 식당으로 갔다. 들어가자마자 식당 주인에게 “이 아이가 내 제자인데 공부를 제일 잘했어요.” “지금 00에 근무하는데 내게 밥을 사주겠다고 하네요.” 아마 주인에게 내 자랑을 하고 싶었나 보다, 그 순간 얼마나 반가웠던지 어떻게 밥을 먹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향기가 바뀌었다. 아카시아 대신 밤꽃이 꿀벌을 부르고 있지만 역시 숫자는 많지 않다. 요즘 대량으로 꿀벌이 사라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러 가지 말이 많지만 살충제나 바이러스 기후 변화로 인해 따뜻한 겨울에 활동을 시작했다가 다시 추워지면서 벌통으로 돌아오지 못해 죽었다는 설도 있다. 벌들이 사라지면 과수나 채소 생산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옥수수나 벼 같은 곡물은 바람으로 수정할 수 있기도 하지만, 배나 복숭아 같은 과일나무는 꿀벌이나 곤충이 꼭 필요하단다. 생산을 늘리기 위해 농약을 살포하고 그것 때문에 꿀벌이 죽어 식량 위기까지 올 수 있다고 하니 ‘진퇴양난(進退兩難)’이다.
아카시아 꽃 따라서 온 선생님은 꿀벌이 사라진 것 같이 내 곁을 떠났다. 양봉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고생하다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가슴이 아려왔다. 얼마 전까지 가끔 꿈속에서 젊은 모습으로 나타나더니 지금은 너무 멀리 갔는지 찾아오지도 않는다. 오월의 아카시아 꽃이 시들어 떨어질 때면 더욱 보고 싶고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