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항일운동(光州學生抗日運動, 1929년)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시작되어 이듬해 3월까지 전국에서 벌어진 학생들의 시위운동이다. 3.1 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항일운동이다. 동학농민운동, 5.18 민주화운동과 함께 광주광역시가 압제자에 굴하지 않는 민중저항의 상징적 장소가 되게 한 사건이다.
1926년 11월 3일, 최규창의 집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왕재일과 장재성은 항일 학생 비밀 결사 성진회를 조직한다. 같은 학교 재학생 김광용, 정우채, 국순엽, 임주홍, 안종익, 최용호, 김창주 등과 광주농업학교 재학생인 정동수, 정남균, 정종석, 김한필, 문승수, 박인생 등이 참여했다. 성진회는 왕재일과 장재성 등 주요 인물들이 졸업하고 회원 한 명이 형사와 인척 관계인 것으로 드러나 해산한다.
1929년 6월, 유학을 마친 장재성은 성진회를 계승한 독서회 중앙본부를 결성한다. 같은 달 광주농업학교는 무등산에서, 광주사범학교는 일제 참배의례에 거부해 문을 닫은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 뒷산에서 독서회를 결성하고,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도 장재성의 여동생 장매성의 주도로 소녀회를 조직한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호남선 통학열차 안에서 일어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교 학생들의 충돌이 본격적인 항일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 3학년 학생 후쿠다가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인 박기옥과 이광춘 등을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였고 이를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가 달려와 항의했는데, 후쿠다가 "뭐냐 조센징주제에"라는 소리로 적반하장을 했고, 결국 박준채가 주먹을 날리면서 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은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중학 학생들의 패싸움으로 확산되었다. 그런데 일본 경찰은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을 편들고 조선인 학생들을 구타하였다.
당일 하교열차 내에서 박준채가 후쿠다에게 사과를 요구하자 후쿠다가 다짜고짜 박준채의 뺨을 치면서 학생들이 몰려들어 또다시 싸움이 벌어졌는데, 당시 열차에 승선했던 광주일보의 일본인 기자가 신분을 밝히면서 조선학생들의 일방적 잘못이라며 비난하고, 열차에 있던 다른 이들도 조선 학생들을 비난하기 시작했고, 결국 박준채와 친구들은 속으로 삭이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11월 3일. 음력 10월 3일 개천절, 성진회 창설 3주년, 그리고 메이지 유신을 기념하는 명치절이 겹치는 일요일. 일제는 학생들에게 일요일에 학교에 등교하고 신사를 참배할 것을 요구했다.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명치절 기념식에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고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10월 30일 사건을 편향되게 보도한 광주일보 사를 공격했다. 그러던 중 광주신사에 참배를 마치고 돌아가던 광주중학 학생들이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을 칼로 찌르는 사건이 발생한다.
수 명의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광주중학 학생들이 충장로에서 충돌했고, 광주중학 학생들은 광주동부소방서 방면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수십명의 광주중학 학생들이 교사의 인솔하에 야구방망이나 죽창 따위를 들고 광주역으로 가 하교하려는 한국인 학생들을 공격한다.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곧바로 달려갔고, 한국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의 싸움으로 광주시내는 개판이 된다.
집에 돌아가면 되는 일요일 정오인데도 학교로 돌아온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일본에 대항해 투쟁할 것을 논의한다. 시내 각 학교 학생들도 광주역에서의 사건에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투쟁에 동참할 뜻을 밝혔다.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고등학교 학생들은 괭이자루, 장작 조각, 목검 등으로 무장해 오후 2시경부터 행진가를 부르며 시내로 진출한다.
시위대는 '조선독립만세',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 '일제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고 애국가와 응원가를 부르며 우선 광주중학으로 향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소방대, 재향군인을 동원해 광주중학으로 가는 동문다리를 틀어막자 시위대는 충장로로 방향을 틀었다.
전남도청에 이르자 광주사범학교 학생 100여명을 비롯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와 수피아여자고등학교 학생들, 학생이 아닌 광주 시민까지 시위대에 합류한다.
3만여 명에 이른 시위대는 도립병원(전남대병원) 광장에까지 진출했으나 경찰의 저지로 방향을 돌려 광주천변을 행진하다 해산.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와 비상 연락과 부상자 입원 문제를 의논한 뒤 해산했다. 한편 광주시내의 일본인들은 시위대와의 충돌을 피해 가게 문을 닫고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항일운동의 물결은 광주 전역으로 퍼져 곳곳에서 가두시위가 일어나게 된다. 11월 12일, 독서회의 주도로 네 학교의 학생들과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대규모로 시위를 벌였다.
항일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이듬해인 1930년 3월까지 전국 320여개교에서 5만여명의 학생의 참여해 1462명이 퇴학, 3000여명이 퇴학 혹은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신간회에서는 김병로, 허헌 등으로 구성된 조사단을 파견하였다. 신간회의 도움은 이 사건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장재성은 끝이 좋지 않았다. 여운형 등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했으나 1948년 황해도의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해 사상범으로 수배되었고, 6.25 전쟁 발발 직후 북에 협조하는 것을 막으려는 경찰들에게 총살당한다.
직접적인 계기가 된 열차 희롱 사건의 당사자인 박준채 는 많은 학교들이 일제의 보복이 두려워서 중퇴 후 몇 주간 전학을 하지 못했으나 양정고등보통학교에 편입, 와세다대학에 진학한 뒤 졸업하여 조흥은행 목포지점의 은행원으로 시작하여 나주에서 주조장을 운영하다가 1960년부터 1988년 정년퇴직 때까지 조선대학교 법학대학 교수와 여대 학장, 대학원장 등을 지냈고, 이후 광주학생독립운동 동지회 이사, 광복회 회원 등으로 광주학생운동의 정신을 알리는 데 노력해오다가 2001년 3월 7일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1990년 광주학생항일시위의 점화자로 공훈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열차 희롱 사건의 당사자 중 하나인 #이광춘 역시 광주여고보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에 참가하였으며, 그 공훈이 인정되어 1996년 건국포장을 받았고, 2010년 4월 12일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187화에서 노구가 이것을 소재로 노인삼에게 거짓말을 하였다. 단,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에서는 박준채가 1975년에 사망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2001년에 사망하였다.
처음 이 운동이 벌어진 날인 11월 3일을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지정하고 있다. 본래는 '학생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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