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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3월20일 월요일
[(백)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수도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2사무 7,4-5ㄴ.12-14ㄱ.16
○ 제2독서 로마 4,13.16-18.22
† 복음 마태 1,16.18-21.24ㄱ
오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와 함께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로 모시고 공경하는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주님의 천사가 명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예수님을
기르는 일에 헌신하신 의로우신 성 요셉을 기리고, 그분의 믿음과 덕을
본받기로 다짐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보면 요셉 성인이 어떠한 분이신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약혼자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자 어떤 태도를 보입니까?
단호하게 법정에 세웁니까? 율법 학자들에게 고발하여 돌로 치게
합니까? 그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지요.
이런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 주님의 계획을 전해 줍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에 요셉은 전적으로
순명합니다. 당시 상황으로서는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웠고 받아들이기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입니다. 자기
생각대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의 전형이지요. 그러기에 하느님 말씀을 이 세상에 실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요셉은 가장 겸손한 사람의 전형입니다. 늘 예수님과 성모님의
뒤에서 말없이 헌신하였지요.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성모님의 남편으로서 동정을 지키며 얼마나 힘든 길을 걸었겠습니까?
그러기에 요셉은 믿는 이의 가장 뛰어난 표본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때로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을 많이 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늘
이를 신앙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고통과 시련은 '사랑'을 통해 극복됩니다.
2017년 가해 3월20일 월요일
[(백)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조상 다윗의 왕좌를 주시리라
(루카 1,32 참조)."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7,4-5ㄴ.12-14ㄱ.16
제2독서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였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4,13.16-18.22
복음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6.18-21.24ㄱ
<또는 루카 2,41-51ㄱ>
남편을 사고로 잃으신 어떤 자매님이 생각납니다. 뜻밖의 사고였기
때문에 얼마나 커다란 슬픔이었는지 몰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도 많이 원망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이렇게 외로움과 슬픔에
잠겨 있을 때, 같은 본당의 많은 형제자매님들께서 찾아와서 기도를
해주셨고 큰 위로를 주신 것입니다. 세상에 자기 혼자만 버려졌다고
생각했는데, 본당 형제자매님들의 사랑을 받다보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천사로 보였습니다.
그 후부터 이 자매님께서는 어떠셨을까요? 세상에 미운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다 소중한 사람이고 그래서 더욱 더 열심히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큰 기쁨을
간직하면서 힘차게 살 수가 있었지요.
뜻밖의 고통과 시련이 찾아오면 우리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원망을 하게 되고, 불평불만으로 세상을 살게 됩니다. 이
고통과 시련을 넘어서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에 있었습니다.
이 자매님께서 이웃의 사랑에 큰 힘을 얻어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처럼, 고통과 시련은 사랑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고 그 너머에 있는
기쁨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요셉 성인을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의
천사로부터 성모님을 아내로 맞이하라는 메시지를 들었을 때
어떠하셨을까요? 기뻤을까요? 아니면 괴로웠을까요? 아마 요셉
성인은 너무나 기뻐하면서 천사의 말을 따라 하느님의 계획을 따랐을
것입니다.
성경에도 나와 있듯이, 요셉 성인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가졌다는 마리아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기를 가졌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볼 때, 간음을 저지른 것처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죄 중에 있는 마리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행동이 되기에 남모르게 파혼해야 할 결정을 했던 것이지요. 사랑하는
마리아와 파혼해야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커다란
고통과 시련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그에게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이라는 천사의 명령을 받았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마리아에 대한 큰 사랑으로 인해 이 고통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사실 꿈을 꾼 것을 가지고 그대로 따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꿈에 전 재산을 팔아서 도박장에 가서 도박을 하라고 한다면
따르시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꿈에 아내로 맞이하라고 했다고 해서
그대로 따른다는 것은 큰 무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의
내용을 그대로 따른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고통과 시련은 ‘사랑’을 통해 극복됩니다. 이 사랑이 성자의 아버지가
되는 커다란 영광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이 멀리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비를 피할 곳, 외로울 때
읽을 책 한 권, 사랑하는 사람과 있는 것. 그런 것들이 행복을 만드는
거야(베티 스미스).
예수님과 성 요셉.
해와 달이 말씨름을 하고 있었다. 해가 말했다.
“나뭇잎은 초록색이야.”
달이 말했다.
“아니야, 나뭇잎은 은색이야.”
달이 또 말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잠만 자더라.”
그러자 해가 반박했다.
“아니야, 사람들은 언제나 바쁘게 움직여.”
달이 말했다.
“그럼 왜 땅이 그리 조용해?”
해가 다시 말했다.
“내가 보기엔 언제나 시끄럽던데 뭐가 조용해?”
그때 바람이 나타나 딱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하늘에 달이 떠 있을 때나 해가 떠 있을 때나 세상을 다녀봐서 잘
알아. 해가 세상을 비추는 낮에는 해가 말한 대로 세상은 시끄럽고,
사람들도 모두 움직이고, 나뭇잎은 초록색이야. 그러나 달이 세상을
비추는 밤이 오면 온 땅이 고요해지며 사람들은 잠을 자고, 나뭇잎은
은색으로 보인단다.”
작년부터 우리나라가 계속 시끄럽습니다. 이러한 원인을 만든
사람들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점점 더 커지는 큰 문제는 의견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각자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있는데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범죄로 이어지는 생각과는 다른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우선으로
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무시하면서 생기는 아픔이 정말로 큽니다.
하지만 해와 달이 본 각각의 세상이 틀린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
각자의 눈으로 바로 본 세상은 결코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어떨까요?
갑곶성지 영성센터장으로 있는 이우진 요셉 신부의 축일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3월19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불멸의 사랑
2017년 가해 3월20일 월요일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불멸의 사랑
요즘 정국이 하도 어수선하다보니 별의 별 웃기는 상황이 다 연출되고
있습니다.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는 말이 있습니다. 망둥이는
말려놓으면 꼬들꼬들, 고소하니, 맛있기라도 하지, 어찌 그리 분위기
파악을 못하시는지 헛웃음이 다 나옵니다. 이름 석 자만 들어도 저절로
스트레스 지수가 올라가게 만드는 분들, 제발 이제 그만 조용히
계셔주면 좋을 분들께서 ‘준비된 후보’ ‘적임자’ 운운하니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있는 상황입니다.
내뱉는 말 한마디 한 마디도 어찌 그리도 천박한지 모릅니다. 지도자에
걸맞은 품위 있고 상식적인 언어라고는 찾아볼 수조차 없습니다.
시정잡배들이나 뒷골목 조폭들도 쓰지 않을 그런 저속하고도 비열한
표현들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이 아무 생각 없이 툭툭
던지는 말은 즉시 독화살이 되어 선량한 국민들 가슴에 대못을 박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니 제발 부탁드립니다. 나라 걱정 해주시는 것은 고마우나 이제
나라 걱정은 수많은 애국 시민들과 평범한 후보들, 적어도 기본은 갖춘
후보들이 충분히 할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그 입들 좀 다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더 이상 나서기보다는 공기 좋은 곳에 가셔서 절대
안정을 취하시는 것이 모두를 위해 좋을듯합니다.
대한민국의 운명을 좌우할 중차대한 대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 모두 눈을 크게 뜨고 유심히 살펴봐야겠습니다. 국민들의
안위나 국가의 미래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들, 자기 호주머니 두둑이
채우는 데만 혈안이 된 사람들, 국민들을 거지발싸개 보다 못하게
여기는 사람들, 그간 한 것이라고는 가난한 사람들 더 곤경으로
몰아넣은 것 밖에 없는 사람들, 입만 열면 국민들 열 받게 만드는
안하무인·후안무치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요셉 성인의 생애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네 복음서 전체를 샅샅이
훑어봐도 요셉 성인 이름만 몇 번 등장하지 그의 입에서 직접 발설된
목소리는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사
현장을 지근거리에서 목격한 사람으로서 그의 역할은 중차대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철저하게도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그만큼 요셉 성인은 신중한 침묵의 사람이었습니다. 입이 무거운
과묵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실 말씀이 참 많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러니 저러니 불평 한 마디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고
또 순명했습니다.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니 아무 말 없이
맞아들였습니다.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이집트로 떠나라니,
역시 군소리 없이 길을 떠났습니다. 불평불만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습니다.
요셉 성인의 이런 철저한 침묵, 과묵함, 든든함은 구세주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크게 일조했습니다. 생각만 해도 든든한 동반자 요셉
성인이 있었기에 마리아도 짙은 안개 속 신앙여정을 충실히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잉태 이후 마리아가 넘어야 할 산은 끝도
없이 펼쳐졌습니다.
당혹해하는 부모에게 뭐라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었습니다. 불러오는
배를 부여잡고 따가운 이웃들의 시선과도 맞서야 했습니다. 만삭의
몸을 이끌고 나자렛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마굿간 탄생, 이집트로의 피신, 소년 예수님의 돌출 발언,
예수님의 출가, 그리고 들려오는 좋지 않은 소식들, 결국 십자가
죽음...
정녕 마리아의 한평생은 길고도 험난한 고행 길이었습니다. 때로
고독하고, 때로 시련의 가시밭길이었습니다. 때로 가야할 길이 너무나
아득해 그만 주저앉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마리아 곁에는 요셉 성인께서 언제나 든든한 보루요 언덕처럼
서 있었습니다. 다행히 마리아 옆에는 '나보다 더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던 요셉 성인이 언제나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와의 기이하고 특별한 '동거생활'을 해나가던 요셉 성인의
그녀를 향한 감정은 참으로 복잡 미묘했을 것입니다. 때로 사랑하는
약혼녀를 하느님께 '강탈당한'것에 대한 야속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때로 무거운 십자가를 홀로 지고 가는 마리아에게서 깊은
연민의 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때로 '지금 대체 내가 뭐하고 있는
건가?' 하는 자괴감에도 빠져들었을 것입니다. 때로 마리아를 향한
강한 부성애와 보호본능을 느끼기도 했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마리아를 마음 깊이 사랑했고
흠모했던 분이 요셉 성인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누구나 다 하는
통속적인 사랑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유효기간이 그리 길지 않은
인간적인 사랑도 아니었습니다. 그 사랑은 지고지순한 영적인 사랑,
헌신적인 신적 사랑, 아가페적인 불멸의 사랑이었습니다.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2017년 가해 3월20일 월요일(마태 1,16.18-21.24ㄱ)
지난번에 있던 본당에는 ‘은행나무 사거리’가 있습니다. 600년 이상 된
은행나무가 아직도 푸른 잎을 자랑하며 은행을 털어내고 있습니다.
길을 걸으면서 은행나무를 보곤 했습니다. 은행나무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건과 행사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시간도 지나가고, 사람들도 지나가고, 계절도 그렇게
변하는데 은행나무는 지금도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성질 급한 저는 절대로 그렇게 못할 것 같습니다.
70년 이상을 고향땅에 머물면서 시골의 선산을 지키시는 큰 집 형님이
있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다들 도시로 나갔고, 번듯한 직장을 구했지만
형님께서는 지금도 농사를 지으시면서 어쩌다 가끔씩 찾아오는
동생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십니다. 고향의 커다란 느티나무처럼
언제나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시는 형님이 있어서 고향 가는
길이 더욱 즐겁습니다. 주변을 보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아무나 할 수 없는 그런 일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동창들 중에는 오랫동안 도시빈민 사목을 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추운 겨울에도, 무더운 여름에도, 비가 오는 중에도 힘없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친구들입니다. 어쩌면 그 친구들이 오래된 은행나무
같고, 고향 선산을 지키시는 시골 형님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요셉성인은 큰 바위 얼굴처럼, 은행나무처럼, 고향 형님처럼,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동창신부처럼 사신 것 같습니다.
요셉 성인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약혼한 처녀 마리아가 결혼 전에
잉태한 것을 알았던 요셉 성인은 조용히 파혼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법대로 하면 요셉은 마리아를 상대로 고소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의 법은 무척 엄격하였기 때문에 마리아는 재판을
받고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셉이 기분대로 사는 사람이었으면 자신
앞에 놓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집에
찾아가서 한바탕 소동을 벌였을지도 모릅니다. 요셉 성인이 법대로
했다고 해도, 기분대로 했다고 해도 당시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명백히 마리아의 잘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를 고발하지도 않았습니다.
마리아의 집에 찾아가 한바탕 난리를 치지도 않았습니다. 말 할 수
없었던 마리아의 입장을 생각하였고, 조용히 파혼만 하기로
하였습니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커다란 배려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요셉은 이제 또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의로운 삶’을 뛰어넘어서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요셉은
꿈에서 가브리엘 천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잉태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역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 또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했습니다. 유명한 겟세마니의 기도입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잔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나사렛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중심에 놓고 살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 신앙은 은총을 주며, 그
은총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나의 뜻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때가 많습니다. 출세와 성공이 삶의 기준이 되곤 합니다. 왜
공부를 하는지를 생각하기 전에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고
이해되는 세상입니다. 돈이 삶의 중심이 되는 세상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 돈을 벌고, 돈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돈의 노예가
되어서 양심을 팔고, 사람을 속이고, 소중한 것들을 멀리합니다.
오늘 성 요셉 대축일을 지내면서 나의 삶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성 요셉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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