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7일 토요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요한 사도는 열두 사도의 하나이다. 어부 출신의 그는 제베대오의 아들로, 야고보 사도의 동생이다. 두 형제는 호숫가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되었다. 요한 사도는 성경에서 여러 차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로 표현되며, 예수님의 주요 사건에 동참한 제자이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성모님을 맡기셨다. 전승에 따르면, 요한 사도는 스승을 증언한 탓으로 유배 생활을 한 뒤 에페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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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요한 20,2-8)
They both ran,
but the other disciple ran faster than Peter and arrived at the tomb first;
말씀의 초대
요한은 첫 번째 서간을 시작하며 자신의 공동체가 체험한 참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한다. 이 편지를 읽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나누기를 바라기 때문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나 이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이 비어 있다고 베드로와 요한 사도에게 전한다. 두 사도는 빈 무덤을 확인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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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지난가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노르웨이의 화가 뭉크의 작품 전시회에 가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첫 번째 전시회로, 많은 사람이 그의 유명한 그림 ‘절규’를 직접 감상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림 옆에는 화가가 이 그림의 영감이 된, 그가 프랑스의 항구 도시 니스에서 어느 날 받은 느낌을 적어 둔 글귀가 있었습니다. “두 친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고/ 불현듯 우울함이 엄습했다./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죽을 것 같은 피로감에/ 멈추어 서서 난간에 기대었다. (중략)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고/ 나는 혼자서 불안에 떨면서/ 자연을 관통하는 거대하고 끝없는 절규를 느꼈다.” 불안한 시대에 사람들이 겪는 내적 분열, 그리고 사람들의 소리 없는 비명을 표현한 ‘절규’는 그려진 지 이미 백 년도 더 되었으나 마치 오늘날을 예언한 느낌이 들게 합니다. 그것이 이 작품이 현대인들의 정신적 상황을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한 그림으로 뒤늦게 명성을 얻은 이유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 그림에 전율하면서도 공감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 곳곳에 불안과 절망과 피맺힌 절규가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참으로 어둠이 짙게 드리워 있습니다. ‘성탄 팔일 축제’의 시기는 이처럼 어두운 시대에 ‘죽음으로 가는 병’인 절망의 유혹 앞에 선 많은 이에게 희망의 길을 보여 주는 때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은 그의 복음의 머리글에서, 어둠은 빛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나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빛은 생명이며, 생명은 말씀이신 하느님 안에 있다고 전합니다. 또한 요한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에 사신다고 증언합니다. 어둠속에 있는 우리는 이 참된 증언에서 빛을 봅니다. 시시각각 절망과 죽음으로 내몰리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빛은 생명을 줍니다. 사람이 되신 말씀에 대한 믿음이 산산조각 난 우리의 삶을 치유하게 합니다. 아기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온 이러한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 신앙인의 몫입니다.
오늘의 묵상
2014-12-27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심종미 수녀 텅 빈 충만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체험이 있는가. 사랑하는 예수님을 잃고 슬픔에 가득 찬 채 주님을 그리워하며 아직 동트기도 전에 무덤가를 서성이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모습을 상상해 보자.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으면 그 무시무시한 무덤가를 그 시간에 갔을까. 사랑은 두려움을 없앤다. 필자도 몇 년 전에 사랑하는 동기 수녀님을 잃고 나서야 이 장면이 정말 가슴에 와 닿았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자신을 죄인 아닌 사람으로 대접해 준 첫째 사람이었기에 그분이 없는 세상은 아무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도 마치 이 텅 빈 무덤가에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잃고 헤맬 때가 있다. 그러나 이 텅 빈 무덤에서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우리가 실의에 빠지고 슬픔에 빠진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은 기쁨과 희망의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바로 빈 무덤은 부활의 상징이다. 빈 무덤에 가득 찬 마리아의 예수께 대한 사랑이 부활한 주님을 만나는 자리로 변화되었듯이 우리도 예수께 대한 사랑을 잃지 말아야만 부활을 체험하게 된다. 곧 비움을 통해 충만을 체험하게 되듯이 죽음을 통해 부활을 체험하게 된다. 슬픔과 절망이 가득한 텅 빈 무덤의 자리에서 참된 충만이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만이 텅 빈 자리를 충만으로 바꿀 수 있다. 사랑은 비움을 가능케 하고 죽음을 각오하게 하고 두려움을 없애준다. 사랑만이 길이 되어주고 진리를 알아보게 하고 우리를 살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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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사랑>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요한 20,2)." 우리 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를 사도 요한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요한만 사랑하시고 다른 제자들은 사랑하시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 이 말이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보다 요한을 좀 더 특별히 사랑하셨다는 표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요한만을 편애하셨다는 뜻으로 생각하기도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편애'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요한 쪽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느꼈고, 그래서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려고 노력했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생각됩니다. (똑같은 사랑을 주어도 받는 쪽에서 자기는 더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랑의 응답을 더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도들의 사랑은 부족했다고 깎아내릴 이유는 없습니다. 실제로 다른 사도들이 예수님을 덜 사랑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열두 사도 모두가 목숨을 바칠 정도로 예수님을 사랑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요한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다른 사도들과 비교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 자신이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끼고, 그래서 예수님을 더욱 깊이 사랑하려고 노력한 것은 그 자신의 일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장면에서 특별히 언급되어 있는 제자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요한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십자가 밑에 서 있었고(요한 19,25),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고(요한 20,2),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른 제자들보다 먼저 만났고(요한 20,14),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첫 번째로 증언한 사람이 되었습니다(요한 20,18). 사도 요한은 붙잡혀 간 예수님을 따라갔고(요한 18,15), 십자가 밑에 서 있었고,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고(요한 19,26-27), 베드로 사도와 함께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요한 20,8).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당시의 상황은 대단히 두렵고 슬프고 긴박하고 답답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 막달레나와 요한의 사랑은 더욱 특별하게 보입니다. 두 사람은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요한 15,13) 제대로 실천한 제자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죽음 전후의 그들의 행동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글자 그대로 목숨을 내놓은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상황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붙잡혀 가서 박해를 받고 죽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이 '예수님만' 사랑하고 이웃은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은 이웃을 사랑하는 일과 하나입니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는데, 예수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여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만일에 "나는 예수님만 사랑하겠다." 라고 하면서 이웃 사랑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이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불우이웃 돕기를 생각하지만, 그것만 이웃 사랑인 것은 아닙니다. 사도들이 한 일 가운데 첫 번째는 복음 선포인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이웃 사랑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서이고, 그 일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하고(궁극적이고) 가장 좋은 것을 주는 일이고, 하느님 사랑을 전해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단순히 자기들에게 맡겨진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복음 선포 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했고 이웃을 사랑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시키셨기 때문에 한 일이지만,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지시에 순종했고, 이웃을 사랑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부활을 증언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복음서를 기록한 것은 복음 선포 활동에 속한 일이고, 그래서 그 일도 역시 이웃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 없이 자기 혼자서만 믿고 자기 혼자서만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엔진 없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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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늘은 요한 사도의 축일입니다. 교회의 오랜 전통에 따라, 요한 사도는 요한 복음서를 쓴 복음사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오늘 복음에서도 보듯이, 자신을 가리킬 때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 실 요한 사도가 자신을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했다는 것은 감동적인 대목입니다. 그는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가 사랑받을 일을 많이 해서 그런 확신을 가졌던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을 때, 요한과 야고보 사도는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예수님께 말씀드렸다가 꾸지람을 듣기도 하였습니다(루카 9,54-55 참조). 그만큼 인간적으로 부족한 사람이며 자신이 사랑받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예수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때때로 자호(自號)를 지어 부르곤 하였습니다. 곧 자신의 의지나 취향, 인생관을 담아 자신의 칭호를 스스로 지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요한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자호를 지은 셈입니다. 신 학생 때 피정을 지도한 어느 노사제의 당부가 기억납니다. “사제 생활 40년 동안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깨달았습니다. 신학생 여러분,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만큼은 결코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우리 각자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요한 사도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재물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지식도 자신이 소유하는 또 하나의 무형의 재산이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지적 재산’이라고 말하지요. 우리가 가진 지적 재산은 필요에 따라 돈이나 명예 또는 신분으로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보와 지식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아는 지식은 반대입니다. 하느님에 대하여 하나를 알면 나 자신 하나를 내려놓아야 하고, 둘을 알면 나 자신 둘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아는 지식은 세상의 지식과는 달리 아는 것만큼 나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치 재산처럼 소유하면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처럼 되고 맙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는 하느님에 대한 지식 때문에 곁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 둘,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이 한낱 쓰레기임을 깨닫는 것입니다(필리 3,8 참조). 하느님을 온전히 알면 우리 자신은 아무것도 붙잡고 있지 않는 빈 마음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와 다른 제자 곧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무덤을 봅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보며 누구보다 예수님을 잘 알던 두 제자가 텅 빈 무덤을 만난 것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던 모든 것이 제로(0)가 되는 순간입니다. 그때부터 비로소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기 시작합니다. 요한 사도의 예수님에 대한 결론은 한마디로 모든 것을 내어 준 텅 빈 존재, 오로지 ‘사랑’(1요한 4,16 참조)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가 성경 공부는 물론 좋은 영성 강의나 신학 강의를 들으려 합니다. 예수님을 더 잘 알고 느끼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분을 아는 지식만큼 우리 자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텅 빈 무덤처럼 비어 있어 내적으로 자유로워야 합니다. 오로지 사랑만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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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신 주님의 무덤 앞에 주님의 제자들이 서 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무덤 안을 들여다보고 놀랍니다. 그렇지만 빈 무덤이 주님 부활의 구체적인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무덤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그분께서 몸소 제자들에게 발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의 생전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고, 말씀을 건네시고, 음식을 잡수시며, 함께하신 일련의 생활이 주님 부활의 가장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빈 무덤 때문에 주님께서 부활하셨다고 고백하는 굳건한 믿음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비록 약간의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불완전한 믿음일 뿐입니다. 이제 곧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만지고, 말씀을 듣고 나누게 될 것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는 요한 사도는 그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신 지상 생활의 가장 구체적인 증인으로서, 요한 사도는 자신이 기억하고 추억하는 주님의 모든 것을 주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세상 사람들에게 증언합니다. 그 증언은 완전한 믿음에서 오는 신앙 고백입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에 힘입어 완전한 믿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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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레나는 이른 새벽 예수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분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무덤 속에 계신다고 인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극진한 사랑이 그녀를 무덤으로 가게 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흔적을 보게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예수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막달레나의 말을 듣자 한순간에 달려갑니다. 그러고는 빈 무덤을 보고 놀랍니다. 환희와 기쁨의 놀람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애정’과 ‘제자들의 열의’를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믿음의 자세입니다. 이후에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발현하셨습니다. 무력감에 젖어 있던 그들을 위로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도 오셨습니다. 용기와 힘을 주시려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며칠 남지 않은 금년입니다. 성탄의 은총을 믿고 밝게 걸어가야 합니다. 평화와 기쁨을 만들며 살아야 합니다. 무덤은 언제든 나타납니다. 신앙이 부담스럽다면 ‘무덤의 시작’입니다. ‘삶의 에너지’인 믿음이 ‘삶의 멍에’로 바뀌기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막달레나의 정성과 요한의 열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부담스러운 믿음’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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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에서는 고통을 운명으로 돌리며 체념으로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고통을 피하고자 사욕에서 물러날 것을 이야기합니다. 소유와 관계를 끊고 마지막에는 자신마저 끊을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체념하거나 피할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부둥켜안아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러기에 당신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이후 고통은 은총을 체험하는 길이 됩니다. 고통을 통하여 인간은 자신의 본모습을 볼 수 있음도 알게 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고통을 정면으로 받아들인 스승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빈 무덤을 본 뒤에 외칩니다. ‘스승께서 정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구나!’ 주님께서 깨달음의 은총을 주셨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이후 그는 사랑의 삶을 삽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이지요.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십자가는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내 것으로 여기며 진정으로 받아들일 때 십자가는 오히려 은총이 됩니다.
올해의 12월 25일이 최고였다고 말씀하시는 신부님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왜냐하면 이번 성탄절이 주일이었거든요. 예수 성탄 대축일은 원래 의무축일이기 때문에 본당 신부들은 여러 대의 미사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날이 주일과 겹쳤기에 대축일 미사로 주일미사까지 모두 봉헌하는 것과 똑같게 된 것입니다. 작년을 떠올려 보세요. 작년에는 예수성탄 대축일이 토요일이었기에, 성탄 자정 미사를 금요일에 봉헌하고 토요일에는 성탄 대축일 미사를 주일 미사 댓 수만큼 봉헌했지요. 그리고 그 다음 날은 주일이기 때문에 또 미사를 여러 대 봉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당신부님들에게 올해가 최고의 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성탄을 보내면 송년 역시 편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1월 1일이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의무 대축일이라 주일처럼 많은 미사를 봉헌하게 되지요. 그러나 정확하게 일주일 뒤이기에 12월 25일이 주일인 올해는 1월 1일 역시 주일입니다.
이렇게 올해는 본당을 맡고 있는 신부님들에게 최고의 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와 같은 특수사목에 종사하는 신부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을 하고, 토요일과 주일은 쉬기 때문입니다. 즉, 빨간 날인 성탄절이 주일이면 쉬는 날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지요.
본당신부의 입장과 특수사목의 입장이 다를 수 있는 것처럼,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다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만을 내세우고,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굽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를 정의라는 이름으로 또는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말을 하지요.
이렇게 자신이 중심이 되는 생각과 말은 올바르지 못합니다. 자신이 중심이 아닌, 주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내세울 수 있는 생각과 말의 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했다는 제자로 알려져 있는 사도 요한 축일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묵상해 봅니다. 바로 오늘 복음만을 봐도 그가 사랑받는 이유를 어느 정도 눈치 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시몬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 시신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마리아 막달레나로부터 듣게 되지요. 그리고 그는 베드로와 함께 무덤으로 갑니다. 더 젊어서인지 체력이 좋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베드로보다 먼저 무덤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먼저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교회의 반석으로 인정받은 베드로가 무덤 안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먼저 도달했으니 먼저 확인해야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베드로에게 양보합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모습이 아니라 남을 드러내는 모습, 또한 자신의 생각보다는 주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이유였던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사랑을 받는 방법은 바로 여기, 자기를 낮추고 주님 뜻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 단지 우리가 가능한 방법을 알고 있지 못할 뿐이다.(래리슨 커드모어)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양승국신부-
<많이 사랑할수록 더 많이 보입니다>
누군가가 너무 보고 싶어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본 적이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요즘 ‘마이카 시대’이니만큼 누군가를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 엑셀레이터를 최대한 밟아본 적이 있습니까?
사랑이 깊어 가면 갈수록 생기는 특별한 현상 하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와 함께 있고 싶어 합니다. 한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 합니다. 좋은 것을 보면 그가 생각납니다. 맛난 것을 먹으면 어김없이 그가 떠오릅니다. 시공을 초월해서 매사가 그와 연결됩니다. 결국 그와 내가 영원히 하나 되고 싶어 합니다.
오늘 축일은 맞는 요한 사도 복음사가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그랬습니다. 요한은 얼마나 스승님을 사랑했던지 언제나 스승님을 독차지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깊었던 만큼 요한은 어디 가나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자리를 잡으려고 기를 썼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를 기억해보십시오. 그는 마치 예수님의 연인이라도 되는 듯이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어 앉아있었습니다.
이런 요한이었기에 복음서 안에 자신을 지칭할 때도 ‘요한’이라고 쓰지 않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난후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 무덤 사건’을 전했을 때 요한의 모습을 보십시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속력으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달려갑니다. 요한이 얼마나 빨리 달렸던지 베드로 사도는 한참 후에야 빈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실 때, 십자가 밑에 서 있던 유일한 제자가 바로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드립니다. 그날 이후 요한은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으며, 어머니 모시듯 지극정성으로 마리아를 봉양했습니다.
이렇게 요한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했습니다. 사도들 가운데서도 가장 열렬히 예수님을 존경했고 추종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성경구절들이 타당성을 입증합니다.
‘많이 사랑할수록 많이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극진히 그리고 꾸준히, 지속적으로 사랑했던 요한이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사랑했던 만큼 예수님의 신비, 예수님의 실체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스승으로 모셨던 예수님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분이심을 믿게 됩니다.
요한은 다른 누가 아닌 바로 자신을 구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으며, 바로 자신을 위해 수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음을, 그리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살아 있는 신앙
-안용태 신부-
요한 사도가 말하는 생명은 아주 구체적이고 생생합니다.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나타난 ‘참된 생명’,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너무 생생하고 현실적입니다. 그런데 이천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참된 생명’은 아리송하고 추상적으로 보이고, 오히려 병원에서 말하는 생물학적 생명이 더욱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보입니다. 우리와 참된 생명이신 그리스도 사이에 놓인 이 두껍고 희미한 안개를 걷어내고 싶습니다. 요한 사도에게 그토록 구체적이고 생생한 생명의 말씀이 왜 우리에겐 이토록 희미하고 추상적일까요? 생명과 우리 사이에 가로놓인 이 안개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거룩함과 속된 것을 구분하는 마음가짐입니다. 일상생활과 신앙생활을 분리하는 마음입니다. ‘저 멀리 하늘 나라에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나는 지금 일상을 걷는다.’는 마음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은 강생을 통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농사일에, 사업에, 직장일에, 가정일에 그분께서 함께하십니다. 일상에 함께 스며들어 계시는 분을 찾으려고 노력할 때에만 이 안개는 걷히고, 우리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사셨던’ 성탄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무덤에서 일어나기
한국의 2030대 남자들의 사망원인 중 1위가 다름 아닌 자살이라고 합니다. 경제사정이 어려워지면서 그동안 자신이 힘들게 이루어낸 모든 것들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무너진 것은 과거만이 아닙니다. 그 노력을 통해 꿈꾸며 준비했던 미래도 함께 무너진 것입니다. 어렵게 공부한 청년들은 직장을 구하지 못해 방황하고, 실직한 가장은 부양해야 할 가족 걱정에 한숨만 쉽니다. 희망을 잃은 사람은 살아갈 힘을 잃습니다. 희망의 자리가 절망의 자리가 되고, 삶의 자리가 죽음의 자리가 됩니다. 삶의 자리가, 살아 있지만 살고 싶지 않게 하는 우리의 무덤이 됩니다.
오늘은 성 요한 사도 축일입니다. 사도는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셨던 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한 지 이틀 뒤인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경험한 제자들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자신의 모든 희망이었던 스승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갔던 모습은 제자들을 절망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래서 다락방에 숨어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다락방은 제자들에게 또 하나의 무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제자들은 그 다락방에서 뛰쳐나오게 됩니다. 자신들의 무덤을 비우고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안에 상처와 아픈 기억들은 나를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용서하지 못하게 하는 나의 무덤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도 그 무덤에서 일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 그리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삶처럼,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사랑은 본래 그리움이다
-김찬선신부-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아기 예수로 오신 것이 고마운 것은 오를 수 없는 우리에게 그분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분이 그렇게 오신 것은 사랑 때문이고요. 저는 이것을 사랑의 키 낮춤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웬만큼 살았고 노력 꽤 했는데도 아직 못 고치는 게 있습니다. 내가 사랑할 만한 너이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 사랑의 짝이 되려면 이 정도는 올라서야 한다지 않으시고 수준을 낮춰 우리에게 내려오시고 사랑해주십니다.
이와 더불어 아기 예수로 오심이 고마운 것은 오늘 축일을 지내는 사도 요한이 얘기하듯 우리가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게 오신 겁니다.
그제는 편찮으신 어머니께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그곳엔 눈이 많이 왔으니 오지 말라고 몇 번이고 마다하시는 것입니다. 목소리 들은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하시는데 저를 보고 싶어 하시는 어머니 속마음 제가 알고, 성탄 미사를 드리게 하고 싶은 제 마음도 있어서 다녀왔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 편 미안함이 컸습니다. 신부 자식 못 둔 같은 처지의 어머님들께 죄송했고, 왕림 미사가 필요한 수많은 가난한 분들께 죄송했습니다.
무릇 사랑이 클수록 봐도 또 보고 싶고, 사랑이 깊을수록 그리움이 큰 법입니다. 오죽하면 옆에 있어도 그립다 하겠습니까? 웬만큼 나이 먹어 이별의 사랑에 꽤 적응이 되었어도 웬만큼 나이 먹어 사랑의 이별을 이제 견딜 수 있게 되었어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야 사랑이 와 닿는 그 유아기적 사랑의 그리움은 여전합니다.
그것이 사랑의 본질이기 때문이고 어머니 배속에서부터, 아니 사랑이신 하느님으로부터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그리움이고, 그리움은 본질적으로 이별과 만남의 쌍생아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부터 사랑하시기에 성부와 성자가 이별하고 사랑하시기에 성부와 성자는 만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부터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당신들로부터 세상으로 떠나보내시고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찾아 세상에 오십니다.
이 사랑의 신비를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았고, 이 사랑의 신비를 예수 그리스도께 배워 사랑 박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신비를 요한은 증거하고 선포합니다.
하느님의 본질인 사랑을 우리에게 알게 해주고, 사랑의 본질인 그리움을 우리에게 알게 해준 요한이 오늘 특별히 무척 고맙습니다.
사랑의 사도인 요한
-이병우 신부-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1코린13,1-13 참조).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 주셨고, 우리를 위해 희생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 주신 하느님의 참사랑이 무엇인지 삶으로써 보여 준 분이 바로 오늘 기념하고 있는 요한 사도이십니다. 요한 사도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의 현장에서도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보다 먼저 달려가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체험한 사도였습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특별하게 사랑했기 때문에 베드로보다 먼저 달려가 주님 무덤에 다다랐다고 생각합니다. 요한 사도가 보여 준 진정한 사랑은 항상 예수님의 곁을 떠나지 않는 것,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요한 사도가 보여 준 이 사랑을 닮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조건에 따라 움직이는 사랑이 아니라 언제나 곁에 머무르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 김혜경-
오늘 복음에서 새삼 재미있는 대목을 발견했다. 4절에 있는 것으로,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 (요한) 가 베드로보다 빨리 무덤에 다다랐다는 대목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요한은 열두 사도의 이름 가운데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묶어 언제나 앞자리에서 거론되며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모신 제자다. 예수님께서도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셨을 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셨을 때,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실 때 시몬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요한을 늘 데리고 다니셨다. (마르 5, 37; 루카 9, 28; 마태 26, 37) 예수님의 파스카 음식을 준비하러 간 제자도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였다. (루카 22, 8) 복음서의 이런 보도를 통해 예수님께서 얼마나 이들 두 형제 그룹을 생각하셨는지, 베드로와 요한에게 얼마나 각별한 감정을 가지고 계셨는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베드로한테는 당신 교회를 맡기시고 (마태 16, 18), 요한한테는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맡기신 것을 통해 잘 드러난다.(요한19, 26 – 27) 오늘 복음은 요한이 쓴 복음서에서 한 번도 자기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계속해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라고 하는 것을 통해 그가 얼마나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확신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아울러 요한도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는지를 4절에서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급박한 소식에 허둥거리며 달려온 장면,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는 말 속에 사랑의 관계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마음이 급했으면, 그분의 수제자인 베드로를 기다리지도 않고 그냥 달려 왔을까 !
사랑 박사
-김찬선신부-
사도 요한의 축일을 지내며 드는 생각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축일이 왜 성탄 주간에 있을까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사도 요한과 관련된 복음이 많이 있는데 성탄시기에 하필이면 부활시기에나 읽을 법한 오늘의 요한복음을 읽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더 생각을 해보니 그것은 아마 요한이 사랑의 사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의 말씀, 생명의 말씀의 탄생을 역설한 사도가 요한이기에 말씀이 탄생하신 성탄시기에 그의 축일을 지내고, 주님의 사랑을 받고 주님을 사랑한 요한에 대해 가장 잘 나타내주는 복음이 오늘의 복음이기에 비록 부활시기의 복음이지만 그의 축일에 읽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사도 요한은 사랑 박사입니다. 자신이 쓴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자신을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니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은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하셨기에 받은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사랑하셨어도 요한이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요한은 사랑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지만 주님의 사랑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사랑을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저는 아무 사랑이나 사랑하지 않습니다. 제가 사랑하지 않는 사랑은 받고 싶지 않습니다. 싫어한다고 하는데도 사랑하면 그것은 짝사랑을 넘어서 스토커의 끔찍한 집착이 될 뿐입니다. 이런 면에서 요한은 사랑을 사랑한 사람이고 특히 주님의 사랑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랑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의 사랑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랑 박사인 요한에게서 사랑을 받는 또 다른 비결을 봅니다. 사랑을 사랑하지만 사랑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사랑해야지 집착하는 순간 사랑은 변질되고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추악해집니다. 사랑하는 것과 집착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자유입니다. 그의 사랑으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야 함은 물론이고 나의 사랑으로부터 그를 자유롭게 해야 합니다. 사랑을 하는 어느 순간부터, 사랑이 점점 자라고 자라 무척 사랑하게 되는 어느 순간부터 그를 나에게 묶어 두려 하고 독점하려 들고 나도 그에게서 한시도 떠나지 못하게 되기 쉬운데 이때부터 사랑은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집착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영적인 사랑, 초월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사랑이고 구속하는 사랑입니다. 이런 면에서 요한은 하느님을 무척 사랑하면서도 자유로웠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자신이 쓴 복음에서 자기를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라고 표현했을 때 예수님께서 요한만 편애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하거나 예수님께서 요한을 다른 제자보다 더 사랑했다는 뜻으로 이런 표현을 한 것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틀림없이 모든 제자를 사랑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제자를 사랑하셨어도 요한은 예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독점적 사랑에 대한 욕심 때문에 주님의 보편적 사랑을 질투하지 않고 독점적인 사랑만 사랑으로 느끼기에 주님의 보편적 사랑에서는 사랑을 못 느끼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이 모두를 사랑하시도록 주님께 자유를 드리고 보편적 주님 사랑의 작은 한 조각으로도 충만할 줄 아는 사랑의 박사였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졸업 기념으로 오디오 하나를 사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이 졸업을 하고 대학에 입학하여 새학기가 시작해도 아버지는 오디오를 사주지 않았지요. 그런데 기숙사로 들어가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성경책을 한권 주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틈나는 대로 성경을 읽으렴. 그런데 특히 필리비 4,19은 네 인생에 크게 도움이 될 테니 꼭 펴서 읽어 보아라.”
오디오를 사주지 않는 아버지에 대해 속이 뒤틀린 아들은 성경책에 구석에 처박아 둔 채 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만날 때마다 오디오를 사달라고 졸랐고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필리비 4,19은 읽어 보았니?”
그러면서 오디오는 절대로 사주지 않는 것입니다. 4년이 지나고 졸업하는 날, 부모가 축하하러 왔지만 아들은 아버지가 반갑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오디오를 사달라고 해도 사주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대학교를 졸업하는 날이니 만큼 들어주겠지 라는 생각을 가지고 오디오를 사달라고 다시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세요.
“필리비 4,19은 읽어 보았니?”
졸업식이 끝난 후 짐을 꾸릴 때 아버지께서 4년 전에 주셨던 포장도 뜯지 않은 성경책이 보였습니다. 그 순간 아들은 생각했지요. 과연 필리비 4,19에 무슨 말씀이 있길래, 만나기만 하면 읽어보라고 하셨을까? 그래서 그 부분을 펼쳐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라는 말씀과 함께 오디오 한 대에 해당하는 가격의 수표가 들어있었습니다.
만약 아들이 아버지의 말씀에 순명해서 곧바로 성경을 펼쳐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4년 전에 이미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눈에 보이는 오디오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아버지를 원망만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은총의 선물을 이미 주셨습니다. 문제는 그 은총의 선물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주님의 뜻을 따르는 실천만 하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을 나의 자그마한 머리에서 나오는 판단으로 인해서 그 선물을 찾지 못하는 것은 물론 원망만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로 알려져 있지요. 그는 사랑을 많이 받았던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정말로 사랑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말을 듣고는 베드로보다도 먼저 무덤에 다다르지요. 신체적인 조건 때문에 빠를 수도 있는 것이지만 표징의 책이라고도 불리는 요한복음의 특징을 보았을 때, 사랑의 열정 때문에 더 빨리 도착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도착 후에 보이는 요한의 행동입니다. 그는 무덤 안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베드로에게 가장 첫 번째 자리를 내 주었던 것입니다.
위계질서에 대한 특별한 그의 마음을, 그리고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마음을 볼 수가 있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에 순명했던 요한이기에 예수님의 가장 사랑받는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주님의 말씀에 순명하고 있었을까요? 그래서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뜻보다는 내 뜻을 먼저 내세울수록 주님의 선물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감추어진 주님 은총의 선물을 발견할 수 있도록 철저히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일 달러는 교회에 가져가면 매우 큰돈처럼 보이지만, 상점에 가져가면 하찮은 액수로 보인다.(프랭크 클라크)
사랑의 향기
-심종민 신부-
많은 사람이 그렇겠지만 저는 고기 굽는 식당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바로 옷에 그 냄새가 배기 때문입니다. 그 식당을 나오면 내가 고기 먹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이미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축일을 기념하는 요한 사도를 보면 고기 냄새가 아니라 사랑 냄새가 물씬 풍기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가 굳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노라고 고백하지 않아도 요한 복음서나 요한 서간들을 읽어보면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묻어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받은 자만이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을 나는 그 글들에서 느낍니다. 그러나 만약 고기 먹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고 그냥 집에 와 옷을 갈아입는다면 아무도 그가 고기를 먹었다는 사실을 모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요한도 사람들과 더불어 그 사랑을 살았기에 사람들이 그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도 요한처럼 그리스도의 향기를 풀풀 내면서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어봅니다.
성 요한의 도움을 청하며
- 황지원 신부-
사도 요한은 야고보와 형제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첫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로 예수님의 중요한 행적에 언제나 함께 동행하며 그분과 함께 머문 제자입니다. 하지만 그 역시 예수님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께 자신의 자리를 청하기도 하고, 또한 천둥의 아들이라고 불리며 불같은 성격으로 실수도 많았던 제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무리 가운데 가장 가까이에서 그분의 말씀을 듣던 사도들 가운데 하나이며, 그 가운데에서도 누구보다 그분 곁에 머물기를 원하던 제자였음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만찬상에서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그분과 말씀을 나누고, 모두 두려움에 떠나가는 죽음의 순간에도 성모님과 함께 그분의 임종을 지켜본 제자이며, 그분의 부활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먼저 그분 곁으로 달려간 제자입니다. 올 한 해를 되돌아보며 믿음이 부족해서 예수님보다 더 높아지려 했던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고 또한 예수님께 향하는 달음질이 아닌 헛되이 바쁘게만 살아오지 않았는지 바라봅시다. 비록 부족하고 모자라지만 사도 성 요한의 도움을 청하며 그분 곁에 머무릅시다.
사랑하는 만큼
-김찬선신부-
말씀이 주님이시다. 말씀이 사랑이시다. 말씀이 생명이시다.
이것을 보고 깨달은 사람은 사랑으로부터 사랑을 받아본 사람, 사랑을 사랑한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아무나 이것을 보고 깨달을 수 없습니다. 바로 사도 성 요한 같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요한은 주님의 첫 제자입니다. 요한은 타볼산과 해골산을 주님과 함께 올랐던 제잡니다. 그래서 요한은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도 보았고 피땀 흘리며 기도하시는 연약한 주님도 보았습니다. 요한은 십자가상의 주님 곁에 있었던 유일한 제자이고 주님께서 당신 어머니를 맡기실 수 있었던 친구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티베리아 호수에서 고기잡이 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많은 고기가 잡히는 기적을 행하셨을 때 주님을 알아채고 “저분은 주님이십니다.”고 베드로에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다음 다른 모습을 한 예수님을 다른 제자들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는데 요한은 어떻게 알아챌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사랑하는 것만큼 알고 아는 만큼 알아채기 때문입니다.
사랑할수록 그의 본질을 알고 사랑할수록 그의 진면목을 알고 사랑할수록 그의 전부를 알고 사랑할수록 그를 속속들이 알기에 그가 아무리 다른 모습을 하여도 신발 한 짝을 보고도 그임을 알아채고 숨소리로도 그임을 알아채고 말투로도 그임을 알아챕니다.
그래서 요한만이 고기잡이를 지시하시는 분이 주님임을 알아챘을 뿐 아니라 말씀이 주님이심을 말씀이 사랑이심을 말씀이 생명이심을 우리에게 전해 줄 수 있었습니다.
새벽을 열며
한 맹인이 지팡이를 짚으며 조심스럽게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 개 한 마리가 겁도 없이 다리 한 쪽을 들더니 그 맹인의 바지에 오줌을 싸는 것이 아니겠어요? 하지만 맹인은 뜻밖에도 화를 내지 않고 저 멀리 달아난 개를 향해 과자를 꺼내더니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 마침 한 신부님이 지나가다가 그 광경을 보고서는 감동어린 목소리로 말합니다.
“왼뺨을 맞거든 오른뺨도 마저 내밀라는 성경 말씀을 실천하는 그 모습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 같으면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을 텐데, 과자를 주다니요?”
그러자 맹인이 말했습니다.
“흠... 과자를 줘야 그놈의 대가리가 어디 있는지 알게 아니오?”
신부님이 보기에는 사랑의 실천을 하는 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즉, 머리를 한 대 쥐어박기 위해서 개를 유인하는 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이러한 모습을 취할 때가 많지 않았을까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올바른 모습을 취하면서도, 혼자 있을 때에는 이기적이고 욕심 가득한 모습으로 변하는 것. 말로는 사랑의 실천을 다짐하겠다고 약속하면서도, 나만을 위한 사랑의 실천으로 머무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떠올려보십시오. 자기만을 알고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자기가 아닌 다른 이웃을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 일하는 사람, 또한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나는 그렇게 살지 않고 있습니다. 남에게는 이타적인 사랑을 원하면서, 자기는 이기적인 사랑을 추구합니다.
오늘 축일을 보내는 사도 요한을 우리는 사랑의 사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단순히 사랑에 관한 글을 많이 써서 사랑의 사도라고 말할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분 삶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3년간 예수님을 쫓아다니면서 한순간도 빼놓지 않으려고 노력했지요. 최후의 만찬 때에도, 십자가 죽음의 순간에서도 예수님 곁에서 시선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묻히셨던 무덤에 갔으며,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알아봅니다. 이 모든 행동이 바로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요.
나의 주님께 대한 사랑을 반성하게 됩니다. 사도 요한이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는 것은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데, 나는 과연 얼마나 주님을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혹시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실제로는 자기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은 사랑만 실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빠다킹신부
겸손의 삶
-조명연 신부-
우리들의 모습은 늘 ‘지금보다 더’를 외칩니다. ‘지금보다 더 돈을 벌어야 해’, ‘지금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야지’, ‘지금보다 더 사랑을 받아야 해’, ‘지금보다 더 잘 살아야지’ 등등의 말을 하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우리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 이런 노력이 필요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을 하면서, 남을 위한 희생과 양보가 없다면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혼자만 사는 세상이 아니라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한 명의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를 교회에서는 사도 요한이라고 이야기하지요. 이 분은 마리아 막달레나로부터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지요. 그리고 곧바로 베드로와 함께 무덤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 분은 무덤에 먼저 도착합니다. 하지만 이 분은 곧바로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즉, 교회의 반석이라 불림 받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할 수 있는 특권을 양보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던 요한 사도의 모습처럼 겸손한 삶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아닐까요?
사랑이 넘치는 사람
-허영엽 신부-
얼마 전 방송에서 사회자가 나에게 질문했다. “내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나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 ‘꿈은 이루어진다’는 슬로건이 우리의 가슴을 뛰게 했잖습니까? 그런데 언제부턴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한다, 바란다.’는 것이 남의 일처럼 들리곤 하거든요. 신부님께서는 가슴이 뛰도록 바라고 원하는 일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 질문은 방송이 끝난 후에도 하루 종일 머릿속에 맴돌았다. 내가 가슴 떨리게 무언가를 기다리는 때는 언제였던가? 문득 사제가 되려고 부단히 노력하며 살았던 가슴 떨리던 시절이 생각났다. 사제가 된 지 어느덧 23년이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났다고 해서 똑같이 삶도 비례해서 성숙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사제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계속해서 되어가는 존재다. 따라서 사제의 길에서 안주하는 것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이미 모두 경험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가. 그래서 떨림도 흥분도 없었던 것은 아닐까?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특별히 생각나는 날이었다. 스승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가는 요한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얼마나 가슴이 뛰었을까? 예수님의 부활 체험은 요한을 온유하고 사랑 많은 사도로 변화시켰다. 전설에 따르면 사도 요한은 늙도록 활동했다고 한다. 거동이 불편해서 간신히 집회에 참석해서도 설교에서는 늘 “자녀들이여, 서로 사랑하시오.”라며 사랑만을 역설했다고 한다. 요한은 사랑의 감수성이 풍부한 사랑의 인물이 되었다. 물론 그의 삶 전체에 주님의 사랑이 관통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도 요한처럼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의 삶에도 분명히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가슴 떨리고 흥분되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 순간을 기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과거를 새롭게 인식하고 해석하는 장이다. 우리는 기억이 하느님의 큰 은총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독차지
-양승국신부-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사도 요한은 12사도 가운데 아주 특별한 인물이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아에 이어 야고보와 함께 일찌감치 예수님으로부터 불림을 받아 핵심 사도단의 일원이 됩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요한은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의 각별한 제자, 핵심 브레인, 최측근으로 활동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자주 이 세 제자만 따로 불러 논의를 하셨고, 이들만을 대상으로 한 특별제자교육도 실시하곤 하셨습니다.
부르심을 받던 초기, 아직 세상물이 덜 빠졌던 시기, 이 세 핵심 제자들은 때로 인간적인 마음에 상대방을 경쟁관계로 설정함으로 인해 서로의 관계가 권력다툼 양상으로 치닫곤 했습니다. 길을 가다가 "누가 높은가" 하는 문제로 싸우다 예수님께 들켜 호되게 야단맞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에게 있어서 인간적인 약점은 상당했었습니다. 성격이 담대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너무 급해서 예수님으로부터 "천둥의 아들" 이란 별명까지 얻게 됩니다.
그가 얼마나 성격이 과격했었는지는 다음과 같은 발언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
뿐만 아니라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주님의 나라가 서면 요한에게 중책을 맡겨 달라”고 당부하는 것을 봐서 요한 가족이 은근히 정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고, 예수님을 통해서 한몫 잡아보려는 마음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그 모든 약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장점 한 가지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나선 이후 요한은 점점 예수님께 빠져 들어 갔고, 조금씩 그분의 정체를 파악해나가면서 완전히 그분께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독차지하려다가 다는 제자들로부터 눈총도 숱하게 받았습니다. 예수님께 완전히 눈이 멀어버렸다고나 할까요.
복음서에 제시된 요한의 행적을 따라가 보면 그가 얼마나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싶어 했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저술한 복음에서 요한은 자신을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라고 표현한 반면, 베드로나 야고보 사도에 대해서는 그냥 단순하게 베드로, 야고보와 같이 이름만 거명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어떻게 해서든 보다 예수님 가까이 머물기를 간절히 열망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예수님의 마음에 들어보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한평생 노력했던 사람이 요한이었습니다.
자주 예수님으로부터 질책을 듣곤 했지만 베드로 이상으로 목숨 바쳐 예수님을 사랑했던 요한이었습니다.
12사도 가운데 유일하게 끝까지 남아서 예수님의 유언을 마무리 짓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했던 사도가 요한이었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주님의 신비를 가르쳐준 사도 -경규봉 신부-
사도 요한은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야고보의 동생으로서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다. 야고보와 요한은 갈릴레아 호수에서 그물을 손질하던 중에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들은 삯군들과 배를 남겨둔 채 예수님을 곧바로 따라나섰다(마태 4,21-22; 마르 1,19-20; 루가 5,10-11).
그들은 그만큼 예수님께 매료되었고, 예수님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들은 성격이 매우 급하고 또 흥분을 잘 하였기 때문에(마르 10,35-41), 예수님은 그들을 ‘천둥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보아네르게스’라는 별명을 붙여 주시기도 하였다(마르 3,17).
그들은 예수님의 중요한 행적, 이를테면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렸을 때(마르 5,37; 루가 8,51)나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마태 17,1; 마르 9,2; 루가 9,28), 또는 게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마태 26,37; 마르 14,33)에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 곁에 있었다.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보다도 그들을 특히 더 사랑하시고 신뢰하셨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에 예수님 옆에 앉도록 해주실 것을 청하기도 했다(마르 35-41).
또한 성서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받던 제자’가 곧 요한이라고 하며, 최후만찬 때에 주님의 가슴에 기댔던 사람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더욱이 십자가상에서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맡기셨다(요한 19,25-27). 그 정도로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신뢰와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또한 부활 아침에는 베드로보다 먼저 예수님의 빈 무덤으로 달려갔고(요한 20,1-5), 그분의 부활을 가장 먼저 믿었다. 그는 예수님을 깊이 사랑했기에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알아보기도 하였다(요한 21,7).
사도행전을 보면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복음을 전하다가 투옥당하기도 했다. 성 바오로는 야고보 및 베드로와 함께 요한을 가리켜 ‘교회의 기둥’이라고 불렀다(갈라 2,9). 후일 요한은 파트모스 섬에서 유배생활을 했고(묵시 1,9), 에페소 지방에서 여생을 지내다가 그곳에서 수를 다하고 선종하였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성 예로니모에 따르면 요한은 너무나 나이가 많아 군중들에게 설교할 수 없고, 다만 간단한 말만 할 정도로 장수하였다고 한다. 신약성서 가운데 요한복음과 요한 1, 2, 3서, 그리고 묵시록이 요한의 저작물이라고 전해져온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많이 사랑받은 제자였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을 가장 사랑한 제자였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가 베드로보다 먼저 무덤에 달려간 까닭도 그만큼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사랑은 그로 하여금 어떤 제자보다도 주님께 더 가까이 가도록 한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깊이 체험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한 4,16)라고 말할 정도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체험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있게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설교했다(1요한 4,10). 그리고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누구보다도 먼저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었다.
또한 그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영성가이다. 하느님에 대한 깊은 사랑은 그로 하여금 하느님의 신비를 깊이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그는 가장 영성이 깊은 요한복음을 저술했다. 그는 주님이 하느님의 말씀이요 어두움을 몰아내는 세상의 빛이심을 가르쳐주었다.
주님께서 임하시면 어둠의 세력은 물러갈 수밖에 없음을 잘 가르쳐주었다. 또한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빵이시라는 심오한 신비를 말함으로써 성체성사의 신비를 우리에게 잘 가르쳐주었다.
오늘 요한 사도 축일을 보내면서, 우리도 요한처럼 주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제자임을 마음에 새기자. 우리도 요한처럼 주님을 깊이 사랑하자. 그럼으로써 하느님께 한걸음 더 가까이 나아가고, 하느님의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의 신비를 느낄 수 있는 신앙인이 되자............◆
별명이 무엇입니까? -이찬홍 신부-
어렸을 적에 친구들에게 불렸던 별명이 있습니까? 저는 ‘말’이란 별명입니다. 얼굴에 말에 물린 상처가 크게 나 있기에 자연스럽게 불린 별명입니다. 지금도 친구들을 만나면 그렇게 불립니다. 전에, 식당에서(할매 추어탕에서) 식사하고 나올 때 중 고등학교 친구를 만났는데 마찬가지였습니다. 많은 신자 분들이 함께 있었는데도, ‘누구야’ 라는 이름이 아닌, “야 ?” 이란 별명을 들었습니다.
별명은 단순히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으려고 붙여지기 보다는, 친구들 사이에서 자신에게만 있는 어떠한 특징이나, 독특한 개성에 의해 불려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기에 별명은 친구들 사이에서 이름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오늘은 요한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매일미사에서 알려주듯이,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중요 사건에 항상 동행한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도 함께 하면서 예수님으로부터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라는 말씀을 들은 제자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베드로와 함께 무덤으로 달려간 제자입니다.
그런데, 요한에게도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에게 불리는 별명이 있습니다. 무엇 같습니까? 네, 바로 “예수님의 사랑받던 제자” 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기에, 그런 별명이 붙여졌을까? 라는 생각과 함께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유독 요한 사도만을 더 많이 사랑하신 것일까요? 좀 인간적인 생각이지만, 그 모습이 얼마나 많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면, 요한의 별명이 “사랑받는 제자”가 되었을까요? 예수님님께서 요한 사도만을 편애하신 것일까요?
우리에게 있어 돈으로 살수 없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우리의 지식으로 배울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아마도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 사랑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얻어 누리는 것이요, 지식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으로 터득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많이 사랑한 사람은 더 많은 사랑을 받는다.”는 말씀에서 알려 주듯이, 요한은 예수님과 늘 함께하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 방법은,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알았기에, 다른 제자들 보다, 예수님과 더 깊은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사랑을 주고받는 모습이 다른 제자들 눈에는 ‘예수님께서 요한 만을 더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 무엇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기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란 인사를하며 사람들이게 편지를 보내며 사랑을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그토록 많은 사랑을 받았고, 늘 체험했기에 우리에게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라는 귀중한 가르침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한 사도는 사랑을 주고받으며 늘 사랑 안에서 살아갔기에 다른 사도들과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사랑받던 제자” 라는 또 다른 이름이요, 별명으로 불릴 수 있는 것입니다.
별명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사람에게만 더 크게 보이는 특성이나, 독특한 개성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들의 별명, 저의 별명, 요한 사도의 별명이 모두 그렇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별명이라 하더라도, 요한 사도는 영원하신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사랑받던 제자” 라고 불린 별명이라 돌아가신 후에도 그 별명이 영원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별명은 자신이 듣고 싶다고 해서 스스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붙여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교회 안에서 다른 신자 분들이나,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별명을 듣고 싶습니까?
부족한 저의 강론을 인터넷에 올려주는 한 형제님께서는 저에게 ‘주님의 작은 그릇’ 이란 별명을 붙여주셨지만, 그 별명은 너무 황송할 따름이요, 저는 ‘늘 주님의 사랑을 받는 죄인’ 이란 별명을 갖고 싶습니다.
해바라기가 따스한 해님을 통해 싱싱하게 되어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듯이, 저 역시 주님의 사랑스런 시선, 손길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스런 손길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너무나 쉽게 죄인이 되어 버릴 그런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신앙의 경쟁심
-민경철 신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서 빈 무덤 소식을 접한 베드로 사도와 주님께 사랑받던 제자는 마치 경주를 하듯 달려갑니다. 도둑맞은 주님의 시신, 혹 말씀하신 바와 같이 부활하실 수도 있는 스승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먼저 도착한 제자는 늦은 베드로에게 무덤에 먼저 들어가도록 배려합니다. 둘 사이에 경쟁의식이 있는 가운데 베드로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한 셈인데 아마도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교회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내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정원 ○명 모집’ 이런 식이 아니지요. 정원 무한대입니다. 내가 들어가면 다른 이가 못 들어가는 그런 것이 아니기에 신앙 안에서 경쟁으로 비춰지는 것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처럼 정해진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감춰져 있는 하늘 나라의 보화들을 열의를 다해 찾아 나서는 노력들의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찾은 보화를 형제들과 함께 나누는 가운데 교회를 풍요롭게 하려구요. 그러기 위해서 베드로에게 자리를 내준 제자처럼 첫째가 꼴찌가 되어야 하는 겸손을 매일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예쁜 짓을 하자
-박용식 신부-
사도 요한을 ‘사랑받던 제자’라고 한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는 바로 요한을 두고 한 말이다. 사도 요한이 각별한 사랑을 받은 까닭은 무엇일까? 요한은 다른 사도들보다 사랑받을 행동을 더 많이 한 모양이다. 흔히들 사랑을 말할 때 ‘사랑하는 것’에 중점을 두지만 ‘사랑받는 것’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사랑은 주는 것만이 아니라 주고받는 상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주기만 하고 받을 줄 모르는 사랑은 짝사랑, 일방적 사랑이지 진정한 의미의 완전한 사랑이 아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것’ 못지않게 ‘사랑받는 것’도 중요하다. 곧 사랑받게 행동하는 것, 사랑스럽게 행동하는 것, 상대가 나를 사랑하도록 행동하는 것, 사랑받을 짓, 예쁜 짓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내가 누구를 사랑했어도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를 사랑하지 않은 그 사람에게만 책임이 있는 게 아니라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 나는 사랑을 주었을 뿐 받을 줄 몰랐고 사랑받도록 행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남편 잘못이지만 아내에게도 사랑받게 행동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며느리에게도 사랑받게 행동하지 못한 잘못이 있다. 사랑은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받기도 하는 것이므로 주려는 노력과 함께 받도록 행동하자. 예쁜 짓을 하자.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김정용 신부-
◆사제가 된 지 어느덧 13년이 됐습니다. 사제서품식 때 입었던 제의도 지나온 세월만큼 낡고 빛이 바랬습니다. 문득 세월의 무게를 느낄 때면 제의처럼 그렇게 저도 조금씩 퇴색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단순히 세월의 때가 묻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세월이 지났다고 해서 꼭 삶이 무르익는 것도 아닌 듯합니다. 어쩌면 순례자의 모습과 정신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순례자는 몸이 가벼워야 하는 법입니다. 순례자에게 명예의 무게는 곧 치우기 어려운 장애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명예의 무게가 쌓이면 순례자는 안주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명예의 손짓을 쫓아가려고 합니다. 나그네가 길을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순례자는 무엇보다 자기를 경계해야 합니다. 순례길을 가다 보면 많은 풍요로운 것들을 얻게 됩니다. 경험이 많아지고, 길도 더 훤히 꿰뚫어보게 되고 갖가지 어려움에 대처하는 법도 더 능숙해집니다. 그렇더라도 오로지 자신만을 신뢰하려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이끄심을 한시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순례자는 늘 새롭게 배울 줄 알아야 합니다. 순례 여정이 단 하루도 똑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하루가 새롭게 열립니다. 하찮게 보이는 길가의 풀이나 들꽃 한 송이라도, 형편없어 보이는 것이라도 몸을 굽혀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세상엔 귀기울여 들을 만한 것이 꽤 많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창조물을 통해서 자신을 말하고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그저 귀를 간질이는 소리에만 취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소리를 듣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 알고 있다고,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도 우리와 같이 주님의 길을 따랐던 순례자였습니다. 늘 주님 가까이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주님 멀리 떨어져 있었던 적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분은 우리 곁에 늘 가까이 계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그것을 깨닫기까지 꽤 오래 걸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요한처럼.
-김옥수 신부-
예수성탄 팔일 축제의 셋째 날에 교회는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을 지냅니다. 방금 들은 요한복음을 본다면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던 제자(애제자)였습니다. 사도들 중에서 예수님의 빈무덤을 가장 먼저 목격하고 믿었던 자들이 바로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더구나 요한이 빈무덤에 먼저 도달하였다고 전합니다.
오늘은 주님께 불림받은, 특별히 선택받은 우리 자신들을 두고 묵상합시다.
1. 부르신 이유? - 주님은 자기 옆에 두려고 부르셨습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와서 보아라” 이들은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특히 요한 사도는 그분과 늘 함께 지낸 분이시다 마음에 들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함께 지내길 원합니다.
얼마나 그분 마음에 들었으면.... 얼마나 그분을 사랑했으면...
사랑받기 위하여 그분과 함께 하였습니다 - 그분과 함께 함으로써 그분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당신을 따르는 목자에게 무엇을 바라실까? 당신 곁에서 무엇을 보여주시며 무엇을 배우길 원하셨을까?
주님의 사랑을 가득 받은 사도 요한 축일을 맞아 어느 노사제께서 새사제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되새기고자 합니다.
사제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사제는 이런 사람입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사람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사랑하는 사람이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첫째, 사제는 집이나 옷에, 음식에, 일에, 봉사함에 있어서 가난하여야 합니다. 사제는 하느님께 대해서, 사람들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정신과 마음으로 가난하여야 합니다. 사제는 말구유의 가난을 실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제는 육신에, 의지에, 명예에, 세상에 죽어야 하고, 사제는 침묵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일을 통해서, 때로는 고통을 통해서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사제는 골고타 언덕의 영신적 죽음과 제물 됨을 실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사제는 몸을, 시간을, 자기 제물을, 건강을, 생명을 주어야 하며, 사제는 자기 신덕을 통하여, 자기 가르침을 통하여, 자기 말을 통하여, 자기 기도를 통하여, 자기 표양을 통하여 남에게 생명을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살려면 제가 보기에 적어도 아래 10가지 일들이 선행되어야할 것입니다
사제 10계 시간 1. 아침에 일찍 일어납시다(아침형) 그러기 위하여 적어도 밤 11시엔 침대에 들어가야합니다. 밤시간은 하느님께서 우리게 쉬라고 주신 하느님의 시간입니다. 2. 성당 내에서 시간을 보냅시다
전례 3. 기도의 삶을 삽시다 그러기에 교회는 적어도 성무일도를 하도록 교회법으로 정해놓았습니다. 일 때문에 성무일도 마저도 바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알 수가 있으며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4. 강론을 잘 준비합시다 주님을 대신하여 양들을 잘 돌보아라는 말씀을 잊지맙시다. 참여한 신자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맞게 공부(연구)해야 합니다 5. 적어도 미사시작 30분전엔 꼭 고백소에 있도록 합시다 고백자가 기다리기 전에 사제가 먼저 기다려야합니다. 6. 전례, 특히 미사를 잘 준비하고 장엄하게 거행합시다(평일미사까지) 그러기 위해 미사 시간부터 잘 지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전례를 거행해야할 것입니다
생활 7. 수단을 입도록 합시다. 수단을 전례 때만이 아니라 신자들이 수단을 입은 사제를 자주 볼 수 있도록 합시다. 사제의 품위를 드러내며 자신을 지킬 좋은 도구입니다 8. 가난한 사제가 됩시다. 부유한 이들과의 만남을 자제하고 가난한 이들과 자주 자리를 같이 합시다 9. 검소한 삶을 살도록 노력합시다. 10. 노인과 주일학교 어린이, 청소년을 가까이 합시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소외받는 사람들을 가까이 합시다
하느님의 불림을 받은 복된 신부님,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푸시어 가장 보잘것없는 그대를 사제로 삼으시고 나날이 주님의 영광이 그대만을 비추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대는 나날이 그분의 별을 발견하고 그 분을 찾으며 그분께 선물을 드리는 사제가 되길바랍니다.
비록 새 사제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지만 바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하느님의 사람 사제들은 바로 이렇게 살려고 오늘도 노력하고 있답니다. 여러분도 사제들이 하느님의 불림받은 , 특별히 선택된 사람으로 복된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고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할 때 사도 요한처럼 주님의 사랑받는 사제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거룩한 사제직으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주님의 복이 가득하길 기원하며 강복을 드리겠습니다.
자비 지극하신 아버지 하느님과
언제나 함께 하시고자 우리에게 오신 아기 예수님과 항상 기쁨으로 일치시키시는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사랑하는 사람은...
-이인옥-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만이 사랑을 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흠뻑 받은 사람이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의 "품에 기대듯 자리잡고"(새번역) 있었을만큼 친밀했다. 예수께서는 중요한 사건(최초의 소생기적-회당장 딸, 변모사건, 최후의 밤-겟세마니)때는 유독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다녔다. 왜 예수님은 사도들 중에서 몇 사람에게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셨으며 그 중 한사람을 유독 사랑하셨을까? 요한은 야고보와 함께 ’천둥의 아들’이라고 불릴만큼 성격이 다혈질이고 급한 사람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냉대에 화가 나서 주님의 능력을 빌려 복수를 시도하려고 했던 적도 있고, 그의 어머니는 장차 그들을 일등공신으로 출세시키고자 치마 바람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예수님 곁에 꼭 붙어 다니던 베드로 역시 급하고 실수 잘하는 성격의 사람이었다. 어쩌면 세 사람은 남보다 더 사랑을 쏟아주고 남보다 더 교육을 시켜야할 제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든 그렇게 급하던 ’천둥의 아들’ 요한이 오늘 복음에서는 베드로에게 무덤에 먼저 들어갈 것을 권하는 겸손한 사람으로 변했다. 사랑하던 주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먼저 무덤에 달려왔음에도 동료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요한의 모습은 다른 제자들보다 우위에 서려던 야망에 찬 옛 모습이 아니다. 티베리아 호숫가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도 가장 먼저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알려주었다. 부활하신 주님의 신비를 가장 먼저 알아볼 수 있었던 비법은 무엇이었을까? 요한 복음의 저자가 만일 사도요한이라면 자신의 모습을 자신이 묘사해야하는 입장에 있게 된다. 이렇게 가정해 볼 때, 훗날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주님의 가슴에 기대고’있다고 묘사한 대목에 주목해본다. ’와서 보라’는 예수님의 초대를 듣고 첫 제자가 된 요한은 ’눈으로 보는 사람’에서 차차 ’가슴으로 보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가슴으로 보는 요한이 되었다는 것은 펄펄 뛰는 혈기로 눈에 보이는 대로 반응하는 요한이 아니라 가슴에 묻어두고 생각하고 느끼고 삭히는 요한이 되었다는 것이다. 요한은 무엇보다도 십자가 밑에서의 고통의 시간을 주님과 함께 보냈다. 온갖 기대와 희망을 걸고 쫓아왔던 최초의 시간부터 모두가 도망가버린 괴롭고 참담한 최후의 시간까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이 아니면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겠는가? 사랑은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결국 사랑이야말로 주님을 알아볼 수 있고 주님의 마음을 알아들을 수 있게 만드는 묘약인 것이다. 십자가 밑에서의 주님의 부탁인 어머니(라는 또 다른 이름의 사랑)를 모시면서 세월이 흐를수록 요한 사도의 마음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불타 올랐을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끝까지 함께 있었던 요한은 주님의 사랑을 가장 가까이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복음에서 다른 제자들보다 특별히 더 사랑했다는 말로 자주 예수님을 오해하게 만드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자신을 사랑함을 자주 확인했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랑의 고백일 뿐이다. 사도 요한의 모습을 보며, 사랑하는 사람만이 사랑을 알아 볼 수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하느님까지도 알아 뵐 수 있다는 교훈을 얻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강영구 신부-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발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대에게
어제는 첫 순교자 스테파노 축일이었고, 오늘은 복음사가 요한 사도 축일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특별히 사랑 받았던(요한21,20) 제자입니다. 사랑은 눈멀게 하기도하지만 눈 뜨게 하기도 합니다. 사랑에 눈멀면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게 됩니다. 사랑에 눈먼 사람에게는 모자람도 풍족함으로, 부족함도 충만함으로, 작은 것도 크게, 끝내 추함도 아름다움으로, 고통도 환희로, 불행마저도 행복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은 언제나 행복합니다. 사람들이 불행한 것은 돈이나 재물, 지식이나 명예가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씁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4,16)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이 되고 하느님의 권능과 생명에 참여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통해서 하느님의 손길이 사랑하는 사람의 입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사랑하는 사람의 삶을 통해서 하느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심이 아름답고 향기롭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예수님을 사랑했던 요한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말씀(요한1,1-18)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이라는 아주 독특한 사랑고백서를 남깁니다. 오늘 저와 당신은 그의 사랑고백서인 요한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납니다.(一明)
예수님의 사랑 받던 제자
-박상대신부-
예수성탄 팔일축제의 셋째 날에 교회는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을 지낸다. 사도 요한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통상 그가 스스로 집필하였다고 알려진 요한복음 자체에서보다 공관복음에 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사도 요한은 우선 갈릴래아 출신의 어부였다.(마르 1,19) 그는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야고보의 형제요 제베대오의 아들로서 12사도의 명단에 들어 있다.(마태 10,2) 복음사가 마르코는 사도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에게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 라는 별명을 붙였다.(마르 3,17) 이로써 두 사도는 매우 활동적이고 격한 성품을 가진 인물로 추정되며, 예수의 일행을 거부한 사마리아 사람들을 불살라 버릴 생각도 하였다.(루가 9,54) 요한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함께 예수로부터 총애를 받아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체험하기도 했다.(마태 17,1; 마르 9,2; 루가 9,28)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명예욕도 강하여 예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오른편과 왼편의 자리까지 부탁하였다.(마르 10,35-40)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초대교회에서도 요한과 야고보는 베드로와 함께 믿음의 기둥처럼 존경받던 사도들이었다.(갈라 2,9)
이처럼 공관복음서는 사도 요한에 대하여 그의 이름을 거명(擧名)하여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서가 사도 요한의 이름을 단 한번도 거명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반면 사도 마태오는 자기 복음서에 자신의 이름을 3번 기술하고 있으며(마태 9,9.10; 10,3), 사도가 아니었던 루가의 이름은 바울로의 서간에만 3번(골로 4,14; 2디모 4,11; 필레 1,24), 마르코의 이름은 사도행전에 5번, 서간에 4번 등장한다. 유독 요한복음만은 ‘요한’을 거명하여 다루고 있지 않다. 그러나 복음서 전체에 사도 요한을 가리키는 부분은 많다. 요한복음은 딱 한 번 ‘제베대오의 아들들’(21,2 - 21장은 추가편집 부분)을 언급하고 있으며, 그 밖에 다른 대목에서는 막연히 ‘제자’로 표현되고 있지만 문맥상 사도 요한을 지칭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밑줄을 그은 부분의 ‘제자’는 모두 사도 요한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요한복음에서 자신을 암시하는 ‘제자’로 언급된 대목을 정리하여 보자.
“다음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다시 그 곳에 서 있다가 마침 예수께서 걸어가시는 것을 보고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가신다.’ 하고 말하였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갔다.”(1,35-37) “그 때 제자 한 사람이 바로 예수 곁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였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눈짓을 하며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여쭈어 보라고 하였다. 그 제자가 예수께 바싹 다가앉으며 ‘주님, 그게 누구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줄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하셨다.”(13,23-26a)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라갔다. 그 제자는 대사제와 잘 아는 사이여서 예수를 따라 대사제의 집 안뜰까지 들어갔으나 베드로는 대문밖에 서 있었다. 대사제를 잘 아는 그 제자는 다시 나와서 문지기 하녀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갔다.”(18,15-16)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19,26-27) “베드로가 돌아다보았더니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의 옆자리에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묻던 제자였다.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주님,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21,20-21)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제자는 죽지 않으리라는 소문이 퍼졌다.”(21,23) “그 제자는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글로 기록한 사람이다.”(21,24)
위의 요한복음이 기술하는 대목들을 미루어 볼 때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던 제자(애제자)였고, 공관복음이 거론하는 바로 그 사도 요한과 동일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사도들 중에서 예수님의 빈무덤을 가장 먼저 목격하고 믿었던 자들이 바로 베드로와 요한이다. 요한이 빈무덤에 먼저 도달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를 기다린 것은 초대교회 안에서의 베드로의 수위적(首位的) 위치를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초대교부들이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을 초대교회의 직무와 열정, 권위와 사랑, 수제자(首弟子)와 애제자(愛弟子), 직무교회와 사랑교회 등으로 각각 표현한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문제로 남는 부분은 사도 요한이 정말로 요한복음, 요한서간들, 요한묵시록의 저자(著者)인가 하는 것이다. 오늘날에 이르러 성서학자들은 성서원문비판과 성서주변연구들을 근거로 이들 기록들이 요한의 저작이 아니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요한은 늦어도 60년경에 순교하였고, 통상 요한의 작품이라고 인정되었던 이 기록들이 거의 빨라도 90년 이후에 집필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의 놀라운 신학적 내용과 묵시록에 담겨 있는 구약성서에 관한 해박한 지식들을 갈릴래아 어부출신의 요한이 혼자 소화하기에는 너무 벅차다는 것이다. 요한서간들이 다루고 있는 영지주의적이고 그리스도론적이며, 윤리적이고 종말론적인 이단사상은 역사적으로 볼 때 1세기에 등장한 사조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들이 요한 사도의 친저성(親著性)을 완전히 깨는 것은 아니다. 약간의 이견(異見)이 있더라도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미덕(美德)이라고 여겨진다면, 사도 요한이 그 저자라고 인정할 수도 있다. 아니면 사도 요한의 직접적인 증언을 토대로 요한의 제자들이 집필하여 스승의 이름을 붙였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적어도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던 제자로서 다른 누구보다 스승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동참함으로써 받았던 사랑만큼 스승을 사랑했고 또 그렇게 추종했다는 것이다.
<머리와 심장이 함께 있는 이유>
-전삼용신부-
‘단숨에 독자의 심장에까지 도달하는 작가’라는 평을 받은 로버트 제임스 월러의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실화에 바탕을 둔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메디슨 카운티의 밤의 장막이 내렸다. 이 날은 1987년 그녀의 예순일곱 번째 생일이었다. 그녀는 추억했다. 추억하고 또 추억했다.
그리고 소설은 프란체스카의 회상으로 이어집니다.
1965년 미국의 어느 작은 마을. 교사 출신인 프란체스카는 농부의 아내로, 두 아이의 엄마로 무료하고 권태로운 전업주부의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런 어느 날 남편과 두 아이가 박람회에 참가하기 위해 4일간 여행을 떠나고 프란체스카는 홀로 집에 남겨집니다.
그때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기자 로버트가 메디슨 카운티 다리를 촬영하기 위해 마을을 찾아옵니다. 프란체스카와 로버트는 우연히 만나고, 짧은 기간이지만 애틋한 사랑을 나눕니다.
곧 가족들이 돌아올 시간이 다가오고... 그들은 이별해야 했습니다. 헤어져야 하는 시간, 로버트는 프란체스카에게 말합니다.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이 우주에서 이런 확실한 감정은 단 한 번만 오는 거요.”
로버트는 남은 인생을 함께 살자고 하지만 프란체스카는 대답합니다.
“당신은 낡은 배낭이고, 해리라는 이름의 트럭이고, 아시아까지 날아가는 제트 여객기예요. 나를 데리고서도 당신이 그렇게 살 수 있다고 확신할 수가 없어요. 당신이라는 멋진 야생동물을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프란체스카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열정을 이성의 차가움으로 진정시켰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이별을 맞아야 했습니다. 그 후 그들은 평생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이 살았습니다. 그렇게 가슴속에 꼭꼭 묻어 두었던 사랑. 프란체스카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자녀들에게 말합니다. 그와의 추억이 있는 매디슨 카운티 다리 주변에 자신의 잔해를 뿌려 달라고....
평생 그녀를 그리워하다가 먼저 죽어 간 로버트. 그가 죽기 전에 프란체스카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나도 결국 사람이오. 아무리 철학적인 이성을 끌어대도 매일 매순간 당신을 원하는 마음까지 막을 수는 없소. 자비심도 없이 시간이, 당신과 함께 보낼 수 없는 시간의 통곡 소리가, 내 머릿속 깊은 곳으로 흘러들고 있소.’
[출처: 내 인생의 화양연화, 28-30]
프란체스카와 로버트와의 짧은 사랑은 단순한 육체적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단 한 순간도 잊지 못할 정도의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은 가슴으로 한 사랑입니다. 그러면 프란체스카는 로버트를 따라가야 했을까요? 가족과 아이들까지 버리고 로버트와 떠났다면 이런 아름다운 - 물론 슬프기도 하지만 - 사랑이야기늘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삼류 불륜드라마가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가슴도 뜨거워야하지만 그 가슴의 뜨거움을 제어할 수 있는 차가운 머리도 함께 지녀야 인생이 고장 나지 않습니다.
오늘 사도 요한 축일을 지내는데, 사도요한은 열정과 이성이 조화를 이룬 인물로 보입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다는 말을 듣자 단숨에 무덤에 도착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애절한 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보다 먼저 무덤에 들어가 그것을 확인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조급해도 무덤 앞에서 베드로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갑니다. 이렇게 위대함은 열정과 이성이 조화를 이룰 때야만 완성되는 것 같습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도 열정만 뛰어나서 대단한 기적을 행했더라도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겸손이 없어서 제 영혼도 구원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요한은 어떤 복음보다도 깊이 있는 복음을 저술하였지만 그 안에 자신의 이름은 쏙 빼고 다른 사도들을 돋보이게 하면서 또한 겸손이 자신을 제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렇게 가슴과 머리가 함께하는 균형 잡힌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어제는 어르신 신부님들과 송년모임을 하며 술을 좀 마셨습니다. 방에 들어와서 생각해보니 조금 친해졌다고 해서 제가 어른 신부님들이 약간은 기분 나빠 할 만한 말도 한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친해지는 것도 좋지만 그분들에게 대한 예의는 지켜야 하는 것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이렇게 마음과 이성이 함께 조화를 이루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겸손이 바탕이 되지 않는 어떤 위대함도 위대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머리를 심장 위에 두신 이유는 열정을 제어하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성체성사를 세우기 전까지 가르치시기만 했던 이유는 그 뜨거움을 머리로 이해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차가운 심장도 문제지만 절제되지 않는 뜨거움도 문제입니다. 뜨거운 심장과 냉철한 이성, 이것이 함께 몸을 지탱해 주는 것입니다.
어떤 책을 보다가 이런 구절을 보게 되었습니다.
“늘 바쁘다고 하는 사람들을 수첩에 잘 적어 두었다가 연말에 살펴보게. 그런 사람들은 대게 1년 내내 별로 한 일이 없다네.”
사 실 저 역시 작년에는 정말로 입에 ‘바쁘다’는 말을 달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강의와 일들로 인해서 바쁘기도 했습니다. 제 다이어리를 보면 더 이상 일정을 적을 수 없을 정도로 항상 일정이 꽉 차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항상 쫓기는 생활을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올 초에 스스로 다짐했지요. ‘한 해 동안은 바쁘다는 말 대신에 한가하다는 말을 달고 살자’고 말입니다.
그런 데 정말로 한가했습니다. 강의도 잘 들어오지 않고, 제가 맡은 일의 양도 많이 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에 다이어리 수첩을 정리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작년이나 올해의 강의 다닌 숫자가 거의 똑같습니다. 또한 제가 한 일도 늘었으면 늘었지 결코 줄지 않았습니다.
저 의 이 체험을 통해서 느낀 것은 자신이 생각한데로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바쁘다고 생각하면 바쁜 몸이 되는 것이고, 한가하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일이 많아도 한가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아야 더 많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도 생긴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며칠 전에 어떤 수녀님께서 수도원 성탄 미사를 부탁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께서는 바쁘셔서 그 동안 차마 부탁도 하지 못했어요.”
얼 마나 바쁘다는 표시를 하고 살았으면 수녀님이 그런 생각을 했을까 라는 반성을 하게 되더군요. ‘바쁘다’라고 말하는 순간, 사람들은 그만큼 다가서기 힘듭니다. 그러나 ‘한가하다’라고 말하는 순간, 사람들도 다가서기 쉽고 그 만큼 사랑을 실천할 기회도 생길 것입니다.
오 늘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을 맞이해서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둘은 부활 소식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가지요. 요한이 먼저 무덤에 도착하지만, 무덤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수장인 베드로가 먼저 들어간 뒤에야 그도 따라 들어가지요. 요한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셨던 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사랑을 받았던 그가 왜 부활 소식을 듣고서 먼저 무덤으로 들어가 확인해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제자들의 수장인 베드로에게 그 첫 자리를 양보하는, 서두르지 않고 기다리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았던 이유가 바로 이러한 여유 있는 기다림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자신이 독차지 하려는 욕심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양보하고 첫째 자리를 넘겨주는 모습에서 주님의 사랑을 받는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 쁘다고 서두르는 모습에서는 주님을 받아들일 여유조차 생기지 않습니다. 요한 사도처럼 기다리고 양보하는 모습에서 주님의 사랑도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바쁘다면서 서두르는 것이 아니라 여유를 가지고 주님의 사랑에만 집중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가족과 친구, 소중한 이웃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사랑의 빚을 지며 살고 있다. 그러니까 행복한 것은, 언젠가 갚아야 할 빚이다(위지안).
못생긴 강아지(‘좋은생각’ 중에서)
영국의 로리 가족에게 기쁜 일이 생겼다. 집에서 기르던 개가 강아지를 아홉 마리나 낳은 것이다. 하지만 강아지들은 어미와 달리 못생겼다. 그래도 로리 가족은 튼튼하게 태어났다는 데 감사했다.
그들은 아홉 마리를 모두 키울 수 없어 신문에 광고를 냈다. 그러나 전화 한 통 걸려 오지 않았다.
이번엔 무료로 나누어 주겠다는 광고를 냈다. 그런데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막내가 말했다.
“아빠, 아무 연락도 없는데, 제일 못생긴 이 강아지는 제가 키울래요. 나머지는 한스 삼촌에게 주면 어떨까요?”
아버지는 “왜 하필 제일 못생긴 강아지니?”라고 물었다. 막내가 답했다.
“몰라요. 절망적으로 못생긴 이 강아지한테 왠지 마음이 더 끌려요.”
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이런 광로를 냈다.
“절망적으로 못생긴 강아지 아홉 마리를 나누어 드립니다.”
그러자 전화가 쇄도했다.
“저에게 절망적으로 못생긴 강아지 보내 주세요.”
누구나 연약함을 보면 보듬고 싶은 마음이 드는 모양이었다. 결국 로리 가족은 강아지 아홉 마리를 모두 나누었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의 무관심으로 소외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들이 돌보아야 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향한 기도와 보살핌이 필요한 요즘입니다.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김대열신부-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요한 20,2) ---
믿지 못한다는 것. 정말 힘들고 아픈 일이다. 마음과 마음 사이에 건너기 힘든 강이 흐른다.
믿음이란 가까움 안에서만 가능한 언어이듯이, 못 믿는 것 역시 가까움 안에서만 만들어진다. 하여 아플 수밖에 없는 상처를 만들어낸다.
믿지 못한다는 것. 정말 외로운 일이다. 내 안에도 네 안에도 진실은 뒤틀리고 만다. 실타래는 꼬여만 간다. 유치한 외로움만 고개를 든다. 마음과 마음 사이에 부수기 힘든 벽이 가로막는다.
무엇이 믿지 못하게 만드는가? 그것은 아직 사랑을 모르는 것이다. 누구나 실수는 한다. 누구나 거짓을 살 수 있다. 모자람이 없어 만들어지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사랑하기에, 사랑해야 하기에 바보 소리를 마다 않고 어느 한 쪽이 먼저 믿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기다리는 거다.
너 때문이라는 말은 하지 말자. 내 안에 모든 것이 있다.
우리가 믿고자 한다는 것은 우리가 믿어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2013.12.27)
함께 했음이 믿음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믿고자 하는 마음에 허락되는 것도 아니다.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렇다. 사랑이어야 한다.
그저 이기심에서 나온 눈먼 사랑이 아니라, 옳기 때문에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그런 사랑이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2012.1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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