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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0. 묵상글 (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 그리 흐르다. 등 )
* 김찬선 신부님 : 아직(04:44) / 예전 강론글 공유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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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0.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리 흐르다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2,38)
믿음을
믿는 이
믿음이 된다네
믿음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희망을
희망하는 이
희망이 된다네
희망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사랑을
사랑하는 이
사랑이 된다네
사랑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기쁨을
기뻐하는 이
기쁨이 된다네
기쁨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의로움을
의로워하는 이
의로움이 된다네
의로움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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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0.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ㅡ 23년, 21년 신부님 강론글 아래 공유합니다. (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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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레오나르도 신부님 예전 강론글
1. 23년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안주하는 세상 사랑과 구원하는 세상 사랑)
http://www.ofmkorea.org/542201
2. 21년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아무것도 너를)
http://www.ofmkorea.org/459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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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레오나르도 2023.12.30 03:53
12월 30일-안주하는 세상 사랑과 구원하는 세상 사랑
오늘 요한 서간은 세상과 그 세상 안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신 나머지 하느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어 오셨다고
우리는 알고 특히 주님 성탄 축일에 그 의미를 특별히 기념하는데
주님의 세상 사랑과 우리 세상 사랑은 뭐가 다르기에 사랑치 말라고 하는 걸까요?
오늘 요한 서간은 이어서 이렇게도 얘기합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이 말씀들에 비춰 볼 때 세상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주님의 세상 사랑과 우리의 세상사랑.
영적인 세상 사랑과 육적인 세상사랑.
그리고 이런 얘기가 되겠습니다.
우리는 안주하는 세상 사랑이고,
주님은 구원하는 세상 사랑입니다.
우리의 세상사랑은 영원한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지나가는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에 안주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인생이 불행해지겠지요?
그런데도 우리가 지나가는 세상을 사랑하고 안주하려고 하기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이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지
주님께서 설마 우리처럼 지나가는 세상을 사랑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사랑하게 하고 안주하게 하는 것을 육의 욕망이라고 서간은 또한 말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악이 아니고 주님처럼 세상을 사랑하면 죄나 악이 아니지만
육의 욕망에서 비롯된 세상 사랑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기에,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를 지향하지 않기에 악이고 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먼저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사랑하고,
그리고 지나가는 이 세상을 우리도 안주하지 않고 지나가면서
하느님 나라를 증거 한다면 우리도 구원하는 세상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어제는 저의 동기 수사님의 장례 미사가 있었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가신 거지요.
그래서 장례 미사를 봉헌하고 고별식을 주례하며,
돌아가셨다는 말을 새삼 의미 새김을 하였습니다.
돌아간다는 것은 온 곳으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묵상하니 고향에 돌아가듯 하나도 슬프지 않았습니다.
저도 같은 곳에서 왔으니 제가 돌아가야 할 곳도 수사님이 가는 곳이고,
수사님이 먼저 가신 것은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선명하게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성탄절에 저는
세상을 떠남과 하느님께 돌아감을 묵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여러분께 강하게 말씀드립니다.
죽지 말고 돌아갑시다.
그리고 올해 마지막 날 교회 묘지에 가면 쓰여있는 이 경구를 기억합시다.
Hodie Mihi, Cras Tibi(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
이것을 이렇게 바꿔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오늘은 네가(Hodie Tibi).
내일은 내가(Cras Mi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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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레오나르도 2021.12.30 02:28
12월 30일-아무것도 너를
미드라쉬라는 유대교 문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다윗 왕이 어느 날 보석 세공인을 불러
자신을 위해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라고 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답니다.
"내가 큰 승리를 거둬 환희를 주체하지 못할 때 감정을 다스릴 수 있고.
반대로 절망에 빠졌을 때 다시 힘을 북돋워 줄 수 있는
글귀 하나를 반지에 새겨 넣어라."
보석 세공인은 며칠동안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지만 이런 양극의 상황을
동시에 만족시켜줄 촌철살인의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며칠을 끙끙대던 세공인은 결국 지혜롭다고 소문이 나 있는
왕자 솔로몬을 찾아가서 해답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솔로몬이 세공인에게 알려준 문구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것 또한 곧 지나가리라."
솔로몬 왕자가 말했답니다.
"왕이 승리에 도취한 순간 그 글귀를 보면 자만심이 금방 가라앉을 것이고,
절망 중에 그 글을 보면 이내 큰 용기를 얻어 항상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오늘 미드라쉬에 나오는 이 얘기를 길게 소개한 이유는
오늘 서간에서 세상 것들과 세상 것들에 대한 욕망은
지나간다고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것들은 본래 지나가는 것이고 사라지는 것이니
그 욕망도 지나가고 사라질 것이며,
욕망에 따른 근심과 걱정도 지나가고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지나가고 사라질 때 우리는
허무감에 빠져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것이 사라질 때 영원하신 하느님이 우리에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구름이 걷혀야 해가 나타나듯
세상 것들과 욕망이 사라져야
영원하신 하느님이 드러나고 하느님 갈망이 생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두 성인의 뛰어난 권고를 마음에 새깁시다.
하나는 성녀 대 데레사의 기도입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다른 하나는 프란치스코의 권고입니다.
"우리는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최고선이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홀로 선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양순하시고 달고 달콤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원하지도 바라지도 말며
다른 아무것도 마음에 들어하지도 만족하지도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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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0.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024년 파리올림픽 여자 공기 소총 10m에서 올림픽 역사상 대한민국 100번째 금메달을 거머쥔 반효진 선수가 자기 노트북에 붙여 놓은 쪽지가 화제였습니다.
‘어차피 이 세계 짱은 나다.’
생각한 대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사회심리학 이론 중에도 자기 충족적 예언이 큰 효과가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특정 상황을 마음속에서 ‘실제’라고 결정해 버리면 그것에 맞게 자기 행동과 생각을 변화시켜 결국 원하는 결과를 이뤄낼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속담도 기억납니다. ‘말이 씨가 된다.’
생각의 힘이 이렇게 대단한데도 생각을 닫아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히려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생각만 하면서 자기 변화를 멈춰버립니다. ‘어차피 안 될 거야.’라면서 쉽게 포기합니다.
언젠가 방에서 나오지 않는 중학생을 만났던 적이 있습니다. 방에 나오지 않고 게임에만 몰두하고 있다면서 그 부모가 한 번 만나주길 원해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학생은 사람 만나는 것도 힘들고, 이 세계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냥 가상의 세계에서의 삶만이 이 아이에게 행복이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앞으로 엄청나게 많을 텐데 할 수 없다면서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나이 들어서 이렇게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거 해 볼 걸….”
생각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이 힘을 키우는데 주님과의 대화는 결정적입니다. 사랑이신 주님은 생각 안에서 큰 힘을 주시며, 그 힘으로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후회를 줄여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한나라는 예언자도 생각의 힘을 믿었던 분이었습니다. 주님을 뵙게 되리라는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그 생각이 한두 해의 노력으로 이루어졌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여든네 살이 될 때까지 자기 생각이 이루어지길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 결과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즉각적인 결과만을 바라면서 쉽게 포기하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포기하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일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큰 기쁨과 함께 새로운 변화를 갖게 됩니다. 진정한 행복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역경 속에서도 계속 의욕을 가져라. 최선의 결과는 곤경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마틴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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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0.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성탄 팔부 축제 제6일입니다. 태어난 지 40일 만에 아기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헌됩니다. 이 봉헌은 예언자 시메온에 의해 거행되는데, 오늘 <복음>은 그때 성전에 있던 여 예언자 한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봉헌은 구약의 사무엘의 봉헌을 떠올려줍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남편 엘카나와 함께 실로의 성소에서 노 사제 엘리를 통해, 아기를 주님께 봉헌했습니다(1사무 1,24-28). 그때에 엘리가 한나를 축복했듯이(1사무 2,20)했듯이,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시메온도 마리아를 축복합니다(루카 2,34).
또 사무엘의 경우, 성소의 문에서 봉사하는 여자들이 언급된 것처럼(1사무 2,22), 예수님의 경우에서도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긴”(루카 2,37) 여 예언자 ‘한나’가 등장합니다. ‘한나’는 7년 동안을 남편과 함께 살고, 84세가 되도록 과부로 살았습니다. 마치 밤낮으로 하느님을 예배하고 지냈던 과부 유딧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이 봉헌될 때, 예언자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루카 2,39).
그녀는 ‘은혜’, ‘호의’라는 그의 이름의 의미대로, 하느님의 은혜와 호의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마치 시메온이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루카 2,25)를 기다렸던 것처럼, 그녀는 “예루살렘의 속량”(루카 2,38)을 기다려 온 까닭입니다.
‘한나’는 시메온처럼 아기가 ‘예루살렘을 속량’할 메시아임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사가는 그 감사 찬양의 노래를 전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를 ‘한나’의 자리로 불러들이는 듯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기 예수님께 직접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지어 부르도록 말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 “대체 참된 지혜는 어디에 있는가?” 묻게 합니다.
코헬렛은 말합니다.
“지혜의 시작은 하느님을 경외함에 있다.”(3,14)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다.”(9,10)
그런데 지금 우리는 ‘무엇을 위해 공부하고 있는가?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대체 나는 ‘존경받기 위해 공부하는가? 존경하기 위해 공부하는가?’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며 영광을 드리기 위해 공부하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주님께 찬미의 노래를 불러드려야 할 일입니다. ‘한나’처럼 밤낮으로 기도하고 성전에 머물며 주님을 찬양하며 예배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37)
주님!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과부의 마음속 말을 들으시듯,
미처 말이 되지 않는 제 마음 헤아려 들어 주소서.
성전을 떠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을 떠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 면전에서 기도하게 하소서. 밤낮으로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당신의 자비에 감싸여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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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0.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만으로 족하라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그러나 현실은 인간의 욕망과 하느님의 뜻 사이에서 방황하고 걸려 넘어지며 은혜를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오늘을 감사하고 늘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희망하며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기를 기도합니다.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출신 '한나'라는 예언자를 생각합니다.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벌써 이름에서부터 행복을 누렸습니다. 한나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누엘은 “하느님은 빛이시다”는 뜻입니다. 아세르는 “행복”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빛 안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으니,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로움이겠습니까? 그는 충만한 은총 안에 있었습니다. 물론 이름 자체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은총이 많아도 담을 그릇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은총을 은총으로 알아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한나는 겉으로만 보면, 남편을 일찍 잃은 불행한 여인입니다. 그러나 여든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않고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루카2,37). 불행한 처지에 매여 있지 않고, 오히려 그 처지를 하느님을 섬기는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남편이 있다면 밤낮없이 단식과 기도로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일찍 과부가 된 것은 불행이지만 온전히 하느님을 차지할 수 있음은 행복입니다. 한나가 행복한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한나의 행복은 그의 처지나 형편에 따라 있고 없는 것이, 아니라 천상의 것을 추구함으로써 누리는 행복입니다. 주어진 현실,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를 생각할 때입니다. 주변의 환경이나 상황에 흔들림 없이 하늘을 향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한나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하여 성전에 왔다가 메시아이신 아기 예수님을 보았고 시메온이 예수님에 관하여 말하는 모든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루카2,33-35). 그리고 구원자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관해서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늘 성전을 찾아 기도한 덕택입니다. 우리도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기를 원한다면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성체 앞에서 기도하며 주님께 마음을 둔다면 감히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사랑과 기쁨, 희망과 평화로 충만히 채워주십니다. 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그분께서 네 마음이 청하는 바를 주시리라.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한나' 예언자가 하느님을 차지해서 행복하였듯이 모두가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셔서 행복하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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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0.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봄에 뉴욕에서 달라스로 왔습니다. 오니까, 교우들이 ‘창고’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전임 신부님이 창고 공사에 필요한 비용을 후원하고 떠나셨습니다. 매주 토요일 형제님들이 창고 공사를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기초를 놓았고, 바닥, 벽, 지붕, 창문, 문, 전기 공사를 했습니다. 창고가 완성된 다음에는 청년들이 멋진 벽화로 마무리했습니다. 2월에 시작한 창고 공사는 7월에 마무리되었습니다. 저도 매주 토요일 현장에서 형제님들과 함께했습니다. 전임 신부님이 선물한 것은 ‘창고’가 아니라, 창고 공사를 통해서 형제님들과 청년들을 선물했습니다. 지난 8일에 ‘사도회와 이냐시오회’의 송년 모임이 있었습니다. 사도회는 40대 형제님 모임이고, 이냐시오회는 50대 형제님 모임입니다. 모임 자리가 하나도 낯설지 않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미 창고 공사를 통해서 얼굴과 이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형제님들이 제게 물어보는 것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어떻게 사람들 이름을 잘 외우세요?’ 제가 사람들 이름을 잘 외우는 이유는 가능하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에 보던 것과는 다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자녀와 아버지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그분의 이름 덕분에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여러분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쓴 까닭은 여러분이 강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머무르며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요한 사도는 글을 쓰는 이유 3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죄를 용서받았다는 겁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을 알았다는 겁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악을 이겼다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 감사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로 저희 마음의 눈을 새롭게 밝혀 주시어 하느님을 눈으로 뵙고 알아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저희 마음을 이끌어 주셨나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성탄 팔일 축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은 친절하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성탄을 지내면서 카드를 보내는 것도, 구유 경배를 하는 것도, 선물을 보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성탄을 지내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묵상하는 것도 좋습니다. 오늘 독서는 신앙인들이 삶을 살아가야 할 방향과 목적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올해도 이제 이틀 남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363일을 욕심과 욕망 때문에 채우려고만 했어도, 오늘과 내일 마음을 비우고 나누는 삶을 산다면, 베푸는 삶을 산다면, 기도의 삶을 산다면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새로운 한 해를 선물로 주시는 분이라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나는 예수님을 만나고 축복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세상의 분주함 속에서는,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만날 수 없는 예수님이었습니다. 헤로데가 살았던 궁전에서는 예수님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율법과 규율에 얽매여서 살던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기도 중에 하느님의 뜻을 찾았던 한나는 예수님을 보았고, 축복의 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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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0.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언젠가 단식기도하시는 분들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기도의 길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쁨과 설렘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 길은 바로 주님을 향해 걷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을 만나러 향하는 길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유혹도 있습니다. 잠시 쉴 수 있는 오아시스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들려주었습니다. 드디어 주님을 만났을 때의 그 기쁨을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한나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복음에 의하면 한나는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고 합니다.
단 한 줄이지만 한나의 삶의 모습은 단순했으며 늘 하느님 곁에서,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대단한 일이며 동시에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하느님을 위해 봉사하며,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아간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부끄럽지만 저 역시 그렇습니다.
그렇게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던 한나는 드디어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봉헌합니다. 한나의 기도가 이루어졌음을 한나는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한나의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한나의 기쁨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이미 우리 마음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우리가 눈으로 알아보고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작고 작은 아기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로 오셨음에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선 한나처럼 우리에게도 단식이 필요합니다. 세상 것들을 끊어낸 시간,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시간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단식입니다.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는 단식속에서 이미 오신 주님을 만나기를 희망합니다.
⭐소유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사랑하는 것들.
삶에 필요한 것들.
나를 즐겁게 하는 것들.
그럼, 나를 소유하는 것은 무엇인가?
미움.
복수심.
분노.
시기.
질투.
파괴적인 모든 것들….
나를 소유하는 것이.
나를 지배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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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0.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마음의 창, 영혼의 창
“하느님 중심의 내적자유의 삶”
제주항공 참사...탑승객 181명 중 179명 사망, 세밑 한파 속에 모처럼 따뜻한 남국으로 여행했던 사람들, 타이 방콕발 제주항공 비행기의 무안공항에 착륙하던중 충돌, 폭발로 일어난 대 참사입니다. 179개 별이, 세상이, 우주가 사라진 것입니다. 부활축제내 어제 29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에 상상할 수 없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새벽 강론 쓰는 시간도 참담하고 무거운 마음에 주님의 자비를 청할 뿐입니다.
조속히 사고가 수습된다해도 참혹하게 죽은 사람들의 유가족의 슬픔과 상처는 얼마나 깊을지 가슴이 미어지는 듯 합니다. 참으로 한치도 내다볼 수 없는 우리의 참 허약한 삶입니다. 하루하루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한 것이 제일이겠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수록 초연한 무욕의 삶에 내적자유와 부요하고 행복한 삶이겠습니다.
불가의 사고四苦와 사성제四聖諦의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진리에 공감합니다. 생노병사, 인생사고의 삶 자체가 고통이요, 이에서 벗어나는 길은 고집멸도의 진리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집착의 탐욕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기적 나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삶만이 탐욕의 집착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고해가 아닌 인생축제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하느님 중심의 날, 성탄축제입니다. 예전에 써놨던 “좋은 창 지닌 방 하나만 있어도”란 시가 생각납니다.
“방에 있는
TV, 그림, 사진...
대부분이 군더더기
쓸 데 없는 짐
이보다 임 만드신 창문밖 하늘 풍경
살아 있는 그림
늘 봐도 새롭고 좋네
좋은 창 지닌 방 하나만 있어도
부러울 것 없겠네”<2005.12. >
예전 피정집에 안내할 때 방에 안내 받으면 피정자들이 본능적으로 확인하며 만족하며 반색하는 것이 하늘 향해 활짝 열린 창에 밝고 따뜻한 방입니다. 마음의 창도, 마음의 방도 이랬으면 참 좋겠습니다. 정말 하늘 향해 활짝 열린 창을 지닌 밝고 따뜻한 방이라면 하루종일 방에 있어도 행복할 거란 생각이 듭니다.
방의 창이 상징하는 바, 바로 하느님 향한 마음의 창, 영혼의 창입니다. 하느님 향해 활짝 열린 영혼의 창, 마음의 창을 지닌 이들이 바로 탐욕의 집착에서 벗어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한 이들입니다. 무소유의 삶에도 내적자유와 부요를 누리며 사는 무욕의 지혜로운 참 행복한 삶입니다.
정주의 관상수도자들이 늘 거기 그 자리에서 답답해 하지 않고 내적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는 비결도 이런 마음의 창, 영혼의 창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강론 쓰는 시간은 이런 마음의 창, 영혼의 창을 맑게 씻어내는 시간입니다. 이런 활짝 열린 마음의 창, 영혼의 창을 통해 은총의 햇살, 성령의 바람이 들어오고 아름다운 하느님의 자취도 관상, 관조할 수 있으니 참으로 내적부요에 내적자유의 삶이겠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이런 하느님 향한 넓은 영혼의 창, 마음의 창을 지니고 있는지요?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오늘 복음의 한나라는 여예언자입니다. 앞서의 시메온에 이어 오늘 복음의 주인공인 한나입니다. 나이가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해를 살고서는,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내면서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오로지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니 한나의 마음의 창, 영혼의 창은 정말 한없이 넓고 깊고 맑고 깨끗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구세주 탄생을 목격한 한나도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예수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중 하느님 향해 활짝 열렸던 영혼의 창을 지녔던 한나만이 예수 아기의 구원자 탄생을 체험한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의 한나가 영혼의 창을 지니고 내적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투철함으로 세상을,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초연히 바라보며 탐욕이 말끔히 사라진 무욕의 삶을 살았던 한나같습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도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세상의 무시나 멸시가 아닌 세상에 집착하지 않는 이탈과 초연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의 한나는 물론 예수님을 추종했던 모든 성인들의 삶이 이러했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많은 이들이 어리석게도 하느님 향한 영혼의 창을, 마음의 창을 지니지 못했기에, 참 보물 주님을 모시지 못했기에 세상 것들의 집착에서, 탐욕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세상 것들을 추구하지만 여전히 영혼의 목마름에 굶주림입니다. 눈들면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있는, 마음의 창 가득히 들어오는 자나깨나 늘 앞에 있는 정주의 불암산을 볼 때 마다 되뇌이는 고백시입니다.
“늘 앞에 있는
산
늘 앞에 있는
주님
이 행복에 삽니다
나는”<2024.10.25>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집착의 탐욕에서 벗어나, ‘영혼의 창’ 활짝 열린 내적자유와 내적풍요의 참행복을 살게 해주십니다.
“주님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네.”(요한1,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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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0.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한나라는 예언자가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36-37)
배필의 죽음으로 과부가 된 교회를 나타내는 한나
신비적 의미로 풀면, 한나는 배필의 죽음으로 과부가 된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녀의 나이도 교회가 주님과 멀리 떨어져 지내온 세월을 가리키지요. 일곱에 열둘을 곱하면 여든넷이 됩니다.
여기서 일곱은 일곱 날로 표현되는 이 세상의 전 과정을 나타내고, 열둘은 사도들 가르침의 완전함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삶의 전 과정을 사도들의 가르침대로 살아온 이라면, 보편 교회든 개별 신자든, 여든네 해 동안 꽉 차게 주님을 섬긴 이로 칭찬받을 만합니다.
한나가 남펀과 함께 산 일곱 해는 주님께서 육으로 사신 시간을 나타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시간 전체를 일곱이라는 수로 표현합니다.
여기서는 주님 위엄의 특별한 속성 때문에, 일곱 해라는 단순한 숫자가 완전함의 표징으로서 그분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를 가르치신 때를 나타냅니다. 또한, 한나를 주님의 은총으로 풀이하는 것도 교회의 신비로운 성사들을 확증해 줍니다.
한나는 ‘주님의 얼굴’로 불리는 프누엘의 딸이며 많은 자녀로 축복받은 아세르(신명 33,24 참조) 지파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존자 베다-
✝️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4
하느님이 그대 안에서 하느님 되게 하라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엑카르트가 말하는 참된 행위는 원초적인 창조의 행위를 암시한다. 그것은 삶과 사랑에서 솟구친 행위다. 따라서 모든 참된 행위에는 이유가 없다.
엑카르트는 “하느님은 사랑이다” 라고 한 요한의 말을 해석하는데, 이것은 하느님이 이유 없이 사랑한다는 뜻이다.
하느님은 자신의 바깥에서 어떠한 “이유”도 찾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자신을 위하실 따름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위하여 만물을 사랑하시고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보상이나 명예나 행복을 바라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과 그분의 영광만을 위해서 그분과 만물을 사랑하고 모든 일을 한다면,이것이야말로 여러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징표일 것입니다.
더욱이 하느님은 자신을 위해 사랑하시고, 자신을 위하여 만물을 사랑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은 사랑을 위해서 사랑하시고, 행동을 위해서 행동하십니다 ... 하느님에게서 태어나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하느님을 위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게 마련입니다. 그는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일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일을 할 따름입니다.(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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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1.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 떼이야르 드 샤르뎅
주님, 당신을 깊이 만날수록 당신의 영향력이 전 우주에 미침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 점을 가늠자로 하여 제가 당신 안에서 어디만큼 와 있는지를 짚어 볼 수 있습니다. 제 주변의 모든 것들이 각기 제 모습과 개성을 지켜 가지만, 다른 한편, 어떤 숨겨진 영혼에 의해 그것들이 모두 무한히 가깝고 무한히 먼 단 하나의 요소 안에 흩어져 있음을 볼 때, 하느님의 지성소에 철저히 붙들려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제가 모든 피조물의 하늘을 휘젓고 다니며 유유히 노니는 느낌을 가지게 될 때, 바로 그때 저는 세계를 향해 내려오시는 하느님 심장의 열선안에서 우주의 심장이 가 닿는 그 중심점에 근접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 우주가 백열하고 있는 그 지점에서, 일체의 내적 및 외적 활동들로부터 나온 불로 저를 태워 주소서. 이런 활동들은 당신으로부터 조금만 떨어져 있었어도 덤덤하거나 이쪽도 저쪽도 아니거나 적대적인 것이 되어 버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자신에게 복속시킬 수 있는 “에너지”의 힘을 받으면, 그것들은 당신 심장의 물리적 깊이 안에서, 당신의 승리에 찬 활동의 천사들이 됩니다. 당신의 자력으로써 이루시는 놀라운 조화의 솜씨를 통하여, 창조물의 아름다움과 부족, 달콤함과 심술, 한심한 나약성과 가공할 능력 등을 놀랍게 융화시킴으로써, 번갈아 가며 저의 마음을 환회와 즐거움으로 채워 주시고, 순결의 참 의미를 깨닫게 해 주소서. 순결이란 사물로부터의 나약한 도피가 아니라, 모든 아름다움을 두루 거쳐 뛰어오르는 도약입니다. 또 나의 마음에 사랑이 무엇인지도 가르쳐 주소서. 사랑이란 실수할까 봐 결국 아무 일도 못하고 마는 소심증이 아니라, 저희 모두가 힘을 합해서 생명의 문을 열어제치고야 말겠다는 당찬 결의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 무엇보다도 더 귀중한 것인데-‘당신께서 어디에나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며 우주를 향해 더욱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 당신을 찾아내고, 어떤 것은 적극적으로 행하고, 어떤 것은 수동적으로 당하는 등, 일체의 과정을 통해, 한 치 한 치 당신 자신 속으로 점점 더 깊이 침투해 들어갈 수 있는 복된 〈정열〉을 제 마음에 부어 주소서.
나의 하느님, 저의 모든 기쁨과 성취, 제 존재의 목적과 제 삶의 의미는, 당신과 우주가 하나로 일치되어 있다는 이 단순하고도 기본적인 깨달음에 달려 있습니다. 다른 이들이야 더욱 훌륭한 자기 직분에 따라 당신의 순수 영을 선포하라고 하십시오. 그렇지만 존재의 밑바닥에서부터 애시당초 다른 소명을 받고 태어난 저로서는, 물질을 통한 당신 육화 존재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연장(延長)밖에는 그 어떠한 것도 선포할 뜻도 능력도 없습니다. 저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 속에서 투명하게 드러나 보이는 〈영혼〉이시여, 저는 당신 〈몸〉의 신비 이외에는 아무것도 선포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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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0.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구원의 희망으로 기도하는 삶을 /
박윤식 [big-llight] 241229. 19:23 ㅣNo.178892
한 해의 끝이 이틀 남았다. 이 시기에 또 새해를 생각하니 마침은 또 다른 시작의 순간이요, 그 시작은 항상 앞선 마침과 연결되는 게 순리이다. 달이 차면 기우는 법, 완전히 기울지 않은 달은 다시 차오를 수 없는 것처럼, 우리네 인생도 시작이 있으면 마침이 있고, 마침이 있지 않고는 또 다른 시작이 없으리라. 이렇게 시작에서 마침을 보고, 다시 마침을 통해 시작을 찾아볼 수 있는 혜안이, ‘영원한 삶’을 사는 지혜이다. 겨울의 황혼은 이제 긴 밤의 안식을 준다. 한 해의 끄트머리에 각자가 가진 모든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봉헌하고픈 시기이다.
아기 예수님의 할례와 정결 예식을 거행하는 자리에는 구세주 오심을 기다리던 여자 예언자 한나도 함께하고 있었다. 불행과 슬픔을 깊이 체험한 여인이었지만, 이것이 그녀에게서 믿음을 빼앗지는 못했고 오히려 하느님을 더 굳게 신뢰하였다. 한나는 비록 84세의 고령이었지만 결코 희망을 잃지 않고 단식과 기도를 하며 하느님 백성으로 성전에서 그분의 손길을 기다렸다.
한나는 혼인하여 일곱 해만에 남편 사별하고 오로지 기도와 헌신으로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 희망은 그녀로 하여금 경건한 여인으로 만들었다. 한나는 그 오랜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성전에서 부모에 안긴 아기 예수님을 뵙고서는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이렇게 그녀는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은총을 받았다. 불행과 슬픔을 오랜 기간 깊이 체험하였지만, 그것이 그녀에게서 믿음을 빼앗지는 못했고 오히려 하느님을 굳게 신뢰하게 했다. 사실 당시 성전에는 이스라엘의 속량을 기다리며 많은 이가 기도를 드렸다. 한나가 그 중의 일원이었다. 그녀는 고령이었지만 결코 희망을 잃지 않고, 단식과 기도로 하느님 손길을 기다렸단다.
사실 그녀는 한나라는 이름이 뜻하는 대로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받았다. 그만큼 마음에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그분께서는 한나에게 은총을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구원의 때를 준비하신다. 구원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때 오기에, 우리도 겸손과 극기로 그때를 기다리자. 하느님 사명을 충실히 따르는 신앙인으로, 그분 구원을 기다리는 이가 되자.
한나가 예수님 구원을 본 것처럼, 우리도 그 구원의 은총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주님 곁에 머무르는 이는 세상의 악을 이기고 승리하는 믿는 이리라. 고통 없이는 은총도 없다. 누군가가 거저 축복받는 듯이 보여도, 사실은 누군가가 그를 위해 기도했거나 희생했기 때문일 게다. 그러니 불평과 낙담에서도 새로운 마음을 지니도록 하자. 마음을 바꾸어야만 세상이 달리 보이기에. 자신이 변해야만 주위도 자연 변화되게 할 수 있으니까. ‘죽음’마저 극복될 변화를 하자.
여든네 살의 과부 한나는 성전에서 시메온과 같은 영광을 누렸다. 그녀는 구세주의 탄생을 보며 자신이 바친 단식과 기도의 응답을 들었다. 그녀는 구세주를 직접 바라보며 기쁨에 가득 차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었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희망이었고 그것은 그녀로 하여금 언제나 최선을 다하게 했다. 한마디로 경건한 여인이었다. 설령 교회의 일에 부정적인 면이 있더라도 신앙의 끈을 쥐고는 교회 공동체와 일치하여야 할 게다. 그래야만 신앙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에. 우리도 한나 예언자처럼 인내심을 지녀서, 구원의 희망을 새기며 기도하는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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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0.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루카 복음사가는 한나 예언자의 출신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루카 2,36).
아세르 지파는 구약 성경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거나 주목받는 지파가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한나는 ‘여자 예언자’였습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로 볼 때, 출신으로나 성별로나 그리 주목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사가는 한나 예언자가 한 일에 주목합니다.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2,38).
여기서 ‘같은 때’는 시메온이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2,30-32)라고 하느님을 찬미한 순간입니다.
시메온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진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역할을 하였다면,
한나 예언자는 시메온이 선포한 구원의 기쁜 소식을 모든 이에게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루카 복음사가는 이와 같은 한나의 역할도 시메온 못지않게 비중 있게 바라봅니다.
성탄의 기쁜 소식은 교회 안에서 선포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나 예언자처럼 구원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널리 알리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성탄 축제를 지내는 우리는 모두 한나 예언자처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이웃에게 널리 알리는 매우 중요한 부르심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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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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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0.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아기가 태어난지 여드레가 되어
아기의 부모는 정결례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데
아마 마리아의 출산 후 일주일 동안
베들레헴에 머물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처럼 생각됩니다.
정결례 때 시메온과 한나를 만나고
복음은 그 일들을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쳤다'라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루카복음은
예수님의 생애 첫 일주일을 전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 이야기는 루카에만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말하는데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방문과
이집트로 피신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즉 루카복음은 다른 복음보다
율법을 지켰다는 것을 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놀라운 것은
우리가 흔히 알듯이
루카복음의 독자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유다인이 아니기에
율법을 지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인데
그들에게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었을까
생각됩니다.
할례, 정결례 그리고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만 보면
예수님은 여느 아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여느 인간과 다르지 않습니다.
즉 루카복음사가는
율법을 지키는 예수의 부모를 이야기하면서
예수가 정말 인간이 되어 왔음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간이 되어 온 예수가
예루살렘을 속량할 것이라고
한나는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예루살렘의 속량을 위한 죽음은
보여주기식이 아니라
정말 한 인간의 죽음이었음을 말하기 위해서
예수가 인간임을 강조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수많은 신화를 믿는 이방인들에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신화가 아니고 사실임을 말하기 위해
그것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우리가 신화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예수가 인간이 되어 왔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중요합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는 죽음이
정말 사실이었음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인간이 되어 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묵상하며
그것이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었음을
같이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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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0.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루카 2, 38)
아픔만
넘쳐나는
세상에서
우리를 잡아줄
참된 희망이
우리에게는
간절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시작된 희망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구원의
이야기가
성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야기는
우리의 현실로
이어집니다.
이야기를
열고 나오시는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약속이
우리 삶에서
이루어집니다.
아픔이
사랑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과
우리는
가장 친밀한
관계입니다.
지나가는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자신을
구원하는
구원의
관계입니다.
구원의 관계는
어제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의
이야기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동의합니다.
우리의
힘들고
아픈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께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유명을 달리하신
소중하신 분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계속되는
아픈 이 현실을
아프게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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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0.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둠이 깊다면, 그것은 새벽이 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하였을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아기 예수님 곁을 스쳐 지나갔지만, 다들 세상사나 자기 생각에 깊이 빠져 그분을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두 사람, 육화 강생하신 하느님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품에 안아보는 특전을 누린
예언자들이 있었으니, 시메온과 한나였습니다.
두 사람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세상 의롭고 독실했습니다.
언제나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기도했습니다.
성령께서 항상 그들 위에 머물러계셨으며, 성령의 인도로 아기 예수님께로 나아왔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여 예언자 한나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 36-37)
보십시오.
한나 예언자가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지복직관할 수 있었던 비결이 짧은 문장 안에 정확히 들어 있습니다.
이른 나이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큰 고통을 겪었지만, 그 고통 속에서도 항상 하느님만 바라보며 신앙생활에 충실했습니다.
요즘 우리 가톨릭교회를 지탱하고 있는 7-80대 자매님들처럼 단 하루도 빠짐없이 미사에 참석하며, 교회 일에 협조적이었습니다.
항상 묵주를 손에 놓지 않고 밤낮으로 기도했습니다.
한나는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는데, 신명기에 따르면 아세르 지파는 모세로부터 엄청난 축복을 받은 모범적인 지파였습니다.
“아들 가운데에서 가장 큰 복을 받은 아세르. 그는 형제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가 되어 발을 기름에 담그리라.
너의 빗장은 쇠와 구리 너는 한평생 평안하리라.”(신명 33, 24-25)
한나의 좋았던 시절 7년과 현재 나이 84세에 대한 주석가들의 해설이 흥미롭습니다.
한나가 남편과 함께 산 7년 세월은 주님께서 육신으로 사셨던 시간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84세에 대해서는, 일곱에 열둘을 곱하면 84가 됩니다. 일곱은 또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전 과정을 나타낸답니다.
열둘은 열두 사도의 완전한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한나 예언자가 84세란 표현은 그녀가 삶의 전 과정을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충실히 살아온 신앙인이었음을 강조합니다.
결국 한나는 갖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84년 동안, 아니 평생토록 충만한 은총 속에 주님을 섬겨온 신앙인의 모델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한나 예언자처럼 불행한 여인이 다시 또 없었습니다.
결혼 7년 만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냈습니다.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참으로 많은 고생을 겪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가장 불행한 인생의 대표 격인 ‘청상과부’로 60년 이상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삶을 보십시오.
그 오랜 세월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한평생에 걸친 기도의 결과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큰 상급을 내리셨는데, 그것은 바로 ‘지복직관’
하느님의 얼굴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뵙는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의 품에 안겨 계신 만왕의 왕,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품에 안아 본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상 가장 어두웠던 시기, 아무런 의미도, 아무런 희망도 없던 좌절의 시대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유다 백성들에게 보내셨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노력은 기다리는 일이군요.
비록 단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의 나날이라 할지라도 그저 기다리는 일입니다.
꼬이고 꼬인 인생이라 할지라도, 도저히 풀 방법이 없어 보이는 실타래를 손에 들고 있다 할지라도 기다릴 일입니다.
어둠이 깊다면, 그것은 어쩌면 새벽이 멀지 않았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고통의 정도가 극심하다면 그것은 어쩌면 고통의 끝이 멀지 않았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정말 너무 너무 지루하다면 기다림의 끝이 멀지 않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기다리다보면 선하신 하느님께서 언젠가 반드시 우리 앞에 좋은 날을 펼쳐놓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노고를 크게 치하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인내에 백배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한나 예언자에게 하신 그대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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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0.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2,36-40: 안나라는 과부의 기쁨
오늘 복음에서는 성전에서 기도하며 지내다가 하느님의 구원을 발견한 한나라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여인이 과부라고 소개한다. 인생에 있어서 과부라고 하는 생애는 남편과 사별을 하고 외롭고 슬픔이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남편을 잃은 슬픔은 인간적으로 참으로 비통에 빠지기 쉬운 경우라고 하겠다. 한나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뼈아픈 체험을 통하여 현세의 삶과 죽음의 허무함을 통감하여 모든 것을 하느님께 더욱 의탁하는 경우이다. 현세에서 당하는 슬픔은 단지 이런 여인의 슬픔만이 아니라,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당하는 모든 고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외면하게도 되고, 신앙의 깊이를 더할 수도 있어 그 뿌리를 튼튼하게도 한다. 이 모든 것은 그러한 고통을 통해서 결국 하느님을 자기 생활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나라는 여인은 결혼한 후 7년 동안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된 사람이었다. 84세에 이르도록 성전에 몸담아 하느님께 봉사와 기도로써 지내왔다. 이것은 하느님 공경에 참으로 정성스러운 생활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그러한 그 할머니가 성전에서 봉헌되는 구세주 아기 예수가 누구신가를 알아보고 기뻐하며 다른 이들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증언하였다고 한다. 오늘 복음의 한나 할머니는 과부가 되었으나 자신의 삶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알았고 충실히 믿었기 때문에, 또 하느님이 자신의 삶에서 최선의 분이시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성전에서 일생을 봉사와 기도로써 살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나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 아기 예수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나이를 먹고 기운이 없어져도 오늘 복음의 안나 할머니처럼 믿음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며 기도하는 속에서 구세주 그리스도를 찾고 만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 이러한 삶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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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0.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도전하지 않는 희망은 합리화된 절망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얼마 전에 어떤 신자분이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있는데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나고 싶고 힘든데 왜 나타나지 않느냐고 합니다.
저는 그저 인내를 가지고 희망하라고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빠진 것 같아 이 강론으로 설명을 대신합니다.
저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하.사.시.를 끊임없이 읽었고 단식하였습니다.
만나주실 때까지 할 작정이었습니다.
루카 복음 2장 36-40절에서는 예언자 안나가 오랜 세월 동안 금식과 기도를 통해 메시아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녀의 기다림은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기다림이었습니다. 안나는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헌신하며 기도로 하루하루를 채우며 메시아를 볼 수 있는 그날을 준비했습니다.
그녀의 기다림은 희망 속에서 도전하며 신앙을 실천하는 모범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이처럼 참된 기다림과 희망은 반드시 실천과 도전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월터 미티의 이야기는 이러한 주제를 현대적인 방식으로 잘 보여줍니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주인공 월터 미티의 삶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월터는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상상을 통해 자신을 위로하며 살아가던 인물입니다.
그는 모험적인 삶을 꿈꾸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하는 삶을 희망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의 삶은 단순히 희망과 상상의 반복일 뿐, 현실을 바꿀 용기를 내지 못한 채 정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중요한 순간 용기를 내어 자신의 상상을 행동으로 옮기기로 결심했을 때,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월터는 회사의 중요한 사진을 찾기 위해 전 세계를 여행하며 상상이 아닌 현실 속에서 진정한 모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는 빙하를 건너고, 화산이 분출하는 장면을 목격하며 자신의 상상력을 현실로 실현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두려움에서 벗어나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게 됩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사랑하던 여인과도 연결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상상과 희망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교훈을 줍니다.
도전과 행동이 동반되지 않는 희망은 단순히 합리화된 절망일 뿐입니다.
월터의 삶은 도전과 실천이 있을 때 희망이 어떻게 현실로 변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제, 또 다른 실화를 통해 희망과 도전의 힘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영화 ‘바람을 길들인 아이’(The Boy Who Harnessed the Wind)는 말라위의 한 소년
윌리엄 캄쾀바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윌리엄은 극심한 가뭄과 기아 속에서 절망에 빠진 마을에 희망을 가져다준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의 가족을 구하고자 했지만, 자신이 가진 것은 학교 도서관에서 배운 과학 지식과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폐품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작은 자원을 활용해 풍차를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이 풍차는 마을에 물을 끌어올려 농사를 가능하게 했고, 그의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윌리엄은 단순히 기적을 기다리며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희망을 행동으로 옮기고, 실질적인 노력을 통해 기적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의 아버지 역시 처음에는 그의 계획에 회의적이었지만, 아들의 열정과 결심에 감동해 마침내 협력하게 됩니다.
이렇게 바람과 아버지를 감동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도와주었다가는 자신이 바람과
아버지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교만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 희망이 당신을 감동시키기를 기다리시는 이유입니다.
결국 윌리엄은 자신의 노력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협력을 통해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우리가 단순히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음을 가르칩니다.
참된 기다림은 준비된 기다림이며, 희망은 행동으로 실현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가집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약속을 믿었을 때 무엇을 하였을까요? 약속의 땅으로의 여정을 시작하였습니다.
욥은 또 어땠나요? 자기 자신과 싸웠습니다.
예수님께 치유 받은 모든 사람들은 어떤가요? 절망하지 않고 그분의 옷자락을 만지기 위해
손을 내밀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5)
희망 자체가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희망은 믿음을 낳고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희망한다면 무엇이든 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준비된 기다림,
실천하는 기다림을 해야 합니다.
단순히 비가 오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길들일 수 있는 도전과 준비를 통해 우리의 희망을 현실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응답하며 도전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참된 희망과 기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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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0.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탄은 ‘십자가의 길’의 시작입니다.>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36-40).”
1) ‘같은 때’는, 아기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알아본 시메온 예언자가 하느님을 찬미한 때이고(루카 2,28-32),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는, 시메온 예언자가 했던 말을 한나 예언자도 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모든 이에게’ 이야기했다는 말이 시메온 예언자의 이야기에는 없고, 한나 예언자의 이야기에만 있는데, 그 차이에 특별히 중요한 의미는 없습니다.
시메온은 선포를 하고, 한나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렸다고 구분해서 생각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시메온이 하느님을 찬미한 것은 성전이라는 공적인 장소에서 한 것이고, 그 찬미를 요셉과 마리아만 들은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모두 들었습니다.
시메온과 한나는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같은 찬미를 했고, 같은 증언을 했습니다.
중요한 점은 예언자가 두 명이었다는 점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두 명의 증인은 법적인 효력이 있음을 뜻합니다(마태 18,16).
여기서는 두 예언자의 찬미와 증언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분명히 ‘하느님의 일’에 속한다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2) 시메온 예언자는 이렇게 찬미했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9-32).”
이 찬미에서 중요한 말은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만을 구원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을, 즉 이방인들도 구원하는 메시아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루카복음에서는, 시메온 예언자가 처음으로
이방인의 구원을 말했습니다.>
3) 또 시메온 예언자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예수님과 마리아의 고난을 예언한 것도 시메온 예언자가 처음입니다.
‘영혼이 칼에 꿰찔리다.’ 라는 말은, 혹독한 고통을 겪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4)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할 때 고난을 겪을 것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31-33).”
예수님께서 겪게 될 십자가 수난을 천사가 일부러 감춘 것은 아닙니다.
구약성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메시아가 겪어야 하는 고난을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루카 24,26).
<그리고 로마제국 식민지였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메시아’ 라는 말이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는, 당시 사람들은 모두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성모 마리아도 예수님께서 겪게 될 고난과, 자기 자신이 겪게 될 고난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응답했기 때문에 마리아의 응답과 순종이 위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 신앙인들 가운데에서 성모 마리아는 첫 자리에 계시는 분입니다.
5) 신앙인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어떤 길인지 알면서도 기꺼이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예비신자 교리 교육 때에도 배우는 것이고, 세례를 받은 뒤에도 성경 말씀을 통해서, 강론을 통해서, 또는 여러 가지 경로로 끊임없이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신앙생활이 이렇게 힘든 생활인 줄 몰랐다.” 라고 불평하는 경우를 가끔 보는데,
그 경우는 예비 신자 교육을 제대로 안 받았거나
성경 말씀 묵상을 제대로 안 한 경우입니다.
그게 아니면, 예수님께서 주시지 않는 것을, 즉 세속의 부귀영화 같은 것을 바라는 경우이거나,
현세적인 소원이나 비는 경우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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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0.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2,36-40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는 자리에 한나라는 예언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한시도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며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라면 밤낮을 가리지 않았던 성실한 여인이었지요. 그녀의 팔자는 참으로 기구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결혼생활의 행복을 누린 시간은 고작 7년이었고, 이른 나이에 과부가 되어 여든 네살이 될 때가지 거의 60년에 달하는 시간을 외로이 살고 있었던 겁니다. 게다가 의지할 자식조차 없었으니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며 그분의 자비에 모든 것을 맡겨드릴 수 밖에 없었지요. 그건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을 하루 하루 극복해내야 하는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었지만, 한나는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그 모든 과정을 이겨냈고 그 보답으로 구세주를 자기 두 눈으로 직접 뵙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오직 하느님 뿐입니다. 그분을 굳게 믿고 전적으로 따르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이지요. 그러나 많은 이들이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들에 쉽게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재물과 부귀영화에 마음을 뺏기고, 시기와 질투에 마음을 뺏기며, 증오와 복수심에 마음을 뺏기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하느님이 내 마음 안에 안계시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1분 1초라도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한나 예언자가 주님을 직접 뵙고 구원에 대한 확신 속에서 참된 기쁨을 누린 것은 단 한 순간도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롯이 하느님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큰 슬픔을, 세상에 혼자 남겨진 깊은 절망을 통해 하느님께 더 깊이 일치된 사람이었습니다. 고통과 시련 때문에 하느님께 실망하여 신앙에서 멀어지는 이들도 있지만, 한나는 오히려 그 고통과 시련을 하느님께 대한 자기 신앙을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드는 계기로 삼은 겁니다. 많은 이들이 상황과 조건과 환경을 탓하며 신앙생활을 하기 힘들다고 하지만, 결국 선택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핑계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면 절망과 고독 속에서 슬픈 결말을 맞게 될 것이고, 그럼에도불구하고 하느님을 따르기로 선택하면 희망과 기쁨 속에서 참된 행복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러니 세속적인 이익과 즐거움들을 누리지 못한다고 실망하거나 억울해 할 필요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고 그것을 욕망하는 내 마음도 언젠가 사그러들고 말지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분과 깊이 일치되어 그분과 함께 ‘영원’을 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희망하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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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0.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가난했던 그러나 사랑의 가정”
제가 아는 한 가정의 딸이 결혼을 앞두고 입버릇처럼 자기는 아이를 낳으면 모유를
먹이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갖게 되었는데, 병원에서 아이를
낳자마자 바로 인큐베이터에서 우유를 먹였습니다.
뒤 늦게 그 아이 엄마가 자신은 모유를 먹이겠다고 해서 우유를 중단하고 모유를
먹이려 했습니다. 그런데 모유를 먹는 것이 쉽지가 않다고 하네요. 그 아기는 우유를
먹어보아서 쉽기 때문에 엄마 젖은 안 먹으려고 보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의 사랑과 노력으로 모유를 먹고 잘 자란다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이 알고 있지만 엄마의 초유는 영양분도 그렇지만 병에 대한 저항을
갖고 있어서 아이가 병에서 이길 수 있는 힘도 길러준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왜 아침부터 본당신부가 ‘젖 타령’이이냐고 의아하실 수 있습니다.
지난 우리의 추억은 아이와 엄마는 젖 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고
아이는 엄마의 품에서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저자도 하느님 앞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을 ‘어미 품에 안겨 있는.’
또는 ‘어미 품에 있는 젖먹이 아이처럼’라는 표현을 썼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의 관계를 표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식과 부모를 잇는 가장 큰 관계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와의 관계 가족들간의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가정을 ‘인생 최초의 학교.’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동서양을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부모에 대한 효도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바로 어버이에 대한 사랑과 효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 사는 사회에서는 서로의 관계를 중시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 가정 축일입니다. 우리는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 받으려고 하고 이습니다.
그런데 나자렛을 가정의 표양으로 삼으라고 하는데 정말 그럴까요?
성가정이 우리의 생각대로라면 평화롭고 예수님의 가정 답게 모든 것이 정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모처럼 예루살렘에 올라갔던 부모는
잃어버린 자신의 아들을 찾아다닙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그를 발견하고 부모는 반가움도 있지만 원망의 목소리로
‘얘야, 왜 우리에게 이런 짓을 하는 것이냐?’ 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전혀 다른 내용읠 설명을 듣습니다. “제가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이
무엇이 이상하십니까.”‘라는 내용입니다.
하느님의 영역이 아들과 인간의 차원의 부모 사이에는 갈등을 엿보입니다.
가정의 본 모습이 어런 것 아닙니까? 서로가 같기 때문에 가정인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지만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가정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하느님의 아들이고 자신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들이지만
나자렛에서 ’순명‘하며 살았다는 사실을 복음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성가정의 어려움을 또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지금으로 말하면 막노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직업이 목수라고 하지만 일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생활이 그렇게 넉넉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활에서 제일 민감하게 오는 것은 바로 생계에 대한 의무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님의 가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으로는 늘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 세상에 제일 서러운 것은 가난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바로 가난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성 가정의 가장 큰 모습은 바로 하느님 중심의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가정이야말로 가난하고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주고 서로의 갈등을 묶어주는 것입니다.
오늘 나자렛의 성 가정 대축일을 맞이하며, 부모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이 자리에 있게 하신 분들은 바로 우리의 부모, 아버지 어머니라는 사실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고국에서 가난에 쪼들리고 전쟁에 피난살이 하던 그 부모님들이 없었다면,
어쩌면 생각하기도 싫었던 꾀죄죄한 우리의 부모님이 안 계셨더라면
우리의 지금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가정 축일을 맞는 우리는 먼저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기도하며 감사하는 오늘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에게는 가난했지만
정직했던 부모님을 갖고 있는 지금의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어제 우리 본당의 청년들이 송년 파티를 열었습니다.
우리 김신부와 저도 초대를 받았습니다.
한 말씀해달라고 해서 청년들이 귀가 닳도록 들어왔던 ‘옛날에는 말이다.’로 시작하는
가난하고 고생했던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터전 위에 청년들이
이 땅에서 희망을 키우라고 했습니다. 몇 몇 청년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와서 그런 말씀에
대한 고마움을 아주 서툴게 표현해서 저도 사실 기뻤습니다.
주님께서 걸으셨던 가난, 순명, 하느님 사랑의 길을 우리도 가야합니다.
무엇보다도 가난했지만 비굴하지 않았던 그리고 올바르게 살아오려 했던
우리의 부모님과 삶고 우리의 삶을 이 땅에 심고 젊은이들이 그 처전에서 희망을
가꾸게 해야 합니다.
너무 어둡고 심각한 분위기의 말씀을 드렸나요?
제가 알고 있는 강원도 한 산골의 한 가정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아이들만 여덟이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저에게 들려주었는데 몇 번이나 웃었고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또 하나의 저의 이야기 이기 때문입니다. 식사할 때는 가관입니다.
큰 양푼에다 밥에다 감자를 쌓아두고 온 식구가 그 둘레에 앉습니다. 어린 나이에
그 밥은 바로 산과 같이 높지만 입이 여러개라 순식간에 먹어치웁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행복하고 그것을 듣는 저도 웃었습니다. 제가 그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잠 잘 때가 더 가관입니다. 커다란 이불이 하나입니다. 거기에 형도 누나도
누이도 함께 잠을 잡니다. 그런데 자다가 추운 겨울에 밖에 나가 오줌을 누고 들어옵니다.
사방이 캄캄해서 마당 한 켠에서 그냥 누고 들어옵니다. 들어와 보면 잠자던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지 알아요? 발을 하나 형과 누나 사이에 집어 넣고 날싸게
들어가면서 몸을 흔들면 자리가 하나 생기고 그 안에서 아침까지 자는 것입니다.
더 웃기는 이야기 할까요? 아침에 일어나면 일어나는 순서대로 양말을 신습니다. 제
일 먼저 신는 아이는 그래도 온전한 양말을 신습니다. 맨 나중의 아이는 발꿈치가 다 나간
양말을 그래도 좋다고 신고 학교에 가야 합니다.
곁들어 더 웃기는 이야긴 하나 더 할까요?
지금처럼 우리가 씹는 껌이 아닙니다. 그래도 대대로 내려오는 껌이 있습니다.
매일매일 커지는 껌 이야길입니다. 껌을 씹다가 아무도 못 씹게 침을 뱉고 벼개를 고이고
높이 붙여놔도 일어나서 먼저 씹는 아이가 임자입니다. 그런데 그 그 껌이 커지느냐면
벽에 붙였는데, 벽지까지 붙어서 떨어지고 떼어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강원도 산골의 이야기이지만 어디선가 들었던, 아니면 내 자신이 그곳에 있었던
정다움이 있습니다. 가난했지만 우리의 가정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대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직함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것은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가정의 소중함을 거짓을 일삼는 삶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바로 가난한 가정의 삶이 있었다는 지난 일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성가정 축일을 맞이하며 더욱 이 땅에서 가정성화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하느님 중심의 가정,
그래서 때로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나가 되고 힘이 되는 가정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정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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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0.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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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0.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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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0.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우리의 편이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
<2024.12.30> 아침을 여는 묵상 (시 118:1~13절)
❝우리의 편이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
❚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시니 그 무엇도 우리를 해할 수 없습니다.
✔ 어떠한 삶이어야 합니까?
➲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감사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4절).
시인은 회중들에게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명하고 있는데, 인생의 가장 중요한 본분은 여호와께 감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라’는 ‘찬양하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감사와 찬양은 불가분의 관계이며, 감사는 찬양의 한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여호와께 감사해야 하는 이유는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하며 예배를 드리는 세 그룹은 ‘이스라엘’과 ‘아론의 집’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입니다. 이 세 그룹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공동체를 대변합니다. ‘이스라엘’은 예배하는 회중을, ‘아론의 집’은 예배를 집례하고 봉사하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앞장서서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만백성에게 알려야 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분께 의뢰하는 자들의 부르짖음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사랑은 이기적이고, 일시적이지만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사랑은 선하시고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간구에 응답하시는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양이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은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총을 고백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본 사람이라면, 그리고 구원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각자에게 맞는 복과 은사를 주시고 한없이 풍성한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을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께 고통중에서 기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5~7절).
시인이 여호와께 감사하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셔서 구원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시인을 옥죄는 매우 좁은 곳이 고통의 상징이라면, 그런 고통에서 구원받아 자유롭게 되는 것이 ‘넓은 곳’이라는 말입니다. 즉 넓은 곳이란 시인을 괴롭히던 위협과 위험들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고통과 불안으로부터 자유를 나타냅니다(5절). 시인은 자신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자신의 편이시라는 사실을 두 번이나 강조합니다. 여호와께서 시인의 편이라는 말은 여호와께서 시인을 도우시는 분이시라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7절)라는 표현은 여호와께서 시인의 강력한 도움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인의 편이 되어 주시니 어떤 나라와 군대로 그를 헤칠 수 없고, 도리어 그를 미워하는 자들이 패하게 될 것입니다.
늘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고 결국은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 중에 있을 때, 환난의 힘든 여정을 걷고 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간구하고 부르짖는 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진실함을 믿고,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신뢰하는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육체의 고난과 영적인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여 내십니다. 아무리 큰 능력과 권세가 있는 자라 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무기력한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 되심을 확실히 믿으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앞서 행하시고 앞서 싸우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신뢰하는 삶이어야 합니다(8~13절).
시인은 사람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더 좋다(8~9절)라고 선언합니다. ‘피함’의 뜻은 ‘바위’, ‘힘’, ‘안전한 피난처’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에 대해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위기와 고난을 만날 때 항상 적용해야 하는 신앙의 원리인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피하는 것이 전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나라들이 사방에서 자신을 에워싼다 할지라도 ‘...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물리...’(10~11절) 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벌 떼처럼 주위에 몰려들지라도 불타는 가시덤불처럼 빠르게 타 없어졌고, 뒤로 밀려나 넘어질 뻔하였지만, 여호와께서 도우셨다...(12~13절)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고난과 인생에 닥치는 환난 속에서 아니 어쩜 매 순간 하나님을 신뢰할 것인지 사람을 신뢰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오늘 시인이 선택한 것처럼 우리 역시도 하나님을 신뢰하겠다고 결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피난처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신뢰하게 되면 그 순간은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나 결국은 실패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을 신뢰하면 어려운 듯 보이나 결국은 승리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사람들의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께 피한다는 것은 하나님께만 소망을 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살아갈 때, 원수에게서 구출되며, 기도의 응답을 받으며, 올바른 길로 가게 되며,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마음의 평안을 얻는 축복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날개 아래 피할 때 하나님은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심을 믿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영원히 우리의 편이 되셔서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그늘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살아갈 뿐 아니라 우리의 절대적인 피난처가 되어 주시며, 안전한 평강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만을 온전히 신뢰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시 118:1~13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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