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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 독살로 읽는 세계사 』
세계사를 재미로 읽게 하는 이 책은 아주 흥미롭다. 저자인 ‘엘리너 허먼’은 미국 볼티모어에서 태어나 편집자 겸 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나이가 좀된 그녀는 버지니아주 메클레인 집에서 남편과 살면서 고양이를 4마리나 키우고 있고, 가끔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하지만 영화 관람보다는 따끈한 버터 팝콘을 먹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책은 러시아 언론인이자 시민운동가인 ‘볼라디미르 카라 무르자’에게 바친다고 했는데, 러시아 정부가 두 차례나 독살을 시도했지만 꿋꿋이 살아남아 “바로크 시대와 함께 막을 내린 줄 알았던 정치적 독살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보여준 당신은 암울한 역사의 산증인입니다.”라면서, 무자르를 칭찬해 소개하기도 했다.
[넘쳐나는 독약]
역사는 평화 시대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지 않지만, 암울하고, 암담하고, 암살을 일삼던 시대는 오래도록 기억하는 것 같다. 암살은 주로 독약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은 김정남의 암살 장면을 봐서도 알 수 있다. 17세기까지도 독약이 활발히 거래되었는데, ‘줄리아 토파나’라는 여성은 나폴리와 로마에서 50년 동안 독약을 팔다가 붙잡혔고, 1659년 쳐형되었다. 그녀는 무려 600명의 목숨을 빼앗을 정도로 독약을 많이 거래했다고 하는데, 주요 고객은 미망인이 되고 싶어 하는 여성들이었다고 한다. 비소, 납, 벨라토나(가짓과 여러해살이 풀)혼합물로 만든 이것은 빛깔과 냄새가 없고 포도주와 잘 섞였다. ‘아쿠아 토파나’라고 한 이 독약은 그녀가 죽은 뒤에도 오랫동안 인기를 끌었단다. 그녀는 감시를 피하려고 성화가 그려진 유리병에 독약을 담아서 성수로 위장하거나 화장품처럼 팔았다고 하는데, 고객이 미망인이라니 의아하지 않은가?
1676년 브랑빌리에 후작 부인이었던 44세의 ‘마리 마들렌 도브레’는 부친의 땅을 상속받기 위해 아버지와 두 형제를 독살한 죄로 처형당했다. 그녀는 심문 과정에 이렇게 말했다. “상류층 절반은 이런 일에 연루되어 있어요. 내가 입을 열면 여럿 다칩니다.”실제로 그녀의 말대로 재판과정에서 관료를 포함해 319명이나 파리 인근에서 체포되었는데 모두 연관된 증거가 있었다고 한다.
모기가 매개체인 말라리아는 오래전부터 죽음을 몰고 왔다. 고대 로마황제들은 모기 온상인 습지대를 없앤다고 했지만, 근절시키지는 못했다. 추기경, 왕자, 장군뿐 아니라 교황조차 말라리아에 걸려 죽곤 했다. 그러나 이때는 사람들이 독살당했다고 생각했다. 말라리아 증세와 독약 중독 증세가 헷갈렸기 때문이다. 1503년 8월 초, 교황 알렉산드르 6세와 그의 사악한 아들 체사레는 로마 근교 포도원에서 추기경 코르네트와 식사한 뒤, 8월 12일 셋 다 몸져누웠다. 사람들은 체사레가 추기경을 독살하려다 자기들도 독이 든 포도주를 마셨다고 수군됐다. 하지만 비소에 중독되면 증상이 나타나기까지 일주일까지는 이상이 나타나지 않는 사실을 감안할 때, 세 사람은 말라리아에 걸린 것이 확실하다고 의사들은 진단했다.
지금도 성형이나 화장품을 잘 못 해서 얼굴을 망가뜨리는 경우가 있지만, 18세기에는 치명적인 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영국 최고 미인으로 꼽혔던 ‘마리아’라는 여성은 화장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그녀의 눈은 퉁퉁 붓고, 잇몸은 내려앉았고, 치아가 흔들렸고, 머리카락은 빠졌으며, 깨질 듯한 두통에 몸을 덜덜 떨기까지 했다. 하지만 남편조차도 그녀의 숨 막힐 듯한 하얀 피부와 새빨간 볼연지에 감춰진 민낯을 볼 수는 없었다. 그녀의 두꺼운 분칠을 싫어했던 남편은 1752년 유력인사들이 모인 성대한 파티에서 그녀의 짙은 화장을 지우는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지만, 결국은 단념하고 말았다. 수은이 들어간 파운데이션을 사용하면 주름과 피부발진, 주근깨와 심지어 정신혼란, 성적환상, 신에게 노여움을 샀다는 표식이라고 믿기까지 했으니 피부를 환하고 투명하게 만들어주는 이것이야말로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몸에는 해로워 기형을 유발하고, 타액이 과도하게 분비되며 치아가 거무스름하게 변하고, 쇠 맛이 느껴지기도 하여, 육체뿐 아니라 우울증과 편집증 같은 정신적 문제도 발생한다는 것을 그녀는 몰랐던 것이다.
요즘도 북한에서는 영부인 이설주가 입은 옷과 머리모양을 따라 한다고 하는데,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때도 그랬다고 한다. 여왕이 빨강머리로 염색하자 이것이 유행했다고 하고, 1660년 영국에서 가장 명성이 높고 부유했던 의사 토마스 윌리스는 폐질환을 치료하면서 말, 수탉, 황소, 비둘기 똥으로 만든 음료를 처방했다고 하는데, 당대 최고의 의사였던 그가 개똥과 아몬드 기름으로 만든 연고를 바르는 것이 효과 있다고 믿었고, 황달에 걸린 사람에게는 양과 거위 똥으로 만든 혼합물을 먹게 했다고 하고, 살아 있는 이(louse, 蝨(슬)를 아홉 마리나 삼키라고 하기도 했다고 한다. 쥐똥이 변비에 특효라고 조언하기도 했는데, 아마도 독성물질이 몸에 들어왔을 때 그것을 빨리 배출하려고 몸이 반응했을 테니 그것을 효과라고 본 것은 아니었을까.
어느 시대든 변이 딱딱하면 강제로 배출하는 방법을 쓴다는 것은 상식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강력한 변비약은 수은으로, 보통 액체로 된 수은은 섭취했을 때 거의 해가 없다. 미량만 흡수되고 대부분 대변으로 배출되기 때문이다. 프랑스 왕실 의사 앙브루아즈 파레는 1585년 “수은은 꼬이거나 막힌 장을 풀어주고 몸속에 쌓인 대변을 강하게 밀어낸다.”라면서 변비치료제로 강아지에게 수은을 먹인 뒤에 강아지가 싼 똥을 식초에 넣고 끓인 액체를 추천했다. 수은과 비소를 넣은 변비약은 그로부터 200년 뒤에도 ‘영구적 알약’형태로 유행해 팔렸다.
중세에는 매독이 성행했는데, 그것은 성이 문란해서라기보다 사람들의 면역이 약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프랑수아 1세 왕의 보석 세공사였던 벤베누티 첼리나라는 남자는 1529년 29세의 나이에 매독이 걸리자 당시 유행한 수은 치료를 거부하고 버텼다. 치료에 따른 부작용이 워낙 큼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면서 원래도 성마르던 그는 감정 기복이 심해져 과대망상과 편집증에 빠졌다. 화가 난 동업자들이 그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은 연회에 그를 초대해 수은을 소금에 섞어 그에게 먹였다. 첼리나는 극심한 복통에 시달리며 며칠 동안 사경을 헤매다 깨어났다. 치사량에 미치지 못해 죽지는 않은 것이다. 그러나 매독균을 죽이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매독이 치료되어 그로부터 42년을 더 살았다.
1524년 54세로 숨진 이탈리아 왕족인 이사벨라 다라고나는 매독치료에 운이 따르지 않았다. 1994년 이탈리아 파사대학교 지노 박사는 나폴리의 산도메니코마 대성당에서 그녀의 시신을 발굴했을 때, 치아가 모두 두꺼운 녹으로 덮여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몸에 있던 수은이 빠져나와 치아를 검게 만든 것이었다. 문제는 미술가들은 이사벨라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모나리자〉의 모델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녀가 왜 입을 다물고 미소를 짓는지 납득이 되고 남는다.
세상에 식인종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치료를 위해 사람을 먹었다는 이야기는 〈전설의 고향〉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다. 사람 몸에서 영혼은 떠났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생명이 깃들어 있다고 믿은 것이었을까? 그러나 자연사하거나 노인처럼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 사고로 죽은 사람의 시신으로 만든 약은 쓸 수 없다며, 그런 몸은 그냥 벌레나 먹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한다. 유럽 사람들은 사람 살로 만든 약을 ‘무미아’라고 했는데, 약은 사형 집행인으로부터 구했다 영국 찰스 2세와 월리엄 2세,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를 비롯한 군주들까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식인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철의 군주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식인을 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그녀가 총애했던 의사 2명이 다른 환자들에게 식인을 추천했다는 기록은 있다.
지난 2013년 16세기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아이들 유해 9구를 조사한 적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비타민D 결핍으로 기형이 된 상태로 구루병을 앓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중에서 6명은 뼈가 물렁물렁한 상태로 기거나, 걸으려고 하다가 팔다리가 휘었고, 두개골이 기형인 아이도 있었다. 햇빛을 쪼이기만 하면 비타민D를 형성할 수 있지만, 사악한 기운과 바같 공기로부터 보호한다는 이유로 갓난아기 때부터 햇빛이 들지 않는 궁 안에서만 지내게 했기 때문이었다.
〈사람 잡는 연금술〉
연금술이란 납과 수은을 비롯한 여러 금속을 황금으로 바꿀 수 있다는 전설의 물질, ‘철학자의 돌’을 찾는 과정을 말한다. 1720년 무렵에는 연금술이 바보나 사기꾼의 영역으로 여겨졌지만, 이것이 과학 발전에는 기여하기도 했다. 연금술사들이 화학의 기초 원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영국 찰스 2세 왕은 연금술로 연구실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다 중독되어 죽었다. 전쟁과 사치스러운 연인들 때문에 재정적으로 쪼들리던 그는 연금술로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작가 사뮤엘 피프스는 그가 ‘예쁜 장소’라고 묘사한 곳을 돌아본 다음 “화학물질을 담아둔 유리병이 즐비하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뭔지는 알 수 없었다”라고 했다.
만성중독에 걸린 사람처럼 행동하기도 했던 왕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낙천적이 되었지만, 불안하고 예민해져 우울증에 시달렸다. 신하들은 54세의 왕이 나이가 많아 성격이 까다로워졌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1685년 2월 2일 연구실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고, 왕은 치사량의 독소를 들이마셨고, 쓰러져 경련을 일으켰다. 이런 증상을 세 번씩 보였으며 한동안 실어증을 앓기도 했다. 열두 명의 의사들은 왕의 몸에서 사악한 체액을 빼내기 위해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했다. 피를 한 번에 450그램이나 뽑기도 했으며, 달궈진 인두로 머리를 지지기도 했다. 구토와 설사를 하도록 유도했고, 왕이 경련을 일으키는 동안에 혀를 깨물지 못하도록 입에 막대기를 밀어 넣어 목구멍에 상처가 나기도 했다. 2월 6일 금요일, 정오가 되기 바로 전 왕은 증상이 시작된 지 4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부검을 담당한 의사들은 왕의 처참한 뇌를 보고는 당황했다. 일반적인 뇌졸증과는 완전히 달랐다. 왕은 마비증상을 보인 적이 없고, 실어증도 잠시만 나타났다가 회복되었다. 다른 장기는 다 정상이었으며 뇌출혈도 없었다. 부기나 종양도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뇌를 감싸고 있는 아주 맑은 액체가 혈액 단백질을 포함하는 혈청 속에 섞여 있었는데, 이것을 현대 의학에서는 혈액뇌장벽이 손상된 것으로 본다. 그것은 혈액뇌장벽에 유독한 물질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것을 통과할 수 있는 물질은 하나밖에 없다. 바로 수은이다.
몇 년 뒤, 아이작 뉴턴도 찰스 2세와 같은 운명에 처했으나, 그는 살아 남았다. 1683년 50세의 뉴턴은 자신이 박해를 받고 있다는 망상에 빠졌고, 결국 친구들에게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선언한 뒤에 은둔생활로 들어갔다. 그는 편집증, 불면증, 식욕부진처럼 수은중독에서 비롯된 증상으로 고통을 받았다. 1979년 잘라두었던 뉴턴의 머리카락을 분석한 결과 납, 비소, 안티몬이 보통 사람의 4배, 수은은 15배나 검출되었다. 자신의 화학실험실에서 발생한 치명적인 수은 증기로 고통을 당했던 찰스 2세와 달리 뉴턴은 약한 중독 상태로써 오래 생존했다. 6개월을 앓은 그는 중독되었을 때보다 조금 나은 이전 상태로 돌아갔고, 84세까지 살았다.
[유럽 왕실의 독살사건]
고대부터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독살이 사용되었는데, 사실은 독살이라고 알려졌을 뿐 독살이 아니거나 수은·비소 등에 의한 중독사일 경우도 있다. 불결한 환경 속에 비롯된 감염사일 수도 있다. 로마제국이 몰락하고, 3세기가 지난 800년경에 서로마제국의 샤를마뉴는 황제 직위를 부활시켜 그 자리에 앉았다. 이후 1313년 8월 8일, 숨이 턱턱 막히는 날씨에 38세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7세는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피사를 떠났다. 그는 앞으로 닥칠 전쟁의 참상을 떠올리며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로부터 16일 뒤, 적을 앞에 두고 황제는 숨을 거두었다. 독살이 의심되는 사건이었다. 2013년 시신을 조사한 이탈리아 연구자들은 그의 죽음에 대하여 의문을 품었다. 당시에 알려진 것처럼 독이 든 포도주를 마시고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당시 유럽은 교황파와 황제파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이상주의자였던 하인리히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탈리아반도에 평화를 선물하고 싶어 했고, 그 기회를 잡고자 했다. 기독교인답게 분쟁을 잠재우고 사랑을 실천하며 새로운 황금시대를 열고자 했다.
하인리히는 북부에 도착해 죄수들을 풀어주고, 통치기구를 개편하고, 정치적 추방령을 거둬들이고, 압류 재산을 돌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강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는 등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전쟁에 지친 국민들은 그를 ‘평화의 왕’이라 불렀지만, 다수 시민들은 황제의 통치에 공포를 느꼈다. 하인리히는 지역 분쟁에 휘말려 어느 한쪽을 편들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그러자 반대편이 반기를 들었다. 가장 무서운 적은 교황의 대변자이자 나폴리의 왕이었던 로베르토였다. 1312년 6월 로마에 입성했을 때 그를 막고 있는 군대는 로베르토의 동생이 이끄는 군사였다. 곧바로 맹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결국 성베드로대성당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성요한 성당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하지만 돌을 던져대는 방해자들 때문에 황제는 피신해야만 했다. 분노와 좌절에 빠진 황제는 평화와 용서라는 진부한 가치를 내려놓고, 전쟁에 돌입했다.
8월 8일 몸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의사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출정했다. 그는 먼저 로베르토가 다스리는 시칠리아로 향해 함대를 출항시켰다. 그러나 전진 속도는 매우 느렸다. 몸에서 열이 났고, 엉덩이에 난 종기를 치료하느라 여러 곳의 온천에 들렀기 때문이었다. 군사들이 병들었고, 귀족들도 여럿 죽었다. 탄저병이 유행했던 것이다. 탄저병은 사람 사이에 전염되는 경우는 드물지만, 페스트처럼 매우 위험한 전염병이다. 동물의 사체와 함께 땅에 묻은 탄저균은 수백 년이 지난 뒤에도 감염력을 가진다. 탄저병이 창궐했을 때는 “말이 풍기는 악취”라고 하는 냄새가 심하게 났다. 아마 처음에는 말이나 짐승에게서 탄저병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탄저병에 걸린 소나 말의 고기를 제대로 익히지 않고 먹으면 병사들에게 그것이 옮겨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하인리히는 건강의 적신호를 애써 무시하고 남쪽으로 진군했고, 이탈리아의 구원자가 되었을지 모를 그는 3일간 고열에 시달리다 숨졌다. 수행원들은 그가 성찬식에서 포도주를 마시고 독살되었을 것이라고 했는데, 포도주는 감별 과정을 거치지 않고 신부가 황제에게 직접 전달하기 때문으로 황제의 고해신부였던 베르나디노 신부가 독살범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그는 현명하게도 황제가 죽은 뒤 바로 자취를 감췄다. 이탈리아에서 8월에 열병으로 죽었다면 말라리아를 떠올릴 것인데, 말라리아에 걸리면 종기는 나지 않는다. 황제는 아마도 피부탄저병으로 생긴 상처를 통해 감염된 피부로 들어온 독소가 혈관으로 퍼져서 독혈증을 앓았고, 고열에 시달리다 숨졌을 것이다.
황제는 임종 때 자신의 시신을 피사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황제의 죽음으로 절망에 빠진 측근들은 시신을 북쪽으로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8월의 더위에 시체가 썩으면서 냄새가 났고, 탄저병 환부의 악취도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당시 유럽에서 유행한 방식으로 먼저 머리를 자르고 나머지는 삶은 뒤 피부와 근육을 벗겨내고 뼈를 추려 악취가 나지 않게 해서 유해만 피사로 가져갔다. 그런 다음 거대한 무덤을 3년 뒤인 1315년에야 만들어졌다.
2013년 하인리히 서거 700주년을 맞이하여 피사대학교 연구진은 왕의 무덤을 열었다. 은으로 만들어 금박을 입힌 왕관, 홀, 구슬 등이 나왔다. 유골은 금실과 은실로 수놓은 수의에 감싸있었고, 까맣게 탄 뼈를 분석한 결과, 키는 175㎝가량, 기골이 장대했고 허리 아래쪽 근육이 특히 발달해 있었다. 다리가 안쪽으로 조금 흰 것으로 보아 많은 시간 동안 말 위에서 지낸 것이 분명했다. 뼈에 축적된 비소의 수치가 조금 높았지만, 독살로 볼 증거는 아니었다. 만약 신부가 성찬에서 비소가 든 포도주를 주었다면 그것이 뼈에 도달하기 전에 죽었을 것이고, 간이나 위에 있었을 것인데, 뼈에서 검출되었다는 것은 오래전 혹은 몇 주, 몇 달 전에 흡수되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런데 뼈에서 비소가 검출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탄저병 치료에 비소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의사들도 비소의 독성을 알았지만, 소량의 비소로 탄저병의 피부질환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것이 어떻게 치료 효과가 있는지까지는 몰랐다. 하인리히는 열병으로 죽었다. 하지만 수개월 혹은 2년에 걸쳐 수은 등에 중독되는 동안 체력이 약해지면서 끝내 굴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영국의 헨리 8세 왕은 여러 명의 왕비를 두었는데, 첫째 부인은 아들을 낳지 못해 이혼당했고, 둘째 부인도 같은 이유로 참수됐다. 셋째 부인인 제인 시모어는 귀족의 딸로 결혼 16개월 만에 그토록 기다리던 왕위 계승자 에드워드 6세를 낳았다. 왕자가 9살이 되던 해 헨리 8세는 돼지고기 요리를 과식해 죽었다. 그는 16명의 섭정위원회 위원들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에드워드를 잘 부탁한다고. 그러나 어린 왕자의 외삼촌인 시모어가 위원들에게 뇌물을 주고 모든 권한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모어의 오만과 무능력에 불만을 품었고, 경제가 어려워지고 종교 다툼까지 생기면서, 위원회의 워릭 백작이 1549년 10월 7일 쿠데타를 일으켜 시모어의 형제들을 죽였다.
어른들의 이런 몹쓸 짓에도 에드워드는 품위를 지키며 여전히 학문적 열정을 갖고 헌신적인 군주가 되려고 했다. 그는 매우 건장한 청년으로 자라났다. 1552년 그가 19살이 되었을 때 기침을 심하게 하면서 쇠약해졌는데, 그가 이를 극복하자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이듬해 2월 그는 다시 몸져누웠다. 몸에서 열이 나면서 고통스러워했으며, 특히 오른쪽 장기에서 통증을 느꼈다. 5월 중순 잠시 회복 기미를 보였지만, 곧 악화되었다. 초록, 검정, 노랑, 등 칙칙한 가래를 뱉어냈고, 온몸에서 피부 궤양이 생기고 진물이 흘렀다. 일부는 딱딱해졌지만, 어떤 것은 아물지 않고 벌어진 채로 있었다. 머리와 발은 기괴한 모습으로 부어올랐으며, 의사들이 준 아편을 먹지 않고는 잠들 수조차 없었다. 에드워드는 자신이 이 병으로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병상에 모인 위원회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짐에게 적법한 계승자가 없을 경우 첫째 누이인 메리 공주와 둘째 누이 엘리자베스가 차례로 왕위를 잇게 한 아버지 헨리 8세의 유지는 따르고 싶지 않소”위원들은 무척 놀랐다. 에드워드는 누이 두 사람이 모두 왕이 될 수 없다고 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왕위를 물려받아야 할까? 메리의 딸 프랜시스가 이을 수 있었다. 프랜시스는 아들이 없었지만, 세 딸 중 열여섯에 이미 종교개혁가로서의 면모를 보인데다 그녀의 장녀 제인 그레이가 차기 영국 여왕이 될 터였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외삼촌 노섬벌랜드(시모어)공작은 자신의 아들인 길포드를 제인과 결혼시켜 미래의 왕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기능을 잃고 손톱과 머리카락이 빠지고, 피부에 딱지가 덕지덕지 붙었다. 그래도 그는 다음 달까지 버티다 7월 6일 죽었다. 사람들은 그가 자연사처럼 보이도록 오랜 기간 중독시켰다는 소문이 돌았다. 런던의 의류상인 헨리 마킨은 “고귀한 왕 에드워드 6세는 모두가 말하는 것처럼 독살당했다.”고 기록했고, 프랑스 대사는 왕이 독살되었다고 수군거리던 사람들이 감옥에 갇혔다고 보고했다. 또 당시 상황을 관찰한 이탈리아인 한 사람은 “그가 오래전부터 서서히 중독되었다고 의심할 만한 정황이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왔다.”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독살에 대한 이런 소문과 달리 시신을 검시한 당시 의사들은 “전하가 승하하신 이유는 폐질환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폐에서 커다란 구멍 두 개를 발견했고, 둘 다 부패한 상태로 쾌차하기 어려웠을 것이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후에 현대의 의사들은 뭐라고 할까? 에드워드 시신은 웨스트민스터사원 지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다. 그의 시신은 조사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웨스트민스터사원의 주임 사제 마이클 메인 신부는 “우리는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사람들이 아니다.”라면서 무덤 열기를 거부하고 있고, 작년에 타개한 엘리자베스 2세도 조상들의 시신 발굴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영국의 군주제는 혈통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왕의 유해를 연구하다 보면 그들이 곤란하게 될 수도 있다. 만약 DNA 검사 결과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유전적 관련성이 전혀 없다라는 결과가 나오면 어떻게 될까? 엘리자베스 여왕이 적법하지 않은 여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1882년 독일 의사 로베르트 코흐가 결핵균을 발견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결핵균을 몰랐다. 에드워드는 비소가 아니라 결핵균에 감염돼 죽었을지 모른다. 왕실 의사들은 결핵균에 대해서는 무지했지만 죽음의 원인은 거의 정확하게 밝힌 셈이다.
과학적 분석이 없어도 십대인 왕이 죽은 것은 당시 유행한 결핵균에서 찾을 수 있다. 에드워드의 할아버지인 헨리 7세도, 삼촌인 아서 왕세자도 폐결핵에 걸려 죽었으며, 에드워드가 건강했을 때 결핵에 걸렸다면 그의 면역계가 세균을 물리치거나 격리했을 것이다. 잠복 결핵균은 휴면 상태에서 폐의 주변 세포나 혈관으로 퍼지지 않기 때문에 의사들은 에드워드가 결핵 보균자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에드워드가 쇠약해진 원인은 1552년 홍역에 걸렸기 때문이다. 비록 빠르게 회복되어 말을 타고, 창으로 시합과 사냥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때는 이미 내성이 생겼기 때문에 세균이 몸 전체로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에드워드가 죽은 뒤 노섬벌랜드 공작은 제인 그레이와 길포드가 무사히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준비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고통받았던 메리 공주는 대중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군대를 일으켜 9일 만에 노섬벌랜드를 축출하고, 왕위를 계승했다. 공작과 그의 아들과 제인 그레이는 참수당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죽음〉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에 그 누구도 서구 세계를 나폴레옹만큼 뒤흔든 사랍은 없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코르시카섬에서 별 볼 일 없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법률가였던 아버지 카를로 부아나파르테가 38세 나이로 위암으로 사망하자 홀로 남겨진 미망인이 8명이나 되는 자녀들을 돌봤다. 어머니와 집안을 위해 출세하겠다는 포부를 가진 나폴레옹은 16세때 프랑스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장교가 되었다. 27세에 육군 대장이 되었으며, 이탈리아 북부 전투에서 4배나 많은 적을 상대로 입이 쩍 벌어질 만큼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그는 말이 총에 맞아 쓰러지자 말을 버리고 “운명이 다했다면 두려워한들 무슨 소용인가!”라고 하면서 말을 뛰어넘어 전진했다. 승리의 원인이라면 초인적인 상상력이었을 것이다.
이집트를 정벌하고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국가의 현금 보유액이 16만 프랑인데 반해, 빚이 4억 7천 프랑이나 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쿠데타를 일으켜 통령이 되었다. 그는 복권을 이용해 자금을 마련하고 소득세와 재산세를 좀 더 거둘 수 있도록 세무서를 설립하고, 예산부족을 현명하게 관리했다. 유대인 거주 구역을 없애고 유대인도 원하는 곳에 살 수 있게 했으며 투표권도 주었다. 최초로 전문 소방대를 창설하였으며 공개재판을 도입했다. 홀수 번호와 맞은 편에는 짝수 번호를 매기는 건물에 번호를 매기는 방식을 도입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1804년 그는 프랑스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1812년 러시아 침공에 실패하면서, 전환기를 맞았다. 60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이끌고 처들어갔지만, 겨우 4만에서 7만 명 정도만 살아 돌아왔다. 또 다음 해에는 오스트리아, 스웨덴, 러시아,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연합군과 맞서 싸웠으나 패했고, 부인과 아들, 장인이 오스트리아로 끌려갔다. 이에 1814년 4월 조건없이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 엘바섬으로 쫓겨갔다. 거기서 10개월을 보낸 뒤 700여 명의 부하를 데리고 섬을 빠져나와 파리로 쳐들어가자 루이 18세는 도망쳤고, 그는 다시 프랑스 통치를 시작했지만, 행운의 여신은 더이상 그의 편이 아니었다. 1815년 6월 18일 벨기에 워털루전투에서 군이 궤멸하고 나폴레옹의 백일천하는 끝이 났다. 백성들이 등을 돌린 것이었다. 그는 총살당할 것을 두려워해 영국에 항복했다. 영국은 그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고 인도양 귀퉁이에 있는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유배 보내면서 장교 3명과 하인 12명만을 딸려 보냈다.
세인트 섬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단단하던 그는 몇 달 만에 체중이 10㎏이나 줄었다. 그를 진단한 의사 카를로 안톰마르키는 약을 먹으라고 권했지만, 그는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약은 아껴두시게 나는 병을 두 개 얻고 싶지 않아, 하나는 이미 걸렸고 또 하나는 자네 때문에 걸릴테지.”1817년 4월 말이 되자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며 커피 찌꺼기처럼 보이는 물질을 토해냈는데, 이는 위장 출혈 때문이었다. 주기적으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밤에 조세핀을 보았다며 헛소리를 하기도 했다. 결국 5월 5일 밤,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51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천재 음악가로 지금도 추앙받고 있는 모차르트는 1756년 태어나 1791년까지 35해를 살았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독살설이란 소문도 있었는데 진실은 무엇일까? 그는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다. 천연두는 물론 황달, 발진티푸스, 편도선염, 위장장애, 폐혈증, 인두염, 상기도감염 등등. 안 앓아 본 병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1791년 11월 20일부터 고열과 부종에 시달리다가 결국 12월 5일 숨졌다. 그가 숨지자 사람들은 라이벌이던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질투심에서 그를 독살했다고 수군거렸다. 모차르트 시신에서 역겨운 냄새가 풍겼고, 얼굴과 몸은 잔뜩 부어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던 것도 원인이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찰츠부르크궁 음악감독으로 일했는데, 두 아들에게 어릴 때부터 음악을 가르쳤다. 모차르트는 세 살 때 이미 하프시코드를 연주했으며, 다섯 살 무렵에는 작곡도 했다. 6살일 때 아버지를 따라 순회공연에 나서기도 했는데, 그의 탁월한 연주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아홉 살이 되자 모든 악보를 읽고 못 하는 연주가 없었다. 커가면서 그의 음악은 혁명적이고 난해했다. 그냥 귀족들을 즐겁게 해주는 상투적이고 편한 음악이 아니라, 사람들의 영혼을 흔드는 새로운 음악을 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첫 번째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도주〉를 듣고, 당황한 요제프 2세는 “모짜르트, 음표가 너무 많군.”라고 했다가 “딱 필요한 만큼입니다.”라는 당돌한 대답을 들어야 했다.
빈에서 모차르트의 경쟁자는 3개 언어로 오페라를 만들었던 이탈리아 출신 작곡사 안토니오 실리에리 뿐이었다. 그는 모차르트가 경력을 쌓던 그곳에서 음악계를 장악했고 1788년 궁정악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둘은 1785년 칸타타를 함께 작곡했으며, 1788년 살리에리는 자신의 음악대신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로 공연하기도 했다. 오페라 〈마술피리〉를 보고 나서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는데, “그는 공연에 온전히 집중했으며 서곡부터 마지막 합창까지 곡이 끝날 때마다 ‘부라보’, ‘벨로’같은 감탄사를 외쳤다.”고 했다. 모차르트는 진중하고 근엄한 살리에리와는 전혀 다른 성격이었다.
말년에 모차르트는 네 편의 오페라를 작곡하고 엄청난 수입을 얻었다. 그는 화려한 옷과 아내인 콘스탄체에게 줄 선물을 마구 사들이고, 값비싼 음식을 먹으며 도박을 하는데 돈을 펑펑 썼기 때문에 늘 빚에 쪼들렸다. 죽던 그해 가을에는 거세한 수탉, 철갑상어 같은 산해진미를 즐기며 지칠줄 모르는 열정으로 멋진 음악을 작곡하는 일에 열정을 쏟아부었다. 그가 열병에 걸렸다는 사실마저 놀랍지 않았다. 그만큼 자기 몸을 혹사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과 달리 병이 낫지 않았다. 12월 4일이 되자 모차르트는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의사 두 명이 2리터에서 3리터나 되는 피를 뽑은 탓에 체력이 떨어졌고, 다음날 모차르트는 몸을 떨며 갈색 거품을 토하고 나서 결국 숨졌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를 살해했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모차르트의 둘째 아들 프린츠에게 음악을 가르쳤지만 소문은 잠잠해지지 않았다. 살리에리는 말년에 치매를 앓았는데, 정신이 혼미할 때는 자신이 모차르트를 죽였다고 하기도 했지만, 정신이 온전할 때는 완강히 부인했다. 1832년 음악가인 모셀레스가 빈 외곽의 병원에 입원한 73세의 살리에리를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이때 살리에리가 말했다. “내가 비록 이런 상태이기는 하지만 명예를 걸고 말하겠네. 그 바보 같은 소문은 사실이 아니야. 자네도 알 테지만 사람들은 내가 모차르트를 죽였다고 믿는다네. 하지만 아니야 그건 악의적으로 지어낸 말일 뿐이야. 이보게 자네가 사람들에게 말 좀 해주게. 머지않아 죽을 이 늙은이의 말을 전해 달란 말일세.”
모차르트가 죽은 뒤, 당시의 간소한 장례 절차에 따라서 성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묻었다. 가족도 친구도 무덤의 위치를 몰랐다. 게다가 당시에는 한 구덩이에 관 다섯 개를 매장하고는 10년 뒤 다시 파내라는 칙령도 있었다. 하지만 10년 뒤인 1801년 모지 관리인이던 로트마이어는 표시를 해두었다고 했다. 하지만 유해를 파냈을 때 아래턱이 없는 두개골에 골절 흔적이 선명했는데, 모차르트는 골절상을 당한 적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모차르트가 심한 타격을 입고 죽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는데, 2006년 모차르트 박물관에 보관된 뼈로 DNA를 추출하여 외할머니와 조카의 뼈에서 추출한 것과 비교했을 때 그들의 주장은 억척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 졌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사인을 정확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그는 자신의 음악 속에서 여전히 숨 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는 지금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에 비하면 정말 오래 산다. 하지만 잘난 척할 처지는 아니다. 인류의 목표가 오래도록 건강하게 사는 삶이라지만, 오늘날 우리의 생활방식은 조상들 못지않게 생명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이 사용했던 납 화장품과 수은 관장제와 비소 크림을 비웃지만, 미래 세대는 분명 오늘날 화학요법에 경악하면서, 왜 암이나 자폐증 혹은 치매를 유발하는 물질을 사용했는지 의아하게 여길 것이다.”프랑스 루이 14세의 정부였던 아녜스 소렐이 1450년 수은중독으로 죽기 전에 남긴 말이 있다. “냄새나고 더럽고 보잘 것 없는 이 몸, 참으로 덧없구나!”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우리는 아름다움, 용기, 자기희생, 예술과 음악, 인류의 다양한 발견과 발명 속에 어쩌면 영원히 남을지 모른다. - 저자가 책 마지막에 한 말이다.
고대에는 식물성으로 만든 독이 인기였지만, 르네상스 시대와 바로크 시대에는 암살자들이 중금속 성분이 든 독을 선호했다. 19세기 이후에는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화학물질과 방사성물질 혼합물이 주목받고 있다. 아마도 얼마 뒤에는 원격으로 조정되는 드론이나 레이저를 이용한 독침이 암살 도구로 등장할 것이다. 아니 등장해 있다. 우리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는 데서 발생한 김정남의 독살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당시 TV로 생생히 보았지만, 한번 되짚어 보자.
2017년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대합실에서 매표를 하려는지, 검표하려는지 창구로 다가가는 김정남에게 달려든 한 여성이 얼굴에 무언가를 발랐고, 뒤이어서 다른 여성이 같은 행동을 했다. 둘이 도망친 뒤 엄청 통증을 느낀 그는 공항 관계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곧바로 의식을 잃었고, 구급차로 병원으로 호송 도중에 숨졌다. 불과 15∼20분 사이였다. 북한은 시신을 즉각 인도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말레이시아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부검 결과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신경독인 VX(venomous agentX)에 중독되어 사망했다고 밝혀졌다. 빠르게 효과가 나는 이것은 단 한 방울로 호흡기와 심장을 정지시킨다. 호흡이든 피부든 접촉만 하면 곧바로 죽일 수 있다.
전문가들은 김정남을 암살한 여성들은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것은 치명적이지 않은 두 물질이 섞이면서 VX가 생성되었기 때문이었는데, 이런 물질을 ‘이원혼합물’이라고 한다. 이것들은 따로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다. 영국 언론은 현지 경찰의 말을 인용해 여성 중 한 명이 얼굴에 특정 물질을 뿌리고 다른 여성이 그 위를 손수건으로 덮어 눌렀다고 보도했다. VX는 1997년 국제조약에 의해 개발·생산·비축·사용할 수 없지만, 북한은 이것을 비축, 사용하였고 그것이 타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세관검사를 면제받는 외교행낭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인도네시아 국적의 시티 아이샤(25세)와 베트남 국적인 도안 티 호응(28세)은 살인죄로 기소되었고, 둘 다 쿠알라룸푸르 마사지 업소에서 일했다. 그들은 리얼리티 프로그램 제작자라고 한 제임스라는 남자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장난치는 대가로 돈을 받기로 하고, 몇 번 연습까지 했다고 했다. 그들은 김정남에게도 얼굴에 기름을 뿌리는 장난인 줄 알았다고 했으나, 그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암살에 가담한다는 것을 인식했다고 보았다.
성장하는 과정에 김정남은 차기 지도자감이 아님을 명확히 보여주었는데, 그는 2001년 가짜 여권으로 일본에 입국하려다 체포되면서 독재자가 될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렸다. 심문을 받는 동안 도쿄 디즈니랜드에 가고 싶었을 뿐이라고 자백했다. 김정남은 한곳에 정착하지 않았고, 중국 정부의 보호 아래 마카오 등에서 도박을 즐겼다. 그는 두 명의 부인과 여섯 명의 자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버지 김정일의 눈에 나면서 실권은 김정은에게 돌아갔고, 김정은은 고모부 등 관료들을 수없이 처형했지만, 굳이 실권 없는 이복형을 왜 죽인 것일까? 왜 그 시기에 카메라가 설치된 곳에서?
이유는 김정남의 배낭에서 찾을 수 있었다. 배낭에는 그가 미 CIA요원에게 두 시간 동안 독재자로 등장한 동생의 비밀을 누설한 대가로 받은 12만 달러가 들어 있었다. 김정남은 김정은을 좋아하지 않았다. 몰론 김정은도 그랬다. 할아버지 김일성도 김정남을 좋아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김일성은 배우였던 김정남의 어머니(성혜림)를 며느리로 여기지 않았고, 김정남은 아버지 김정일이 무용수와 동거하면서 아들을 두 명이나 보는 동안 모스크바와 스위스 기숙학교를 전전했다. 김정은이 그들 중 막내다.
김정남은 2012년 김정은이 실권을 차지한 뒤에 한 언론사와 인터뷰를 하면서 나라를 이끌기에는 동생이 너무 어리고 미숙하다며 “개혁 없이는 북한이 무너지고, 개혁이 일어난다면 정권이 무너질 것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무너진 것은 김정남 자신이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독살사건은 맨 처음에 소개한 러시아 시민운동가 ‘볼라디미르 카라 무르자’이다. 그는 푸틴에게 반기를 든 활동가이자 ‘마그니츠키법’을 제정하도록 활발히 활동을 벌였다. 그 법은 러시아 변호사이자 회계사인 마그니츠키의 이름을 딴 것으로, 그는 조작된 혐의로 투옥되어 심한 구타를 당한 뒤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2009년 사망했다. 그러나 그 법은 2012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서명했다. 이에 러시아정부는 크게 분노했다. 무르자와 입법활동을 함께했던 동료로서 푸틴을 대놓고 비판했던 야권지도자 보리스 넴초프는 2015년 2월 27일 크렘린궁 근처에서 다리에 총을 맞아 사망했다. 그해 5월 26일, 33세의 무르자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회의 도중 갑자기 쓰러져, 구토를한 후에 의식을 잃었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뇌가 부어오르고 심장, 폐, 신장, 소화기관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혼수상태를 지속했으며 생존율이 5%라는 진단을 받았다. 무르자의 아내가 혈액과 머리카락, 손톱 샘플을 프랑스 독극물연구소에 보내 중독여부를 조사해 달라고 보냈다. 검사 결과 정상치의 수십 배에 달하는 중금속이 검출되었지만, 어떤 독인지 밝혀내지는 못했다.
2017년 1월 19일 미국은 러시아 연방수사위원회를 이끌던 푸틴의 측근 알렉산드르 바스트리킨를 제재했다. 이번에도 무르자에게 혐의를 씌워 죽이려고 했다. 그해 2월 2일 무르자는 인척의 아파트에 머물고 있었는데, 갑자기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박동이 빨라지면서 구토 증세가 나타났다. 그는 이미 이런 일을 경험했으므로 곧바로 지난번에 치료받았던 병원으로 갔고, 동일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다. 의료진은 혼수상태로 유도해 혈액을 교체했다. 이번에는 또 어떤 독을 사용했는지 알기 위해 샘플을 프랑스와 이스라엘로 보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밝혀내지 못했으며, “식별 불가능한 물질 때문에 발병한 급성중독 증상”이라는 모호한 진단이었다. 2월 29일 무르자는 퇴원 후에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워싱턴으로 갔다. 그는 지난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의사가 그러더군요.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더는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이런 일이 한 번으로 끝나지는 않을 듯합니다.”그리고 덧붙였다. “저는 절대 용감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끈질길 뿐이지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