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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내가 만난 사람들(高僧大德)
그 밖에 총무원 안에서 월하, 전강, 대의, 탄허, 녹원, 지관, 경보, 무진장스님 등 이 시대 한국불교 대표 선지식을 만났고, 참선에 대해 알고 싶어 자주 무진장 스, 경보 스님을 괴롭히기도 했고, 외부 원고 청탁 차 이희승, 이항녕, 이병도, 황산덕, 서정주 같은 유명한 분들 댁을 들락거리기도 했다. (계속)
그날 나는 동승동 이병도 박사 댁에 먼저 들렀다. 청탁 원고 수령하고, 정릉 국민대 이기영 학장 인터뷰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원고 청탁 때 수락한 분이 갑자기 자기는 크리스천이라서 불교 관련 원고는 못쓴다고 거절한 데서 일이 터졌다. '아니 선생님! 원고 마감 시간에 크리스천이라서 불교 원고 못쓴다니, 그게 말이나 됩니까?' 나는 소싯적 고려대 미식축구 선수다. 서울운동장에서 상대 공격수들에게 몸을 날려 힢부럭 숄더부럭으로 깔아뭉개던 등에 34번 커다란 번호 단 라이트 가드 선수다. 레슬링 선수 못잖던 몸이다. 서울대 도도하던 원로 교수고 뭐고 없다. 언성 높아지자, 잘못은 먼저 자기가 저질렀다. 선생도 난감한 표정이다. ' 좋습니다. 내가 고등학생 시절에 교과서에서 선생님이 쓰신 <아차산>이란 시를 배웠습니다. 그걸 왜 불교인도 보는 교과서에 올립니까? 삭제하고 크리스천들만 보는 교과서에 실으세요' 완벽하게 태클을 걸자 선생이 할 일은 젊은 기자 달랠 일 밖에 없다. '여보소! 내가 원고 청탁 때 실수했네. 옆에 이희승 교수 댁이 있으니 그분 원고는 어떨까?' 사정조로 부탁하며 먼저 자기가 급히 현관에 나가서 슬리퍼 신고 나를 부른다.
꽁 대신 닭이라고, 이렇게 이희승 교수 댁에 가서 원고 청탁 후 나오던 골목길에서 처음 오동꽃을 만났다. 꽃은 보랏빛이 세련되고 향기 깊고 은은했다. 나는 낙화 하나를 와이셔츠 윗주머니에 넣고 국민대 이기영 학장 만나러 갔는데, 거기서 또 일이 터졌다. 불교 관련 글 많이 썼기 때문에 이기영 학장은 불교학자로 불린다. 여비서가 와서 무슨 차 드시겠냐고 묻는데, 첫눈에 산속에서 희귀한 난초를 본 것 같았다. 용모나 언어나 몸가짐이 완벽한 동양 미인이다. '이런 향내 나는 차는 없습니까?' 내가 윗주머니에서 오동꽃을 꺼내 그의 손에 쥐어주자, 그는 가늘고 하얀 손으로 그 꽃을 받았다. 냄새를 맡고 고요한 눈동자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세련된 보랏빛 향기와 그 꽃을 건넨 젊은 기자에게 감동한 눈빛이었다. ' 향기가 서양의 어느 향수 보다 더 오묘하지요?' 사실 그녀도 오동꽃 향기처럼 오묘한 존재였다. 총각 시절이다. 이렇게 꽃 선물 후 연락이 시작되었고, 집은 세검정 쪽이었고, 이름은 이진호라고 기억된다. 마지막으로 본 건 광화문 만원 버스 속에서다. 세월은 무심히 흐르지만 계절마다 꽃은 핀다. 꽃을 보면 옛일 생각난다.
(계속)
당시 강남의 봉은사 땅 수십만평을 팔아해치운 승려가 있었다. 종단은 날만 새면 이들을 성토하는 자와 비호하는 자들이 싸움을 벌여 마치 시장바닥 같았다.
하도 쌈질만 하길래 나는 봉은사 젊은 스님 만나면 '스님들이 돈과 땅을 앞에 놓고 이 무슨 챙피한 모습이냐?'고 비난하곤 했다. 그래도 자주 신문사에 들리길래, 하루는 어찌 이야기가 샛길로 나가 '거기 채소 키울 땅이나 나한테 한 5백평 떼어 줄 수 있소?하고 물은 적 있다. 당시 봉은사는 다리가 없어 뚝섬에서 나룻배 타고 건너다녔다. 주지에게 물어보라고 했는데, 그 뒤 주지 승락이 났다고 하는 걸, 말만 해놓고 차일피일 하던 새에 그만 강남이 개발되고 말았다. 현재 그 땅 가치는 아마 5백억 넘을 것이다. 사람은 일생에 큰 복이 두어번 들어온다고 한다. 승락 받아놓고 등기 못한 그 봉은사 땅이 놓친 첫번째 복인가 싶다.
내 서가(書架)에 법정스님 책도 없다. 광덕스님이 쓴 <선관책진>, 유찬거사가 동국역경원 책임자 때 편찬한 <불교성전>만 있다.
불교신문 기자했던 그것만으로 나는 전생에 불교와 인연이 있었지 싶다. 조계종 총무원 강당에 식장을 꾸며 수많은 스님을 하객 삼아 장가간 사람은 나 이외 다른 사람은 없다. 어릴 때 내가 철모르고 놀려먹던 스님이 나중에 알고보니 한국 불교계의 큰 별이었던 것도 묘한 인연이다.
최범술 스님은 진주 해인대학 학장 하신 분이다. 고등학생 때 내가 이 분 놀린 생각을 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나는 해인대학에서 평행봉을 하다가 브로크 담에 걸터앉아 지나가던 사람들을 구경하곤 했다. 그러면 스님이 닥아와서, 마치 방앗간 참새 쫒듯 손을 휘저으며 내려가라고 고함을 친다. 이때 나는 어떻게 했는가. 당시 스님은 몸이 뚱뚱하고 얼굴도 뚱뚱하고 키가 작았다. 나도 지금 칠십 넘어 그렇지만 행동도 느렸다. 입은 양복은 몇십년 입었는지 고리삭은 양복이었다. 나는 스님을 무시하여 눈만 깜빡깜빡 하면서 그 얼굴만 쳐다본다. 그러다가 바로 옆에 오셔야 훌쩍 몸을 날려 담 너머로 뛰어내리곤 했다.
내 눈에 그 웃기던 구식 화상이 그렇게 대단한 분인지는 그 후에사 알았다. 대학시절에 도서관에서 그 분의 저서 '한국의 차도(茶道)'란 책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초의스님 이래 한국 최고의 차인(茶人)이었다.
전라도 광주 무등산에 의제 허백련이 있다면, 경상도 곤양 다솔사에 효당 최범술스님이 있었다. 허백련은 화가로 차만 즐겼고, 최범술은 고승으로 차에 대한 이론을 정리한 분이다.
1975년 보련각(寶蓮閣)에서 펴낸 이 책은 원효스님 이래 한국 불교계의 다선일여(茶禪一如) 사상을 잘 정리해놓은 책이다.
스님과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나중에 인사동에서 채원화 보살을 만났다. 그는 나보다 1년 뒤 진주여고 졸업하고 연세대 졸업한 분이다. 다솔사에서 스님 모시고 차를 배운 인연으로, 인사동 허름한 2층 집에서 반야로(般若露)란 차회(茶會)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날 내가 우연히 들러 다도 공부하는 여대생들에게 효당 최범술스님을 소개한 적 있다.
스님은 경남 사천군 서포면 바닷가 마을 밤섬에서 태어났다. 13세인 1916년 1월 12일 다솔사로 출가, 불교에 입문하여 해인사 임환경스님을 은사로 수계했다. 당호는 금봉(錦峰)이며, 효당은 원효스님의 교학 복원에 평생을 바칠 것을 서원하여 스스로 지은 법호(法號)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란 화두로 유명한 성철스님은 건강이 좋지 않아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한 후 지리산 대원사에서 철학서 탐독하며 불교공부를 하던 중 효당 최범술 스님 권유로 해인사에 첫 발을 디뎠다.
일본에서 초대 민단 단장 박열의사, 독립운동가 박흥곤,옥홍균을 만나 단체를 조직 하여 일본천황 암살계획을 돕기위해 상하이에 잠입해 폭탄운반을 돕기도 하였다.
1930년 귀국하여 다솔사를 중심으로 불교청년들의 항일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을 결성했고, 만당의 당원과 우국지사들이 왕래하면서 다솔사는 항일의 거점이 되었다.
스님은 다솔사 뒷산에 죽로차 차밭을 조성하고 차를 보급시켰다.
소설가 김동리씨는 다솔사 요사채에 10여년 머물었는데, 여기서 그의 형 범부와 최범술스님 만해스님이 나누는 대화에서 중국의 소신공양(燒身供養) 이야기를 듣고 소설 등신불(等身佛)을 썼다.
당시 다솔사에 한국 최고 지식인들이 모였다.
스님은 초대 제헌국회의원도 역임했고, 1936년 서울에 여성교육기관인 명성여자학교를 설립했고, 1948년에는 신익희씨와 국민대학을 설립하고 재단 이사장에 취임했고, 1952년 해인사 부동산을 담보로 해인대학을 설립했다.
나는 해인대학 옆에 살아서 고등학생 시절에 최범술스님을 뵌 적 있다.
대략 이런 이야기였다. 채원화 원장은 이 이야길 들고 여대생들의 반응이 좋자, 날더러 같이 차회(茶會) 운영하자고 제의한 적 있다. 지금 반야로(般若露) 차회(茶會)는 전국적인 조직을 자랑하고 있다.
청담(靑潭)스님은 가친과 진주서 초등학교 동창이다. 그때 이미 결혼한 스님이 반장이고, 아버님이 부반장이었다. 스님이 만세운동으로 경찰서에 갇히자 아버님이 경찰서 뜰에서 밤을 새웠다고 한다. 스님은 농고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불도를 딱았고, 귀국하여 해인사와 도선사 주지를 역임하고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냈다.
총무원장 시절 아버님이 서울 올라오시면 우릴 조계사에 데려가시곤 했다. 스님은 형제가 하나는 서울대 하나는 고대라해서 착하다며 용돈을 주신 적 있다. 날더러 아버님 없어도 혼자라도 찾아오라는 말씀도 하셨는데, 그것도 묘하다. 내가 사는 수지 근처 수원시 우만동에 봉녕사란 절이 있다. 그 절은 청담스님의 따님 묘엄스님이 만든 비구니 절인데, 선원과 강원, 승가대학까지 갖춘 큰 절이다. 도량이 깔끔하고 정갈해서 간혹 들리는데, 그때마다 나와 인연이 전혀 없는 절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선친과 청담스님, 그리고 묘엄스님이나 나, 모두 진주 사람이기 때문이다.
불가에 맹구부목(盲龜浮木)이란 말이 있다. 큰 바다에 눈먼 거북이가 백년마다 한 번 숨을 쉬러 물 위로 올라오는데, 망망대해에 떠다니는 구멍 뚫린 나무판자에 머리를 들이밀고 숨을 쉰다고 한다. 불행히 그 구멍 뚫린 나무를 못 만나면 다시 백년 후에 다시 올라와 숨을 쉬어야 한다고 한다.
사람으로 태어나는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고 사람으로 태어나도 부처님 세상 만나는 것은 이 보다 더 어렵다고 한다. 수많은 고승대덕을 만난 나는 분명 그 거북이 보다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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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불교신문 고승 인터뷰 ‘귀중한 체험’
이 시절 가장 귀중한 체험은 아마 고승 인터뷰였을 것이다.
중생이 사람 몸 받고 태어나기도 어려운데,
나는 수많은 고승대덕과 정법(正法)을 만났다.
기독교의 구약 신약처럼, 한 종교에 경전이 없으면 되겠는가?
그렇다고 그 많은 팔만대장경 경전을 다 읽으라고 하겠는가?
재직기간 가장 뜻 깊었던 일은 부처님 오신 날 공휴일제정 앞장
소송불씨는 ‘대불련 청원 기사’ 기획 취재한 템플스테이 참여
그 방송작가들이 쓴 드라마엔 ‘중’ 표기가 ‘스님’으로 바뀌었다
영국 성공회 캔터베리 램지 대주교도 만났다.
그 분이 동국대 이사장실에서 불교지도자들과 대담한
<기독교의 신비사상과 불교의 성불사상>을 취재 보도했다.
참선 배우려고 조계산 송광사 구산스님 따라온 하버드 출신
벽안(碧眼)의 납자들 인터뷰도 했다.
이분들이 지금 서양에서 불교학자로 이름난 분들이 되었다.
방송작가들을 가야산 해인사로 초청하여 템플스테이 시킨 일도 기억에 새롭다.
신혼이라고 취재 길을 아내와 함께 갔다. 그때 신랑 따라가 방송작가들한테
인기 독차지한 그 새댁이 지금 칠순이 넘었다.
이서구 신봉승 등 두 대 버스에 동승한 원로작가 70여명이 해인사로 가서,
선방 스님 일상을 1주일 참관한 후부터 절 집안에 대한 인식이 확 달라졌다.
그 후부터 그들이 쓴 드라마에서는 ‘중’이란 말이 ‘스님’이란 표현으로 바뀌었다.
부처님 오신 날 공휴일 제정은 조계종은 물론 모든 불자의 쾌거였다.
특히 소송의 불씨가 됐던 대불련의 ‘부처님 오신 날(당시 사월초파일)
공휴일 제정 청원 기사’를 접한 후 용태영 변호사를 총무원에 소개하고
취재에 정성을 쏟았던 필자도 ‘부처님 오신 날 공휴일 제정
청원 운동’을 불교신문 재직기간 중 가장 뜻 깊은 일로 꼽았다.
➲ 용태영 변호사 총무원에 소개
불교신문 근무 중 가장 뜻 깊은 일은 사월초파일(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청원에 앞장선 일이다.
이 소송의 불씨는 풍전상가에 있던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에서
불교신문에 보낸 부처님 오신 날 공휴일 제정 청원 기사였다.
그 기사를 접한 나는 매우 뜻있는 일이라 생각하여 관심 갖고 크게 보도했다.
그러다가 1973년 어느 날 일간지 귀퉁이에 실려 잘 보이지도 않는
부처님 오신 날 공휴일 제정 촉구 1단짜리 작은 기사를 발견했다.
용태영 변호사란 분이 낸 청구소송이었다.
그래 물어물어 사무실을 찾아갔고, 기자를 반기던 그 분을 총무원에 소개했다.
그 후 그 분이 조계종의 부처님 오신 날 공휴일 제정 자문위원이 되어,
법적인 제 절차를 진행하여 재판에서 승소한 것이다.
당시 재미있던 일은 소장(訴狀)에 기록된 피고는 정부를 대변하는
총무처 장관이고 원고는 조계종이다.
그런데 재판 중에 대구 불자들이 버스를 수십 대 동원하여
법정을 가득 메웠을 때, 피고 총무처 장관의 장모되는 보살님도
사위를 피고로 만든 그 소송에 참여했던 점이다.
소송이 승소한 까닭은 당시 불교신자는 800만,
기독교 신자는 400만인데, 12월25일 성탄절만 공휴일이라면
종교간 형평성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간에 소송이 고등법원에서 각하되어 대법원에 즉각 상고하고,
곡절 끝에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청원서 보내
결국 1975년 1월 국무회의에서 의결하여 결정된 것이다.
이때가 경산스님이 총무원장 하시던 때다.
불교신문 기자로서 절 구경 많이 한 것은 당연하다.
해인사도 가보고, 송광사도 가보고, 청담스님 계신 도선사,
성철스님 계신 해인사, 비구니 도량 진관사도 가보았다.
통도사 홍매화, 선운사 동백, 백양사 단풍 다 구경했다.
산은 오대산, 설악산, 지리산, 달마산 모두 신선의 산이요,
거기 절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는 모두 신선의 음악이다.
때로 마조(馬祖) 백장(白丈)의 어록도 읽었고,
진각, 원감, 태고, 서산대사의 오도송과 임종게도 읽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나는 이 좋은 인연을 버리고 딴 길로 새버린 것이다.
<불교신문>이 주간지라는 것이 맘에 걸려 일간지로 옮겼고,
그 후 기업체로 옮겨 재벌 비서실장과 회사 대표를 거쳐
대학교수로 은퇴했다.
원래 대승불교의 근본 사상을 간단히 한마디로 말하면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이다. 위로는 불법의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라는 것이다.
그 중에서 스님들 수양의 핵심을 禪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21세기는 동서양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것이고, 그 중에서 서양이 동양에게 배울 건 선(禪)이라 생각했다. 그래 그걸 내가 선점해보자는 생각으로 선에 관련된 책자를 모으고, 선에 해박한 스님을 찾아가곤 했다.
경산, 경보, 무진장 스님이 그들인데, 경산스님은 천축사(天竺寺) 무문관(無門關) 토굴에서 10년 면벽한 후 회향했을 때, 내가 처음 인터뷰했다. 경보스님은 1년에 선(禪) 관련 책자를 세 권이나 내던 분이다. 신문사에 신간안내 부탁하러 오곤 했고, 간혹 자기 글씨를 禪筆이라며 주셨다. 포교사로 유명한 무진장 스님은 같은 총무원 건물에 있어 자주 선에 관한 질문을 해보곤 했다. 무진장 스님한테 풍난 석부작 멋을 배웠고, 쌍계사 백운스님한테서 지리산 춘란 선물을 받기도 했다. 당시 가장 인상 깊은 인터뷰는 봉선사 운허 스님 인터뷰다. 그분은 춘원 이광수의 사촌 형이다. 춘원은 봉선사에서 그 유명한 <산중일기>를 썼다. 운허 스님은 역경원장을 하면서 당시 한문으로 되어있던 팔만대장경을 한글로 번역했다. 나는 인터뷰에서 그분을 '물속에 깊이 숨은 용이요, 숲 속에 엎드린 범'같은 분이라고 표현했다.
곁가지 이야기로 그 당시 봉은사 땅 5백 평을 공짜로 얻은 적 있다. 당시 한 승려가 봉은사 땅 수십만 평을 팔아서 그 돈으로 동국대 경내 총무원 건물을 사고, 나머지는 부산에 절을 세웠다. 돈의 끝자리 회계가 애매해서 날만 새면 찬성과 반대파가 싸움을 벌였다. 스님들은 종단 보도기관 불교신문 눈치를 보곤 했다. 나는 '스님들이 공부는 않고, 시장판 같이 땅 가지고 이 무슨 창피한 모습이냐?'라고 힐난했다. 당시 봉은사는 다리가 없어 뚝섬에서 나룻배를 타고 건너 다녔다. 어느 날 '거기 채소 키울 땅이나 나한테 5백 평 떼어 줄 수 있소?' 하고 물었더니 가능하다고 한다. 그럼 주지한테 승낙 얻어 연락달라고 했더니 승낙 났다는 소식이 왔다. 당시 그 땅 1평에 십원 2십 원 하던 때다. 그래 미뤄두고 있었는데, 금방 강남이 개발될 줄 누가 알았는가. 제3한강교가 서고 땅값이 금방 오르고 나니 차마 땅 내놓으라고 할 수 없었다. 지금 그 땅은 평당 1억 넘는다. 일은 반드시 법적인 서류를 만들어놓아야 한다. 총무원장 월주스님이 내게 개운사 경내에 있던 가옥에 와서 살라고 권했다. 종단 위해 일하는 젊은 기자가 집이 없다고 호의를 베푼 것인데, 아내가 반대하는 바람에 포기했다.
원래 대승불교의 근본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다.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스님은 매스컴에 나오길 좋아한 분이다. 총무원장 시절 사회단체 성명서에 곧잘 이름을 올렸고, 청와대 초청엔 만사 불구하고 참석하신 분이다.
설조스님은 공주사대 영문과 출신으로 미남이고 다정하던 분이다. 신혼 때 우리 부부와 신륵사에 갔을 때, 스님이 남한강 달빛 아래 배를 띄우고 외국곡 '먼 산타루치아'를 부르던 일, 신륵사 주지가 다락에 감추고 있던 곡차를 우리에게 대접하게 한 일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스님은 샌프란시스코 '여래사' 주지를 하다가 돌아와서 불국사 주지를 역임했다. 년 전에 88세의 스님이 41일간 단식을 하여 조계종 총무원장을 사임시킨 적도 있다. 법주사에 계신데, 간혹 서울 오시면 아내와 종로 3가 선학원 근처에서 뵙곤 한다.
법정스님은 많은 책을 낸 유명한 분이다. 그러나 개운찮게 헤어졌다. 내가 불교신문에서 내외경제신문으로 옮길 때다. 송별연 회식에서 스님이 '김 거사! 그동안 불교신문에서 나와 함께 근무하면서의 느낌을 한마디 해보소.' 하고 부탁했다. 아마 고대 출신 젊은이 평을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몇 번 사양해도 세 번이나 요청하고, 유찬 거사도 '어디 한 말씀해보시게. 스님이 궁금해하시잖아?' 그랬다. 그래 내가 '굳이 말해보라고 하시니 말씀드리겠습니다'하고 운을 뗀 뒤, '스님은 제가 보기엔 스님이라기보다는 문필가입니다. 아침에 출근하면 함석헌, 천관우 씨들과 전화 통화로 일과를 시작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수행하는 사람은 처자식까지도 버리고 목숨을 걸고 구도에 정진하는 것이 본업 아닙니까?' 이렇게 질문하는 바람에 좌중의 분위기가 싹 변해버렸다. 말이야 옳은 말이지만, 젊은 놈이 너무 우직했다. 스님은 안색이 변했고 곁에 있던 유찬 거사도 '이 사람아! 말을 하라고 해도 그렇지, 그렇게 말하면 쓰나?' 하고 꾸짖었지만, 때는 늦었다. 이렇게 헤어졌고, 그 뒤론 만난 적 없다.
최근에 사람들은 스님이 불일암에서 손수 나무를 얽어 만들어 쓰던 의자까지도 무슨 보물처럼 떠받든다. 요정 대원각을 김영환 마담한테 기증받아 길상사로 만든 걸 찬탄한다. 서점에는 좌판 중앙에 스님 책이 가득하다. 금세기 최고의 고승대덕이라고 요란하다. 사람들은 법정스님 '무소유'란 말 좋아하고, 스님이 낸 책은 모두 베스트셀러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진정한 '무소유'란 무엇인가. 명예나 이름도 소유이다. 무소유가 아니다. 이름을 세간에 대문짝만 하게 내놓고, '나는 무소유를 추구했소'라고 할 수 없다. 스님은 입적할 때 '그동안 풀어놓은 말 빚을 다음 생에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달라'라고 했다. 그걸 보고 사람들은 스님은 자신의 책마저도 애착을 끊었구나 하면서 또 존경한다. 그러나 고승 중 이런 유언 남긴 분 많다. 성철스님도 임종 시에 '한평생 무수한 사람들 속였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보다 더 하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이니, 한 덩이 붉은 해 푸른 산에 걸려 있다'라고 하셨다.
어쨌든 스님의 유언에 따라 책을 절판시키자, 어떤 경매에서 출판 당시 1500원 하던 '무소유' 1993년판 중고책이 110만 5천 원에 낙찰되었다. 이런 유명한 스님과 헤어진 것은 아쉽다. 그러나 '어허 내가 김기자에게 그렇게 보였나? 앞으론 주의하겠네!' 굳이 소감을 부탁하셨으니 스님이 이렇게 응수해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소설가 최인호 씨는 법정스님이 무소유에 너무 집착했다고 말한 적 있다. 나도 동감이다.
고승대덕 이야기 끝에 효당(曉堂) 최범술 스님 이야길 빼놓을 순 없다. 그분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란 화두를 낸 성철스님을 출가시킨 스님이다. 건강이 좋지 않아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한 성철이 지리산 대원사에서 불교 공부하다가 최범술 스님 권유로 해인사에 입산했다. 효당은 일본 초대 민단 단장 박열의사, 독립운동가 박흥곤, 옥홍균을 만나 단체를 조직하여 일본 천황 암살 계획을 세웠다. 몸소 상하이에 잠입해 폭탄을 동경으로 운반했다. 1930년 귀국하여 다솔사를 중심으로 불교 청년들의 항일 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을 결성했고, 만당의 당원과 우국지사들이 왕래하면서 다솔사는 항일의 거점이 되었다.
스님은 경남 사천군 서포면 바닷가 마을 밤섬에서 태어나, 13세인 1916년 1월 12일 다솔사로 출가, 해인사 임환경 스님 아래서 수계 했다. 당호는 금봉(錦峰)이며, 효당(曉堂)은 원효 스님의 교학 복원에 평생을 바칠 것을 서원하여 스스로 지은 법호(法號)다. 스님은 다솔사 뒷산에 죽로차 차밭을 조성하고, 거기에서 만해 한용운과 김동리 씨의 형 김범부를 만났다. 소설가 김동리는 다솔사 요사채에 10여 년 머물던 중 스님들 대화에서 중국 소신공양(燒身供養) 이야기를 듣고 소설 '등신불(等身佛)'을 썼다.
그런데 내가 고등학생 때 진주 해인대학에서 최범술 스님을 첫대면한 일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온다. 그 시절 나는 하교하면 해인대학에서 평행봉을 하다가 브로크 담 위에 앉아 놀곤 했다. 그러면 스님이 담 위에 앉은 놈을 보고 방앗간 참새 쫒듯 손을 휘저으며 달려오신다. 당시 나는 몇십 년 묵은 고리삭은 양복을 입고, 뚱뚱하고 키 작고, 행동 느린 스님을 완전히 무시했다. 못 본 체 딴전을 보고 있다가 스님이 바로 발밑에까지 오면 훌쩍 담 넘어 길가쪽에 뛰어내리곤 했다.
그 웃기던 화상이 그렇게 대단한 분인지 나중에 알았다. 대학 도서관에서 그분의 저서 '한국의 차도(茶道)'란 책을 본 후다. 그분은 초의 스님 이래 한국 최고의 차인(茶人)이다. 광주 무등산에 의제 허백련이 있다면, 곤양 다솔사에 효당 최범술이 있다. 허백련은 화가로서 차를 즐긴 분이고, 효당 최범술은 차를 즐기면서 차 이론을 정립한 분이다. 1975년 보련각(寶蓮閣)에서 펴낸 이 책은 원효 스님 이래 한국 불교의 다선 일여(茶禪一如) 사상을 가장 잘 정리해놓은 책이다.
스님은 초대 제헌국회의원을 역임했고, 1936년 서울에 여성교육기관인 명성 여자 학교를 설립했고, 1948년에는 신익희 씨와 국민대학을 설립하여 재단 이사장에 취임했고, 1952년 해인사 부동산을 담보로 해인대학을 설립했다.
훗날 나는 인사동에서 스님과의 인연을 다시 만났다. 채원화 보살을 만난 것이다. 채원화 보살은 나보다 1년 뒤 진주여고 졸업하고 연세대를 졸업한 분이다. 다솔사에서 효당 스님 모신 인연으로 인사동 허름한 2층 방에서 반야로(般若露)란 차회(茶會)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날 우연히 들린 내가 공부하는 여대생들에게 효당 스님 내력을 소개했고, 채 원장은 여대생들 반응이 좋자, 날더러 같이 차회(茶會) 운영하자고 한 적 있다. 지금 반야로(般若露) 차회(茶會)는 전국적 조직을 자랑하고 있다. 그를 통해 한국 불교계의 큰 별, 효당(曉堂) 스님의 사상이 더욱더 알려졌으면 싶다.
불교신문 기자로서 절 구경 많이 한 것은 당연하다.
해인사도 가보고, 송광사도 가보고, 청담스님 계신 도선사,
성철스님 계신 해인사, 비구니 도량 진관사도 가보았다.
통도사 홍매화, 선운사 동백, 백양사 단풍 다 구경했다.
산은 오대산, 설악산, 지리산, 달마산 모두 신선의 산이요,
거기 절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는 모두 신선의 음악이다.
때로 마조(馬祖) 백장(白丈)의 어록도 읽었고,
진각, 원감, 태고, 서산대사의 오도송과 임종게도 읽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나는 이 좋은 인연을 버리고 딴 길로 새버린 것이다.
<불교신문>이 주간지라는 것이 맘에 걸려 일간지로 옮겼고,
그 후 기업체로 옮겨 재벌 비서실장과 회사 대표를 거쳐
대학교수로 은퇴했다.
진흙탕 50년…108배 참회의 절
이제 생각하니 나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세달사 장원관리인 조신스님 같다.
스님은 그 절에 불공드리러 오는 고을태수 김흔공의 딸에게 반하여
낙산사의 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기도하던 중 그 처녀가 나타났다.
그래서 함께 인연을 맺고 속세로 나왔으나,
십 수 년이 지나자 가난을 면치 못했다.
나물죽도 넉넉히 먹을 수 없고, 살던 집마저도 쫓겨나
떠돌다가 아들이 굶어죽어 명주 해현령(蟹峴嶺) 고개 위에 묻어주었다.
부부가 늙고 병들자, 딸아이가 밥을 얻어와 가족을 먹여 살렸는데,
하루는 동네 개에게 물려 아픔을 호소하면서 자리에 누웠다.
그러자 아내가 말했다.
“당신과 처음 만났을 때는 서로 사모하는 정이 아주 깊었지만,
이제 50년을 살고 보니, 나는 당신에게 짐이 되고,
당신은 나 때문에 괴롭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모든 것들이 번뇌였습니다.
뭇 새가 모여 있다 함께 굶어 죽기보다는 차라리 짝 없는 새일지라도
살아 있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저는 저의 고향으로 갈 테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십시오.”
그 순간 꿈을 깨어보니 스님의 머리털이 하얗게 세어 있었다.
스님은 하루 밤새에 백년의 고생을 모조리 겪은 듯,
인간 세상의 뜻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래 서로 헤어져 명주 해현령을 지나다가 땅을 파보니,
아들을 묻었던 곳에서 돌미륵불이 나왔다.
스님은 그 미륵불을 깨끗이 씻어서 그 후 정토사라는 절을 지어
수도하고 살다가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나 역시 사바의 진흙탕을 50년 뒤집어 쓴 이후에야 꿈을 깨었다.
그래 이제는 늦게나마 새벽에 일어나면 불교방송 들으며
<반야심경> 독송하고, 108배 참회의 절 올린다. 생각해보면 첫 직장 불교신문이,
내가 이 세상에서 맺은 인연 중 가장 복된 인연이 아닌가 싶다.
불교신문 근무 중 가장 뜻깊은 일은 4월 초파일 공휴일 제정 청원에 앞장 선 일이다. 이 소송의 불씨는 풍전상가에 있던 대학생 불교연합회에서 불교신문에 보낸 초파일 공휴일 제정 청원 기사였다. 그 기사를 접한 나는 매우 뜻있는 일이라 생각하여 관심있게 크게 보도했다. 그러다가 1973년 어느 날 일간지 귀퉁이에 실려 잘 보이지도 않는 사월초파일 공휴일 제정 촉구 1단짜리 작은 기사를 발견했다. 용태영 변호사란 분이 낸 청구소송이었다. 그래 물어물어 사무실을 찾아갔고, 기자를 반기던 그 분을 총무원에 소개했다. 그 후 그 분이 조계종의 초파일 공휴일 제정 자문위원이 되어, 법적인 제 절차를 진행하여 재판에서 승소한 것이다. 당시 재미있던 일은 솟장에 기록된 피고는 정부를 대변하는 총무처 장관이고 원고는 조계종이다. 그런데 재판 중에 대구 불자들이 버스를 수십대 동원하여 법정을 가득 메웠을 때, 피고 총무처 장관의 장모되시는 보살님도 사위를 피고로 만든 그 소송에 참여했던 점이다. 소송이 승소한 까닭은 당시 불교신자는 8백만, 기독교 신자는 4백만인데, 12월 25일 성탄절만 공휴일이라면 종교간 형평성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간에 소송이 고법에서 각하되어 대법원에 즉각 상고했고, 곡절 끝에 박정희 대통령께도 청원서 보냈고, 결국 1975년 1월 국무회의에서 의결하여 결정된 것이다. 이때가 경산스님이 총무원장 하시던 때다.
불교신문 기자로서 절 구경 많이 한 것은 당연하다. 해인사도 가보고, 송광사도 가보고, 청담스님 계신 도선사, 성철스님 계신 해인사, 비구니 도량 진관사 다 가보았다. 통도사 홍매화, 선운사 동백, 백양사 단풍 다 구경했다. 산은 오대산, 설악산, 지리산, 달마산 모두 신선의 산이요, 거기 절에서 들려오는 목탁 소리는 모두 신선의 음악이다. 때로 마조(馬祖) 백장(白丈)의 어록도 읽었고, 진각, 원감, 태고, 서산대사의 오도송과 임종게도 읽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한가지 아쉬운 점은 나는 이 좋은 인연을 버리고 딴 길로 새버린 것이다. 불교신문이 주간지라는 것이 맘에 걸려 일간지로 옮겼고, 그 후 기업체로 옮겨 재벌 비서실장과 회사 대표 거쳐 대학교수로 은퇴했다.
이제 생각하니 나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세달사 장원관리인 조신스님 같다. 스님은 그 절에 불공 드리러 오는 고을태수 김흔공의 딸에게 반하여 낙산사의 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기도하던 중 그 처녀가 나타났다. 그래서 함께 인연을 맺고 속세로 나왔으나, 십수 년이 지나자 가난을 면치못했다. 나물죽도 넉넉히 먹을 수 없고, 살던 집마져도 쫒겨나 떠돌다가 아들이 굶어죽어 명주 해현령 고개 위에 묻어주었다. 부부가 늙고 병들자, 딸아이가 밥을 얻어와 가족을 먹여살렸는데, 하루는 동네 개에게 물려 아품을 호소하면서 자리에 누웠다. 그러자 아내가 말했다.
'당신과 처음 만났을 때는 서로 사모하는 정이 아주 깊었지만, 이제 50년을 살고보니, 나는 당신에게 짐이 되고, 당신은 나 때문에 괴롭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모든것들이 번뇌였습니다. 뭇 새가 모여 있다 함께 굶어 죽기 보다는 차라리 짝 없는 새일지라도 살아 있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저는 저의 고향으로 갈테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십시오.'
그 순간 꿈을 깨어보니 스님의 머리털이 하얗게 세어 있었다. 스님은 하루 밤새에 백년의 고생을 모조리 겪은 듯, 인간 세상의 뜻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래 서로 헤어져 명주 해현령을 지나다가 땅을 파보니, 아들을 묻었던 곳에서 돌미륵불이 나왔다. 스님은 그 미륵불을 깨끗이 씻어서 그 후 정토사라는 절을 지어 수도하고 살다가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나 역시 사바의 진흙탕을 50년 뒤집어 쓴 이후에사 꿈을 깨었다. 그래 이제는 늦게나마 새벽에 일어나면 불교방송 들으며 <반야심경> 독송하고, 108배 참회의 절 올린다. 생각해보면 첫직장 불교신문이, 내가 이 세상에서 맺은 인연 중 가장 복된 인연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