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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상세한 연표입니다(1592년~1598년)
여기저기서 찾아서 모은 자료이므로 정확성은 95%입니다.
또 음력 위주인데 가끔 양력으로 나온 자료도 있어서 음력으로 환산하여
표에 담았습니다.
근데 KBS TV 드라마 징비록과는 다른 것도 나옵니다.
예를 들면 임해군이 체포된 시기가 명의 심유경과 왜의 50일간 휴전회담한 시기의 전 후가 드라마와 다릅니다.
뚱보강사 이기성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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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연표(음력입니다)
1592년----------------------------------
1592년 3월 15일 왜군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동원령으로 15만 8천명 조선 침략 시작
1592년 4월 13일 : 왜군 15만 명이 이상이 부산성 공격
4월 14일 : 부산 함락, 다대포 함락
4월 15일 : 밀양 함락
4월 19일 : 언양 함락, 김해 함락
고니시군: 양산-밀양-대구-선산-상주-충주
가토군: 양산-울산-경주-문경-충주
구로다군: 김해-창원-성주-김천-추풍령-영동-청주
조선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
4월 20일 : 유성룡 도체찰사로 임명됨, 유옥 이일의 군대를 이끌고 남하
4월 21일 : 신립 도순변사 임명
4월 22일 : 김응남 병조판서로, 김명원 도원수로 임명. 신립에게 상방검 하사
곽재우(홍의장군) 의병 심대승, 풍세와 낙동강, 남강에서 승리.
4월 28일 : 광해군 세자 책봉, 이덕형 휴전협상 준비
왜군 문경 진입. 현감 신길원 전사
신립 장군 탄금대 전투에서 패배. 충주목사 이종장 전사, 신립과 김여물 자결
왜군 도도의 수군 부산도달
이순신 함대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도작선 46척, 거북선 제외
4월 29일 : 저녁 이원익 평안도, 최흥원 황해도 순찰사 임명
임해군 - 함경도로
순화군 - 강원도로
왜군 가토군 조령을 넘어 충주성 입성
가토군: 음성-죽산-용인-과천-한양
고니시군: 여주-양근-한양 입성
4월 30일 : 선조 한양서 피난 출발, 한양 궁궐 불탐, 벽제에서 윤두수와 합류
저녁 선조 일행 임진강에 도달
1592년 5월 1일 : 선조 정오 판문점 도달. 선조 저녁때 개성 도달
5월 2일 : 함경남 병사 신할 임금 호위
고니시군: 용인-북한강-팔당-망우리
가토군: 과천-남태령-동작진
선조 3정승 유성룡, 최홍원, 윤두수로 교체
5월 3일 : 이항복 인빈 김씨를 평양으로 피난시킴.
선초 피난 3일 후 왜군이 한양에 입성(1년 뒤 1593년 4월 한양 탈환)
5월 4일 : 이순신 함대 출항, 5월 5일 당포(통영) 앞바다에 도착
5월 6일 : 통영에 원균 도착. 큰 배 4척 중간 배 2척
5월 7일 : 이순신 가덕도로 진격. 해상 전투 승리(옥포 해전)
왜선 42척 격파
5월 8일 : 선조 평양에 당도
5월 11일 : 왜군 가토 임진강가로 이동
5월 17일 : 임진강 전투 신할, 홍봉상, 유극량 전사
5월 27일 : 왜군 이동
왜군 요시나리: 포천-철원-안변-강릉-삼척-정선-영월-평창-원주
왜군 고니시, 가토, 구로다 북진
이순신 함대 출항 거북선 참가
5월 29일 : 사천해전 승리, 이순신 부상
왜선 13척 격파
이광, 윤선각, 김수 6만 모음
윤두수 평양에 1만 모음, 이덕형, 왜 현소와 재협상
고경명 담양에서 의병. 유팽로, 양대복, 양희적 참가
5월 31일 : 왜군 고니시 유키나가 개성 입성
1592년 6월 1일 : 왜군 평산 도달
왜군 안코쿠지, 데라자와 마사나리 1만7000명 전라도로 진격
왜군 함안 도착. 곽재우 남강 도하, 윤탁 정남진 방어
이순신함대 옥포에서 남진
고경문 격문돌림
6월 2일 : 고니시, 구로다 평양으로 감
6월 3일 : 이순신 추도, 미륵도 해역 수색
이억기 수군 25척과 합류
이순신 거북선 참여한 당항포해전(당포해전) 승리
왜군 구루시마 전사. 왜선 26척 격파
이순신의 수군은 6월 10일까지 사천 선창· 당포· 당항포· 율포해전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지에서는 계속 패전 소식
6월 11일 : 선조 평양을 떠나 함경도로 피난
6월 13일 : 선조 명나라로 망명하기로 결심.
광해군 분조 발족
6월 15일 : 왜군 대동강 도하. 평양성 함락
6월 17일 : 명나라 원군 의주에 도착
왜군 무주 점령
6월 18일 : 선조 선천 당도, 6월 20일 용천 도착
6월 22일 : 선조 의주 도착
6월 23일 : 권종의 1백 군사 왜군을 천내강에서 방어
왜국의 도요도미 히데요시 이순신 제거 명령
6월 24일 : 왜군 우회하여 조선군을 공격 권종, 이극경 전사
6월 27일 : 고경명 은진 도달(태인-전주-여산) 보병6천 기병 8백
1592년 7월 6일 : 왜군 진안 점령, 왜군 한강 상류 도달
이순신 함대 출항 거북선 3척 참전
이순신 24척, 이억기 25척, 원균 7척
7월 7일 : 명군 압록강 집결, 왜군 해주 진입
왜군 와카자카 73척 구키/가토 42척
와카자카 견내량으로 이동, 구키 거제에서 당포로 이동
7월 8일 : 어영담의 6척이 한산도로 왜군을 유인
학익진 전개 왜군 격파, 대승 --- 한산대첩
와카자카 김해로 도주
한산대첩 - 학익진을 펴고 왜군을 향하여 모든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을
한꺼번에 쏘아 적선 66척을 격파.
한산도로 도망친 왜군 400여 명은 군량이 없이 13일간을 굶주리다가 겨우
탈출하였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 때의 3대첩의 하나로, 그 결과 일본 수군은
거의 전멸하였다.
7월 9일 : 광해군의 분조는 맹산-양덕-곡산-이천 도달. 6월 13일 분조후 26일 만에
이천 도착.
고경명 금산 도달
7월 10일 : 명나라 군대 압록강 건너옴
조승훈, 사유, 대조변 5천의 명군 가산 당도
조선의 요청과 요동의 정세에 위협을 느낀 명나라는 조승훈을 선봉으로 한
3500명의 명나라 군을 투입시킴. '당장에 일본군을 쓸어버리겠다.'고 큰소리치던
조승훈은 한달 후 평양성을 공격하지만 일본군에게 완전히 참패하고 본국으로
도주해 버림.
-안주에서 유성룡 합류, -숙천에서 김명원 합류
순안 이원익, 이빈 주둔
고경명 의병이 왜군의 공격을 당함. 곽영의 관군 퇴각
고경명, 고인후, 유팽로, 안영 전사
이순신 수군 안골포에서 왜군 격퇴
안골포 해전 - 왜선은 42척으로서 수군장 구키와 가토가 이끄는 제2의 수군부대. 왜군 250명이 사살되고 나머지 왜병들은 뭍으로 도망침.이 해전은 한산도대첩과
함께 일본 수군의 주력부대를 쳐서 멸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음
7월 17일 : 왜군 가토 마천령 넘음,
명군 평양성을 공격 그러나 사유, 장국충, 마세융 전사
고니시 동생 루이스 전사
7월 19일 : 왜군 가토군 영흥 도달, 나베시마군 함흥 주둔
7월 22일 : 신녕(조계)에서 매복 전투
7월 23일 : 임해군과 순화군이 함경도에서 왜군에게 체포됨
7월 24일 : 가토군 두만강가에 도달
이정암, 김덕함, 박춘영, 조종남 곽재우 모함 당함
7월 26일 : 영천성 밖에 권응수의 의병 3500집결
7월 27일 : 권응수 화공으로 영천성 탈환
7월 30일 : 저녁, 청주성 밖 당도(청주성, 후쿠시마군)
승병장 영규대사와 합류
1592년 8월 1일 : 왜군 가토 기요마사 간도로 진격
8월 2일: 승병장 영규대사 청주 탈환
8월 7일 : 한양에서 왜군회의 이시다가 주최
가토와 나베시마는 제외, 개성에 고바야카와 주둔
광해군 이정암을 황해도 초토사로 임명
8월 15일 : 가토 병력 재배치 길주(1500),단천(500),북청(1000),
함흥-덕원(12000),해정창(500),이원(500)
흥원(500),안변(3000) 가토가 지휘
8월 16일 : 정문부 왜군 습격, 국세필 자살, 국경인 사망
여진족과 전투
8월 17일 : 금산 도착(조헌 전방)(영규 후방)
금산 고바야카와 권율의 연락서 탈취
8월 18일 : 금산전투 조헌의 의병 전멸
8월 20일 : 경주 집결 1만(권응수, 박진)
가토 간도에서 퇴각
8월 21일 : 왜군이 경주를 기습, 박진 퇴각,
의병장 정세아의 아들 정의빈이 아버지와 권응수를 구출하고 순절.
경주를 탈환
길주 공격 정문부 1500. 길주 포위 보병 이봉수 1500
8월 22일 : 연안별장 장응기 연안성 진입, 900명 증원
정문부, 이봉수 재공격 길주 탈환
8월 24일 : 이순신함대 출항
8월 28일 : 구로다군 도착 6천명
이순신함대 사량에서 원균과 합류
1592년 9월 1일 : 부산해전 왜군 퇴각 정운 전사
부산포해전 - 부산포에서 왜선 430여 척과 해전. 이순신 함대 대승.
왜선 100여척 격파
왜군 고니시와 명나라 심유경의 휴전 협상(조선 대표 불참 상태)
구로다군 연안성 재기습
평양-중화 왜군로 조호익에게 차단
왜군 제9군 총대장 하시바 히데카쓰 사망
9월 20일 : 왜군 나카오카, 가타키리 2만 모임
9월 24일 : 창원의 경상우병사 유숭인 패배
9월 27일 : 왜군 창원 점령
1592년 10월 2일 : 왜군 함안 점령
10월 6일 : 왜군 진주성 공격
10월 7일 : 김시민 새벽에 적 야습 심대승, 최경희의 의병 지원
10월 11일 : 진주목사 김시민 진주성 싸움을 대승리로 이끔.
3800명으로 왜군 2만명을 물리침
10월 25일 : 명나라 이여송 의주 도착
명군 4만 3천(이여송, 이여백, 양원, 장세작)
10월 26일 : 심유경과 고니시 협상(50일간) 휴전키로.
10월 28일 : 명군 이여송 이동
1593년----------------------------------
1593년 1월 4일 : 명군 숙천 집결, 김명원의 조선군 합류
1월 5일 : 명군 순안 도착, 서산대사, 사명당 승병합류
승병 모란봉에 포진
1월 6일 : 평양성 공격개시
양원, 장세작 명군 2만 칠성문 밖에 주둔
이여백 1만 보통문에 주둔, 이여송 고지에 주둔
김응서 8천 함구문에 배치, 정희운 2천 정양문에 배치
이일 김응서 후방 고지에 3천 배치
전세정, 사대수의 기병, 오유충의 보병 모란봉에 배치
왜군 고니시 모란봉에 매복
기습 왜군 승병의 함정에 대패
이여송 - 1592년 명에서 발배의 난을 평정하고, 명나라 원군으로 4만의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 1593년 1월 평양성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을 격파하여
전세를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공을 세움. 그러나 고양 벽제관싸움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 패한 후로는 평양성을 거점으로 화의교섭 위주의 소극적인 활동을
하다가 그해 말에 철군하였다.
1월 7일 : 왜군 고니시 구로다에게 지원요청
밤 고니시 김응서에게 패해 퇴각
조선군 왜군 식량고 불태움
1월 9일 : 왜군 퇴각, 고니시군 봉산으로 도달
조명 연합군 평양성 공격 후 3일만에 탈환 -
명의 첫 원군이 패전하자 명에서는 4만3천의 군사를 더 보내옴.
조명 연합군 = 명의 군사 4만3천 + 조선 군사 8천 + 승병 2천2백으로 참전
1593년 1월 6일 본격적 4차 평양성 전투 시작, 1593년 1월 9일 7개월 만에 다시
평양성을 되찾음(1592년 6월 15일 고니시 유키나와에게 평양성 함락되었음).
1월 12일 : 왜군 구로다군과 고니시군 합류 한양 이북 왜군 철수령
고바야카와 퇴각, 고니시 용산에 주둔
1월 18일 : 명군 이여송, 양원, 이빈 남하, 선조 남행
1월 19일 : 광해군 정주로 이동
1월 20일 : 정주에서 광해군 선조와 합류
1월 22일 : 분조 폐지
한양에 왜군 5만 모임
1월 23일 : 명군 개성에 집결
고언백과 김천일 한양 내부와 밀통
1월 25일 : 고언백, 조승훈, 사대수 한양부근 정찰
왜군 전방에 고바야카와 2만 후방의 우키다 2만 ,수성부대 고니시 1만
1월 27일 : 고언백, 사대수 왜군 정찰대 격파
벽제관에서 고바야카와 동, 서, 남쪽에서 명군 포위
지휘사 이유승이 이여송대신 희생(왜장 이노우에 가쿠로베에게 사망)
왜군 혜음령까지 추격
1월 28일 : 명군 이여송 고양시 벽제관에서 대패하고 퇴각(임진강 건너 동파로)
1월 29일 : 명군 또 후퇴
1593년 2월 15일 : 충청수사 정걸의 50척이 한강에서 왜군 150척 격파
2월 18일 : 권율 관악산으로 이동
권율, 조경 2300명, 선거이 2000명
권율 행주에 도착, 목책을 세움
김명원과 이빈의 3000명 임진강 남안에 주둔
2월 22일 : 왜군의 행주산성 공격
조선군 행주 탈출-퇴로가 막히자 산성으로 퇴각
경기수사 이빈 김명원에게 구원요청
조여충, 김지남, 김수남 전사
처영의 지원군 도착
왜군 고바야카와 화공시도
김천일, 충청수사 정걸 구원병 보냄
왜군 이시다 미쓰나리, 마에노 나가야스, 우키다 부상
왜군 퇴각
권율 행주산성에서 대승- 행주대첩
행주대첩은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 행주치마 전설 유래.
2월 29일 : 가토, 나베시마 퇴각 13000 잔존
1593년 3월 10일 : 왜군 1만이 주변 약탈
3월 15일 : 명의 심유경 다시 휴전협상
1593년 4월 9일 : 왜군 철수 명령
4월 10일 : 왜군 철수 개시
4월 19일 : 왜군 완전 퇴각
조선군 이빈, 이산휘 왜군 후미 나베시마군 공격
한양 수복(1592년 5월 3일 함락 후 1년만에)
1593년 5월 2일 : 왜군 부산도착
5월 18일 : 왜군 고니시 일본 귀국
1593년 6월 14일 : 권율 도원수 임명
6월 22일 : 왜군이 진주성 공격
명군 배치 경주 왕필적, 성주 유정, 선산 오유충, 거창 조승훈, 남원 사대수
조선군 의령 집결 5만
조선군 운봉으로 퇴각
김천일 진주로 이동
왜군 9만 2000 진주성 공격
진주성 촉석루에 본영설치
6월 23일 : 왜군 재공격
1592년 10월 1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배한 왜군이 1593년 6월에 진주성 재공격
6월 25일 : 왜군이 토산을 쌓고 진주성 공격, 26일 : 왜군 재공격
6월 29일 : 진주성 우천 전투 장윤 전사
오후 성문 무너짐(동문쪽), 왜군 성내 진입 조선군 촉석루로 퇴각
김천일, 최경희, 고종후, 김상진 투신, 이종인 전사
왜군에게 진주성 함락됨(논개 이야기)
왜군 가토 포로 임해군, 순화군 석방(1592년 7월 23일 체포된지 1년만)
1593년 8월 24일 : 명군 벽제관 전투에서 대패 후 명군 이여송 후퇴
8월 25일 : 명군 송응창 요동으로 철수
1593년 9월 13일 : 명군 의주 집결 퇴각
진주전 후 왜군이 축성 시작
울산(서생포), 임랑포, 기장, 동래, 부산, 김해(죽도), 감동포,
안골포, 웅천 거제도의 장문포, 영등포
왜군의 주둔지
가토: 울산, 고니시: 웅천, 나베시마: 김해,
모리 요시나리: 안골포, 시마즈: 가덕도
모리 히데모도
김덕령 의병
1594년----------------------------------
1594년 6월 14일 : 선조 영유에서 떠남. 선조 강서에 당도
8월 11일 : 선조 해주를 떠남
8월 15일 : 임해군, 순화군과 상봉
1594년 9월 22일 : 선조 한양으로 떠남
1594년 10월 1일 : 선조 한양으로 돌아옴. 월산대군의 사저를 행궁으로 사용
충청도 홍산에서 송유진의 반란 사전에 발각
1594년 12월 25일 : 광해군의 무군사 전주에 도착
좌찬성 정탁, 분병조판서 이항복, 분호조판서 한준, 한성부좌윤 김우웅
전라도 무과실시
1595년----------------------------------
1595년 2월 : 광해군 전주를 떠남. 홍주로 이동.
1595년 4월 13일 : 사명당(유정) 울산 도착, 가토와 회담
4월 15일 : 가토와 재회담
4월 30일 : 고니시 귀국
1595년 6월 26일 : 고니시 조선으로 돌아옴. 데라자와, 마시다도 같이 도착
1595년 8월 : 사명당 유정 5천군 퇴각
8월 13일 : 서울 도착
1596년----------------------------------
1596년 7월 6일 : 이몽학의 난 1천명
홍산읍 공격. 현감 윤영현 임천군수 박진국 항복
7월 9일 : 이몽학 정산, 처양, 대흥 함락시킴. 5천으로 증강
홍주 포위 홍주목사 홍가신 수성 충청병사 이시언 예산, 어사 이시발 공주,
중군 이간 처양에서 지원
7월 10일 : 반란군 진압 이몽학 자살(김덕령, 최담령 처형)
1596년 8월 24일 : 왜군 고니시, 데라자와 다시 부산도착
1596년 9월 2일 : 일본과 명 휴전 협정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명의 책봉사를 접견하였으나 강화회담 결렬로 책봉사를
추방하고 조선 재침공 준비령 내림
9월 10일 : 명나라 사신 귀국
1596년 12월 21일 : 왜군 침략 감지
1597년----------------------------------
1597년 1월 : 김응서 장계로 고니시 가토의 행로 알아냄
4도 제찰사 이원익, 경상좌병사 권응수 경주 주둔
도원수 권율, 김응서 의령 주둔
1월 12일 : 이순신, 권율 회담
1월 13일 : 왜군 가토군 재침략, 부산 상륙(정유재란 시작)
1597년 2월 7일 : 이순신 체포 명령
2월 21일 : 명 책봉사 서울 도착
2월 22일 : 정유재란 왜군 편성 현황
1~8군 12만 1100명, 후방수비대 2만 390명
가토 키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시마즈 요시히로
죠소가베 모토치카, 하치스카 이에마사,
모리 히데모도,우키다 히데이에
조선군 산성 수축: 창녕의 화왕산성, 대구의 공산성, 개령의 금오산성,
안음의 황석산성, 진주의 정개산성 수축
성윤문, 권응수 경주수비 좌도방위. 김응서 의령에서 우도방위
이원익, 권율 각각 경주, 초계에 주둔 1만
병마사 이복남 장흥주둔 1500
2월 26일 : 이순신 체포됨. 서울로 압송. 원균을 통제사로 임명
2월 28일 : 왜군 선발대 1만 1500 조선 재침략
1597년 3월 14일 : 이순신 파직.
3월 18일 : 왜군 가토와 사명당(유정) 회담
3월 30일 : 이순신 석방. 백의 종군으로 결정
1597년 4월 2일: 명 책봉사 북경으로 귀환
4월 8일: 도요도미 히데요시 14만 5000명 동원 전면 재침공 명령
1597년 5월 8일 : 명군 양원의 군대 5000 한양 도착
1597년 6월 14일 : 오유충 한양 도착, 양원 남원 도착, 심유경을 체포
6월 18일 : 조선수군 한산도 출항
안골포, 가덕도 전투 승리 퇴각
당시 수군 지휘관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배설, 충청수사 최호,
경상좌수사 이운룡(독자 행동)
1597년 7월 3일 : 명군 마귀 7천, 한양 도달. 명군 총 14만 2천 7백
7월 5일 : 원균의 조선함대 4백척 칠천량 도착
7월 7일 : 부산앞바다에서 패배 퇴각, 구로다 유인
7월 15일 : 왜군 함대 칠천량 도달
7월 16일 : 왜군 수군이 공격(시마즈, 요시나리)
원균 칠천량 해전 대패. 원균, 원사웅 부자 전사.
이억기, 최호, 배흥립, 안세의, 이응표 전사
왜군은 칠천량 해전 승리로 무사히 부산 상륙 완료
왜군 총대장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7월 21일 : 사면된 이순신 노량 도착
왜군 3군으로 분류
좌군: 우키다 히데이에,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모,
시마즈 요시히로, 모리 요시나리 - 4만7천6백
우군: 모리 히데모도, 가토 키요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 6만4천2백
수군: 도도 다카토라, 와카자카 야스하루
7월 25일 : 왜군의 우군 양산 집결
1597년 8월 4일 : 우키다, 고니시 1만7천 사천상륙
명군 배치
남원의 양원 3천, 전주의 진우충 2천, 충주의 오유층 4천,
단양의 마귀1천
8월 11일 : 전라병사 이복남 남원 입성 7백
남원부사 임현, 구례현감 이원춘, 조방장 김경로,
산성별장 신호 합류 4000명
8월 13일 : 왜군 5만6천 공격
시마즈, 가토(수군)3200 북문 공격
8월 15일 : 우천 전투 (기습)
왜 우군 양산-창녕-초계-합천-안음 도착
화왕산성 곽제우 주둔
황석산성 안음현감 곽준, 백사림, 조종도 5백 주둔
8월 16일 : 우키다 남문 공격 밤 10시 남문 열림
동문 열림 이신방 전사, 하치스카, 요시나리 입성 양원 퇴각(117명)
이복남, 송응정, 김경로, 신호, 임현, 이원춘, 이덕희 전사
왜군 수군 퇴각. 육군 2일 휴식 임실거쳐 전주 공격 계획
왜 우군 황석산성 공격
8월 17일 : 왜 우군 황석산성 재공격 백사림 도주
왜군 공격
8월 18일 : 곽준 왜장 진다 쓰시마에게 전사, 조종도 전사
8월 19일 : 전주의 진우충 공주로 퇴각
8월 20일 : 왜 좌군 전주 입성,
8월 21일 : 왜 우군 입성(진안-웅치)
8월 25일 : 왜군이 전주성 파괴
왜 좌군 전라도, 충청도 서반 공격, 우군 충청도 내륙, 경기도공격
왜군 나베시마, 죠소가베 25000 좌군에 편입
8월 28일 : 왜 좌군(전주-익산-부여-한산-서천-순천
나베시마의 별동대 공주-김제-고부-나주-강진-해남
8월 29일 : 이순신 수군 재건 준비
전라우수사-김억추, 경상우수사 배설, 12척 재건
8월 30일 : 왜 우군 공주 공격 준비
공주: 명의 진우충 2천, 우백영, 마귀 2600
충청감사 정윤우, 방어사 박명현,
충청병사 이시언, 제찰부사 한효순
명군 진우충 공주에서 패전하고 천안으로 도주. 조선군도 돌아감
1597년 9월 1일 : 왜군 공주 입성
왜군 가토 1만 연기-청주-죽산-용인-과천에서 모리 히데모도와 합류 예정
조선 한강변에 8천 배치
9월 2일 : 이순신 함대에 합류한 배설 도주(1599년 선산에서 권율에게 잡혀 서울에서
처형됨)
9월 3일 : 평양의 명군 한양에 도착
9월 4일 : 모리 히데모도 천안 입성, 가토 청주 공격
9월 5일 : 명군 마귀 8천8백 수원으로 남하
9월 7일 : 직산에서 명군, 왜군 전투
구로다 3천 공격
명 파세, 이익교, 유우절, 명군 2천 당도
왜 모리 히데모도의 3만 원군 도착
명군 수원으로 퇴각. 왜군 천안으로 퇴각
9월 16일 : 이순신 수군 명량해전 대승
진린의 명수군 지원 결정
이순신 함대 재편성
해남현령 유형, 진도군수 선의경, 강진현감 송상보, 중군장 김응함,
거제현령 안위, 녹도만호 송여종, 평산도 대장 정응후,
사도 첨사 황세득, 제포만호 주의수, 사량만호 김성목
명량해전 - 13척의 배로 왜선 330척과 맞서서 왜선 133척을 격파한 대승
1597년 11월 3일 : 명 병부상서 형개의 군대 3만 압록강 도하
11월 27일 : 명군 한양 당도
명 좌군 : 이여매 보기 1만 2000명
명 중군 : 고책 1만 1690명
명 우군 : 이방춘, 해생 1만 1630명
팽우덕, 양등산, 파새, 사명당(유정) 9000명
이시언 2000, 한강수비군 2000 좌군과 협력
성윤문, 권응수, 박의장 3200, 함경강원 군사 2000명 중군 협력
정기룡, 고언백 1300, 황해도 군사 2000 우군과 협력
울산 공격 준비
1597년 12월 20일 : 경주 집결 4만
12월 23일 : 울산 공격 수비군 아사노 유키나가 2000명
밤 서생포의 가토 해로로 귀환
12월 24일 : 1만 왜군 울산지원
12월 27일 : 8600 왜군 지원
-1598년 ---------------------------------
1598년 1월 4일 : 명군 울산에서 후퇴
1598년 6월 : 명수군 1백척, 5천명 당진에 도착
유정 1만2천 증원
1598년 7월 16일 : 명 수군 고금도 도착
1598년 8월 14일 : 왜국 도요도미 히데요시 사망
명군 마귀 2만 4000, 이경준, 성윤문 5514명 울산 공격
명군 동일원 2만 6800, 정기룡 2215명 사천 공격
유정 2만 1900, 이시언, 이광악 5928명 순천 공격
8월 18일 : 명군 한양에서 출격
1598년 9월 14일 : 명군 동일원 진주 도착
9월 15일 : 수군 출격
9월 19일 : 이순신 여수 도착
예교의 왜군 공격. 황세득 전사
당시 왜군 주둔지
울산: 가토 키요마사 1만,
서생포: 구로다 나가마사 5천
부산: 모리 요시나리, 데라자와 마사나리,
창원: 나베시마 나오시게
김해: 나베시마 가쓰시게 6천, 사천: 시마즈 요시히로 1만
고성: 다치바나 무네토라 7천, 남해: 소 요시토모,
순천 예교: 고니시 유키나가 1만3천
9월 20일 : 명군 동일원, 망진, 영춘 점령
9월 21일 : 명군 동일원 곤양 점령, 마귀 울산 포위
9월 28일 : 명군 동일원 사천 점령. 왜군 시마즈 신성으로 퇴각
1598년 11월 9일 : 새벽 조,명 수군 200척 광양으로 진격
11월 10일 : 여수 도착, 왜군 거제도에 집결
11월 14일 : 왜군 아리마 하루노부 명군 진린을 매수
11월 18일 : 시마즈의 왜군 500척 순천으로 진격
밤 2시 노량에서 왜군과 접전 이순신 대승
왜선 200여척을 격파.
이순신 전사
왜군 시마즈 50척만 남고 도주,
고니시도 도주.
1598년 11월 18일 전쟁 종결
노량해전 -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이 마지막으로 벌인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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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상세한 연표입니다 1592년~1598년
첫댓글 상기 정보 고맙습니다. 1593년 6월 29일: 진주성 함락. 8월 25 : 명군 송응창 요동으로 철수. 9월 13일: 명군 의주 집결 퇴각
진주전 후 왜군이 축성 시작: 울산(서생포), 임랑포, 기장, 동래, 부산, 김해(죽도), 감동포, 안골포, 웅천 거제도의 장문포, 영등포 등.
왜군의 주둔지 가토: 울산, 고니시: 웅천, 나베시마: 김해, 등 30개 내외의 왜성이 있는데 조선군, 조명연합군이 전투로 빼앗은 성이 있나요? 궁금합니다.
138_징비록과 임진왜란
뚱보강사 계원예술대학교 명예교수 이기성
“그런데 말입니다”로 유명한 김상중 탈렌트가 KBS TV 드라마 <징비록>에서 서애 류성룡 역할을 그럴듯하게 잘하고 있다. 서애 류성룡은 학자이면서 동시에 실천 결과를 더 중요시한 행정가였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에 오르게 되고 4도 도체찰사(전시의 최고군직)가 되어 당쟁과 전란 속에서 조선의 조정을 총지휘하며 가증스러운 선조를 잘 다스린다. 당색은 동인이지만 당리당략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 요즘 우리나라에도 꼭 필요한 인물.
서애 류성룡은 1542년(중종37) ~ 1607년(선조40) 조선의 문신 학자로 총명과 예지가 남달리 뛰어 났고 일찍부터 학문에 힘을 써 20세
에 퇴계를 찾아가 글을 배웠다.
임진왜란 발발 시 좌의정으로 병조판서를 겸하고 있던 그는 다시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군무를 총괄하였다.
선조가 난을 피해 길을 떠나자 같이 갔으나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했다.
한양 수복 후, 다시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오자 훈련도감을 설치, 제조에 올라 군비를 강화하고
인재를 배양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 이듬해인 1598년 북인들의 탄핵을 받아 또 관직을 삭탈당했다.
조정에서는 다시 선생을 불러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74회나 사양하고,
고향인 하회와 군위에서 학문과 제자 양성에 여생을 보내면서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서애집>, <영모록>, <징비록>, <신종록> 등을 남겼다.
임진왜란은 임진년(선조 25년)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간 2차에 걸친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이다.
임진왜란의 발발 원인은 국내, 국외 두 가지로 생각된다.
조선 국내의 원인은 오랜 평화로 국방 정책에 소홀하였다. 무능한 선조는 이이의 십만 양병설을 무시하였으며
양반 계급의 세력 싸움으로 국론이 분열되었고 조세 제도의 문란으로 민심이 극도로 혼란하였다.
국외의 원인은 명과 왜의 각기 국내 상황 불안전이다.
명은 망하기 직전의 극심한 국내의 혼란 시기여서 반란군 진압에 힘들어 했고
차기 왕은 이자성의 반란군을 진압하지 못하고 자결을 하여 명나라 주씨 왕조를 끝내고 만다.
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등장하여 100 여년 간 계속되어 온 내란을 수습하고 통일 국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투항하거나 정복당한 제후의 불평불만을 전쟁으로 잠재우고자 조선과 명에 대한 침략을 시도한다.
1592년 4월 13일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요약 연표]
1592년 4월13~15일 왜군 15만명이 부산성을 공격. 부산, 동래전투
1592년 4월 28일 광해군 세자 책봉, 충주 탄금대전투 패배
1952년 5월 3일 한양성 함락
1592년 6월 13일 선조 명나라로 망명하기로 결심. 광해군 분조 발족
1592년 6월 15일 평양성 함락
1592년 7월 8일 한산도대첩 대승
1592년 7월 23일 임해군, 순화군 포로로 잡힘
1592년 10월6~11일 진주대첩
1593년 2월 22일 행주대첩
1593년 1월 9일 조명 연합군 평양성 탈환
1593년 4월 19일 한양 탈환
1593년 6월 29일 임해군, 순화군 석방
1597년 1월 13일 왜군 재침략(정유재란)
1597년 2월 26일 이순신 체포됨. 한양으로 압송
1597년 3월 30일 이순신 석방, 백의종군
1597년 7월 16일 원균 칠천량해전 패배
조명 연합군이 1593년 1월 9일에 평양성을 탈환하고, 그 후부터는 명군이 거의 패배하고 이여송은 요동까지 도망가고...
챙피한 역사입니다. 의병과 수군이 없었으면 조선은 없어졌을 것입니다...
뚱강 올림
http://www.kg60.kr/?MID=bInfo&IDX=2342&IDX2=256178&page=&searchType=&searchVal=&CBIDX=690
명주님, 옳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사건을 정확하게 날짜순으로 정리한 데이타베이스가 없습니다. 꼭 필요합니다. 뚱강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