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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뜨거워진 사람 (눅24:24-35절)
독일의 사회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인간을 정의하기를 “호모 에스페란스” 즉 “소망하는 인간” 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인간은 꿈과 소망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소망이 무엇입니까. 유대인 정신과 의사 빅토르 프랭클은 세계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나치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빵 한 조각에 대한 집념에 사로잡힌 비참한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인간 정신의 온갖 고매함을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이토록 짐승의 삶 같은 처참하고 더러운 환경 속에서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자신을 다시 통찰하기에 이릅니다. ‘나는 정신과 의사이며 이곳은 최악의 환경 속에서 인간을 실험할 수 있는 특별 실험실이다. 여기서 나는 공포로 인한 압박 가운데 한 인간이 다른 인간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 가를 배울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 그 경험과 지식을 나의 환자들에게 유용하게 적용시켜 보리라.’ 프랭클은 그때부터 수용소의 수감자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곳에는 이 비참한 환경을 극복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육체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젊고 건강한 사람들이 죽는가 하면 늙고 약한 사람이 끈질기게 버티어 나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는가? 무엇이 약한 자들을 강하게 만드는가? 프랭클의 기록에 따르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저력은 프로이드가 말한 성 충동도 아니며 아들러가 말한 힘으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주장하기를 진정한 삶의 저력은 삶의 의미를 바르게 찾는 데서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프랭클은 두 가지의 예를 들었습니다. 손자의 양말을 뜨개질하는 늙은 여인과 성탄절에 석방되리라는 꿈을 가진 젊은 지식인이 있었습니다. 젊은이는 갈망하던 날이 지나자 희망을 잃고 생존의 목적이 사라지자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가 실망하는 순간 그의 육체 속에 있던 티부스 전염병에 대한 저항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늙은 여인은 손자의 결혼식에 꼭 참석하겠다는 집념으로 그의 수명보다 더 오래 살았다고 합니다.
심리학자들이 실험을 하였습니다. 쥐를 잡아서 독 안에 넣은 다음 완전히 밀폐시킵니다. 물론 숨을 쉴 수는 있지마는 빛이 전혀 들어가지 않도록 해 놓으면 그 쥐는 3분 안에 죽습니다. 이유는 밖으로 나가려는 희망을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독에 쥐를 넣고 뚜껑을 닿을 때에 빛이 조금 들어가게 해 놓으면 이 경우는 36시간이나 살아 있다고 합니다. 똑같은 여건입니다. 쥐가 스스로 나올 수도 없고 먹을 것을 넣어준 것도 아닙니다. 다만 빛이 있느냐 없느냐, 소망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이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에밀 브루너는 ‘허파에 산소가 필요하듯 삶의 의미에는 소망이 필요하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은 소망을 마시고 먹고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험난한 역사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근거는 ‘메시아 대망 사상’ 에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기다렸던지 심지어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 는 말씀을 붙잡고 베들레헴에서는 시집을 가지 않는 노처녀들이 아주 많았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철저하고 간절하게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메시아가 오셨습니다. 그분의 행하시는 일, 권위 있는 말씀, 그 능력과 이적을 볼 때 그는 바로 기다리던 메시아였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의 제자들도 자신의 온 생애의 생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열심히 따랐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을 자신들의 소망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눅24: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그들은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것을 소망하였습니다. 그런데 엉뚱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메시아가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너무나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들은 절망합니다. 당연히 높은 보좌에 앉아야 하고 다윗의 보좌에서 세상을 호령하며 이스라엘을 영광을 온 천하에 나타내야 할 사람이 왜 이런 고난을 당하고 죽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의롭고 거룩하신 분이 비난과 고통 속에 십자가를 져야 한다니 믿을 수도 없고 이해가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내 이적이나 기사를 보이지 않고 죽으시고 장사되셨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 앞에는 모든 것이 끝나고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들은 소망이 절망으로 바뀌고 삶의 의미나 목적이 어둠으로 퇴색되어 버렸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모든 사건을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의 죽음은 절망할 사건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오랫동안 예언되어 온 구약의 성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기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요, 멸망이 아니라 승리요, 부끄러움이 아니라 영광입니다. 사망이 아니라 생명이요, 유한적인 단순한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부활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얻는 것이요, 인생의 종지부를 찍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요 출발입니다. 이처럼 영광된 사건 앞에서 왜 슬퍼하고 절망합니까. 문제는 저들의 눈이 닫혀 있고 마음이 둔하고 어두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상황은 최악이었고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식민지였으며 거기에다 경제적으로는 최악의 빈곤이었으며 사회적으로는 무질서와 종교적 타락이 극심하여 모든 면에서 혼란하고 절망스러운 상태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마침내 저들이 기다리던 메시야가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위대한 대업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이름은 가졌어도 사실 영적 눈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예수가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이기를 바랐습니다. 구속해 주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런 메시야가 죽으십니다. 그들은 절망합니다. 당연히 높은 보좌에 앉아야 하고 왕이 되어야 하고 온 천하를 호령해야 하는데 왜 고난을 당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토록 의롭고 거룩한 분이 비난을 받고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순간에도 ‘혹시나’하는 기대를 걸었을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이 있으니까 십자가에서 내려올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내 내려오시지 않고 죽으시고 장사되셨습니다. 그들의 소망은 절망으로 바뀌고 삶의 의미가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갔는데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빈 무덤만 보았고 그가 살아나셨다고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얼마나 확실합니까. 그러나 저들은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또 어떤 제자들은 여자들의 말을 듣고 무덤에 가서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기들과 동행하고 있는 것을 이 엠마오 제자들은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 사람이 근심 중에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예수께서 물으십니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글로바가 대답하기를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라고 하면서 도리어 예수를 책망합니다. 그때 예수께서 모세와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일을 자세히 설명하십니다.
예수의 부활 사건은 엄연히 생명적이고 소망적인 사건입니다. 문제는 저들 자신에게 있습니다. 눈이 닫혀 있고 마음이 어두워져서 부활의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다고 해서 다 보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가 눈을 뜨고 보고 있지만 본다고 다 보는 것도 아니요, 눈이 떠 있다고 해서 깨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욕망이 있는 사람은 그 욕망의 대상만 보입니다. 돈에 대한 욕망이 있는 사람은 돈만 보이고 증오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증오만 보입니다. 시기와 질투에 마음이 사로잡힌 사람은 사랑이 보이지 않습니다. 왜 사랑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만 마음이 차가워진 사람은 사랑이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참 사랑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릴 때에 강단을 똑 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교인이 있습니다. 한 시간 내내 다른 쪽을 보든지 핸드폰을 보든지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한 가지 말씀도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을 똑바로 보아야 합니다. 초점이 분명해야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저들의 눈이 흐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찰스 알렌이라는 사람은 세 가지의 시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이 세 가지의 시력이 밝아져야 무엇이든 환하게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신체적 시력입니다.
우리가 눈을 떴기에 아름다운 경치도 감상하고 세상의 온갖 것들을 다 보며 살아갑니다. 밝은 눈을 가진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사물을 밝게 보아야 여러 가지 생각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눈을 감으면 이 모든 것이 일시적으로 나하고 상관이 없어져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좋은 눈을 주셔서 모든 사물이 밝게 보이고 똑똑히 보입니다. 눈이 밝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것을 보고 안다는 것입니다. 만일 눈이 나쁘면 모든 것이 흐리고 지혜와 총명이 사라져 버립니다.
둘째는 정신적 시력입니다.
이성이 밝아야 합니다. 비판하고 추리하고 통합하는 사고의 능력입니다. 합리적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이해하는 총명을 말합니다. 환경 속에서 지혜와 지식을 계발하는 능력입니다. 육신의 눈이 아무리 밝아도 정신이 흐리면 그 보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셋째로 영적 시력입니다.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영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미국의 우주 비행사 에드윈 올드린 대령이 헝가리의 한 대학을 방문하여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내가 달에 첫 발을 내디디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가까이 계신 것이 느껴졌습니다.” 강연을 듣고 있던 어느 학생이 물었습니다. “소련의 우주 비행사 가가린은 우주에 가서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십니까.” 그때 대령은 대답하기를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의 눈으로, 영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답변을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는 “연다” 라는 말이 세 번 등장합니다. 헬라어로 ‘디아노이고’라는 이 말은 세 가지로 다르게 번역하여 사용합니다.
*눅24: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눈이 밝아져--여기서 “밝아져” 라는 헬라어 ‘디에 노이크테산’ 은 ‘열다’ 라는 “디아노이고” 의 수동형입니다. 따라서 두 사람의 눈은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 저희에게 주실 때에 열려졌음을 뜻하는데 이는 그들이 자신들의 앞에 계신 주님을 능동적으로 알아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눈이 열려졌음을 알게 된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눈이 밝아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눅24:32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성경을 풀어--여기서 ‘풀어주다’ 라는 헬라어 “디에노이겐” 은 위의 “밝아져” 라는 “디에노이크테산” 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을 직역하면 ‘성경을 열어 주실 때에’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는 주님께서 그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도록 말씀을 열어 주셔야 합니다.
*눅24: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마음을 열어--‘눈이 밝아져’ 및 ‘성경을 풀어 주다’ 와 같은 헬라어 “디아노이고” 로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마음을 여시고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를 종합해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열어 주셔야 우리는 알 수 있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고 성경을 열어 주시고 마음을 열어 주실 때에 우리는 성경 안에서 주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마음은 두려움과 의심, 세속적인 욕망, 편견과 더디 믿는 미련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행하시는 주님께서 밝은 마음을 주시고 성경을 열어 주심으로 비로소 진리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만남의 관계, 열리는 관계를 저들은 “뜨거워지다.” 라고 표현합니다.
*눅24: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주님께서 말씀 하실 때에, 주님께서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은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식 이전의 일입니다. 생각보다 먼저 가는 것입니다. 느낌보다 먼저입니다. 우리의 지식과 판단보다 먼저입니다. 저들이 깨닫고 알고, 그리고 뜨거워졌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상황을 파악한 다음에 마음이 뜨거워진 것이 아닙니다. 뜨거움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깨닫게 됩니다. 체험이 먼저 있었습니다. 중생의 체험도 그렇습니다. 거듭나는 역사도 우리는 알 수 없는 의식 이전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3:6-8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그러하니라.
모든 생명의 역사가 다 이러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을 기억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태어나서 보니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의 관계에서도 그러합니다. 언제부터인가 마음속이 더워지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의 생각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리고 양 볼이 빨갛게 달아오릅니다. 아직은 사랑을 느끼지는 못해도 좀처럼 식지 않는 마음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생명의 역사는 의식보다 훨씬 먼저라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뜨겁다” 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의 일기장에 씌어 진 내용입니다. ‘1738년 5월 24일 아침 나는 루터의 로마서 주석을 읽고 있었다. 오전 9시 15분 경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하였고 내 죄를 다 사하시며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내 일생에 처음으로 경험한 뜨거움이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내 마음 속의 모든 정욕과 죄악이 물러가면서 주님만을 모시는 기쁨으로 충만했다.‘ 웨슬레는 이 기쁨을 참을 수 없어서 밖으로 뛰어나가 증거 하였고 그가 나가서 간증할 때에 사람들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역사가 계속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러한 뜨거움의 운동이 온 나라에 번져 지금의 감리 교단을 이루게 되었고 부패와 타락으로 멸망해 가던 영국을 건져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뜨거움의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봅니다. 성경이 우리의 마음을 엽니다. 고난의 메시아를 만날 때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무작정 성경을 읽는다 해서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성령이 감동할 때에 그 마음이 뜨거워지며 주님을 만나는 큰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눅24:32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마음이 뜨거웠다” 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오메네’ 는 “계속해서 불타오름을 당했다” 는 뜻입니다. 즉 그들의 감동이 지속적으로 계속되었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뜨겁게 되고 주님을 알게 되고 보니 두 사람은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부활의 주님을 전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뜨거운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어떻게 읽습니까. 성경을 읽을 때에 “내가 너희 죄를 다 사하였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를 졌다. 내가 너를 진정으로 사랑한다.” 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귀에 들려옵니까. 이러한 말씀이 들릴 때까지 성경을 읽으십시오.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으십시오.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쁨, 뜨거워지는 체험을 경험하십시오. 이 뜨거움의 체험이 있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옛날 고려 말기에 충신이었던 정몽주의 어머니는 아들의 옷을 입힐 때에 안은 빨간 천으로, 겉은 파란 천으로 해 입혔다고 합니다. 사람이 밖으로는 평화와 온유와 겸손이 나타나야 하고 안으로는 불붙는 정열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을 열정적으로 사랑했습니다.
*살전2: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네 가지의 잘못된 관념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무감각, 무책임, 무관심, 무목적입니다. 돈에 미치고 발광하는 열정은 있어도 진실에는 무감각하고 무관심합니다.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욕심은 한없이 크지만 이웃에 대해서는 한없이 냉담하고 무관심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재물을 모으지만 삶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실패합니다. 잘사는 선진국인 일본이 세계에서 자살의 비율이 최고로 높은 이유를 아십니까. 대우 그룹의 창시자 김우중 회장을 아십니까. 그는 기업을 파산하고 5년 이상을 해외에서 떠돌며 지내다가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어서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준엄한 법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조국에 첫발을 내 디딘 그가 한 말은 이렇습니다.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저는 실패한 기업인입니다.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저는 실패한 기업인입니다’ 한 때는 가장 성공한 기업인으로 황금의 보좌에 앉았던 그가 인생의 종말에 한 말은 이렇듯 허무합니다. 200억 달러를 해외에 유출한 혐의를 받은 그가 돈이 부족하여 조국을 찾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삶의 방향을 잃고 정처 없이 표류하다가 돌아온 것뿐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통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그 귀한 뜨거움을 체험하는 순간 모든 육체의 정욕은 물러가고 감정이 순화되어 모든 지혜가 솟아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알면 나를 알게 되고, 인생을 알게 되고,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인생의 행로를 알게 되고, 나에게 주어진 사명의 길도 깨닫게 됩니다. 어둠의 원인이 지식의 부족에 있지 않습니다. 무지함과 완악함이 양심의 결핍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절망이나 실패도 믿음의 좌절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내가 실패하고 좌절하고 낙망하고 힘들어하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이 하나님과 만나는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마음이 뜨거워진 사람은 이 세상을 밝은 눈으로 아름답게 바라봅니다. 마음이 뜨거워진 사람은 절망을 희망으로 변화시키고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나갑니다. 마음이 뜨거워진 사람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세계, 하나님이 지배하시고 다스리시는 세계를 바라보고 헌신하며 봉사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진 사람은 인생을 사랑하며 생명을 가슴에 품고 화평과 화목의 제물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진 사람은 이웃에게 삶의 생기를 불어넣고 감격의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진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칩니다. 마음이 뜨거워진 사람은 오늘 이 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성경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그리고 마음이 뜨거워져서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등불이 되어 모든 우상과 거짓된 것을 훼파하고 진리를 높이 세우는 복음의 역군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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