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4주일[2019. 9. 15]
오늘 독서 탈출기 말씀은 소위 ‘금송아지’ 사건이 벌어진 후 모세의 중재 시도에 관한 것이다(탈출 32,7-14). 중재가 성공하고 주님께서 재앙을 거두시자, 모세가 ‘하느님께서 손수 그 판에 새기신’ 두 증언판(31,18; 32,16)을 던져 깨트렸다는 사실(32,19)이 중요하다. 오늘 복음의 비유 말씀들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전체를 상대로는 모세가 하느님을 상대로 누렸던 친밀함, 곧 가까움의 직접성이 어차피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손수 새기신 판 자리에 이제 하느님 말씀을 듣고 ‘모세가 그 위에 기록한 돌판’(34,28)이 들어선다. 이로써 항상 중재를 필요로 하는 이스라엘이 천명된 셈이다. 적어도 이스라엘 중 일부는 항시 ‘잃은 양’이 되기 때문이다.
‘잃은 양’이 결국에는 기쁨을 제공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루카 15,5-7). 잃었다가 다시 찾지 않았으면 누리지 못했을 기쁨 말이다. 모세의 손으로 새겨져 전해진 하느님 말씀 역시 어떻게든 ‘잃었다 다시 찾는’ 기쁨을 가져다줄 것이다. 말씀이 매 순간 끊김 없이 우리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이 놓아주며 우리 각자를 가고 싶은 데로 떠나보낸다는 것이다. 이로써 말씀이 지닌 온전한 자유와 사랑이 드러난다. 매 순간 우리를 붙든다면, 이는 또 다른 강요요 폭력이 될 것이다. 이미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우선적으로 말씀이신 당신 독생성자를 상대로 이러한 ‘보내고 놓아주는’ 사랑의 진수를 보여주셨다. 이렇게 아버지 하느님과 말씀은 하나인 것이다. 이러한 아버지 하느님과 아드님이신 말씀이 서로를 상대로나, 성령을 통해서 우리 각자를 상대로 보이는 절대적 자유를 통해 이미 삼위일체 교리의 본질이 계시된 셈이다.
장 바니에(Jean Vanier)의 영향을 받은 금세기 최고의 영성가 중 하나로 평가받는 헨리 나웬(Henri Nouwen)은 라르슈(L’Arche) 공동체 내에서의 체험을 통해 오늘 복음 장면에 속하는 루카 15,11-31에서 스스로 걸어왔던 삶의 행보를 생생히 보았다. 아버지가 그리고 말씀이 두 아들을 가고 싶은 곳으로 보내 주었듯이, 나웬 스스로를 상대로도 그러하였다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라는 책에서 그 스스로 작은아들도 되고 큰아들도 되는 경험을 통해 아버지 됨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했다. 우리 모두 출발점은 다르고 시점은 다를지라도 작은아들의 자리에도, 큰아들의 자리에도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인 자리는 아버지의 자리이다. 아들로만 머물게 아니라 아버지의 자리에 들어서 아버지가 되는 체험을 해야만 한다. 이는 마치 삶 속에 체현된 삼위일체 신비라고나 할까. 예나 지금이나 얼마나 많은 아버지들이 아들들을 떠나보내지 못한 채, 그들을 곁에 붙들어둔 채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고 있는가? 사랑과 염려라는 미명 하에 아들의 현재를 자신의 미래를 위해 희생시키고 있는가?
하지만 모세가 전한 두 증언판은 ‘양면에, 곧 앞뒤로 쓰여 있었다’(탈출 32,15ㄴ)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주님 안에 머물 땐 안쪽에 적힌 말씀을 보지만, ‘잃은 양’이 되었을 땐 바깥에 적힌 말씀을 접할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둘째 아들뿐만이 아니라 첫째 역시 아버지가 계신 집 ‘밖으로 나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루카 15,28) 내가 지금 첫째인가, 아님 둘째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잃은 양’인가, 쿨하게 목자 곁을 지키는 양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어느 자리에 있건 아버지가 주시는 자유의 본질을 보게 되는 것, 그렇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조금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 바로 그것만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몫이요 은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