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 - 155. 몽골과 한반도, 얼마 동안 관계가 끊기나?
▶ 대륙 격변기에 이는 고려 새바람
[사진 = 주원장( 대만박물관 소장)]
1356년, 중국 대륙은 몽골제국을 제쳐놓은 채 대륙의 새 주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회오리바람에 휩싸이고 있었다.
홍건적에 들어가 독자적인 세력을 키웠던 주원장은 이 해 남경(南京)을 점령해 응천부(應天府)로 이름을 바꾼 뒤
이곳에서 오왕(吳王)으로 추대됐다.
주원장은 자신보다 몇 개월 앞서 똑같이 오왕(吳王)을 지칭한 소주(蘇州)의 군벌 장사성과 한판 승부를 벌이며
대륙의 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같은 시기, 고려에서도 새바람이 일고 있었다.
즉위한 지 5년이 되던 해인 1356년, 공민왕은 즉위 초부터 내세워 왔던 반원정책(反元政策)을 본격적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몽골이 자신의 몸 추스르기도 어려운 지경에 빠진 호기를 놓칠 수 없었다.
▶ 부원세력 척결로 시작된 개혁
반원 개혁정치는 기철을 비롯한 부원세력을 척결하는 데부터 시작됐다.
일가족이 척결되는 수난을 겪는데도 기황후조차 제대로 손을 쓰지 못했다.
가족이 모두 제거됐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기황후는 공민왕을 제거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래서 공민왕 폐위를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과거 같으면 고려왕을 바꿔치는 일이 쉬웠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져 있었다.
[사진 = 최영]
공민왕 13년인 1364년, 기황후는 충선왕의 서자인 덕흥군을 앞세워 요양과 심양의 고려인 부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도록 했다.
하지만 청천강 이북지역에서 최영 등이 이들을 쉽게 물리쳤다.
그것으로 사실상 몽골의 고려에 대한 지배력은 사실상 끝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기황후는 더 이상의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가 없었다.
무너져 내리는 몽골의 사정이 더욱 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공민왕의 脫몽골 시도는 더욱 탄력이 붙을 수밖에 없었다.
공민왕은 대규모 숙청작업을 성공적으로 매듭짓고 脫몽골을 위한 조치들을 계속 밀어붙였다.
부원세력의 권력기구인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가 사라졌다.
부원세력이 소유하고 있던 모든 산림과 토지는 국가에 귀속됐다.
[사진 = 쌍성총관부]
그들이 가진 미곡은 구제용으로 빈민들에게 돌아갔다.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회복하고 최영 등이 나서 압록강 북쪽지역을 공격해 고려영토로 편입시켰다.
이러한 조치들과 함께 원나라가 사용하던 지정(至正)이라는 연호의 사용을 중지시켰다.
이제 고려가 몽골의 지배로부터 완전 벗어났다는 것을 공식화한 것이다.
▶ 극적으로 포장된 문익점 얘기
[사진 = 드라마‘기황후’ 포스터]
기황후가 공민왕의 폐위를 시도하던 이 시기에 만들어진 일화가 바로 문익점(文益漸)의 이야기다.
몽골에 사신으로 갔다가 고려의 이탈 움직임에 반감을 가진 몽골 조정이 사신으로 온 문익점을 중국 강남지역으로 귀향을 보냈고
그 곳에서 3년을 보낸 뒤 돌아오는 길에 반출이 금지된 목화씨를 붓 뚜껑에 숨겨서 고려로 들어왔다는 것이 알려진 얘기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문익점이 목화씨를 고려로 들여온 것으로 드라마틱하게 만들기 위해 포장된 얘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역사적 근거 없는 얘기
[사진 = 문익점]
우선 문익점이 사간원좌정언(司諫院左正言)으로 있을 때 서장관(書狀官)이 돼
계품사(啓禀使)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원나라에 갔던 때가 1363년이다.
이때는 기황후가 충선왕의 서자 덕흥군을 앞세워 공민왕 폐위를 시도하던 때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압록강 넘어 군대를 보낸 것이 이듬해인 1364년이다.
[사진 = 베 짜는 여인]
그런데 문익점은 당시 덕흥군 편에 섰다가 덕흥군이 패배하자 곧바로 고려로 귀국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덕흥군 편에 섰느냐하는 것은 몽골 측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는 있다.
하지만 문익점은 사신으로 갔다가 1년 만에 귀국했고 3년 동안 귀향 갔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붓 뚜껑에 몰래 숨겨왔다는 것도 조선 초의 기록에는 그냥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온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 목화씨가 반출금지 품목이었다는 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 삼우당일기에 기록된 주장
[사진 = 목화]
그런데도 이런 얘기가 만들어진 것은 19세기 남평문씨(南平文氏) 문중에서 펴낸 삼우당일기(三憂堂日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삼우당은 문익점의 호다.
여기에 강남에 3년 유배됐다가 돌아오는 길에 반출이 금지된 목화씨를 붓 뚜껑에 몰래 숨겨 들어왔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고려사에는 문익점이 덕흥군편에 섰다고 기록돼 있으나 여기에서는 덕흥군 옹립에 반대해 귀향을 간 것으로 둔갑해 있다.
[사진 = 문익점영정]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와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어렵게 재배에 성공해 백성들의 생활을 이롭게 한 공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근거 없는 얘기가 극적으로 포장돼 어린이 위인전에까지 등장하는 것은
그 시대가 만들어 낸 해프닝이라고 말 할 수밖에 없다.
▶ 노국공주 죽음으로 신돈 실권 장악
[사진 = 노국대장공주 영정]
그 시점에서 공민왕의 개혁 작업은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으로 암초를 만난다.
몽골에 대한 반감과는 별개로 몽골의 노국공주를 끔찍이 사랑했던 공민왕은
그녀가 어렵게 가진 아이를 낳다가 난산으로 숨지자 비탄에 잠겼다.
정사를 뒷전으로 밀어둔 채 시름에 빠져 있는 동안 승려 신돈(辛旽)이 사실상 모든 권한을 쥐고 국정을 운영해 나갔다.
신돈 역시 민생문제의 해결과 정치질서 회복, 특히 왕권의 강화를 내세운 개혁을 추진해 나갔지만
급진 개혁에 대한 수구파의 저항이 거셌다.
때맞춰 중국 대륙을 거의 장악한 명나라가 신돈 정권을 비판하고 나섰다.
내외의 비판에 직면하자 공민왕은 결국 신돈을 숙청하고 교서를 반포하면서 개혁 작업의 고삐를 다시 직접 거머쥐었다.
하지만 명나라와의 관계가 또 다른 개혁의 걸림돌로 나타났다.
몽골을 몰아내고 중국을 장악한 명은 고려에 대해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 좌절된 개혁정치의 꿈
[사진 = 공민왕]
공민왕은 명문자제들로 구성된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는 등 왕권을 강화해 명나라의 압력에 대처하려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 시비 반야(般若)의 소생인 모니노(牟尼奴)에게 우(禑)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강녕부원대군에 봉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민왕은 1374년 갑자기 시해 당해 죽음을 맞게 된다.
공민왕은 자식을 얻기 위해 자제위 소속의 홍륜(洪倫)에게 자신의 후비인 익비(益妃) 한씨(韓氏)를 범하도록 만들었다.
[사진 = 공민왕 천산대렵도(국립박물관)]
익비가 임신을 하게 되자 아이를 완전한 자신의 자식으로 만들기 위해 홍륜 일파를 제거해 입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환관 최만생(崔萬生)의 밀고로 오히려 그들에게 살해되고 만 것이다.
그림과 글씨에 뛰어난 예술적 자질과 함께 개혁 의지가 충만했던 공민왕은 왕위에 오른 지 23년 만에 45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몽골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주 고려를 만들겠다는 집권자의 꿈은 거기에서 좌절되고 만 것이다.
▶ 관계 끊긴 5백년
공민왕 이후 우왕과 창왕 공양왕으로 이어지는 고려 말은 이성계의 주도아래 조선건국으로 가는 과도기로 정세가 어지러웠다.
널리 알려진 조선 건국의 과정은 여기서는 덮어두자.
어쨌든 고려왕조가 막을 내리면서 몽골과 한반도의 관계도 오랫동안 끊긴다.
적어도 20세기가 들어설 때까지 5백년 이상동안 한반도와 몽골은 거의 교류가 없이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세계제국이 무너진 몽골로서는 초원으로 돌아가 영광의 재현을 위해 오랜 세월을 투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