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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 가득! 신화와 역사의 땅, 튀르키예 동부 11일
2024년 9월 [유재원 교수의 문명답사 제17차]
튀르키예(터키) 문명은 넓고도 깊고 다양합니다. 혹자는 튀르키예 문명을 “3중의 시루떡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문명·기독교문명·이슬람문명이 켜켜이 쌓인 구조로, 가는 곳마다 이야기와 유적들로 넘쳐나지요. 그만큼 튀르키예의 문명은 복잡하고 역사는 깊습니다.
▲튀르키예 남동부 하란의 원추형 모양의 흙집인 전통 가옥. 하란은 고도의 문명을 자랑했던 유서 깊은 고대 도시이며,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이 정착한 곳으로 유명하다.Ⓒ유재원
선사시대까지 시야를 넓히면 튀르키예 땅의 문명의 층은 더욱 깊어집니다. 1958년부터 1965년 사이에 튀르키예 중앙아나톨리아의 콘야 지역에서 신석기 시대와 금석병용기 시대인 기원전 7500년에서 기원전 5700년 사이의 인류 최초 도시인 차탈회육(Çatalhöyük)이 발굴되어 당시 세상을 놀라게 했고, 1994년부터 오늘날까지 튀르키예 남동부 산르우르파(Sanrurfa) 지역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에서 신석기 시대 후기인 기원전 1만 년 전부터 기원전 9000년까지 존손되었던 수렵-채취인들의 거석 신전들이 계속 발굴되고 있습니다.
탁월한 문명사학자 유재원 교수(한국외대 명예교수)는 얘기합니다.
“튀르키예는 그리스와 불가리아, 흑해 건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아르메니아, 이라크, 이란, 시리아, 그리고 지중해 건너 키프로스와 국경을 접하는 복잡한 나라, 아시아와 유럽, 동서양이 교차하는 나라로 문명과 역사 역시 깊고 복잡합니다. 이렇게 복잡한 나라를 글로만 이해하겠다는 것은 어리석다 못해 무모한 일이겠죠. 튀르키예는 그 깊은 문명의 한가운데로 가 보아야만 합니다. 그곳에서 ‘문화 충격‘을 받아야만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2010년 유재원 교수는 <터키, 1만 년의 시간여행> 1, 2권을 펴냈습니다. 36여 년 튀르키예 현장을 발로 뛰며 거둔 성과를 담은 노작이며, 또한 대작입니다. 지금 이 책은 튀르키예를 여행할 사람, 여행한 사람, 여행을 꿈꾸는 사람, 나아가 튀르키예 현지의 여행가이드들에게도 거의 필독서가 되었습니다. 유 교수는 최고의 그리스 전문가이자 최고의 튀르키예 전문가입니다. 더하여 이 시대가 낳은 뛰어난 여행 안내자이자 길 위의 에듀테이너입니다.
유 교수와의 여행에는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길 위에서 펼쳐지는 명강의는 동서고금을 통달한 깊이 있는 내용뿐만 아니라 재미로도 정평이 나 있으며, 여행이 단지 관광으로 끝나지 않고 새롭고도 깊은 인문학을 만나는 설렘을 선사합니다.
2024년 9월 [유재원 교수의 문명답사 제17차]는 튀르키예 동부의 역사와 신화의 현장으로 떠납니다. 9월 25(수)-10월 5(토)일, 11일 일정입니다. 튀르키예 동부는 서부에 비해 그동안 여행 여건이 좋지 않아 깊이 숨어있는 채로 많이 안 알려진, 튀르키예 문명의 보물창고입니다. 유 교수가 오랜만에 직접 안내, 현장 강의합니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는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인 오늘날까지 인류 문명사를 다시 쓰게 만든 불가사의하고 신비스러운 동부 튀르키예 지역을 둘러보려 합니다. 비록 짧은 여정이지만 이 지역의 역사와 문명을 이해할 수 있는 중심부는 하나도 빠뜨리지 않은 알찬 일정을 준비했습니다. 오지이면서도 놀라울 만큼 깊고도 세련된 문화를 보여주는 이곳의 매력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아라라트 산(노아의 방주)으로 가는 길, 도우바야지트에서 지프로 화려한 이삭 파샤 궁전을 보며 노아의 방주 화석이 남아 있다는 투루푸나르 산으로 오르는 길은 황량한 아름다움의 극치이다.Ⓒ유재원
이번 튀르키예 동부 문명답사를 준비하는 유 교수로부터 간단한 답사지 설명을 들어봅니다.
여행단은 제1일, 9월 25일(수), 인천공항을 떠나 이스탄불에 도착 후, 제2일 튀르키예 관문 산르우르파로 날아가 하란(Haran)으로 이동합니다.
제2일, 9월 26일(목), 튀르키예의 최고 곡창지대이자 가장 넓은 평야에 자리잡은 하란 유적지에는 아브라함이 15년 동안 살았다는 집터와 이슬람 세계의 최초 대학 폐허가 있고, 페르시아인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지역 주민들이 믿었다는 달의 여신 신(Sin)의 신전이 있습니다. 이 신전을 후에 카라반 사라이로 이용되었는데 지금 우리가 보는 모습은 그때의 것입니다. 하란은 시리아와의 국경지대라서 이슬람공화국(ISIS)가 한창 기승을 떨던 2014년부터 2018년까지는 여행이 금지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하란은 또 야곱이 에서에게서 장자권을 산 뒤 몸을 피해 이곳으로 와서 아내 라헬을 신부로 맞기 위해 장장 14년 동안 장인의 머슴살이를 했던 곳입니다. 하란 평야 서쪽에는 야곱이 라헬을 처음 만났다는 ’야곱의 샘‘이 있습니다. 그 근처의 성채는 1144년 제1차 십자군이 대패했던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제3일, 9월 27일(금), 산르우르파의 역사는 아주 오래 되어 이미 구약 성경에 자주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야훼의 명령에 따라 고향 우르를 떠나 이곳에 와서 살았는데 이곳의 왕이 그를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화형을 시키려는 순간 하늘에서 비가 내려 장작이 쌓였던 곳은 연못이 되고 장작은 물고기가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옵니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도심 곳곳에 연못과 운하가 있고 그 안에는 물고기가 가득합니다. 이 물고기들은 성스러운 존재로 여겨져 잡아먹으면 눈이 멀게 된다는 저주가 내려져 있다고 합니다.
이 도시의 고대 그리스 시대 이름은 에데사로서, 이곳 주민들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으로서 최초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1143년 제1차 십자군이 첫 점령지로 에데사를 함락했을 때 서유럽의 그리스도교인들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게다가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찍힌 수건을 발견함으로써 그들의 기쁨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지금 그 수건의 행방은 묘연합니다.
▲선사 시대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을 괴베클리 테페 유적 발굴 현장. 약 1만 2천 년 전 인류 최초의 신전으로 보이며 이집트 피라미드보다 7천여 년 앞선다고 한다.Ⓒ튀르키예문화관광부
산르우르파에서 북동쪽으로 60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카라한테페(Karahantepe)는 기원전 9500년까지 소급되는 대표적인 신석기 시대 수렵-채취 사회집단의 거석 유적입니다. 1997년에 발견되어 오늘날까지 발굴이 계속되고 있는 카라한테페는 지난 2023년부터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습니다. 2023년 이곳에서 작업대에 단단히 묶여 앉아있는 2.45m 높이의 벌거벗은 거대한 남성 조각상이 출토되었습니다. 생생한 표정에 두 손으로 자신의 거대한 성기를 움켜쥐고 있는 이 조각상은 튀어나온 갈비뼈와 척추, 어깨뼈가 강조돼 마치 죽은 사람을 연상시키면서도 끈으로 묶인 자세를 보면 살아있는 사람 같게도 보입니다.
또 작업대 앞쪽에는 독수리 조각과 그 위에 놓인 석판이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또 이곳에 세워진 신전들은 이웃 괴베클리 테페의 신전들보다 더 큰 규모가 크고, 곡물 농경을 암시하는 흔적이 발견되어 인류가 농사를 지은 시기가 언제인가에 대한 새로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신석기시대에 농경이 시작되어 사람들이 한곳에 정착하게 되고, 그 결과로 종교가 발생했다는 것이 정설로 간주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발굴되는 흔적들은 지금까지의 통념들을 뒤흔드는 것입니다. 카라한테페에서는 지금까지 동물의 부조가 새겨진 약 250여 개의 T자 모양의 돌기둥들이 발굴되었는데 앞으로 이 숫자는 더욱 더 많이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산르우르파 북동쪽으로 12km 떨어진 쾨베클리 테페는 기원전 10,000년에서 8,000년 사이에 세워진 인류 최초의 사회적 혹은 종교적 중심지로 추정됩니다. 1963년 이스탄불대학과 시카고대학의 합동조사 과정에서 미국의 고고학자 피터 베네딕트는 거대한 석조 유물들과 T자 모양의 거석의 윗부분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베네딕트는 이것들을 비잔틴 시대의 무덤으로 착각하며 조사를 계속하지 않았습니다. 이곳이 농경지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어 오랜 세월 동안 농부들이 암석을 옮기거나 깨뜨리며 유적의 훼손이 점차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1994년, 독일의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는 새로운 발굴지를 찾는 과정에서 우연히 시카고대학에서 출간한 괴베클리 테페에 관한 보고서를 보고 흥미를 느껴 이 지역을 발굴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괴베클리 테페의 유적들이 선사 시대의 유적임을 직감하고는 곧바로 발굴 작업에 착수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T자 모양의 돌기둥들을 발견하였습니다.
1996년에 시작된 슈미트 교수의 발굴은 그가 사망한 2014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발굴 결과, 유적에는 기원전 10,000년에서 8,000년 전 사이에 지어진 건축물들을 발견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된 유적은 거대한 T자 모양 돌기둥들로서, 토기 없는 신석기 시대A(PPNA)에 지어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거석 유적임이 밝혀졌습니다. 현재까지 발굴된 바에 따르면, 각각의 기둥의 높이가 대략 6m에 무게가 20톤쯤 되는 200개에 달하는 돌기둥들이 20여 개의 원을 이루고 있는데, 기둥들은 모두 기반암을 다듬어 만든 받침대에 박혀 있습니다.
그보다 후기에 지어진 유적의 또 다른 부분들은 토기 없는 신석기 시대B(PPNB)에 지어졌는데, 이 기둥들은 비교적 작은 크기의 잘 손질된 석회암이 바닥에 깔린 직사각형의 방들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이 신전들이 지어진 목적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는데, 아마도 여러 수렵-채취 부족들이 공동으로 종교적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아직 정착한 주민들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2017년에 이곳에서 쪼개진 두개골이 발굴되었고, 30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현재 우리가 먹는 밀의 조상 격이라 할 수 있는 야생 밀의 흔적도 발견되어 학자들은 이곳이 밀 재배의 발생지일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계속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는 괴베클리 테페는 선사 시대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우리가 미개했었다고 믿었던 신석기 시대의 수렵-채집인들이 일정 기간 한곳에 정착하여 거대한 유적을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괴베클레 테페와 카라한테페는 지금까지의 우리 상식에 상당히 어긋납니다. 어떤 학자들은 거대 신전을 짓기 위해 정착했던 수렵-채취인들이 곡물을 처음으로 재배해 먹었다고 추정하면서 괴베클리 테페가 도시 문명의 발전에 기여했을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괴베클리 테페와 카라한테페는 형성 과정과 설립 목적이 모두 짙은 베일 속에 가려져 있습니다. 앞으로의 발굴과 연구가 더욱 더 기대되는 까닭입니다.
9월 27일 오후, 우리가 방문할 산르우르파 괴베클리테페박물관은 쾨베클리 테페와 카라한 테페의 중요 유물들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으로서 이번 여행에서 절대로 빼어 놓을 수 없는 곳입니다. 수많은 도움들의 부조상들에 대한 의미와 예술적 솜씨를 감상할 예정입니다.
신비로 가득! 신화와 역사의 땅, 튀르키예 동부 11일
2024년 9월 [유재원 교수의 문명답사 제17차]
튀르키예(터키) 문명은 넓고도 깊고 다양합니다. 혹자는 튀르키예 문명을 “3중의 시루떡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문명·기독교문명·이슬람문명이 켜켜이 쌓인 구조로, 가는 곳마다 이야기와 유적들로 넘쳐나지요. 그만큼 튀르키예의 문명은 복잡하고 역사는 깊습니다.
▲튀르키예 남동부 하란의 원추형 모양의 흙집인 전통 가옥. 하란은 고도의 문명을 자랑했던 유서 깊은 고대 도시이며,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이 정착한 곳으로 유명하다.Ⓒ유재원
선사시대까지 시야를 넓히면 튀르키예 땅의 문명의 층은 더욱 깊어집니다. 1958년부터 1965년 사이에 튀르키예 중앙아나톨리아의 콘야 지역에서 신석기 시대와 금석병용기 시대인 기원전 7500년에서 기원전 5700년 사이의 인류 최초 도시인 차탈회육(Çatalhöyük)이 발굴되어 당시 세상을 놀라게 했고, 1994년부터 오늘날까지 튀르키예 남동부 산르우르파(Sanrurfa) 지역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에서 신석기 시대 후기인 기원전 1만 년 전부터 기원전 9000년까지 존손되었던 수렵-채취인들의 거석 신전들이 계속 발굴되고 있습니다.
탁월한 문명사학자 유재원 교수(한국외대 명예교수)는 얘기합니다.
“튀르키예는 그리스와 불가리아, 흑해 건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아르메니아, 이라크, 이란, 시리아, 그리고 지중해 건너 키프로스와 국경을 접하는 복잡한 나라, 아시아와 유럽, 동서양이 교차하는 나라로 문명과 역사 역시 깊고 복잡합니다. 이렇게 복잡한 나라를 글로만 이해하겠다는 것은 어리석다 못해 무모한 일이겠죠. 튀르키예는 그 깊은 문명의 한가운데로 가 보아야만 합니다. 그곳에서 ‘문화 충격‘을 받아야만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2010년 유재원 교수는 <터키, 1만 년의 시간여행> 1, 2권을 펴냈습니다. 36여 년 튀르키예 현장을 발로 뛰며 거둔 성과를 담은 노작이며, 또한 대작입니다. 지금 이 책은 튀르키예를 여행할 사람, 여행한 사람, 여행을 꿈꾸는 사람, 나아가 튀르키예 현지의 여행가이드들에게도 거의 필독서가 되었습니다. 유 교수는 최고의 그리스 전문가이자 최고의 튀르키예 전문가입니다. 더하여 이 시대가 낳은 뛰어난 여행 안내자이자 길 위의 에듀테이너입니다.
유 교수와의 여행에는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길 위에서 펼쳐지는 명강의는 동서고금을 통달한 깊이 있는 내용뿐만 아니라 재미로도 정평이 나 있으며, 여행이 단지 관광으로 끝나지 않고 새롭고도 깊은 인문학을 만나는 설렘을 선사합니다.
2024년 9월 [유재원 교수의 문명답사 제17차]는 튀르키예 동부의 역사와 신화의 현장으로 떠납니다. 9월 25(수)-10월 5(토)일, 11일 일정입니다. 튀르키예 동부는 서부에 비해 그동안 여행 여건이 좋지 않아 깊이 숨어있는 채로 많이 안 알려진, 튀르키예 문명의 보물창고입니다. 유 교수가 오랜만에 직접 안내, 현장 강의합니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는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인 오늘날까지 인류 문명사를 다시 쓰게 만든 불가사의하고 신비스러운 동부 튀르키예 지역을 둘러보려 합니다. 비록 짧은 여정이지만 이 지역의 역사와 문명을 이해할 수 있는 중심부는 하나도 빠뜨리지 않은 알찬 일정을 준비했습니다. 오지이면서도 놀라울 만큼 깊고도 세련된 문화를 보여주는 이곳의 매력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아라라트 산(노아의 방주)으로 가는 길, 도우바야지트에서 지프로 화려한 이삭 파샤 궁전을 보며 노아의 방주 화석이 남아 있다는 투루푸나르 산으로 오르는 길은 황량한 아름다움의 극치이다.Ⓒ유재원
이번 튀르키예 동부 문명답사를 준비하는 유 교수로부터 간단한 답사지 설명을 들어봅니다.
여행단은 제1일, 9월 25일(수), 인천공항을 떠나 이스탄불에 도착 후, 제2일 튀르키예 관문 산르우르파로 날아가 하란(Haran)으로 이동합니다.
제2일, 9월 26일(목), 튀르키예의 최고 곡창지대이자 가장 넓은 평야에 자리잡은 하란 유적지에는 아브라함이 15년 동안 살았다는 집터와 이슬람 세계의 최초 대학 폐허가 있고, 페르시아인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지역 주민들이 믿었다는 달의 여신 신(Sin)의 신전이 있습니다. 이 신전을 후에 카라반 사라이로 이용되었는데 지금 우리가 보는 모습은 그때의 것입니다. 하란은 시리아와의 국경지대라서 이슬람공화국(ISIS)가 한창 기승을 떨던 2014년부터 2018년까지는 여행이 금지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하란은 또 야곱이 에서에게서 장자권을 산 뒤 몸을 피해 이곳으로 와서 아내 라헬을 신부로 맞기 위해 장장 14년 동안 장인의 머슴살이를 했던 곳입니다. 하란 평야 서쪽에는 야곱이 라헬을 처음 만났다는 ’야곱의 샘‘이 있습니다. 그 근처의 성채는 1144년 제1차 십자군이 대패했던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제3일, 9월 27일(금), 산르우르파의 역사는 아주 오래 되어 이미 구약 성경에 자주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야훼의 명령에 따라 고향 우르를 떠나 이곳에 와서 살았는데 이곳의 왕이 그를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화형을 시키려는 순간 하늘에서 비가 내려 장작이 쌓였던 곳은 연못이 되고 장작은 물고기가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옵니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도심 곳곳에 연못과 운하가 있고 그 안에는 물고기가 가득합니다. 이 물고기들은 성스러운 존재로 여겨져 잡아먹으면 눈이 멀게 된다는 저주가 내려져 있다고 합니다.
이 도시의 고대 그리스 시대 이름은 에데사로서, 이곳 주민들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으로서 최초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1143년 제1차 십자군이 첫 점령지로 에데사를 함락했을 때 서유럽의 그리스도교인들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게다가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찍힌 수건을 발견함으로써 그들의 기쁨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지금 그 수건의 행방은 묘연합니다.
▲선사 시대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을 괴베클리 테페 유적 발굴 현장. 약 1만 2천 년 전 인류 최초의 신전으로 보이며 이집트 피라미드보다 7천여 년 앞선다고 한다.Ⓒ튀르키예문화관광부
산르우르파에서 북동쪽으로 60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카라한테페(Karahantepe)는 기원전 9500년까지 소급되는 대표적인 신석기 시대 수렵-채취 사회집단의 거석 유적입니다. 1997년에 발견되어 오늘날까지 발굴이 계속되고 있는 카라한테페는 지난 2023년부터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습니다. 2023년 이곳에서 작업대에 단단히 묶여 앉아있는 2.45m 높이의 벌거벗은 거대한 남성 조각상이 출토되었습니다. 생생한 표정에 두 손으로 자신의 거대한 성기를 움켜쥐고 있는 이 조각상은 튀어나온 갈비뼈와 척추, 어깨뼈가 강조돼 마치 죽은 사람을 연상시키면서도 끈으로 묶인 자세를 보면 살아있는 사람 같게도 보입니다.
또 작업대 앞쪽에는 독수리 조각과 그 위에 놓인 석판이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또 이곳에 세워진 신전들은 이웃 괴베클리 테페의 신전들보다 더 큰 규모가 크고, 곡물 농경을 암시하는 흔적이 발견되어 인류가 농사를 지은 시기가 언제인가에 대한 새로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신석기시대에 농경이 시작되어 사람들이 한곳에 정착하게 되고, 그 결과로 종교가 발생했다는 것이 정설로 간주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발굴되는 흔적들은 지금까지의 통념들을 뒤흔드는 것입니다. 카라한테페에서는 지금까지 동물의 부조가 새겨진 약 250여 개의 T자 모양의 돌기둥들이 발굴되었는데 앞으로 이 숫자는 더욱 더 많이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산르우르파 북동쪽으로 12km 떨어진 쾨베클리 테페는 기원전 10,000년에서 8,000년 사이에 세워진 인류 최초의 사회적 혹은 종교적 중심지로 추정됩니다. 1963년 이스탄불대학과 시카고대학의 합동조사 과정에서 미국의 고고학자 피터 베네딕트는 거대한 석조 유물들과 T자 모양의 거석의 윗부분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베네딕트는 이것들을 비잔틴 시대의 무덤으로 착각하며 조사를 계속하지 않았습니다. 이곳이 농경지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어 오랜 세월 동안 농부들이 암석을 옮기거나 깨뜨리며 유적의 훼손이 점차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1994년, 독일의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는 새로운 발굴지를 찾는 과정에서 우연히 시카고대학에서 출간한 괴베클리 테페에 관한 보고서를 보고 흥미를 느껴 이 지역을 발굴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괴베클리 테페의 유적들이 선사 시대의 유적임을 직감하고는 곧바로 발굴 작업에 착수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T자 모양의 돌기둥들을 발견하였습니다.
1996년에 시작된 슈미트 교수의 발굴은 그가 사망한 2014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발굴 결과, 유적에는 기원전 10,000년에서 8,000년 전 사이에 지어진 건축물들을 발견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된 유적은 거대한 T자 모양 돌기둥들로서, 토기 없는 신석기 시대A(PPNA)에 지어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거석 유적임이 밝혀졌습니다. 현재까지 발굴된 바에 따르면, 각각의 기둥의 높이가 대략 6m에 무게가 20톤쯤 되는 200개에 달하는 돌기둥들이 20여 개의 원을 이루고 있는데, 기둥들은 모두 기반암을 다듬어 만든 받침대에 박혀 있습니다.
그보다 후기에 지어진 유적의 또 다른 부분들은 토기 없는 신석기 시대B(PPNB)에 지어졌는데, 이 기둥들은 비교적 작은 크기의 잘 손질된 석회암이 바닥에 깔린 직사각형의 방들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이 신전들이 지어진 목적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는데, 아마도 여러 수렵-채취 부족들이 공동으로 종교적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아직 정착한 주민들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2017년에 이곳에서 쪼개진 두개골이 발굴되었고, 30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현재 우리가 먹는 밀의 조상 격이라 할 수 있는 야생 밀의 흔적도 발견되어 학자들은 이곳이 밀 재배의 발생지일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계속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는 괴베클리 테페는 선사 시대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우리가 미개했었다고 믿었던 신석기 시대의 수렵-채집인들이 일정 기간 한곳에 정착하여 거대한 유적을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괴베클레 테페와 카라한테페는 지금까지의 우리 상식에 상당히 어긋납니다. 어떤 학자들은 거대 신전을 짓기 위해 정착했던 수렵-채취인들이 곡물을 처음으로 재배해 먹었다고 추정하면서 괴베클리 테페가 도시 문명의 발전에 기여했을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괴베클리 테페와 카라한테페는 형성 과정과 설립 목적이 모두 짙은 베일 속에 가려져 있습니다. 앞으로의 발굴과 연구가 더욱 더 기대되는 까닭입니다.
9월 27일 오후, 우리가 방문할 산르우르파 괴베클리테페박물관은 쾨베클리 테페와 카라한 테페의 중요 유물들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으로서 이번 여행에서 절대로 빼어 놓을 수 없는 곳입니다. 수많은 도움들의 부조상들에 대한 의미와 예술적 솜씨를 감상할 예정입니다.
신비로 가득! 신화와 역사의 땅, 튀르키예 동부 11일
2024년 9월 [유재원 교수의 문명답사 제17차]
튀르키예(터키) 문명은 넓고도 깊고 다양합니다. 혹자는 튀르키예 문명을 “3중의 시루떡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문명·기독교문명·이슬람문명이 켜켜이 쌓인 구조로, 가는 곳마다 이야기와 유적들로 넘쳐나지요. 그만큼 튀르키예의 문명은 복잡하고 역사는 깊습니다.
▲튀르키예 남동부 하란의 원추형 모양의 흙집인 전통 가옥. 하란은 고도의 문명을 자랑했던 유서 깊은 고대 도시이며,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이 정착한 곳으로 유명하다.Ⓒ유재원
선사시대까지 시야를 넓히면 튀르키예 땅의 문명의 층은 더욱 깊어집니다. 1958년부터 1965년 사이에 튀르키예 중앙아나톨리아의 콘야 지역에서 신석기 시대와 금석병용기 시대인 기원전 7500년에서 기원전 5700년 사이의 인류 최초 도시인 차탈회육(Çatalhöyük)이 발굴되어 당시 세상을 놀라게 했고, 1994년부터 오늘날까지 튀르키예 남동부 산르우르파(Sanrurfa) 지역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에서 신석기 시대 후기인 기원전 1만 년 전부터 기원전 9000년까지 존손되었던 수렵-채취인들의 거석 신전들이 계속 발굴되고 있습니다.
탁월한 문명사학자 유재원 교수(한국외대 명예교수)는 얘기합니다.
“튀르키예는 그리스와 불가리아, 흑해 건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아르메니아, 이라크, 이란, 시리아, 그리고 지중해 건너 키프로스와 국경을 접하는 복잡한 나라, 아시아와 유럽, 동서양이 교차하는 나라로 문명과 역사 역시 깊고 복잡합니다. 이렇게 복잡한 나라를 글로만 이해하겠다는 것은 어리석다 못해 무모한 일이겠죠. 튀르키예는 그 깊은 문명의 한가운데로 가 보아야만 합니다. 그곳에서 ‘문화 충격‘을 받아야만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2010년 유재원 교수는 <터키, 1만 년의 시간여행> 1, 2권을 펴냈습니다. 36여 년 튀르키예 현장을 발로 뛰며 거둔 성과를 담은 노작이며, 또한 대작입니다. 지금 이 책은 튀르키예를 여행할 사람, 여행한 사람, 여행을 꿈꾸는 사람, 나아가 튀르키예 현지의 여행가이드들에게도 거의 필독서가 되었습니다. 유 교수는 최고의 그리스 전문가이자 최고의 튀르키예 전문가입니다. 더하여 이 시대가 낳은 뛰어난 여행 안내자이자 길 위의 에듀테이너입니다.
유 교수와의 여행에는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길 위에서 펼쳐지는 명강의는 동서고금을 통달한 깊이 있는 내용뿐만 아니라 재미로도 정평이 나 있으며, 여행이 단지 관광으로 끝나지 않고 새롭고도 깊은 인문학을 만나는 설렘을 선사합니다.
2024년 9월 [유재원 교수의 문명답사 제17차]는 튀르키예 동부의 역사와 신화의 현장으로 떠납니다. 9월 25(수)-10월 5(토)일, 11일 일정입니다. 튀르키예 동부는 서부에 비해 그동안 여행 여건이 좋지 않아 깊이 숨어있는 채로 많이 안 알려진, 튀르키예 문명의 보물창고입니다. 유 교수가 오랜만에 직접 안내, 현장 강의합니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는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인 오늘날까지 인류 문명사를 다시 쓰게 만든 불가사의하고 신비스러운 동부 튀르키예 지역을 둘러보려 합니다. 비록 짧은 여정이지만 이 지역의 역사와 문명을 이해할 수 있는 중심부는 하나도 빠뜨리지 않은 알찬 일정을 준비했습니다. 오지이면서도 놀라울 만큼 깊고도 세련된 문화를 보여주는 이곳의 매력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아라라트 산(노아의 방주)으로 가는 길, 도우바야지트에서 지프로 화려한 이삭 파샤 궁전을 보며 노아의 방주 화석이 남아 있다는 투루푸나르 산으로 오르는 길은 황량한 아름다움의 극치이다.Ⓒ유재원
이번 튀르키예 동부 문명답사를 준비하는 유 교수로부터 간단한 답사지 설명을 들어봅니다.
여행단은 제1일, 9월 25일(수), 인천공항을 떠나 이스탄불에 도착 후, 제2일 튀르키예 관문 산르우르파로 날아가 하란(Haran)으로 이동합니다.
제2일, 9월 26일(목), 튀르키예의 최고 곡창지대이자 가장 넓은 평야에 자리잡은 하란 유적지에는 아브라함이 15년 동안 살았다는 집터와 이슬람 세계의 최초 대학 폐허가 있고, 페르시아인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지역 주민들이 믿었다는 달의 여신 신(Sin)의 신전이 있습니다. 이 신전을 후에 카라반 사라이로 이용되었는데 지금 우리가 보는 모습은 그때의 것입니다. 하란은 시리아와의 국경지대라서 이슬람공화국(ISIS)가 한창 기승을 떨던 2014년부터 2018년까지는 여행이 금지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하란은 또 야곱이 에서에게서 장자권을 산 뒤 몸을 피해 이곳으로 와서 아내 라헬을 신부로 맞기 위해 장장 14년 동안 장인의 머슴살이를 했던 곳입니다. 하란 평야 서쪽에는 야곱이 라헬을 처음 만났다는 ’야곱의 샘‘이 있습니다. 그 근처의 성채는 1144년 제1차 십자군이 대패했던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제3일, 9월 27일(금), 산르우르파의 역사는 아주 오래 되어 이미 구약 성경에 자주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야훼의 명령에 따라 고향 우르를 떠나 이곳에 와서 살았는데 이곳의 왕이 그를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화형을 시키려는 순간 하늘에서 비가 내려 장작이 쌓였던 곳은 연못이 되고 장작은 물고기가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옵니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도심 곳곳에 연못과 운하가 있고 그 안에는 물고기가 가득합니다. 이 물고기들은 성스러운 존재로 여겨져 잡아먹으면 눈이 멀게 된다는 저주가 내려져 있다고 합니다.
이 도시의 고대 그리스 시대 이름은 에데사로서, 이곳 주민들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으로서 최초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1143년 제1차 십자군이 첫 점령지로 에데사를 함락했을 때 서유럽의 그리스도교인들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게다가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찍힌 수건을 발견함으로써 그들의 기쁨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지금 그 수건의 행방은 묘연합니다.
▲선사 시대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을 괴베클리 테페 유적 발굴 현장. 약 1만 2천 년 전 인류 최초의 신전으로 보이며 이집트 피라미드보다 7천여 년 앞선다고 한다.Ⓒ튀르키예문화관광부
산르우르파에서 북동쪽으로 60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카라한테페(Karahantepe)는 기원전 9500년까지 소급되는 대표적인 신석기 시대 수렵-채취 사회집단의 거석 유적입니다. 1997년에 발견되어 오늘날까지 발굴이 계속되고 있는 카라한테페는 지난 2023년부터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습니다. 2023년 이곳에서 작업대에 단단히 묶여 앉아있는 2.45m 높이의 벌거벗은 거대한 남성 조각상이 출토되었습니다. 생생한 표정에 두 손으로 자신의 거대한 성기를 움켜쥐고 있는 이 조각상은 튀어나온 갈비뼈와 척추, 어깨뼈가 강조돼 마치 죽은 사람을 연상시키면서도 끈으로 묶인 자세를 보면 살아있는 사람 같게도 보입니다.
또 작업대 앞쪽에는 독수리 조각과 그 위에 놓인 석판이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또 이곳에 세워진 신전들은 이웃 괴베클리 테페의 신전들보다 더 큰 규모가 크고, 곡물 농경을 암시하는 흔적이 발견되어 인류가 농사를 지은 시기가 언제인가에 대한 새로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신석기시대에 농경이 시작되어 사람들이 한곳에 정착하게 되고, 그 결과로 종교가 발생했다는 것이 정설로 간주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발굴되는 흔적들은 지금까지의 통념들을 뒤흔드는 것입니다. 카라한테페에서는 지금까지 동물의 부조가 새겨진 약 250여 개의 T자 모양의 돌기둥들이 발굴되었는데 앞으로 이 숫자는 더욱 더 많이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산르우르파 북동쪽으로 12km 떨어진 쾨베클리 테페는 기원전 10,000년에서 8,000년 사이에 세워진 인류 최초의 사회적 혹은 종교적 중심지로 추정됩니다. 1963년 이스탄불대학과 시카고대학의 합동조사 과정에서 미국의 고고학자 피터 베네딕트는 거대한 석조 유물들과 T자 모양의 거석의 윗부분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베네딕트는 이것들을 비잔틴 시대의 무덤으로 착각하며 조사를 계속하지 않았습니다. 이곳이 농경지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어 오랜 세월 동안 농부들이 암석을 옮기거나 깨뜨리며 유적의 훼손이 점차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1994년, 독일의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는 새로운 발굴지를 찾는 과정에서 우연히 시카고대학에서 출간한 괴베클리 테페에 관한 보고서를 보고 흥미를 느껴 이 지역을 발굴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괴베클리 테페의 유적들이 선사 시대의 유적임을 직감하고는 곧바로 발굴 작업에 착수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T자 모양의 돌기둥들을 발견하였습니다.
1996년에 시작된 슈미트 교수의 발굴은 그가 사망한 2014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발굴 결과, 유적에는 기원전 10,000년에서 8,000년 전 사이에 지어진 건축물들을 발견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된 유적은 거대한 T자 모양 돌기둥들로서, 토기 없는 신석기 시대A(PPNA)에 지어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거석 유적임이 밝혀졌습니다. 현재까지 발굴된 바에 따르면, 각각의 기둥의 높이가 대략 6m에 무게가 20톤쯤 되는 200개에 달하는 돌기둥들이 20여 개의 원을 이루고 있는데, 기둥들은 모두 기반암을 다듬어 만든 받침대에 박혀 있습니다.
그보다 후기에 지어진 유적의 또 다른 부분들은 토기 없는 신석기 시대B(PPNB)에 지어졌는데, 이 기둥들은 비교적 작은 크기의 잘 손질된 석회암이 바닥에 깔린 직사각형의 방들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이 신전들이 지어진 목적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는데, 아마도 여러 수렵-채취 부족들이 공동으로 종교적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아직 정착한 주민들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2017년에 이곳에서 쪼개진 두개골이 발굴되었고, 30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현재 우리가 먹는 밀의 조상 격이라 할 수 있는 야생 밀의 흔적도 발견되어 학자들은 이곳이 밀 재배의 발생지일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계속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는 괴베클리 테페는 선사 시대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우리가 미개했었다고 믿었던 신석기 시대의 수렵-채집인들이 일정 기간 한곳에 정착하여 거대한 유적을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괴베클레 테페와 카라한테페는 지금까지의 우리 상식에 상당히 어긋납니다. 어떤 학자들은 거대 신전을 짓기 위해 정착했던 수렵-채취인들이 곡물을 처음으로 재배해 먹었다고 추정하면서 괴베클리 테페가 도시 문명의 발전에 기여했을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괴베클리 테페와 카라한테페는 형성 과정과 설립 목적이 모두 짙은 베일 속에 가려져 있습니다. 앞으로의 발굴과 연구가 더욱 더 기대되는 까닭입니다.
9월 27일 오후, 우리가 방문할 산르우르파 괴베클리테페박물관은 쾨베클리 테페와 카라한 테페의 중요 유물들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으로서 이번 여행에서 절대로 빼어 놓을 수 없는 곳입니다. 수많은 도움들의 부조상들에 대한 의미와 예술적 솜씨를 감상할 예정입니다.